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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장 조가장
희뿌연 안개가 은은하게 피어오르고 상쾌한 바람이 불어와 온 누리를
어루만지며 지나가는 기분좋은 아침의 정경.
밤새 내렸던 이슬은 풀잎과 나뭇잎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눈부신 아
침 햇살을 받아 영롱하게 빛나고, 경쾌한 새들의 합창 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다.
용당운은 안개가 피어오르는 속으로 천천히 말을 몰아가고 있었다.
이때 한 명의 매채옹이 연신 "나물 사려,나물 사
려!" 하고 외쳐대면서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 장사꾼이 조가장에서부터 따라온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용당운은
속으로 냉소를 흘리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을 몰아갔다. 조가장
에서는 혹시라도 그가 엉뚱한 짓을 할까 봐 이런 식으로 감시자를 붙
여 놓았던 것이다.
그가 신농당 앞에 이르렀을 때,
"아? 용 선생님이 오셨다!"
약포 문이 활짝 열려지고, 병을 고치러 온 환자들이 용당운이 돌아오
는 것을 보고 저마다 기쁨을 나타내며 환성을 올리기에 바빴다.
용당운은 안으로 들어가 아침 식사를 끝낸 다음 평일과 다름없이 환
자들을 한 사람 한 사람씩 맞아 병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환자들 속에는 위장한 조가장의 수하들도 몇몇 끼여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용당운에게서 아무런 이상한 점도 발견할 수 없었는지
라 슬슬 꽁무니를 뺐고, 이 사실을 조중화에게 그대로 보고했다.
밤새 잠을 설친 용당운은 피로를 느끼고 졸린 듯 이따금씩 눈을 스르
르 감으며 큰 하품을 연발했다.
지금 그의 심정은 단 한 시진만 자고 나면 딱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원래 아침나절에 사십 명의 환자를 보기로 계획을 세운 그는
피로한 몸을 이끌고 환자들을 처리해 나갔다.
이윽고 그는 열다섯 명째 환자를 마주하게 되었다. 그 환자는 얼굴색
이 노랗고 피골이 상접한 노인이었다.
용당운이 오른손으로 노인의 맥을 짚는 사이, 노인이 전음성으로 말
을 전했다.
"지금 예정한 계획대로 당력을 성심장에서 잡아온 것처럼 조작하여
회서방과 성심장으로 하여금 서로 분쟁을 일으키도록 하고, 우리는
적당한 기회에 어부지리를 취해야겠습니다."
"음적양은 아직 조가장의 깊숙한 곳에 숨어 꼼짝도 하지 않는 모양일
세. 그걸로 보아 조가장 내에 비밀통로가 있는 것 같은데, 자네는 조
사해 보았나?"
노인은 다름 아닌 천리일순 방각의 변장이었다.
"아직 확실치는 않지만 본채 뒤쪽의 창고가 조금 의심스럽더군요. 아
마 내일쯤이면 어디 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겁니다."
방각은 돌연 히죽 웃었다.
"그건 그렇고, 누남광 노인과 함께 온 운, 곽 두 낭자가 자네를 보고
싶어 성화라네. 그러니 잠깐 시간을 내어 그녀들을 좀 달래 주게."
용당운은 씁쓸한 고소를 머금었다.
"그렇게 하지요."
그는 약처방 종이에 몇 가지 의병지계를 기재하여 방각에
게 건네 주었다.
방각은 약처방 아닌 약처방을 받아 소중히 간직하고 허약한 몸을 일
으켜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신농당을 나섰다. 그는 어느 으슥한 골목
으로 접어들어서는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절정의 경공을 전개하여 서
소문 쪽으로 달려갔다.
세월은 태평 성대라……
관병들의 경비는 허술하기 짝이 없었고, 대낮에도 모여 앉아
술과 도박을 즐겼다.
서소문 성루 위에 숨어 있는 권운도 학귀는 매우 따분하고 갑갑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그가 무료한 나머지 두 팔을 뽑아 내고 있을 때 성루 밑에서 처음 듣
는 음성이 들려 왔다.
"학 대협은 그만 내려오시오."
학귀는 움찔하여 급히 물었다.
"귀하는 뉘시오?"
"노부는 조가장에서 학 대협에게 경고를 해준 사람의 친구요."
학귀는 반신반의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분은 지금 어디 계시오?"
"그 사람은 조가장 내에 잠적하여 회서방의 비밀을 염탐하는 임무를
띠고 있소."
