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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밤사이 내린 폭설로 온통 새하얗게 변한 상태였다. 차갑고 세찬 강바람이 불고 있는 강가로 아침 식사도 거른 채 산책하듯 걸음을 옮기고 있는 방수련은 힐끗 뒤를 바라보았다.
어제 저녁에 온 천궁과 호위무사들이 그녀의 주변을 에워 싼 채 그녀를 따라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방수련은 걸음을 옮기면서 품에 안고 있는 붉은 금(琴)을 쓰다듬었다.
낙양 근처에 있는 낙수(落水)라 불리는 강가에 이르렀을 때 그녀의 걸음은 멈추어졌다. 그리고 그녀를 따라온 나머지 일행들 역시 걸음을 멈추고 강가에 서 있는 방수련을 바라보았다.
무릎까지 푹 푹 박혀드는 눈 쌓인 강가에 서서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면서 방수련은 상념에 잠겼다. 강가는 얼음이 얼어 있었지만 강물 한 가운데에는 얼음과 함께 세찬 물살이 하류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찬바람이 쌩쌩 몰아치는 강변으로 나올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그 장소에는 그녀 방수련과 주위에는 등에 검을 매달고 있는 삼십여명의 검은 무복을 걸친 무사들이 주변을 감시하고 서 있었을 뿐이었다.
강가에 나와 잠시 동안 흘러가는 강물을 묵묵히 바라보던 그녀는 눈 위에 앉아서 강물을 쳐다보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눈 위에 그대로 주저앉아서 금을 타기 시작했다. 낮고 처량한 음색의 금음(琴音)이 겨울 바람에 섞여 강가를 떠돌고 어느 순간 방수련의 붉은 입술 사이로 한 마디의 말이 흘러나왔다.
"사람이 나고 죽는 일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지만, 살아 있는 것은 스스로 살고자 노력하기 마련----. 그대들이 나를 죽이러 왔으니 나 또한 살기 위해 그대들을 죽여야겠군요."
방수련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을 들은 순간 천궁의 얼굴을 하고 있던 자의 입에서 날카로운 고함이 터져 나왔다.
"쳐라!"
외치기가 무섭게 방수련을 둘러싸고 있던 천궁과 삼십여명의 호위무사들은 일제히 방수련을 향해 검과 암기를 날렸다. 연주는 멈추어지고 눈 위에 앉아 있던 방수련의 몸은 미끄러지듯 앞으로 쏘아져 나아가면서, 그녀의 등뒤로 수십개의 검과 암기들이 눈 위에 떨어져 내렸다.
여전히 앉아 있는 자세 그대로 방수련의 몸은 강물 한 가운데로 이동해서, 빙글 몸을 돌려 강가에 서 있는 무리를 슬픈 바라보았다. 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 강물 위에 떠 있는 그녀의 무릎 위에는 여전히 은은히 붉은 광채를 뿜어내는 금이 놓여져 있었다. 무릎 위에 올려져 있는 붉은 금 위에 얹혀진 그녀의 가늘고 하얀 손가락이 현을 퉁기는 순간 그녀의 몸은 순간적으로 붉은 광채에 뒤덮이면서 날카로운 소리가 강변을 메웠다.
"띠----잉."
몸을 날려 방수련의 머리 위에서 검을 내리치던 천궁의 얼굴을 하고 있던 자는 입으로 피화살을 내뿜으며 뒤로 날아가 쌓인 눈 위로 고꾸라지고 다른 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끄악!"
손에 쥐고 있던 무기를 떨구고 양손으로 귀를 막은 강가의 자객들은 한꺼번에 비명을 지르고 칠공으로 피를 흘리며 하얀 눈밭에 한꺼번에 쓰러져 버렸다.
음공의 무서움은 사방으로 퍼진다는 것이었고, 그녀가 터트린 일음(一音)에 대항할만한 실력을 가진 자는 그 장소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를 노리고 있던 자객들 모두가 단 일음을 견디지 못하고 모두가 죽어서 강가에 살아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싸늘한 겨울바람만이 세차게 몰아치는 강물 위에 떠 있는 방수련은 슬픈 눈으로 강변을 바라보다 바로 자신이 떠 있는 강물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물속에 숨어 있던 자들 또한 살인음의 범위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었다. 그자들 역시 입가로 피를 흘리며 실신한 채 물 위로 등만을 드러낸 채 하류로 떠내려가고 있었다.
