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면 우선 수염과 머리를 정돈하고 옷을 입은 다음 그날의 첫 업무를 시작한다. 전날 밤부터 도착해서 비서관들이 준비해 놓은 서류들을 읽고 결재하는 게 그의 첫 일과였다. 워낙 큰 제국이니 한시도 서류가 도착하지 않는 때는 없었다.
그 다음 일과는 가톨릭 국가의 국왕으로서 당연히 해야 될 일인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었다. 당대 사람들의 표현에 따르면 이 시간은 펠리페 2세가 "왕의 일을 하느님께 설명하는 시간"이었다. 그게 끝나면 오전 11시까지 대신들을 접견하거나 남은 서류를 결재했다.
다음은 점심 시간이다. 왕은 하루 두끼를 먹었는데, 대부분 혼자 먹었다. 밥을 먹고 나면 스페인 사람답게 시에스타(낮잠)를 즐겼다. 물론 그가 부려먹는 대신들은 이 시간에 못자고 일을 해야 했다. 하지만 펠리페 2세의 입장에서 이 낮잠은 필수였을 것이다. 이 시간이 지나면 그의 진짜 하루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오전 업무는 예고편에 불과했다.
왕이 일어나면 이제 본 게임이 시작되었다. 그때부터 온갖 서류가 홍수처럼 왕의 책상으로 몰려드는데, 대신들이 작성한 소견서들을 비롯해서 국정과 관련된 모든 문서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왕은 이것들을 모두 꼼꼼히 읽고 결정을 내린 뒤 그것을 작성해서 돌려보내야 했다. 왕의 오후 시간은 이렇게 모두 국정에 바쳐졌으며, 해가 져도 큰 변화 없이 계속되었다.
이 시점부터는 기계적인 일상이 깨지는 일도 종종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왕은 밤 9시까지 서류 작업을 하다가 저녁을 먹었는데, 물론 업무가 많으면 상황이 달라졌다. 끝도 없이 밀려드는 서류에 '더 이상 볼 시간도 기력도 없다'며 결국 두 손을 들고 나온 밤도 있었다. 그날 일에 대해 펠리페 2세는 참으로 인간적인 호소를 내뱉었다.
"지금 시간이 밤 열시가 넘었는데, 짐은 아직 저녁도 못 먹었단 말이오."
사실 최근 들어서 펠리페 2세 시대의 문서들이 대량으로 연구되어 왕의 인간적인 면모가 새롭게 발견된 것이지만, 펠리페 2세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편지를 통해 자신의 고충을 숨김없이 털어놓곤 했다. 몇 가지만 들어보자.
"이미 자정이 넘었는데, 이 업무가 나를 아주 죽이고 있다오. 무슨 뜻이냐면 밤마다 기진맥진한다는 뜻이오."
"내가 뭔가 빼먹은 게 있다면, 수면 부족 탓이라고 생각해 두시오."
"일이 너무 과중해서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지경이오."
"지금 새벽 한 시인데, 나 빼고 모두 자고 있소."
하루는 기껏 열심히 일해서 드디어 끝났다 싶었더니 막 새로운 서류들이 또 무더기로 배달되기도 했다.
하루는 기껏 열심히 일해서 드디어 끝났다 싶었더니 막 새로운 서류들이 또 무더기로 배달되기도 했다.
왕은 비서관에게 말했다.
"온종일 쉬지 않고 일했는데, 방금 또 수많은 서류가 도착했다. 이건 오늘 밤 안에 도저히 끝내지 못할 것 같구나. 도대체 이걸 써 보내는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군. 내가 돌이나 쇠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대놓고 말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내 피곤한 몰골을 보면 나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사람이라는 걸 다들 깨닫게 되겠지."
한번은 딸에게 이런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오늘도 온종일 읽고 쓰면서 보냈단다.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도 이미 밤 10시가 넘었는데, 무척 피곤하고 배가 고프구나."
어찌 되었건 이렇게 작업을 하다가 대체로 9시나 10시경에 비로소 저녁을 먹었다. 스트레스 탓인지 펠리페 2세는 상당히 많이 먹는 편이었다. 그러나 식단은 단조롭게 고기 위주였다. 점심과 저녁 모두, 대체로 구운 닭이나 튀긴 닭, 자고새, 혹은 사냥 고기 중 하나를 메인으로 고르고, 사슴고기나 소고기를 사이드로 먹었다. 여기에 수프와 빵을 곁들였다. 샐러드와 과일도 냈으나 주방 기록에 따르면 거의 손대지 않았다고 한다.
고기가 업무 스트레스를 이겨 내는 가장 큰 힘이 아니었나 싶기도 한데, 바티칸에 열심히 졸라댄 결과 펠리페 2세는 드디어 1585년에 사순 시기(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며 참회와 희생, 극기, 회개와 기도로써 부활 대축일을 준비하는 시기)에 고기를 먹어도 좋다는 허가를 교황으로부터 받아 내기에 이른다. 그 뒤로 펠리페 2세는 행복하게도 성 금요일만 빼고 매일 고기를 먹었다.
