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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장 장원변고
밤.
어둠은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그림자처럼 주위를 물들여 가고 있었
다.
어둠에 잠긴 조가장의 대청에서는 환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대청 안에서는 조중화와 음적양이 긴밀한 의논을 계속하고 있었다.
음적양이 도도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조 장주, 아마 조만간에 성심장의 놈들이 이곳을 습격할지 모르오.
그러니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으시오."
조중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부총호법께서는 언제쯤 총단으로 가실 생각이십
니까?"
"원래는 어제쯤 떠날 생각이었는데 아직 총단에서 돌아오라는 연락이
오지 않아 망설이고 있소. 하나 이곳의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총단으
로 떠날 예정이오."
이때 손지유가 두 손에 찻쟁반을 받쳐 들고 들어왔다.
손지유는 찻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 조용히 말했다.
"부총호법님, 차 드세요."
음적앙은 사의를 표하고 기이한 눈빛으로 손지유를 응시했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다가 시선이 마주친 손지유는 금세 얼굴을 붉히더
니 고개를 한쪽으로 숙이며 황망히 밖으로 나갔다.
음적양은 그녀의 미색에 마음이 크게 움직여 침을 꿀꺽 삼키며
조중화에게 나직이 물었다.
"지금 그 낭자의 방명은 어찌 되오?"
"손지유라고 하는데 폐장에서는 모두 유아라고 부르지요."
"지유라…… 참으로 아름답고 우아한 이름이군요. 나는 본시 여색
을 과히 즐기는 사람은 아닌데 웬일인지 마음이 끌리는군요."
그가 입술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하자 조중화는 가볍게 헛기
침을 했다.
"유아는 어려서부터 폐장에서 성장하여 집사람이 친딸처럼 여기고 있
는데 그 성격이 괄괄해서 몹시 다루기가……"
음적양은 손을 내저으며 말문을 가로막았다.
"조 장주가 허락만 하신다면 그녀로 하여금 내게 진심으로 복종토록
설득시킬 자신이 있소이다."
조중화는 잠시 망설였으나 상대가 부총호법인지라 감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부총호법께서 그애를 거두신다면 그건 정말 큰 복입니다. 대사가 이
루어지도록 힘써 보겠습니다."
음적양은 고개를 흔들었다.
"조 장주가 수고할 것이 아니라 내가 직접 그녀를 만나 얘기를 나누
어 보겠소이다. 그녀의 방이 어디지요?"
"오운각입니다."
음적양은 지체하지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곧 밖으로 나갔
다.
조중화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바깥쪽을 응시하다가 혼자 무어라
중얼거리면서 내실로 향했다.
오운각으로 돌아온 손지유는 미간을 기분이 나쁜 듯 잔뜩 찌푸리면서
깊은 생각에 잠겨들었다.
이때 돌연 오운각 밖 버들가지가 휘휘 늘어진 곳에서 노랫소리가 바
람을 타고 유유히 들려 왔다.
"옷소매 은은히 바람결에 나부끼건만, 버들가지는 누각 위에 떠오른
달을 향해 춤을 추네. 부채에서 이는 바람 따라 방긋 웃는 복사꽃은,
지난 날에 술 취한 얼굴인 듯 붉기만 하네. 오늘밤은 은빛으로 비춰
주는 달빛을 만나, 꿈속에서라도 서로 만나 즐겨 보았으면……"
그것은 남녀간의 애정을 의미하는 노랫소리였다.
본시 어려서부터 서시와 노래를 즐긴 손지유는 이 노랫소리를
듣고서 금시 의미를 알아차리고 얼굴을 붉혔으나 그 음성이 음적양의
것임을 알고는 아미를 찡그리며 내심 중얼거렸다.
"아무리 회서방의 부총호법이라 해도 그따위 솜사탕 같은 노래로는
내 마음을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흥! 나 손지유를 값싼 여자로 알았
다면 큰 오산이다."
이때 노랫소리는 멎고 춘정에 몸부림치는 듯한 퉁소 소리가 은
은히 울려 퍼졌다.
퉁소소리에는 기이한 음공의 힘이 실려 있어 듣는 이의 마음을
울렁거리게 했다.
이내 퉁소 소리도 멎고 온유한 음성이 들려 왔다.