"하--아, 손에 피를 묻히고 청혼하러 가고 싶지 않았건만----."
탄식을 토하며 방수련은 중얼거리면서 다시 강가로 몸을 이동시켰다.
그녀가 일으킨 단 일음에 강가에 서 있던 서른 한 명과 물 속에 숨어 있던 세명의 자객들은 모두 목숨을 잃어야 했다.
아주 멀리서 방수련을 관찰하던 한 인물은 비틀거리면서 일어났다.
운룡회의 용들 중 하나인 개방 출신의 왕질악이었다.
"저 여자의 무공은---?"
중얼거리던 왕질악은 자신이 숨어 있는 곳을 향해 시선을 던지고 있는 방수련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그대로 몸을 날려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불과 일각도 안돼서 왕질악이 숨어 있던 자리에 오게 된 방수련은 눈 위에 핀 혈화만을 발견 할 수 있었다.
"놓쳤군. 여기 숨어 있던 자는 누구였을까? 혼사 일과 더불어서 내 몸을 미끼로 운룡회의 무리를 끌어들일 수는 있었지만---. 하아--, 나도 드디어 살인자가 된 것인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그녀 방수련은 새하얗던 벌판을 피로 물들이며 쓰러져 있는 서른 한구의 시신이 있던 장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다시 걸음을 옮겨 시신들이 있던 장소로 걸음을 옮기고 서른 한 구의 시신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살인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순백의 땅을 붉게 물든 피와 시신들이 보기가 싫었다. 다음 순간 그녀의 소매가 한 순간 저어졌고, 서른 한구의 시신과 피묻은 눈은 모조리 강물 한가운데로 날아갔다.
"첨벙! 첨벙! 첨벙!"
요란한 물 튀기는 소리와 함께 시신들은 모두 세상에서 모습을 감추고, 그녀는 뒤돌아 섰다.
"소구가 신기서생을 해치려는 무리는 모두 처리했겠지?"
신기서생의 집이 있는 복우산 쪽으로 몸을 날리면서 그녀는 중얼거렸다.
신기서생 정옥은 편안한 얼굴로 집안에서 자고 있었고, 허름한 신기서생의 초막 지붕 위에 서 있는 방소구는 주위를 살펴보았다. 이제 더 이상 신기서생을 해치려는 자객은 보이지 않았다.
정옥은 소구에게 수혈을 점혈 당해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상태였기에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고, 소구는 신기서생의 집 안에 있던 바둑돌을 이용해 밤새 자객들을 처리한 상태였다. 소구는 왼손에 들린 바둑돌이 들어있는 통을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바둑알은 잔뜩 남아 있는 상태였다.
"차기 청방의 방주로 거론되는 자를 운룡회의 무리가 가만 놔둘 리 없지---. 누나의 실력이면 그자들은 모두 처리했겠지?"
소구는 이마에 바둑알이 박힌 채 마지막으로 쓰러지고 인간을 바라보았다. 초막 주위에 그렇게 쓰러진 자들이 백여명에 이르고 있었다.
소구의 감각 안에 주위 백여장에 이르는 거리에 살아 있는 인간은 발 밑의 신기서생 외에는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밤새 끊임없이 신기서생을 죽이기 위해 찾아왔던 자객들은 소구가 보내는 바둑알이라는 환영인사로 인해 모두 목숨을 잃어야 했다.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소구는 바둑돌을 옆에 내려놓고 지붕 위에 앉은 상태로 눈 쌓인 세상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제 누나가 오기만을 기다리면 되었다.
정오가 될 무렵 아주 익숙한 느낌의 인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소구는 산 아래로 시선을 던졌다. 멀리 하얀 궁장을 입고 가슴에는 붉은 금을 안고 있는 누나 방수련이 경공으로 이곳에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런 시신들을 처리해야겠구나---."
