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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작은덕골 원문보기 글쓴이: 작은덕골(금동 떡갈봉밑)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큰 전쟁을 치르면서도 500년의 역사를 굳건히 유지했던 조선도 19세기 말 그 운명을 다했다. 조선은 정조의 죽음 이후 60년간 이어진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의 세도정치로 생긴 폐해가 극에 달해 있었다. 전국적으로 민란이 일어났고, 게다가 물밀듯이 밀려오는 외세의 압력까지 더해져 조선은 그야말로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위기에 놓였다. 바로 이 시기에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으로서 난세를 이끌어 가고자 했던 인물이 김홍집(金弘集)이다.
김홍집의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굉집(宏集), 자는 경능(敬能), 호는 도원(道園)이다. 숙종의 장인인 김주신(金柱臣)의 5대손으로 아버지는 대사헌을 지낸 김영작(金永爵), 어머니는 성혼(成渾)의 자손이다. 한마디로 명망 있는 가문이었다.
1867년(고종 4) 경과정시(慶科庭試)에 급제하고, 1868년(고종 5) 승정원 사변가주서(事變假注書)에 임명되면서 벼슬길에 나갔다. 그가 본격적으로 조정에서 활약하기 시작한 것은 1880년(고종 17) 제2차 수신사로 일본을 방문하면서부터이다. 이때부터 그는 개화정책을 추진하며 조선 외교의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게 되었다.
1884년(고종 21)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를 중심으로 한 급진개화파들이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켰으나 사흘 만에 실패로 돌아갔다. 이때 김홍집은 그 뒷수습을 맡으면서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일본의 조선 침략 계기가 된 한성조약(漢城條約) 체결을 주도적으로 이끄는 우를 범했다. 이에 책임을 느낀 김홍집은 한동안 조정의 핵심 관직에서 물러나 있었다. 그러다가 1894년(고종 31) 갑오농민전쟁과 청일전쟁이 연이어 일어나며 명성왕후 민씨가 실각하고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다시 정권을 잡게 되었을 때 중앙 정계로 돌아왔다. 그는 영의정 겸 군국기무처 총재관이 되어 갑오개혁을 주도했다. 이때부터 영의정 대신 총리대신으로서 내각을 이끌었다.
1863년(고종 즉위년) 12월,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둘째 아들 명복(命福)이 왕위에 올라 고종이 되었다. 철종이 후사 없이 죽자 종친 중에서 왕위를 계승하게 한 것이다. 이로써 60년에 걸친 세도정치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고종은 힘이 없는 왕이었다. 그의 재위 기간 내내 안으로는 아버지 흥선대원군과 명성왕후 민씨 일가가 권력 다툼을 했고, 밖으로는 열강의 침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고종의 즉위 초기에 권력을 장악한 흥선대원군은 세도정치 혁파, 조세제도 개혁, 서원 철폐 등 왕권을 강화하는 개혁정치를 실시했다. 또한 민생 안정책으로 흥선대원군 초기 집권 10년 동안 민심도 어느 정도 수습되고 국가재정도 튼튼해졌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은 쇄국정책을 고수함으로써 빠르게 변화하는 세계 정세에 둔감하게 반응했고 그 때문에 조선은 열강의 침략에 무기력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그런데 이때 흥선대원군을 견제하는 세력이 나타났다. 명성왕후 민씨 일가였다. 원래 흥선대원군은 안동 김씨의 세력을 견제할 목적으로 별 볼일 없는 집안의 민씨를 왕비의 자리에 앉혔다. 그러나 민씨가 왕비가 되고 그의 인척들이 주요 관직에 진출하기 시작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그들은 반(反) 흥선대원군 세력을 모아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흥선대원군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흥선대원군의 생각과 달리 성장할 수 있었던 데는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 친정을 하고 싶었던 고종의 의중도 어느 정도 작용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아버지인 흥선대원군과 며느리인 민씨의 사이가 나빴던 것도 두 세력이 다투게 된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결국 고종이 친정을 시작하면서 민씨 세력은 고종의 신임을 바탕으로 흥선대원군을 몰아내고 권력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흥선대원군을 몰아낸 민씨 세력은 적극적인 개화정책을 펼쳤다. 그런 분위기에서 1876년(고종 13) 호시탐탐 침략의 기회를 엿보던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게 되었다. 그런데 그 내용은 일본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불평등조약이었다. 이는 당시 조선이 외교적으로 얼마나 무능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일본은 강화도조약을 빌미로 조선에 대한 침략 의도를 점차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일본은 부산항과 원산항에 이어 인천항까지 개항할 것을 요구했고, 이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온 나라에 들끓었다. 강화도조약을 주도한 민씨 세력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결국 인천항 개항을 늦추고 조약의 내용을 개정해야겠다는 생각에 김홍집이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되었다.
1880년(고종 17) 당시 예조 참의였던 김홍집은 58명의 수행원과 함께 조약 재협상의 임무를 띠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국제 외교 무대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일본은 김홍집을 비롯한 수신사 일행을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김홍집은 그런 환대에 현혹되지 않고 강화도조약, 즉 ‘한일통상수호조약’의 불평등한 내용을 개정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일본은 재협상에 응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본국으로 돌아왔다.