"손 낭자……!"
손지유는 고동치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다가 고개를 돌려 보니 자신
도 모르는 사이 음적양이 막 오운각 위로 올라서고 있었다.
"부총호법님……"
손지유가 떨리는 목소리로 먼저 입을 떼자 음적양은 하얀 이를 드러
내 보이며 싱긋 웃었다.
"낭자, 나는 전부터 낭자를 몹시 그리워하고 있었소. 진정으로 낭자
를 사모하오."
말은 이렇게 했지만 눈은 먹이를 노리는 야수의 눈빛처럼 무섭게 빛
나고 있었다.
손지유는 간담이 서늘해짐을 느끼며 나직이 말했다.
"부총호법께서 미천한 소녀를 그토록 아껴 주신다니 감당하기가 어렵
습니다."
"하핫…… 어려워할 것 없소. 자! 우리 자리를 함께하고 얘기나 나눕
시다."
두 사람은 오운각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함께했다.
손지유는 비록 겉으로는 태연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으나 음적양이 연
신 음탕한 눈초리로 자신의 전신을 쓸어보는 것을 느끼고 불안한 심
정에 가슴이 마구 뛰었다.
그때 손지유의 귓전으로 난데없는 전음성이 들려 왔다.
"낭자는 정신을 바짝 차리시오. 자칫 잘못했다간 뜻하지 않은 봉변을
당하게 될 것이오. 그러나 너무 완고하게 거절을 말로 적당히 응해
주는 척 하며 위기를 모면토록 하시오."
그녀는 내심 깜짝 놀랐다.
그 음성은 분명 용당운의 말소리였던 것이다.
손지유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마음을 가다듬은 뒤 고개를 숙이고 있
다가 일부러 수줍은 웃음을 머금었다.
"부총호법께선 진심으로 절 사랑하세요?"
음적양은 그녀의 음성이나 눈빛이 여전히 초롱한 것을 보고 내심 흠
칫했다.
'나의 섭혼소를 듣고도 까딱없는 것을 보니 정력이 예
사가 아니구나.'
음적양은 능글맞게도 친절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나는 본시 여색에 관심을 두는 성미가 아니오. 그런데 어찌 된 셈인
지 낭자를 보고는 마음이 완전히 끌리는구려. 이걸 보고 사람들은 천
생연분이라 하는 모양인데, 아무튼 낭자가 승낙만 한다면 나는 평생
낭자에게 사랑을 바치겠소."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이세요?"
"그렇소. 내가 만일 속에 없는 말을 했다면 필시 천벌을 면치 못할
것이오."
손지유는 내심 코웃음을 치면서도 겉으로는 교태 어린 음성으로 말했
다.
"저 같은 계집이 부총호법님을 모시게 된다는 것은 더없이 즐겁고 분
에 넘치는 일이에요. 그러나 저는 야합하는 것은 원치 않으니
부총호법께서는 정당하게 중매를 내세워 청혼을 해주세요."
음적양은 약간 난색을 띠다가 곧 말을 받았다.
"그야 당연한 일ol 아니겠소? 이번 임무를 마친 뒤에 조 장주를 중매
쟁이로 내세워 낭자를 예의로써 맞이하겠소."
"그 말씀 고마워요."
음적양은 짐짓 호탕스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핫…… 우리 한 쌍의 원앙이 되어 경치 좋은 총단에서 행복을 누
립시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 모두 우릴 부러워할 것이오:'
총단이라는 말에 손지유는 한 가지 생각이 퍼뜩 떠올라 넌지시 물어
보았다.
"회서방의 총단은 어디쯤 있지요?"
"이 다음에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니 너무 서둘지 마시오."
바로 그때였다.
"휘이이--익!"
저 멀리 성루쪽에서 고막을 울리는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들려 왔
다.
음적양은 금시 안색이 싹 달라졌다.
"학귀가 성심장의 도당들을 이끌고 다시 나타난 모양이군."
그는 손지유에게 고개를 까닥거리고는 부리나케 밖으로 뛰쳐 나갔다.
때는 대지에 어둠이 깔리고 중천에 달이 떠오른 밤이었다.
손지유는 그가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몸을 일으키면서 나직이
불렀다.