뒤늦게 깨달은 소구는 황급히 일어나서 시신들을 향해 일일이 지풍을 날리기 시작했다. 극양의 기운을 품은 지풍에 맞은 시신들이 하나하나 가루가 되어 모두 사라진 것은 방수련이 초막 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그 사람은--?"
"무사해, 누나."
말을 하면서도 남매는 서로를 살펴보았다. 둘 다 격전을 치른 흔적도 부상을 입은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신기서생은 눈이 부시는 것을 느끼면서 잠에서 깨어났다.
"헛, 이럴 수가 정오가 훨씬 지났잖아!"
창문 밖으로 보이는 해를 보면서 놀라 소리치면서 일어난 정옥은 잠이 들기 전 보았던 검은 그림자들을 떠올렸다. 자신에게서 가져갈 것은 아무 것도 없었지만 밤에 자객들이 자신을 노리고 칼을 휘두르던 광경이 떠올랐다.
"꿈인가---?"
고개를 흔들며 방문을 나선 신기서생이 본 것은 자신의 집 마당에 서 있는 한 남자와 얼굴을 면사로 가리고 있는 한 여자였다.
"당신들은 누구요?"
신기서생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다 소구의 손에 들린 바둑알이 들어 있는 통을 바라보고 한층 더 의아한 얼굴이 되어 물었다.
"이보시오. 그 바둑알은 분명히 내 것 같은데---?"
"아, 이걸 아직까지 내가 들고 있었군요. 이제 필요가 없으니 돌려드리지요."
그렇게 말하면서 남자가 바둑알이 들어있는 통을 내밀었다. 나무를 깎아 만든 손바닥보다 조금 큰 통을 받아들면서 신기서생은 맹렬하게 머리를 회전시키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나한테 볼일이 있어 오신 겁니까?"
"그렇습니다. 누나, 이제 그만 면사를 벗지 그래?"
신기서생을 바라보며 대답하던 소구는 바로 고개를 돌려 방수련을 쳐다보며 말했다.
"아직은 아니야."
"도대체 무슨 일로 오신 것입니까?"
"형이 정한 누나의 신랑감을 보기 위해 왔지요."
"신랑감?"
"그렇습니다. 낙양에 학식과 인품이 뛰어난 신기서생이라는 사람이 있으니 누나의 신랑감으로 어떻겠냐고 형이 말하고, 누나는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겠다고 이리로 오게 되었지요."
"그러니까 면사로 얼굴을 가린 저 여자분과 내가 혼인을 하게 될 것이라는 그런 말인가요?"
"그거야, 서로의 인연이 닿으면 될 수도 있고 안될 수도 있는 일이지요."
마당에서 선 채로 대화를 나누던 신기서생은 아차 하는 얼굴이 되어서 말했다.
"이런 정신이 없어 객을 계속 마당에 있게 했군요. 누추하지만 안으로 들어가서 말합시다. 내 놓을 것은 없지만 차 한 잔은 대접할 수 있으니---."
신기서생의 말에 소구는 누나를 바라보았다. 방수련은 고개를 끄덕였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앉은 세 사람의 사이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이 놓여진 채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침묵을 깬 것은 신기서생이었다.
"이러다가 차가 식겠습니다. 어서 식기 전에 드시지요."
"그보다 혹시 마음에 둔 처자가 계시는지요?"
소구의 질문에 어색한 미소를 흘리며 신기서생이 대답했다.
"글쎄요--, 한 십여년 전에 잠시 좋아하던 여자가 있기는 있었지만 그녀는 이미 다른 곳에 시집을 가 버린 후였습니다. 내가 너무 가난해서 싫다나요---? 다 지난 일이죠."
그렇게 말하면서 찻잔을 입가로 가져가는 신기서생의 얼굴 위에는 쓴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저와 혼인하고자 오셨다면--, 이미 저에 대해 많은 것을 조사 하셨겠지요?"
소구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제가 생각하는 아내감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요. 혼인은 서로의 동의가 있어야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평생을 같이할 사람이라면 서로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무슨 말을 하시고 싶은 겁니까?"
