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가
사라져가는 매체라고? 천만의 말씀. 백여개 채널로 무장한 TV, 세상 구석구석 풍경을 한줌 남김없이 훑어내는 인터넷이 판쳐도, 라디오를 통해
전해 듣는 소리의 포근한 감성은 여전하다. 게다가 요즘은 TV·인터넷과 맞서겠다며 ‘엽기발랄’ 코드로 중무장한 DJ들이 잇따라 인기를 얻으며
라디오에서는 새로운 별들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추석 귀성·귀경길에서 더욱 그 빛을 발하는 라디오. 기상천외한 재담과 당혹스러울 정도의
솔직함으로 폭넓은 청취층을 확보하고 있는 스타 DJ들, 추석을 맞아 어떤 즐거움을 전파에 실어 보내려 하고 있을까?
▲
정선희 | |
재치 번뜩이는 수다쟁이 옆집
언니
정선희의 정오의 희망곡(91.9㎒)
“뻔하지 않은 느낌이 제일 중요하죠. 늘 삐걱거리더라도요. 억울한 일 당했다는 사연이라도 오면 ‘아니, 이런 몹쓸~’하며 같이 흥분하기
일쑤니까 청취자들이 제 얼굴을 마주 대하며 이야기 나누는 듯하다는 말을 많이 해요.”
TV에서도 번뜩이는 재치로 돋보이는 그녀. 하지만 따뜻한 내면도 함께 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려면 그의 라디오에 접속해봐야 한다. 그는
“세월이 흐를수록 사람들이 즐길 거리는 많아지고 있지만 근본적인 외로움은 더욱 깊어지는 것 같다”며 “라디오는 그런 외로움을 달래주고 혹시
최악의 선택을 하려는 사람에게 어쩌면 마지막 희망의 끈을 내려주는 그런 매체 아니겠냐?”고 했다.
추석을 맞는 그의 각오는 야무졌다. “꽉 막힌 차량 행렬 속에 청취자들은 답답할 수밖에 없죠. 그럴 때 라디오는 복잡하게 생각하거나
곱씹어볼 필요 없이 즉각 웃음을 터뜨릴 수 있는 이야기를 들려줘야 해요. 또 저라면 마치 귀성길 자가용 속 풍경을 보고 있는 것처럼 제 상상을
부풀려서 이야기 하려고 해요. ‘아이고 저기 부부싸움 하고 계시네’ 처럼요. 노래는 거북이나 크라잉넛 처럼 신나는 팀의 것이 좋겠죠.”
“라디오 진행하면서 추석에 얽힌 가슴 찡한 기억이 있냐?”고 묻자, ‘절반’의 정답을 들려준다. 추석과는 상관 없었지만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10분간 펑펑 울었던 경험을 털어놓았다. “제 방송을 녹음해서 듣고 다니는 나이 지긋한 택시 기사님이 있다는 사연이었어요. 그런데 알고 봤더니
그 분 막내 딸이 최근 세상을 떠났는데, 제 목소리가 딸과 비슷해서 힘들 때마다 듣는다고 하시더군요. 순간 머릿 속이 하얘지면서 아무 생각이 안
났어요. 이후로는 그 어르신을 떠올리며 무엇이든 한번 더 생각해보고 말하게 됐어요.”
▲
김구라 | |
야성으로 승부하는 DJ
김구라의 가요광장(89.1㎒)
김구라는 인터넷, 케이블 등을 무대로 이른바 ‘언더그라운드’ 개그맨 생활을 오래 했다. 그래서 라디오 진행에도 보통 사람의 정서를 잘
살린다는 평가를 듣는다. “이런 저런 복잡한 생각 없이 할 말은 하는 솔직함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추석에는 어떤 방송을 들려줄까? 그는 “아무래도 음악 위주의 방송이 될 것 같다. 부활의 서정적인 발라드 ‘네버 엔딩 스토리’는 꼭
들려주고 싶다”고 했다.
“13년 무명 시절 동안 명절 때 만큼 서러운 시기가 없었다”는 그는 “‘연예인이라면서 왜 방송에서 안 보이냐?’는 친척들의 말에 가슴이
쓰라렸다”고 했다. “그 흔한 명절용 선물세트 하나 받지 못하던 시절이었죠.”