이렇게 저녁 식사가 끝나면, 다시 야간 업무에 복귀했다. 공식적으로는 밤 11시가 본인이 정해 놓은 하루 업무 종결 및 퇴근 시간이었으나, 앞서 보았듯 심각한 일이 있으면 자정을 넘어서 새벽까지 서류를 붙들고 있어야 하는 날들도 있었다. 그러나 촛불에 의지하여 심야까지 매일 업무를 봤으니 시력이 나빠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는데, 그가 남긴 수많은 문서의 필적은 세월이 갈수록 나빠진 시력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물론 그도 사람이니 때때로 집무실의 답답한 일상을 벗어나서 기분 전환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항상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다. 하루는 날씨 좋은 날 왕실의 가족들과 함께 소풍을 나간 일이 있었다. 경치 좋은 강가에서 모처럼 즐거운 하루가 펼쳐졌는데, 정작 펠리페 2세는 다들 잘 노는 동안 구석에 책상 펴놓고 서류 결재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나오며
펠리페 2세의 이러한 업무 스타일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 모든 일은 양면적이다. 나중에 기회가 있을 때 자세히 다뤄 보도록 하겠지만, 펠리페 2세의 이러한 통치는 어떤 면에서는 한계가 있었지만, 또 다른 면에서는 상당한 성과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어찌 되었건 그의 긴 재위 기간동안 상당히 초인적인 노력을 발휘하면서 살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펠리페 2세는 1598년, 상당히 오랜 43년의 재위 끝에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개인적으로 유럽사를 공부하면서 최대 미스테리 중 하나는, 긴 재위 기간에 걸친 과로와 일중독, 불규칙한 수면 시간, 철저한 육식 위주의 식생활이 특징이었던 이 양반이 70대까지 살았다는 점이다.
참고 서적
Geoffrey Parker, Imprudent King: A New Life of Philip II (New Haven, 2014).
william S. Maltby, The Rise and Fall of the Spanish Empire (Basingstoke, 2009).
첫댓글 열심히 일한 권력자 얘기가 나올 때마다 고통받을 전직 대통령(의 얼굴마담) 생각이 나네요
??? : 멀 힘들게 직접 다 하고 그러나 다 시키면 되지
아으닛 제발 조선인이면 고려 천자 까지 맙시더!
@Galleon 까다니요 ㅎㅎ 천자의 넓은 아량에 감복하며 쓴 글입니다 ㅎㅎ
모든 행정을 굳이 자기가 다 하려 했던 태도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스페인이 무슨 중국만큼 관료 시스템이 대단한 나라도 아니고, 혼자 다 하기엔 나라가 너무 컸죠
술담배를 안했나보다
옹정제 : ㅍ
세종: 8시에 일어나고도 근면하다고?
으아니 집이 곧 사무실인 사람에게 8시는 일찍 일어나는 것 아닌가요...???
갓종대황님을 본받았어야지...ㅉㅉ
삭제된 댓글 입니다.
군주조차 야근과 야자를 피할 수 없는 헬조선이 이상한거라구욧!ㅠ
신대륙에서 오는 서류들은 시한이 꽤지나서 결과만 올라왔던걸까요?
신대륙은 부왕령이랑 총독이 알아서...
@Veritas 아항~~역시..그럴거라고 생각은 했습니다만..
@루드비히 베크 하지만 부왕령들 경계가 명확하지않기때문에, 또 각 지역 법원들도 관할구역이 부왕령 기준이랑도 달라서 이래저래 유발되는 문제들을 최고지도자로서 조율해야하는 업무가 대표적인 신대륙업무로 있습니다.
관료제 발달로 향하는 과도기에 황제부터가 과로에 시달리는 사축의 삶을 살던 시절의 이야기... 이후로 관료제가 극히 발달하는 18세기 근방에 이르면 행정업무는 대부분 관료들에게 맡기고 왕은 시도때도 없이 무도회를 열면서 유력자들을 상대하느라 과로하기에 이릅니다. 관료제가 극도로 발달한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이미 황제가 유력자들을 상대하는 동안 관료들이 행정업무를 처리하는 선진적인 체제를 선보였지만...
결국 정치의 복잡성이 가중되면서 왕의 권한은 계속해서 제한되고, 그 영역을 아예 헌법에서 규정해버린다는 아이디어가 탄생하고, 나중에는 니가 전쟁을 하고 싶건 말건 여론이 원하면 해야 한다면서 1차대전으로 달리죠
중앙집권화가 되어갈수록 권력의 최고정점인 군주가 과로사로 몰리게 되는 현장인거군요.
이분이 "서류왕" 별명 가진 그분 맞죠?
넵 그렇습니다
우연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펠리페 2세의 행정가적 운영이 당대 스페인이 식민지를 통해 오스만을 제외하면 서방에서는 최고 전성기의 왕국으로 등극시켜줬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성향으로 훗날 저지대 지역 다 토해내고 무리한 원정으로 잉글랜드에게 패권까지 내준..
네덜에게 내줬지 잉글은 아직...
크으 과로만 안했으면 90살까지도 살았을 사람이네..
그래서 '높으신 분'에게는 사람을 제대로 골라서 적절하게 업무를 위임하는 능력이 필요하죠.
어디서 듣기로는 너무 사소한 것까지 본인이 처리하려하는 바람에 오히려 행정능률의 저하를 가져왔다는 말도 있더군요..
본인도 그 덕에 고생하고 행정능률 저하에 신하들이 업무에 대해 경험을 못 쌓으니..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