일본에 머무는 동안 김홍집은 개화 이후 빠르게 발전한 일본의 신문물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청나라 외교관 황준헌(黃遵憲)이 쓴 《사의조선책략(私擬朝鮮策略)》이라는 서적을 가지고 왔다. 이 서적은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대비해 조선, 일본, 청나라가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조선이 개화정책을 추진해 나가는 데 있어 중요한 지침이 될 만한 내용이었다.
조정에 이 내용이 전해지자 특히 반가워한 사람은 명성왕후를 비롯한 민씨 일파였다. 그들은 강화도조약 이후 궁지에 몰려 있던 자신들의 외교정책이 나아갈 방향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의조선책략》을 인쇄해 널리 보급했다. 또한 김홍집을 예조 참판의 자리에 앉히고 외교 실무 책임을 맡겼다.
그러나 이 일은 민씨 세력의 기대와는 달리 곧바로 조선을 혼란에 빠뜨리고 말았다. 급진개화파들은 《사의조선책략》의 내용을 적극 지지하고 나선 반면 위정척사파들은 더욱 극렬하게 개화운동을 반대한 것이다. 결국 개화파와 위정척사파의 대립만 더욱 가중시킨 결과가 되었다.
위정척사파들은 김홍집을 탄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영남 지방의 유생들이 올린 이른바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에서는 “수신사 김홍집이 가져온 황준헌의 《사의조선책략》이 유포되는 것을 보고 저절로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쓸개가 흔들리며 통곡하고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이 일로 김홍집은 사직소를 수차례 올렸다. 이 상소에는 《사의조선책략》을 가지고 들어온 경위를 밝힌 내용도 들어 있다.
다만 객관(客館)에 머물러 있을 때 중국 공사(公使)와 자주 만나 천하의 대세를 논하고 다른 나라 사람들이 능멸하고 핍박하는 것을 개탄했는데, 손발은 서로 구원하기에 급급했고 말은 기탄없이 털어 놓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안으로는 정사를 닦고 밖으로는 외적을 물리치는 방도에 마음을 쓰며 지키고 요사스러운 것을 배척하는 의리를 한결같이 주장했습니다. 토론하는 것으로 부족해 대책을 강구하기까지 했는데, 무릇 그 수천 마디나 되는 글은 일조일석(一朝一夕)에 마련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떠나기 전날에야 만나서 신에게 직접 전해줬습니다. 그 마음 쓰는 것이 몹시 절실했고 계책한 것이 상세하고 주밀했으니, 어찌 과장되고 허황된 자가 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일은 영토에 관계되는 것이었고 말은 조정에서 취할 만하기에 신이 감히 사적으로 물리치지 않고 받아왔던 것입니다.《고종실록》 권17, 고종 17년 10월 3일
김홍집은 이 일로 한동안 관직에서 물러나 있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김홍집은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의 통상사당상(通商司堂上)으로 다시 기용되었다. 당장 급한 외교 실무를 담당할 적임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통리기무아문은 1880년에 설치된 관청으로, 개항 후의 대외 통상에 대응해 국가의 외교와 군사제도 등을 근대적으로 개혁하기 위한 업무를 관장하고 있었다. 김홍집은 1882년(고종 19) 조선이 미국, 영국, 독일 등과 수호조약을 체결할 때 전권대신들의 부사(副使)로 협상에 참여해 실무를 담당했다. 이로써 흥선대원군의 집권 기간 내내 단단히 잠겨 있던 조선 개화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되었다. 자의든 타의든 김홍집은 개화의 선봉에 서 있었다.
1882년 6월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났다. 무위영 소속 5군영 군병들이 일으킨 폭동에서 출발한 민란이었다. 5군영은 구(舊) 훈련도감 소속의 구식 군대로 새로 설치된 신식 부대와 자신들을 차별하는 민씨 정권에 불만이 많았다. 그러던 차에 오랫동안 체불된 급료를 겨와 모래가 섞인 쌀로 지급하려고 하자 이에 격분해 폭동을 일으켰다. 여기에 도성의 일부 하층민들이 가세하면서 대규모 민란으로 확대되었다.
군란 세력은 선혜청의 당상 민겸호(閔謙鎬)를 비롯해 민씨 정권의 주요 인사들을 처단하고,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정작 개화 세력의 핵심인 민씨와 일본 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를 붙잡는 데는 실패했다. 당시 민씨는 홍기훈의 도움으로 충주에 있는 척신 민응식(閔應植)의 집으로 피란을 갔고, 하나부사 역시 급히 일본으로 몸을 피했다.
고종은 할 수 없이 흥선대원군을 불러들여 사태를 수습시켰다. 흥선대원군은 즉시 삼군부 부활, 통리기무아문 혁파, 민씨 세력 척결을 선언하고, 이에 더해 행방이 묘연한 민씨의 장례까지 선포했다. 하지만 이미 조선을 둘러싼 국제 정세는 흥선대원군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급변하고 있었다. 당장 일본으로 피신했던 하나부사 공사가 강화도로 군함을 이끌고 와서 임오군란으로 인한 피해를 보상하라고 요구했다.