"저는 위선자가 아닙니다. 학문을 계속 배우고 익히다 보니 미추를 논하는 일이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평생을 같이할 사람이라면 예쁘기를 바랍니다. 품성도 착하기를 바라지요. 보시다시피 찢어지게 가난한 생활을 하다보니 생활력 강한, 능력 있는 여자가 내 아내가 되기를 바라지요."
목이 타는지 다시 차를 한모금 들이킨 신기서생은 면사로 얼굴을 가린 채 침묵하고 있는 방수련을 흘낏 바라보다 다시 방소구를 바라보며 계속 말했다.
"집안이 명문이고 재력도 있으면 더욱 좋겠지요. 하하, 다 내 욕심이지요. 세상에 이런 여자가 있겠습니까? 나이도 좀 어리길 바라지요. 이러니----, 하하 아직까지 혼인을 못하고 홀아비 생활을 계속 하게 되었군요."
"흠--, 그러니까 순전히 여자 등에 기대어 살게 되었다는 심보군요?"
"하하, 말이 그렇게 되나요? 제가 배우고 익힌 것은 학문뿐인데 이걸로 밥 벌어먹고 살기는 힘들지요. 조정에서도 몇 번 관직에 오르라고 사람이 찾아오기는 했지만, 한족이 만주족의 조정에 나가 일한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고-----."
연신 어색한 미소를 흘리며 말하는 신기서생을 바라보던 소구는 한숨을 흘리면서 면사로 얼굴을 가린 채 묵묵히 앉아 있는 누나 방수련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누나, 할 말 없어? 이런 자와 혼인을 할 생각은 아니겠지?"
정나미가 뚝뚝 떨어지는 말을 내뱉고 있는 신기서생을 바라보면서 방수련 역시 속으로 한숨이 나오고 있었지만 지금 청방과 백초당에는 눈앞에 있는 남자가 필요했다. 그녀는 손을 들어올려서 얼굴을 가리고 있는 면사를 벗어서 무릎 위에 올려놓고 신기서생을 바라보았다.
드러난 방수련의 얼굴을 본 순간 신기서생의 얼굴은 갑자기 붉게 달아올랐다.
"제 얼굴이 마음에 드나요?"
한눈에 반한다는 것은 이런 경우일 것이다. 도저히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아름다운 얼굴에 흘러나오는 목소리 또한 황홀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온 몸이 녹아나는 기분을 만끽하는 신기서생의 귀에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 얼굴이 당신이 정한 미의 기준에서 벗어나나요?"
"통과!"
"제 성격이 어떤지 알지 못하는데?"
"통과!"
"재력에 대해----."
"통과!"
"저의 가문은---."
"통과!"
"제가 가진 능력에 대해----."
"통과! 모두 통과요! 내 일생에 걸쳐 당신 같이 아름다운 여자는 본 적이 없소!"
신기서생은 흥분해서 소리쳤다.
"제 나이에 대해서 알려--."
"그것도 통과! 모두 통과요! 당신 같이 아름다운 여자라면 내 일생을 걸겠소! 당신이 원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지 하겠소! 그러니 제발 나와 혼인해 주시오!"
다른 것은 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 신기서생은 오로지 방수련의 미모 하나에 완전히 맛이 가서 자신이 내세운 신부감의 조건을 모두 통과라고 소리치면서 구혼하고, 그 광경을 보는 소구는 불쌍하다는 눈으로 신기서생을 바라보았다.
'쯔쯔, 콩깍지가 씌워도 단단히 씌었군.'
소구는 그런 신기서생을 바라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천하제일미녀라 불리던 누나였으니 아름다운 것은 당연한 것이었지만, 성격은----. 모르긴 몰라도 저 신기서생이라는 자는 평생 누나에게 쥐여살게 될게 틀림없었다.
어찌되었건 이번 낙양에서의 일은 잘 처리된 셈이었다. 신기서생이라는 뛰어난 지략가를 청방에 끌어들이는 일이 성공한 것이다.