"용 은공……"
그러자 오운각 뒤에서 한줄기 인영이 소리없이 나타나 곧 손지유 앞
으로 다가왔다.
손지유는 그 인영이 바로 용당운임을 알아보고 의아스럽게 물었다.
"은공께선 순무부에 가셨다더니 언제 돌아오셨나요?"
용당운은 전에 없이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낭자는 현재 나쁜 길에 빠져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오. 나는 본시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무림의 정의가 말살되어 가
는 것을 차마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가 없기에 다시 되돌아온 것이
오."
손지유는 별빛처럼 반짝거리는 눈으로 용당운을 빤히 응시했다.
"은공은 자신의 무공을 짐작하고 계시나요?"
"그렇소. 하지만 과히 자랑할 만한 것은 못 되고 낭자처럼 겨우 자신
을 지킬 정도요."
용당운은 품속으로 손을 우겨 넣더니 한 알의 환약을 꺼내 손지유에
게 내밀었다.
"음적양은 술수가 많은 자이기 때문에 낭자가 순순히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필시 음독한 방법을 사용할 거요. 그러니 낭
자는 이 환약을 미리 복용하여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도록 하시오."
손지유는 고마운 마음으로 환약을 받아 삼킨 뒤 물었다.
"은공은 성심장 사람이세요?"
용당운은 코웃음을 치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어찌 패도불의한 성심장 무리들과 어울리겠소? 나는
무림이 회서방과 성심장에 의해 어지럽혀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이러는
것이니 낭자가 나를 좀 도와 주시오."
손지유는 굳은 표정을 지 었다.
"저는 이 몸이 으스러지는 한이 있러라도 은공의 은혜에 보답할 결심
이 서 있어요."
"고맙소."
이어 무슨 말을 하려다가 밖에서 경미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 오자 급
히 눈짓을 해보이고는 됫방으로 들어가 모습을 감추었다.
다음 순간 조중화의 음성이 들려 왔다.
"유아…… 안에 있느냐?"
"네, 저 여기 있어요."
손지유가 대답하며 얼른 문을 열어 주자 조중화가 표연히 안으로 들
어와 형형한 눈초리로 방안을 쓸어보았다.
손지유는 곧 그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부총호법께선 휘파람 소리를 듣고 급히 밖으로 나가셨어요."
"그건 노부도 알고 있다. 그런데 너는 방금 누구와 얘기를 나누고 있
었느냐?"
손지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으나 곧 기지를 발휘하여 대답했다.
"저 혼자 중얼거렸어요."
조중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서……?"
"부총호법께서 저와 장래를 함께하겠다는 제의를 하셨는데 결단을 내
리지 못해 곰곰이 생각하면서 중얼거린 거예요."
조중화는 그녀의 표정을 뚫어지게 살피다가 말했다.
"부총호법같이 지체가 높고 무공이 고강한 분은 구하려 해도 쉽지 않
은데 하물며 그쪽에서 먼저 의사를 비추어 오는데도 결단을 내리지
못한단 말이냐?"
"……"
조중화는 성큼 걸음을 옮겨 뒷방으로 들어갔다.
이 광경을 본 손지유의 가슴은 방망이질치듯 두근거렸다.
'뒷방에는 따로 나갈 만한 길이 없는데 이 일을 어쩌면 좋지……?'
마음이 다급해진 그녀는 바로 조중화의 뒤를 따라갔다.
뒷방으로 들어간 조중화는 화섭자에 불을 붙여 들고 방안을 살펴보았
다.
그러나 사람의 그림자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약간 의아해 하다가 오른손으로 가슴을 보호하면서 매우 조심스
럽게 옷장 문을 열어제쳤다.
그러나 그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처녀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옷가
지들뿐이었다.
이때 손지유가 안으로 들어오면서 약간 토라진 음성으로 입을 열었
다.
"장주님은 제가 이곳에 사람을 숨겨 두었다고 의심하세요?"
조중화는 자신의 추측이 빗나가자 매우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노부의 청각은 몹시 예민하여 십 장 밖에 나뭇잎이 떨어지고 꽃잎이
나는 소리도 들을 수 있다. 노부는 네가 누군가와 얘기하는 것을 분
명히 들은 것 같은데 참으로 이상도 하구나."