“가족끼리 함께 차 타고 가면서 싸우시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지 마세요. 어차피 막히는 길인데 아예 체념하는 게 상책이죠. 막힌다고 갓길
타는 건 더욱 금물입니다.”
▲
컬투 | |
대본이 필요 없는 통쾌한 입담
컬투의 2시탈출(107.7㎒)
매일 스튜디오에 방청객 30여명을 모아놓고 현장에서 반응을 확인하는 독특한 진행. 그날 기분이 안 좋으면 투덜거리며 뚱하게 말하는 DJ.
라디오에 대한 상식을 통째로 뒤엎는 이런 ‘행태’에도 청취자 반응은 뜨겁기만 하다. 컬투의 솔직하고 통쾌한 입담에 이 프로그램은 SBS
라디오에서 청취율 선두를 다투고 있다.
“우리는 대본이 없어요. 생각하는 그대로, 귀찮으면 귀찮은 대로 힘들면 힘든 대로 가식이라고는 전혀 붙이지 않는 게 최고의
매력이죠.”(정찬우)
“청취자들 눈높이와 정확히 일치하는 DJ라고 할 수 있죠. 사람들은 ‘얘네 뭐야? 자기들 멋대로 말하네’라고 기가 차 하면서도 폭소를
터뜨리곤 해요.”(김태균)
데뷔하고 13년째 추석 때 제대로 쉬어본 적이 없다는 두 사람.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저 때문에 즐거운 사람들이 있는데 어떻게
쉬겠어요?”(정찬우)
두 사람은 이번 연휴 기간, 고향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려줄 생각이다. 정찬우는 “추석때 혹시 못 내려가면 1~2주일 먼저라도 자식들을
데리고 반드시 성묘를 다녀온다”며 “조상을, 근본을 알아야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제가 6살 때 쯤일 거에요. 작고하신 아버지가 추석에 저랑 형을 고향에 데리고 내려가 동네 사람들과 잔치를 벌이셨던 기억이 아련해요.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져서 즐거워하는 그 풍경은 지금 생각해도 아름답죠.” 김태균은 “명절일수록 어려운 사람들 안타까운 사연도 많이 소개하고
싶은데, 프로그램 성격이 워낙 튀어서 쉽지 않다”고 했다.
▲
박명수 | |
청취자도 잘못하면 호통치는
개그
박명수의 펀펀 라디오(91.9㎒)
“요즘은 DJ의 캐릭터가 중요한 세상이죠. 저도 호통개그로 캐릭터를 만들었잖아요. 청취자도 성의 없이 제 방송에 참여하면 호통 들어야
돼요. 야야야~, 이번 추석 때는 질서 안 지키고 까부는 이기주의 청취자는 나한테 혼나.”
‘제8의 전성기’가 갈수록 위력을 더해가는 개그맨 박명수. TV 출연하랴 ‘닭집’ 운영하랴 정신 없을 그가 매일 라디오까지 진행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놀랍다. 게다가 숱한 마니아까지 양산하고 있으니. 항상 산만해 보이는 그이지만 라디오에 대한 철학을 묻자 또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라디오는 아무래도 있는 사람 보다는 없는 사람이 많이 듣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힘들고 어려운 사람을 위해 따스함을 전해야 한다”고 했다.
“타워팰리스에 사는 사람? 라디오 안 들어요.”
그는 “인간냄새가 물씬 나는 라디오를 정말 사랑한다. 펀펀 라디오 청취자들은 TV 속 박명수 뿐 아니라 저의 어제와 오늘을 모두
기억한다”고 했다. 추석에는 어떤 음악을 들려줄까? “아무래도 경쾌한 유로 댄스 위주로 갈 것 같다”며 웃는다. 그렇다면 본인 노래도? “그건
절대 아니다”라며 정색한다.
“이번 추석에는 청취자들의 참여를 많이 유도하려고 해요. 명절에 대한 서로의 생각을 교환할 수 있게요. 물론 잠이 확 깨는 격한 제 특유의
격한 진행은 계속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