"흠…… 그런데 귀하는 무슨 일로 나를 찾으시었소?"
"노부는 학 대협에게 그 친구의 부탁을 전하러 왔소. 지금 안경 일대
엔 회서방의 이목이 많으니 학 대협은 단신으로 행사하다가 최악의
불행을 당하지 말고 일찌감치 이곳을 떠나라는 부탁이오. 그런 노부
도 볼일이 많아 더는 얘기를 나누지 못하고 이만 갈까 하니 몸조심하
시오."
말소리가 끊기고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멎어 버렸다.
학귀는 상대방이 떠났음을 짐작하고 도둑고양이처럼 살그머니 성루에
서 내려와 사방을 한차례 훌어본 다음 교외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갔다.
그가 약 십여 장 앞을 내닫고 있을 때 성루 밑에서 방각의 비쩍 마른
신형이 불쑥 나타났다.
방각은 얼굴에 괴이한 미소를 머금더니 곧 학귀의 뒤를 추적해 가기
시작했다.
* * *
조가장.
조가장 주변에는 삼엄한 경비가 펼쳐져 있었다.
겉보기엔 예나 다름없이 평범한 저택 같았지만, 기실 내부엔 살기가
충만하여 여차하는 날이면 대살겁이 벌어질 상황에 처해 있
었다.
조중화는 마치 펄펄 끓는 가마솥 뚜껑 위를 맴돌고 있는 개미와 같이
마음이 십분 초조하고 불안하여 됫짐을 진 채 대청 안을 서성이고 있
었다.
대청의 중앙에 있는 커다란 태사의에는 한 명의 회의소년이 앉은 채,
왔다갔다하고 있는 조중화를 거만한 눈초리로 응시하고 있었다.
회의소년은 바로 음양공자 음적양이었다.
음적양은 거만하고 냉담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조 장주, 적은 무력으로 막고 물은 흙으로 막는 게 정해
진 이치요. 더욱이 이곳은 경비가 천라지망 같고 내가 이
미 총단으로 급보를 전했으니 이제 곧 총단의 고수들이 달려올
텐데 무얼 그리 안절부절못하고 있소?"
조중화는 씁쓸히 웃었다.
"당 형이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는 것을 보니 이미 적들의 독
수에 당한 것 같군요. 나는 수년 동안 조심에 조심을 거듭했는
데도 결국은 정체가 발각당하고, 그 동안 쌓아 왔던 일들이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와르르 무너지게 되었는데 어찌 걱정이 안 되겠습니까?"
음적양은 눈살을 찌푸리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쨀 수가 없소. 어젯밤만 해도 장주가 직접
손을 썼다면 학귀를 능히 사로잡았을 게 아니오?"
"그런 마음이 없진 않았으나 상대방이 워낙 갑작스레 나타난 데다가
얼토당토않게 냉상아를 내놓으라고 하는 바람에 미처 정신을 가다듬
지 못했습니다."
음적양은 돌연 이를 부드득 갈아붙였다.
"그때 금릉의 연자기에서 숨어 나를 암습한 놈은 성심장의 고수가 틀
림없소. 그런데도 성심장에서 냉상아를 핑계로 조가장을 급습한 것을
보니 그들은 이미 본 방과 한바탕 격전을 벌이기로 작정한 모양이
오."
조중화는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부총호법의 말씀이 옳습니다."
이때 청의를 입은 장정 하나가 급히 안으로 들어와 부복했다.
"장주님의 명을 받들어 용 선생을 다시 모셔 왔습니다."
"어서 모시고 들어오너라,"
청의장정은 곧 물러났다.
잠시 후 용당운이 모습을 나타랬다.
용당운은 태사의에 거만한 표정의 회의소년이 앉아 있고 장주인 조중
화는 서 있는 것을 보고 주춤거렸으나 곧 조중화의 앞으로 다가와 인
사를 했다.
"신농당에는 아직도 환자들이 많은데 어찌 저를 다시 부르셨습니까?
조 장주께선 매우 성질이 급하신 모양이군요."
조중화는 억지웃음을 지었다.
"그건 용 선생이 모르고 하시는 말씀이오. 나는 어젯밤 사건으로 용
선생의 신변이 위태로워질까 염려해서 오시라고 한 것이오."
용당운은 알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저로서는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말씀이군요."
"이 성안에는 노부의 손자 녀석이 기병에 걸렸다는 것과 용 선
생을 청해 치료를 받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오. 그런
데 만일 성심장 도당들이 용 선생을 납치해 간다면 용 선생은 물론이
고 노부의 손자 녀석도 치료를 받지 못해 생명이 위험해질 것이며,
어쩌면 노부까지도 그들의 위협을 받을 게 아니겠소?"