손지유는 내심 용당운이 어디로 숨었기에 보이지 않을까 신기하게 여
기면서도 짐짓 슬픈 듯이 눈물을 글썽거렸다.
"장주님은 저를 못 믿으시는군요. 전 오직 장주님만을 믿어 왔는데…
…"
조중화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휑하니 밖으로 나가 버렸다.
손지유는 퍼뜩 밖을 내다본 뒤 방안을 두리번거리다가 조용히 불렀
다.
"은공, 어디 계세요?"
하나 아무 대답도 들려 오지 않았다.
'이미 이곳에서 빠져 나가신 모양이구나. 그런데 어떤 수법으로 감쪽
같이 사라졌을까?'
손지유는 아리송한 기분이 되어 옷장 문을 닫으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으나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체 용당운은 어떻게 방안에서 사라진 것일까?
중천에 떠오른 달은 교교한 빛을 온 세상에 뿌리고 세상은 괴
괴한 적막 속에 잠겨 있었다.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듯한 심산의 수목들이 소슬하니
불어오는 밤바람에 괴이한 소리를 내면서 흔들리고, 이따금씩 들려
오는 풀벌레의 울음 소리가 적막을 깨뜨리며 대지를 뒤흔들고 있었
다.
삼경 무렵,
돌연 조가장 담장 밖에서 꽹과리 치는 소리가 소란스럽게 들려 왔다.
쨍……! 째쨍!
이 밤중에 무슨 꽹과리 소리란 말인가?
꽹과리의 여음이 채 가시기도 전에 무수한 인영들이 도광을 번
쩍이면서 속속들이 사면팔방으로 나타나더니 조가장을 침습할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어찌 된 셈인지 조가장 내에서는 지금까지 일체 아무런 반응
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건 또 무슨 일일까?
적이 대거 침습할 크나큰 위기가 눈앞에 박두했는데도 무사 태평이라
니……
바로 그때였다.
기괴한 형상으로 자라 있는 한 그루 나무 뒤에서 금의청년 하나가 홀
연히 모습을 나타냈다.
샛별같이 반짝이는 두 눈동자, 날카롭고 미끈한 콧날……
게다가 허리춤에는 호화스럽기 그지없는 금검을 차고 있어 한층 더
준수해 보이는 금의청년은 바로 금검공자 도옥린이었다.
도옥린은 주위를 훌어보면서 매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냉엄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학 대협, 조 노적이 혹시 철수해 버린 것은 아닐까요?"
그러자 한 인영이 유성처럼 날아와 그의 앞에 내려섰다.
그는 바로 권운도 학귀였다.
학귀는 침중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요즘 이틀 동안 조가장을 엄밀히 감시하고 있었는데 오늘 오후부터
회서방의 고수들이 줄을 지어 도착하더군. 이곳 주위에 우리의 천라
지망이 펼쳐져 있는 한 조중화는 절대 철수하지 못했을 것이네."
도옥린은 냉소를 날렷다.
"그렇다고 해서 경솔히 움직이다가는 도리어 우리가 역습을 당할 우
려가 있으니 각별히 조심해야 할 겁니다."
바로 그때 음침한 말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 왔다.
"흐흐…… 과연 그럴까? 귀장의 수하들은 이미 위험지경에 처
해있소. 만일 믿어지지 않거든 시험삼아 수하들을 일차 소집해 보시
오."
도옥린의 짙은 검미가 꿈틀거렸다
"흥! 누군지 말버룻이 상당히 건방지구려."
도옥린은 상대방의 위협적인 언사를 냉소로 일축하고 우장을 번개처
럼 내밀어 소리가 들려 온 쪽으로 강맹한 장력을 밀어 냈다.
꽝!
요란한 굉음 소리에 이어 소나무 한 그루가 흔들리며 나뭇잎이 우수
수 무수히 떨어져 내렸다.
"흐흐…… 왜나 성질이 급한 젊은이로군."
빈정대는 말소리가 또다시 들려 오며 바로 그 소나무 부근에서 인영
하나가 유유히 나타났다.
그는 조가장의 장주인 조중화였다.
"귀하의 무공은 대단하오. 그러나 함부로 움직이다가는 반드시 패하
는 법. 귀하는 이곳에서 마음대로 물러가지 못할 것이오."