낙양의 북쪽에는 기녀원들이 늘어선 건물이 있었고 그 중 군방원이라 불리는 기원(妓院)의 한 내실에는 내상을 입고 누워 있는 한 남자가 머물고 있었다.
"왕 형, 상처는 좀 어떻소?"
"견딜 만 하오."
전 개방의 제자 왕질악은 침상에서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청방의 전력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무섭소. 방씨 일가의 형제들 중 현재 청방의 방주로 있는 방종구는 무공은 없지만 그 머리와 냉혹한 마음이 무섭고---, 나머지 세 형제들 또한 무공이 가히 상상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른 자들이오. 암습은 불가능하오."
"그러게 내가 말하지 않았소?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십년이라는 세월 동안 가장 무공이 낮다고 알려져 있던 방수련 역시 변해 있을 것이라는 건 당연한 일 아니오?"
"희생은 좀 있었지만 방수련의 실력을 알게 되어서 다행한 일이오. 우리 운룡회가 살아 남으려면 상대방의 전력을 잘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소?"
왕질악은 침상 옆에 서 있는 혈룡 악종진을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칠호는 모습을 감춘 상태요. 칠호가 부를 때까지는 조용히 은신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왕질악의 질문에 악종진은 되물었다. 지금은 그들의 우두머린 칠호의 명령대로 가만히 숨어 있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는 그였다.
"넋 놓고 기다리다 앉아 죽으란 말이오? 청방의 무리들이 계속 우리에 대해 찾고 있소. 이 군방원도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청방의 정보망에 걸려들 거요. 그전에 방법을 찾아야 하오."
"그 이야기는 다음 달에 있을 군산에서의 운룡지회에서 이야기합시다."
칠호가 떠난 지금 운룡회에서 가장 강한 고수는 혈룡 악종진이었지만 악종진은 청방과 싸울 생각을 안하고 있었다. 왕질악은 한숨을 내쉬면서 침상에서 일어서서 악종진의 얼굴을 마주보며 물었다.
"이대로 그 여자와 지략의 천재인 신기서생이 청방으로 돌아가게 할 생각이오?"
"어쩔 수 없소. 우리에게 그들을 이길 힘이라도 있단 말이오? 섣불리 덤벼 들었다간 희생만 늘어날 뿐이니---."
"난 이대로 군산으로 떠날 테니, 다음 달에 군산에서 봅시다."
"다음 달에 봅시다."
아직 동이 트기도 전인 새벽에 왕질악은 낙양에서 떠나가고, 피에 절은 용 그래서 혈룡이라 불렸던 악종진은 자신의 처소에서 꼼짝을 안하고 생각에 잠겼다.
운룡회에 가입하면서 얻은 것도 많았지만 잃은 것도 많은 상태였다.
"그자들은 무인이 아니다. 음모를 꾸미는 일은 가능할지 몰라도 진재실학으로 맞서 싸울 용기는 없는 자들----, 이대로 운룡회에 계속 남아 있어야 할까?"
군방원이라는 기녀원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그와 그의 얼마 남지 않은 부하들은 충분히 여유 있는 생활을 할 수 있는 상태였다. 무림의 일에 개입하지 않는 다면 편안한 노후를 보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악종진이었기에 싸우기 싫은 상태였다.
악종진은 자신의 왼손 중지에 끼워져 있는 붉은 용이 새겨진 반지를 바라보았다.
"혈룡환(血龍環)---. 내가 운룡회의 혈룡임을 알려주는 증거--. 이것을 버린다면 내가 운룡이 아니게 될까? 이미 발을 빼기엔 너무 늦어 버린 것이겠지? 그리고 다른 자들은 모르겠지만 나에게 힘을 돌려준 칠호와의 의리를 생각한다면---."
고개를 돌려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린 악종진은 멀리 보이는 복우산의 봉우리를 바라보았다.
"지금은 참고 기다릴 때다. 지금은 청방을 건드릴 때가 아니야."
붉게 물든 해가 산 위로 떠오르는 모습을 보면서 혈룡 악종진은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그래서 낙양에 온 소구와 수련 남매 그리고 신기서생은 더 이상 운룡회의 암습을 받지 않고 낙양을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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