"……"
"폐장에 계시면 우선 침식이 편하고 또 비복들이 극진히 모실
것이니 용 선생은 얼마 동안만 자유롭게 지내 주시오."
말이야 공손했지만 그것은 거의 명령에 가까운 것이었다.
할 수 없이 용당운은 승낙을 하고 한 동자의 안내로 어느 객실에 들
게 되었다.
그 객실은 안채와 멀찌감치 떨어져 있어서 매우 조용했다.
문 앞에는 조그만 연못이 있었는데 꽃나무가 빙 둘러 있어 아주 운치
있는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아담한 객실에 든 용당운은 창 밖으로 연못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
다가 분위기에 이끌려 자기도 모르게 시 한 수를 을조리게 되었다.
"풀빛은 푸르르며 버들 움은 노랗고, 복숭아꽃 흐드
러지며 살구꽃 향기 그윽하다, 봄바람 조차 내 시름
을 불어 씻지 못하고, 도리어 시름 돋우니 하루 해
왜 이다지 길더니……"
그가 한창 시를 읖조리고 있을 때 등뒤에서 갑자기 고운 목소리가 들
려 왔다.
"어머! 용 은공께선 취향이 썩 낭만적이시군요. 생활에 여유가 있어
서 그런가요?"
동시에 눈빛같이 매끄럽고 섬세한 관능미를 자랑하는 손지유가 복숭
아꽃처럼 화사한 미소를 듬뿍 머금은 채 총총히 들어왔다.
용당운은 고개를 돌리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낭자는 이제 보니 무공을 지닌 모양이구려. 낭자가 가까이 다가 오
는 것을 내가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으니 말이오."
손지유는 요염하게 웃었다.
"전 겨우 몸을 보호할 정도의 무공밖에 터득하지 못했으니 장주님에
비한다면 천양의 격차가 있어요."
"아……! 그런데 소공자의 증세는 어떻소?"
"반점은 조금 사그라졌으나 이따금씩 헛소리를 하고 있어요."
용당운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요귀를 제거하기 전에는 완치되기 어려울 것이오."
손지유는 영특함이 엿보이는 샛별 같은 눈에 새삼 의아스런 빛을 떠
올렸다.
"본 장에 진정 요귀가 있을까요?"
"물론이오."
"그럼 빨리 잡아 내세요. 만일 요귀를 잡아 내지 못한다면 장주님께
선 용 은공께서 본 장의 금제를 죄다 알고 있다 하여 절대 놓아 보내
지 않을 거예요."
용당운은 고개를 흔들었다.
"어떠한 난관에 봉착하더라도 절대 이곳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없
소."
손지유는 잠시 생각하다가 결연한 음성으로 말했다.
"제가 은공이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 보겠어요."
"휴--!"
용당운은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며 착잡한 표정을 짓자 손지유
가 두 눈을 깜박거리며 물었다.
"은공께선 어찌 그런 표정을 하고 계세요?"
니는 관상술을 약간 터득하고 있소. 조금 전 조 장주의 안색
으로 미루어 보건대 흉살한 기운이 화개 부위까지 침투
해 있어 큰 화를 면치 못할 것이라 생각되오."
손지유는 안색이 조금 변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용당운은 조금 침울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나는 강호의 일에 전혀 무식하지만, 마음이 너그럽고 인자하며 가산
이 풍부한 조 장주께서 왜 여생을 편히 보내시지 않고 엉뚱한
욕망으로 큰일을 벌이는지 모르겠소."
손지유가 말을 받았다.
"은공께선 장주님께서 어찌 강호의 일에 관여하시느냐 하는 말씀이시
군요. 저는 그 점에 대해 조금은 짐작하고 있어요."
그녀는 생글생글 웃으며 다시 말을 계속했다.
"회서방이 비록 강호에서의 평판은 그리 좋지 않으나 그 세력은 이미
무림을 거의 석권하고 있어요. 장주께선 전날 무림의 고수로 강호에
행도하실 때 만만찮은 원수를 맺은 적이 있는데, 당시 하마터
면 원수에게 죽음을 당할 뻔했어요. 그런데 천행으로 회서방주
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모면하셨고, 그 후 그 은혜에 보답키 위해 회
서방에 가입하신거예요."