말소리가 떨어지자마자 그 소나무 뒤에서 네 명의 청삼노인이 빠르게
뛰쳐 나왔다.
그들은 그대로 장검을 뽑으며 도옥린에게 덤벼들었다.
"흥! 가소롭군."
도옥린은 네 명의 청삼노인이 눈에 차지도 않른지 가볍게 코웃음치며
금검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바로 그때 학귀가 먼저 칼을 뽐아 앞으로 나서며 크게 소리쳤다.
"닭 잡는 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겠나? 이공자는 잠시 구경
하고 있게. 저자들은 내가 맡겠네."
학귀는 번개같이 앞으로 날아오며 칼을 휘둘렀다.
파파파팍!
예리한 소성과 함께 맹렬히 회전하는 칼 그림자의 소용돌이가 마치
바람개비처럼 네 청삼노인을 향해 쇄도해 갔다.
"훌륭한 도법이다!"
네 청삼노인은 동시에 소리치면서 기묘한 검초를 전개하여 민
첩한 동작으로 공방전을 시작했다.
학귀의 도법은 사실 훌릉하기보다는 독랄하고 기묘한 초식이 내포되
어 있었다.
쓱!
그가 한번 도를 휘두를 때마다 서릿발 같은 도기가 쭉쭉 뻗치면서 상
대방의 주요 대혈만을 노렸다. 이에 맞서는 청삼노인들은 순간적으로
기지를 발휘하여 적극적으로 맞서지 않고 상대방의 진기가 소모되기
를 기다려 일검에 승부를 결판 지으려는 전법을 쓰기 시작했다.
일 대 사의 대결.
학귀는 상대편이 일검을 쳐내는사이 연속적으로 사 도를 쳐
내야 했기 때문에 점차로 열세에 몰리는 기미를 보였다.
이 광경을 주시하고 있던 도옥린은 상대방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버럭
노성을 질렀다.
"손을 멈추시오!"
학귀는 고함소리를 듣고 바삐 신룡회미 일도를 펼쳐 달려
드는 네 줄기의 검홍을 방어하면서 뒤로 물러났다.
바로 그 순간,
"이얍!"
일갈이 터져 나오고 도옥린이 쾌속하게 청삼노인들에게 달려들며 금
검을 뽑아 기이하게 휘둘렀다.
파파파파……
주위가 온통 금광검에서 뿜어 나오는 금빛 검광 때문에 환해지며 싸
늘한 검기가 피어올랐다. 네 청삼노인은 상대의 검법이 거의 절정에
다다랐음을 깨닫고 사력을 다해 노도와 같은 기세로 반격을 가했다.
팍! 팍! 팍!
별안간 도옥린의 입에서 호쾌한 웃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크하하하하……!"
그와 함께 금광검에서 뿜어 나오는 검광이 더욱 강렬해졌다.
순간,
"크윽!"
"으음……!"
청삼노인들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이어 그들 중 두 사람이 오른팔이 싹뚝 잘린 채 그 자리에 쓰러져 버
렸고, 다른 두 사람은 장검을 놓쳐 버리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실로 무시무시한 검법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중화는 도옥린의 검법을 보자 가슴 한구석이 싸늘하게 식어 왔다.
'저자의 검법은 나와 비할 바가 아니구나. 게다가 수중에 들고 있는
검 또한 절세의 신검인 것 같으니……'
그 순간 조중화의 뒤에서 음랭한 말소리가 들렸다.
"내가 저들을 깨끗이 청소해 버리겠소."
조중화가 급히 뒤돌아보니 음적양이 막 몸을 냘려 도옥린에게 접근해
가고 있었다.
도옥린은 난데없이 나타난 음적양을 보자 얼굴을 굳히며 두 눈을 무
섭게 번뜩거렸다.
"네놈이 바로 회서방의 부총호법이라는 음적양이냐?"
음적양은 거만스럽게 고개를 까닥거렸다.
"그렇다. 금검을 가진 것을 보니 네가 바로 사대공자 중의 금검공자
도옥린이구나?"
"안목이 제법이군. 냉 사매는 지금 어디 있느냐?"
"냉상아가 네 사매냐? 그녀가 어디 있는지 본 공자가 어떻게 알겠느
냐?"
