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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대지 한 가운데 서 있는 부서진 얼음의 궁전에는 이제 아무도 살고 있지 않았다. 정문에 매달려야 있어야 할 현판은 둘로 쪼개져 얼음의 바닥에 세로로 박혀 있었고, 드러난 글자는 빙(氷)자 하나밖에 보이지 않았다. 차가운 북해의 바람 속에 묵묵히 서 있는 부서진 건물은 백년 전만 하더라도 북해를 지배하던 자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지만 지금은 아무도 없는 폐허일 뿐이었다.
폐허로 변한 이곳은 중원인들이 북해빙궁이라 부르던 한 무림 세력의 터전이었다. 그리고 그 곳의 지하 깊숙한 곳에서 지금 두 여자가 서서히 깊은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극음의 기운으로 가득 차 있는 빙하의 대지 아래 깊숙한 곳에 세워진 빙하신전이라 불리는 건물 안에 있는 두 개의 얼음 기둥은 조금씩 갈라지고 있었다.
쩌적 갈라져 가던 기둥들은 어느 한순간 얼음 가루로 변해 지하의 공간을 메우고, 하얀 얼음 가루들이 바닥에 가라앉았을 때, 벌거벗은 두 여자의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모습이 드러났다.
바닥까지 길게 드리워진 은발을 주워서 눈앞으로 가져가 쳐다보는 취하의 눈에는 아무런 감정이 실려 있지 않았다.
"세월이 얼마나 흘렀을까?"
취하의 귀로 건너편에 앉아 있는 취행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굴을 가리고 있는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치우며 자신을 바라보는 취앵이의 얼굴이 보였다.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지 머리카락은 백발로 변해 길게 늘어져 있지만, 얼굴은 처음 이곳에 왔을 때의 모습 그대로인 취행이의 얼굴을 보면서 취하 역시 자신 역시 머리카락만 달라졌을 뿐 다른 모습은 그대로라는 것을 깨달았다.
"우린 빙하신공을 극성으로 익힌 걸까?"
"극성에 도달하면 움직일 수 있는 자유를 얻는다고 그 응큼한 할아버지가 말해 주었으니--,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
두 여자의 대화는 짧게 끝났다.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둘의 무미건조한 대화는 그렇게 끝이 나고, 그녀들이 다시 대화를 나눈 것은 깨어난 지 열흘이 흘러서였다. 그 때가지 그녀들은 정신도 깨어나고 움직일 힘도 생겼지만 꿈쩍도 안하고 가부좌를 튼 그 모습 그대로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상태였다.
"취하야, 소구 도련님 안 올려나 봐. 우리가 가서 찾아보자."
멍하니 앉아 있던 두 여자 중 취앵이라는 이름의 여자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응."
아무 생각 없는 취하가 대답하고 일어섰다. 두 여자의 감정은 죽어 있는 상태였고 그녀들은 벌거벗은 그대로 빙하신전이라 불리는 장소를 벗어나 지상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녀들은 말없이 걸음만을 계속 옮겼다. 거의 이십년 내내 잠만 자고 있었다고 해도 좋을 그녀들이었다. 졸음도 허기도 추위도 그녀들은 느끼지 못한 채 설원 위에 작은 두 줄기의 발자국을 남기며 묵묵히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그렇게 벌거벗은 채 눈 쌓인 북해의 벌판을 걷던 두 여자 중 이번에는 취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빙궁의 폐허에서 벗어나 사흘 째 되던 날이었다.
"취앵아, 우리 벌거벗었어. 옷 입자."
다 큰 여자들이 벌거벗고 돌아다닐 수는 없는 일이었다. 부끄러움이라는 감정마저 사라진 상태였지만 이성은 남아 있는 상태였다. 벌거벗고 온 세상을 돌아다닐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은 두 여자는 다시 북해빙궁이라 불리는 건물로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사방이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얼어붙은 대지에서 발가벗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 두 여자는 추위를 느낄 수 없는 몸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녀들이 있는 북해에서 옷은 추위를 막아주는 도구로서의 가치가 가장 큰 것이었지만, 추위를 느낄 수 없는 그녀들에게는 단지 알몸을 가려주는 도구이고 몸을 치장하는 도구일뿐이었다.
빙궁의 폐허 속에서 찾아낸 옷들 대부분이 그녀들의 손이 닿기가 무섭게 얼음 조각으로 변해 부서져버렸다.
"우리의 몸에서 차가운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어---, 이걸 몸 안에 갈무리하지 않으면 옷을 입지 못 할 것 같아."
취하는 들고 있던 옷이 얼음 조각으로 변해 떨어지는 광경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그래."
짧게 대답하고 그 자리에서 취앵이는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취하 역시 취앵이를 마주보면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내공을 돌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두 여자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얀 안개가 빙궁이라 불렸던 폐허 전체를 가리기 시작했다.
두 여자가 내공을 운기한지 오일이 지나서야 빙궁을 뒤덮고 있던 백색의 안개는 소용돌이치면서 다시 두 여자의 몸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먼저 눈을 뜬것은 취앵이였다.