"아…… 그렇다면 회서방주는 나이가 많고 덕망도 높은 기인이
겠군요?"
"회서방주가 덕망이 높은지 어쩐지는 알 수 없지만 무림의 절대고수
라는 것은 확실해요. 그리고 회서방 총단은, 저는 물론 장
주님도 확실히 알지 못해요."
용당운은 쓴웃음을 지었다.
"강호상의 일은 우리 의도와는 전적으로 질이 다르군요. 의도
는 사람의 생명을 그 무엇보다도 중히 여기건만 강호에선 수급이 잘
려진 시체가 길바닥에 뒹굴어도 예사로운 일로 취급하니…… 어젯밤
만 해도, 그 냉 낭자란 여자가 얼마나 대단한 신분이기에 학귀라는
자가 찾아와 그 같은 유혈극을 벌였는지,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오."
"그건 저희 장주께서도 가장 의아해 하시는 일이에요. 언뜻 들은 이
야기로는, 냉상아란 여인은 성심장주가 아끼는 제자 중 하나로서 일
대기녀라고 해요. 그런데 회서방에서는 그녀를 생포하려다
실패하여 종적을 잃어버렸는데 오히려 그들이 그것을 핑계삼아 선제
공격을 가해 온 거지요."
용당운은 슬쩍 화제를 돌려 손지유와 잡다한 얘기를 나누었다.
손지유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용당운과의 대화에 열중하는 바람에
그날 밤 늦게서야 그의 방에서 나왔다.
* * *
순식간에 이틀이 지났다.
그 동안 조가장은 매우 평온한 시간을 유지했다. 용당운은 조가장 전
체를 두루 살피고 나서도 요귀가 있다는 곳을 말하지 않았다.
그러자 조중화가 기다리다 못해 그를 불렀다.
"노부가 보건대 손자 녀석은 요귀의 장난이 아닌 것 같소."
용당운은 담담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는 이미 요귀의 소재를 알아 냈으나 조 장주의 명예에 손상을 입
힐까 염려스러워 차마 말씀드리지 못했던 겁니다."
조중화의 표정이 약간 달라졌다.
"노부는 한평생 양심에 가책받을 만한 행사를 해본 적이 없으니 어떤
말씀이든 서슴지 말고 해보시오."
"그럼 말씀드리지요. 요귀는 바로 읍취루 밑에 있습니다. 그
요물은 앞으로 이십 일만 지나면 완전히 제 모습을 형성할 것이므로
요물을 제거할 몇 가지 법물을 준비해야 되겠습니다. 만약 사
전에 준비를 철저히 하지 않고 요물을 잡아 내려다간 뜻하지 않은 피
해를 보게 됩니다."
조중화의 표정이 침중해졌다.
"읍취루…… 그럼 언제 요물 제거에 들어갈 생각이시오?"
"미리 냉수 한 병과 도지 마흔아홉 개
그리고 황지 스물넉 장, 그리고 읍취루 앞에 한 층의 법대
를 준비한 다음 오늘밤 삼경을 기해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조중화는 반신반의하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하인들을 불러 그대로 행
할 것을 분부했다.
어느덧 석양이 황혼을 물들이며 노을이 타올랐다.
어둠이 짙어 오면서 넓고 넓은 장원에는 공포스런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읍취루 앞에는 법대가 세워져 있었다.
법대 양쪽에는 두 개의 자명등이 휘황찬란하게 밝혀져 밀려
오는 어둠을 쫓아 내고 있었다. 법대 주위에는 조가장 내 사람들이
용당운이 요물을 제거하는 것을 보기 위해 거의 전부 모이다시피 했
다.
모두들 긴장된 표정으로 숨을 죽이고 있었다.
상경이 되자 사방은 쥐죽은듯 고요해졌다. 가끔씩 풀벌레 울음 소리
만이 애처롭게 들려 와 사람들의 가슴속으로 은은히 스며들고 있었
다.
조중화와 용당운은 서서히 읍취루 밑에 그 모습을 나타냈다.
그리고 뒤에는 네 명의 무사와 손지유가 조용히 따르고 있었다.
이날 밤따라 현의경장을 한 손지유의 모습은 한결 더 늘씬하고 아름
다웠으며, 어딘지 모르게 사람을 위압하는 기운을 흘려 내고 있었다.
용당운은 두 명의 무사를 시켜 읍취루를 중심으로 아홉 개의 도지
를 방위에 따라 박도록 했다.
조중화는 이것을 보고 있다가 나직이 말을 건네 왔다.