도옥린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네놈이 내 사매에게 흑심을 품고 몰래 암습해서 그녀를 납치
해 간 것을 알고 있다. 허튼수작 부리지 말고 어서 그녀를 순순히 내
놓아라."
"하하하하……!"
음적양은 앙천 대소를 터뜨린 후 경멸의 시선을 던지며 말을 꺼냈다.
"너야말로 허튼수작 부리지 마라. 본 공자는 그녀의 코빼기도 구경하
지 못했는데 무슨 개수작이냐? 괜히 쓸데없는 심기 부리지 말
고 나와 더불어 진정한 무공으로 승부를 가려 누가 진짜 사대공자의
자격이 있는지 확인해 보자!"
말과 동시에 그는 즉시 우장을 번개처럼 휘둘러 왔다.
꽈릉!
도옥린은 감히 방심하지 못하고 신중을 기해 우장으로 화산입정
초식을 펼쳐 냈다.
쌍방의 장력이 맞닥뜨려지는 순간,
꽝!
폭음 소리가 터져 나오며 장풍의 여파가 허공을 맴돌았다.
음적양이 신형을 약간 휘청거린 반면 도옥린은 뒤로 주춤 한걸음 물
러났다.
'장력으로 이놈과 맞서서는 안 되겠구나.'
안색이 조금 굳어진 도옥린은 급히 금검을 뽑아 들고 소리쳤다.
"네놈의 장력은 그런 대로 쓸 만하구나. 자, 그럼 이번에는 내 검을
받아 보아라!"
동시에 그는 금검으로 허의환영 일초를 펼쳐 냈다.
쐐쐐쐐쐐액!
천만 가닥의 검광이 고무줄처럼 늘어나며 음적양의 전신을 휘감아 왔
다.
"흥!"
음적양은 싸늘하게 코웃음치며 오른손 중지를 뻣뻣이 세워 삼
양신지를 발휘하여 도옥린의 미심혈을 쾌속하게
찔러갔다.
쐐액!
도옥린은 상대의 삼양신지가 자신의 엄밀한 검영을 뚫고 들어오자 흠
칫 놀라 급히 금광검을 양손으로 움켜잡으며 허공으로 몸을 솟구쳤
다.
팟!
삼양신지가 아슬아슬하게 그의 발 밑을 스치고 지나가는 순간,
우웅……
괴이한 음향과 함께 도옥린의 금광검에서 붉은색 노을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도옥린이 낙일검강을 끌어올린 것이다 그의 무공은 냉상아보다 고강
하여 그녀보다 훨씬 수월하게 낙일검을 운용하고 있었다.
음적양은 상대가 낙일검을 끌어올린 것을 보고 표정이 잔뜩 굳어진
채 자신도 음양수의 장공을 운용했다. 찰나 그의 양손은 각기 붉고
희게 물들어 있었다.
도옥린과 음적양은 각기 낙일검과 음양수를 끌어올린 채 서로 마주보
며 팽팽히 대치하고 있었다.
구경하고 있던 중인들은 두 절정고수가 강호무림의 최고 무학들을 펼
치려 하자 절로 긴장되고 초조해져 목에서 갈증이 날 지경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노려본 채 미동도 않고 서 있었다.
그들은 서로가 필승의 자신이 없어 아직 손을 쓰지 못하고 있
는 것이다.
그때 돌연 도옥린의 귓전으로 가느다란 전음성이 들려 왔다.
"귀하의 낙일검은 아직 절정에 이르지 않아 음적양의 음양수를 확실
하게 꺾는다는 보장이 없소. 그러니 귀하는 일단 물러났다가 기회를
보아 귀 사매를 구출하는 게 도리인 듯싶소."
도옥린은 그 음성이 일전에 금흥의 연자기에서 우연히 만났던 제백석
의 것임을 알고는 내심 깜짝 놀랐다.
'제백석은 대내의 인물인데 왜 이곳에 와 있는 것일까?'
그가 의아해 하고 있을 때 제백석의 전음이 다시 들려 왔다.
"나는 이무를 띠고 이 근처에 있는 완서 순무부에 들렀다가 마침 조
가장에서 무림인들이 싸움을 한다는 전갈을 받고 달려와 본 것이오.