"취하는 아직 시간이 있어야 하겠는걸."
건너편에 앉아서 내공을 갈무리하고 있는 취하를 바라보며 취앵이는 일어섰다. 죽어 있던 감정이 조금은 살아나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지금 서 있는 장소가 차갑다는 것 또한 느낄 수 있었고, 비록 사람이라고는 취하 밖에 보이지 않지만 벌거벗고 있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이 느껴지고 있는 취앵이였다.
"감정이 조금은 살아난 것일까?"
그런 감각과 감정에 취앵은 약간이나마 놀란 마음을 하고, 옷을 찾아서 빙하신전이라 불리는 차가운 북해에서 가장 차가운 기운이 감도는 장소로 들어갔다. 그곳에 천잠사로 만든 얼어붙지 않는 옷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 낸 것이다.
두벌의 하얀 옷을 들고 취앵이가 다시 밖으로 나왔을 때, 취하 역시 일어나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취하는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남쪽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취하야--."
취앵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자 취하는 화가 난 얼굴로 고개들 돌려 대답했다.
"남쪽으로 가서 소구 도련님을 찾자. 우리가 사람이 되려면 소구 도련님이 있어야 돼."
취하의 말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취앵이가 옷을 건넸다.
옷을 입고 난 후에 두 여자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들은 말이 많아졌다.
"지금 우리는 아무하고도 가까이 할 수 없는 이상한 몸이 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지?"
"음식도 이 상태로는 먹을 수 없어."
"모든 게 소구, 그 악마 때문이야."
"마님은 분명히 소구 도련님이 우리를 찾아 주신다고 했지만 오지 않았어."
"찾아가서 괴롭히자."
대화는 끝이 나고 두 여자의 몸은 허공으로 솟구쳐 올라갔다. 그녀들의 머리 속에는 아주 많은 양의 무공에 대한 지식이 있었고, 북해의 전설로 전해지는 빙하신공을 극으로 익히 몸을 가지고 있는 상태였다.
어기충소로 몸을 하늘 높이 솟구치게 한 후 두 여자는 바람을 타고 남쪽을 향해 빛살처럼 날아갔다.
그는 아주 똑똑한 남자였다. 그래서 그를 가리켜 사람들이 신기서생이라 부르고, 조정에서도 몇 번이나 찾아와서 관직에 오를 것을 종용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현재 자신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다. 가난하기는 하지만 그는 지금의 자유로운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다. 편지를 대필해 준다거나 어린아이들에게 글눈을 틔워 주는 것만으로 삼시 세끼 굶어죽지 않을 정도의 돈은 충분히 들어오니 더 이상 바라는 것도 없었다. 남는 시간 동안 보고싶은 서책을 찾아 읽는 것만으로 그는 충분히 행복한 사람이었다.
다만 서른이 넘어가도록 맘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해 밤에 홀로 잠자리에 들 때는 옆구리가 허전한 것이 그의 불만이었지만, 그렇다고 아무하고나 혼인할 수는 없는 일 아니겠는가?
평생을 같이 할 상대를 언젠가 만나리라 믿으면서 신기서생이라 불리는 그 남자는 오늘도 홀로 있는 외로운 밤에 창문을 열고 달을 벗삼아 잠이 오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하늘 높이 떠 있는 둥근 달이 백설로 물든 세상을 내려 비치고 있는 그 밤에 궁상맞은 남자의 궁상맞은 한탄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아--, 벌써 겨울이로구나. 올해가 지나면 내 나이도 이제 서른 셋이나 되건만----. 공자님 말씀에 서른이면 이립(而立)이라 했건만---. 나는 지금 홀로 서 있는 상태인가?"
나직이 탄식을 토해내며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설경을 감상하고 있는 서생의 모습은 어딘지 우수에 차 있었다.
'흠 흠, 저 정도면 내 신랑감으로 그렇게 부족한 남자는 아닌 것 같은데---.'
숨어서 신기서생이라 불리는 정옥을 관찰하고 있는 방수련이라는 이름의 낭자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방수련은 우수에 찬 눈으로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신기서생을 바라보며 이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곳에 도착한지도 벌써 열흘이나 지난 상태였기에 이미 알아 볼 수 있는 것은 모두 알아본 상태였다.
'누나, 그만 객사로 돌아가자고. 지겹지도 않아?! 저자의 느끼한 얼굴은 그만 보고 밥 먹으러 가자구!'
방수련의 귓가를 파고드는 전음성에 방수련은 살짝 아미를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옆에 짜증이 난 얼굴로 앉아 있는 동생 소구의 모습이 보였다.
동생 소구와 함께 은밀하게 낙양에 온 지도 벌써 열흘이 지난 상태였다. 방수련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무 위에서 일어섰다.
그녀도 이제 경공을 배운 상태인지라 혼자서 높은 나무 위에 올라갈 수도 내려 갈 수도 있었다. 그녀가 서 있는 나뭇가지와 지면까지의 거리는 약 이장(6m) 정도, 보통사람이라면 그 정도 높이에서 땅으로 뛰어 내리면 다리가 부러지던지 심하면 죽을 수도 있는 높이였지만 두 사람에게 문제되는 높이가 아니었다.