"용 선생, 이처럼 신중히 다루는 것을 보니 만만찮은 요물인가 보구
려."
용당운은 쓴운음을 지었다.
"그 요물은 하나의 강시로서, 괘를 뽑아 보건대 여자인 듯
합니다. 그 요물은 달의 정기를 받아 제 모습을 형성했고
영손은 악귀가 몸에 침투되어 그 같은 괴병을 얻은 것입
니다."
강시라는 말에 조중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속으로는 크게 놀
라고 있었다.
용당운은 다시 두 무사에게 분부했다.
당신들은 읍취루 대청으로 들어가 마룻장을 뜯어 내고 일곱 자 두 치
깊이로 구덩이를 판 다음 내게 고하시오."
말을 마친 그는 법의를 걸치고 법대 위에 올랐다.
그는 아홉 번 큰절을 올린 다음 검을 거머쥐고 북두의 방위로
걸으면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러길 약 반 시진.
용당운은 스물넉 장의 황지에 주사로 각기 다른 부적을 그려
검끝에 매달더니 촛불에 소각시키고 냉수를 한 모금 머금어 사방으로
뿌려냈다.
그때 두 무사가 대청 밑에 구덩이를 다 팠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용당운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 뒤 법의를 벗어 놓고 법대 위에서 내
려와 조중화등과 함께 대청 안으로 들어갔다.
"이 구덩이를 중심으로 하여 마흔 개의 도지를 박으시오."
용당운의 지시가 떨어지기 무섭게 두 무사가 도지를 꽃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 작업이 끝나자 용당운은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다시 분부
를 내렸다.
"다섯 치만 더 깊이 파 내려가시오. 그러면 하나의 석관이 나
올 것이오."
두 무사는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러자 과연 구덩이 속에서 네모진 석관이 드러났다.
석관!
그 속엔 과연 무엇이 들어 있을까?
용당운의 말대로 여인의 시체가 들어 있단 말인가!
조중화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크게 소리쳤다.
"어서 관뚜껑을 열어라!"
두 무사는 강도를 쑥 뽑아 들어 칼끝을 틈새로 밀어 넣은 다음 진력
을 모음과 동시에 번쩍 치켜 들었다.
다음 순간,
덜컹!
관뚜껑이 활짝 열렸다.
긴장된 표정으로 관 속을 살그머니 들여다보던 조중화 등은 소스라치
게 놀라며 뒤로 주춤 물러났다
"아앗?"
석관 속에는 하나의 고루가 들어 있었다.
한데 괴이하게도 고루는 전신 배다귀에 한 치 길이의 녹색 털이 돋아
났고, 어리 부분에는 살이 생겨났으며 움푹 들어간 눈에서는 푸르스
름한 한광이 발산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조중화는 사실 그 동안 강시가 있다는 용당운의 말을 반신반의했으나
이렇게 막상 섬뜩한 형상의 강시를 직접 보게 되자 식은땀이 잔뜩 배
어나옴을 느끼면서 내심 용당운의 뛰어난 재학에 탄복을 금치
못했다.
"이 강시를 어떻게 처치하면 되겠소?"
용당운은 가볍게 웃었다.
"동유에 담근 연료를 가져다가 깨끗이 소각시키고 해독을 제거
해야 합니다."
"아……!"
조중화는 감탄성을 연발했다.
잠시 후 석관은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 횝싸였다.
"끼익…… 끼익……"
강시는 괴성을 연발하면서 사지를 꿈틀거렸는데 강시가 타면서 코를
감싸 쥐게 하는 악취가 진동했다.
강시는 약 한 시진 만에 완전히 소각되어 한줌의 재로 변했다.
용당운은 무거운 짐을 벗어 버린 듯 깊은 숨을 내쉬고는 조중화를 돌
아보며 밝은 웃음을 지었다.
"이제 드디어 요물이 없어지고 영손이 완쾌를 보게 되었으니 매우 기
쁜 일입니다."
조중화는 흡족한 표정으로 싱글벙글했다.
"이건 오로지 용 선생의 은덕이오. 노부가 후히 사례하겠소."
그는 용당운과 나란히 누각으로 올라왔다.
그의 손자는 몸에 있던 반점이 물로 씻은 듯 없어졌고 깊은 잠에 빠
져있었다.
용당운은 동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천천히 입을 떼었다.
"영손이 중병을 앓고 나서 진기가 많이 소모되었을 것이니 반달간 보
약을 복용해야 할 것입니다."
조중화는 무언가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용당운은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수그렸다.