이곳에서 다행이 도 형을 만났으나 나는 대내의 시위영반의 직책이
있는지라 공개적으로 도 형을 도와 주지 못하니 도 형이 양해하시
오."
그제서야 도옥린은 사정을 짐작하고 낙일검을 거두었다.
음적양은 돌연 도옥린이 낙일검강을 거두자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
보았다.
도옥린은 두 눈에 날카로운 신광을 번뜩이며 일 장 밖으로 물
러서더니 고개를 쳐들고 크게 웃어 젖혔다.
"으하핫…… 과연 음양공자의 무공은 보통이 아니군. 내 귀하의 무공
을 높이 사 특별히 양보하는 바이니 이틀 내에 냉 사매를 석방하도록
하시오."
이어 그는 잽싸게 몸을 튕겨 어둠 속으로 날아갔다.
학귀도 청아한 휘파람 소리를 내며 그 뒤를 따랐다.
학귀의 휘파람 소리가 사방으로 메아리쳐 가자 조가장 곳곳에서 검은
인영들이 속속 나타나며 담장 너머로 자취를 감추었다.
조중화는 해연히 놀라 중얼거렸다.
"이제 보니 그들은 이미 본 장의 구석구석에 숨어 있었구나. 그런데
어찌 본격적으로 싸우지 않고 물러간 것일까?"
음적양은 서서히 음양수를 거두며 음침하게 웃었다.
"도옥린과 몇 초를 겨루어 본 바 나와 막상막하의 실력을 지니고 있
으므로 승부를 예측하기 어렵소. 그가 이틀의 말미를 주고 물러간 것
은 그동안 성심장 내의 실력자들을 동원하여 나를 상대하려는 수작인
데 내가 그의 술책에 말려 들어갈 위인이 아니오. 아무튼 우리는 만
반의 준비를 하고서 그들이 다시 나타나기를 기다려 일거에 몰살시키
는 게 현명한 방법이오."
조중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부총호법의 요인요사는 귀신 같습니다. 그리고 무영
귀수 당력이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이미 성심장 무
리들의 독수에 당한 것 같군요."
음적양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오늘밤 도옥린이 당력에 대한 얘기를 일체 입 밖에 내지 않은 것으
로 보아 필시 무슨 곡절이 있는 듯하오. 조 장주는 재치있는 수하 몇
사람으로 하여금 성심장 수하 한 놈을 잡아 대령토록 하고 그자를 심
문해 내막을 알아보도록 하시오."
조중화는 대답하고 난 뒤 다시 물었다.
"부총호법은 유아를 만나 보셨습니까?"
음적양은 손지유의 얘기가 나오자 히죽 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매우 총명한 사람인지라 나더러 정당한 절차를 밟아 청혼을
해야만 응하겠다는 야무진 대답을 했소. 내가 그처림 현숙한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다면 마음이 흡족하겠소만 그녀를 그리는 마음이 불꽃
처럼 타올라……"
그는 여기서 말끝을 흐렸다.
조중화는 그가 손지유를 진정한 애정이 아닌 일시적인 욕정
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 슬며시 울분이 치밀어 오르며
역겨움이 일어났다.
그러나 내색치 않고 오히려 웃음을 머금었다.
"유아는 얼굴이 예쁠 뿐더러 정조가 서릿발 같고 성미가 괄괄
하여 부총호법의 다급한 생각은 일시에 이루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니 우선은 다른 미소녀를 택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음적양은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내겐 오직 그녀뿐이오. 내가 이미 예의로써 맞이하겠다고 약속을 했
는데 어찌 성사가 되지 않겠소?"
조중화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애는 부총호법에게 자신의 정조만 잃고 나중에는 헌신짝 같은 취
급을 받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것이오."
음적양은 자못 정색을 했다.
"명색이 일방의 부총호법이란 지위에 있는 내가 어찌 그같이 무분별
한 처사를 하겠소? 조 장주는 나를 믿지 못하시오?"
조중화는 민망스런 표정을 지어 보였다.
"천만에요. 제가 유아의 성미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노
파심에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하하…… 그것이 기우였다는 것을 곧 알게 될 것이오."
음적양은 가볍게 웃고는 몸을 튕겨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조중화는 그가 사라진 곳을 멍하니 보고 있다가 뜻 모를 한숨을 내쉬
며 몸을 돌렸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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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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