그녀 방수련과 동생 소구는 나무에서 나무를 타고 신기서생의 거처가 있는 숲에서 나와 낙양 시내에 있는 객점으로 돌아갔다.
객점 안의 한 방에 있는 탁자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식사가 놓여 있고 남매는 식사를 하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어쩔 거야 누나?"
"글세, 지난 열흘 동안 그 사람에 대해 이것저것 알게 되었지만 아직 판단이 안 서는구나."
"대충 계산하고 웬 만하면 혼인하라구. 누나가 만족할만한 신랑감이 세상에 없을 것 같은데---. 그렇게 이것저것 따지다간 머리가 하얗게 센 할머니가 되어도 신랑감은 구할 수 없을 거야."
"그래, 나도 지금의 내 입장에서 이것이 최선의 선택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괴롭구나."
"----."
늘 희희낙락하면서 나날을 보내는 누나의 입에서 괴롭다는 말을 들으면서 소구는 속이 쓰려왔다. 머리 속에 꽤 많은 지식이 들어 있는 소구였지만 사람을 통솔하고 돈을 관리하는 일을 할 자신이 없었다. 자신이 형을 대신해 백초당과 청방을 운영할 수 있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겠지만 소구는 자기자신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게으른 성격에 돈 계산에 서투르고 사람도 제대로 적재적소에 활용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자신이 청방의 방주가 된다면 백초당과 청방을 말아먹게 될 것이 분명했다. 형은 죽어가고 청방을 운영할 사람이 필요했지만, 그 사람은 반드시 방씨 집안의 형제들과 생사를 같이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했다. 그러니 수련 누나의 남편은 거대한 기업인 백초당과 청방을 운영할만한 능력이 있지 않으면 안되었다.
말없이 신경질적으로 젓가락을 놀리는 소구를 바라보며 방수련은 희미한 미소를 흘렸다.
"걱정하지 말아라. 그 사람은 충분히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지 않았니? 외모도 준수하고 인품도 그만하면 훌륭하고--, 명성도 있고 재능도 있는 사람이야. 그 정도면 훌륭한 신랑감이잖니?"
입 속에 들어간 밥을 목구멍 속으로 삼킨 후 소구가 신경질 적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찢어지게 가난해서 궁상서생이라 불리기도 하지."
"그래 참 궁상맞은 남자지만--, 재력이라면 우리 집안의 재산이 중원제일이라고 하지 않니?"
둘이 식사를 하면서 그런 대화를 하고 있을 때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수련 낭자와 소구 도령은 이곳에 계십니다."
청방의 사업은 곳곳에 퍼져 있었고 이곳 낙양에도 청방에서 운영하는 객점이 있었다. 그리고 이곳에 머물고 있는 남매의 존재를 아는 것은, 객점의 운영을 맡고 있는 황고수라는 이름의 상인뿐이었다.
"수련 낭자, 나 천궁이오. 들어가도 되겠소?"
문 밖에서 들려오는 늙은 노인의 목소리에 두 사람은 탁자에서 일어났다. 비록 홍방은 세상에서 사라졌지만 방씨 집안의 원수들인 운룡회의 무리들 중 죽은 자는 아무도 없었고, 방가의 자손은 언제나 암습에 대비하고 있어야했다.
방수련은 침상에 걸터앉아 은은히 무릎 위에 붉은 광채를 뿜어내는 금을 올려놓고 문 쪽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구는 그런 누나의 모습을 보면서 문을 열었다.
문 앞에 서 있던 천궁 옥형진은 문이 열리자마자 황급히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남매를 바라보았다.
방수련은 무릎 위에 올려놓았던 금을 옆에 내려놓고 일어서며 말했다.
"옥 선배, 갑자기 이곳에 무슨 일로 오신 거죠?"
"방주가 소구 도령을 급히 오라고 하네. 운룡회의 무리에 대한 정보가 들어왔다는군."
"수련 누나의 호위는 어떻게 하고요?"
"돌아갈 때까지 내가 맡기로 했다네. 청방의 무사들 삼십여명과 이곳에 같이 왔으니 수련 낭자의 호위는 걱정 말고 자네는 어서 개봉에 있는 백초당으로 가보게나."
방소구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누나인 방수련을 바라보았다.
"걱정하지 말아. 이제 나도 내 몸 하나는 지킬 힘이 있어. 그러니 어서 종구 오라버니에게 가봐."
침상 위에 놓인 붉은 금을 툭툭 건드리며 방수련이 말하자 소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수련의 음공은 아주 무서운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소리로써 살인이 가능한 경지에 이르러 있는 그녀의 실력을 알고 있는 소구였다.
"옥 대협, 그럼 부탁하겠습니다."
"걱정 마시고 어서 가 보시게나."
대화는 짧게 끝나고 폭설이 내리고 있는 그 밤에 소구는 객점에서 나와 백초당이 있는 개봉 쪽으로 몸을 날렸다.
첫댓글 즐독하였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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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읽엇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