"이젠 제가 이곳에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으니 이만 작별을 고할까
합니다."
조중화는 고개를 저으며 자기의 의사를 표했다.
"노부는 몇 달간 용 선생을 모시어 노부의 성의를 표할까 하니 물리
치지 말아 주시오."
'음…… 내가 이곳 조가장에 배치된 금제를 알고 있기에 조중화는 내
가 비밀을 폭로시킬까 두려워 계획적으로 나를 잡아 두려는 것이다.'
용당운은 이렇게 생각했으나 사전에 계획한 바가 있기 때문에 미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장주, 내가 귀장에 머무른다면 오히려 장주에게 불편함이 있을 겁니
다."
조중화는 크게 의아해 했다.
"아니, 그건 또 무슨 말씀이오?"
"저는 본시 운학과도 같은 성격인지라 한곳에 오래 머물지도
않을 뿐더러 누구에게 얽매여 살지도 않습니다. 제가 만약 그런 괴상
한 습벽만 없었다면 벌써 대내로 들어가 어의 노릇을 하
고 있을겁니다."
용당운은 차분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더욱이 저는 이번에 완서 순무사의 초청을 받고 왔기
때문에 귀장에 머물러 있다면 장주께 애로만 끼쳐 드리게 됩니다. 그
리고 장주와 성심장과의 분쟁에 대해서는 제가 이미 비밀을 지켜 드
리겠다는 맹세를 했으니 그 점에 대해서는 염려치 마십시오."
조중화는 내심 갈피를 잡지 못하고 망설였다.
'용당운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지 어떨지 모르겠구나.'
그의 속셈을 간파한 용당운은 엷은 웃응을 띠며 다시 말을 꺼냈다.
"내일이 바로 완서 순무사의 생신이라 저는 조그만 선물까지 준비해
놓았기 때문에 필히 가서 축하를 드려야겠습니다."
조중화는 잠시 긴 침묵에 잠겨 있다가 명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용 선생의 사정이 그렇다면 노부로서도 더는 만류할 수 없
군요. 좋소이다. 노부는 그럼 다음 기회를 빌려 용 선생을 대접하겠
소."
그는 수하를 시켜 황금 백 냥을 가져 오게 했다.
용당운은 조중화가 내주는 황금 백 냥을 굳이 사양했다.
이때 하인 하나가 대청 안으로 들어와 아뢰었다.
"장주님, 순무부에 계시는 유 교두 나으리에서 오
셨습니다."
조중화는 이 의외의 방문객에 어리등절해 하다가급히 자리에서 일어
났다.
"노부가 나가서 영접해야 되겠구나."
그가 막 밖으로 나가려는 사이 밖에서 낭랑한 음성이 들려 왔다.
"아무 통보도 없이 들어옴을 조 장주는 널리 이해하시오."
바로 이어 키가 작고 체구가 왜소한 유생 하나가 몸에 하늘색
장삼을 걸치고 들어와 웃음떤 표정으로 포권의 예를 취했다.
조중화는 얼른 답례하고 맞이했다.
"유 교두께선 무슨 분부가 있으시기에 이렬듯 급작스럽게 왕림하셨습
니까?"
유 교두는 용당운을 힐끔 쳐다보고 나서 말했다.
"내가 어제 순무사 어른의 명령을 받고 신농당으로 용 선생을 뵈러
갔더니 귀장에 와 계시다고 해서 이렇게 찾아왔소이다. 내일은 순무
사 어른의 생신이며 용 선생은 순무사 어른과 망년지교이
시므로 지금 순무사께서 주석을 마련하고서 용 선생을 고대하
고 계십니다."
조중화는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그렇다면 용 선생은 속히 가보셔야 되겠군요. 그런데 순무
사께서 새벽같이 손님을 맞이하시는 것으로 미루어 성미가 매우 급하
신 모양이군요."
"하핫…… 조 장주는 그 내막을 잘 모르실 것이오. 용 선생께선 성격
이 고고하여 순무사 어른과 절친한 사이라는 것을 일체 남에게
알리지 않으셨고 또 이부에 찾아오시는 예도 극히 드물기 때문
에 순무사께선 오늘 생신을 계기로 용 선생과 더불어 술잔을 기울이
며 회포를 푸시려는 것이오."
"아…… 그렇군요. 노부는 진정 몰랐소이다."
그제서야 모든 의심이 완전히 풀린 조중화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곧 유 교두는 용당운과 함께 조중화와 작별하고 조가장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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