흥선대원군은 외교 실무 경험이 풍부한 김홍집을 불러 협상을 주도하게 했다. 개화를 이끌었던 김홍집이 흥선대원군의 마음에 들 리가 없었지만 김홍집 외에는 일을 맡아서 처리할 인물이 없었다. 김홍집은 전권대신 이유원(李裕元)의 부관 자격으로 일본과의 협상에 임해 제물포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이 역시 불평등조약으로 일본의 횡포는 더욱 심해졌다.
한편 피신해 있던 민씨는 다시 정권을 되찾기 위해 청나라군과 몰래 내통했다. 흥선대원군은 청군에 납치되었고, 민씨는 다시 정권을 잡았다. 민씨는 이번에도 김홍집에게 뒷수습을 맡겼다. 그는 진주사(陳奏使) 조영하(趙寧夏)의 부사로 청나라에 가서 흥선대원군의 석방을 교섭했다. 민씨의 요청으로 조선에 들어올 명분을 얻은 청나라는 군란을 제압한 후에도 군을 철수시키지 않고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려고 들었다. 특히 그들은 개화정책을 추진하던 개화파들을 탄압했다. 민씨는 조정이 청나라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데도 수수방관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洪英植), 서광범(徐光範) 등이 주축이 된 급진개화파들은 1884년(고종 21) 12월 정변을 일으켰다. 이것이 바로 갑신정변이다. 조선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청나라를 견제하려는 일본 공사관의 지원으로 이루어진 쿠데타였다. 그러나 김홍집은 같은 개화파였지만 정변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개화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조정을 대표해 열강과의 대외 교섭에 앞장섰지만 혁명적 실천에는 미온적인 온건개화파였다.
갑신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급진개화파들은 청군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실각했다. 그리고 김홍집은 다시 한 번 그 뒷수습을 맡았다. 조정은 불안하고 민심은 흉흉한 가운데 어려운 임무를 맡게 된 것이다. 그는 이때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까지 올랐다. 한편 일본은 적반하장으로 갑신정변의 피해를 보상할 것을 요구했다. 김홍집은 전권대신으로 일본과의 보상 협상을 진행했고, 그 결과 1885년 1월 한성조약을 체결했다. 한성조약은 그야말로 일본에게만 유리한 조약이었다. 이 일에 책임을 느낀 김홍집은 좌의정 자리에서 물러났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났다. 이는 동학(東學)의 농민들이 일으킨 전국적 규모의 민란이었다. 갑신정변 이후 청나라의 비호를 받으며 정권을 유지해 온 민씨 세력은 자신들의 안위에만 신경 쓸 뿐 국가의 재정 확충이나 민생 안정에는 무관심했다. 그 결과 백성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다. 일본의 경제 침투는 국내 경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고, 극심한 흉년과 지방 관리들의 가렴주구(苛斂誅求)가 더해지면서 백성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이에 동학이라는 종교를 중심으로 세력을 규합한 농민 집단이 대규모 민란을 일으킨 것이다.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 데 실패한 고종과 민씨 세력은 청나라에 군을 파견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것은 일본군의 조선 개입을 허용하는 결과를 낳았다. 갑신정변 이후 청과 일본은 톈진조약(天津條約)을 맺었다. 그 내용 중에는 청군이 조선에 들어올 경우 일본도 군대를 파견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이렇게 조선 땅에 합법적으로 군사를 이끌고 입성한 청과 일본은 동학농민군이 자진 해산한 후에도 철수하지 않았다. 서로 조선에 대해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다투던 이들의 견제는 곧 청일전쟁으로 이어졌다. 제 나라 백성을 진압하기 위해 외세를 끌어들임으로써 조선을 외세의 전쟁터로 내주게 된 것이다.
청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군은 조선의 내정 개혁을 주장했다. 그러나 민씨 세력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일본은 당시 동학농민군의 지지를 받고 있던 흥선대원군을 끌어들여 민씨 세력을 몰아냈다. 그리고 1894년 7월, 군국기무처를 설치하고 김홍집을 영의정으로 임명했다.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이 된 김홍집은 박정양(朴定陽), 김윤식(金允植), 유길준(兪吉濬) 등과 함께 개혁 작업에 착수했다. 이것이 바로 갑오개혁이다. 갑오개혁은 비록 일본의 내정 간섭에 의해 주도되었지만, 조선 최초의 근대적 개혁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김홍집은 갑오개혁으로 개편된 관제에 따라 영의정에서 최초의 총리대신이 되었으며, 제1차 김홍집내각의 수반으로 개혁 작업을 추진해 나갔다.
한편 일본은 흥선대원군이 자신들의 의도대로 잘 따라 주지 않자 그를 다시 실각시켰다. 이때 김홍집은 흥선대원군의 편이 되어 적극적으로 그를 옹호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일본은 군국기무처를 해산하고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에 망명 중이던 박영효 등을 귀국시켜 김홍집-박영효 연립내각(제2차 김홍집내각)을 출범시켰다. 이들은 우리나라 최초의 헌법적 성격을 띤 〈홍범(洪範) 14조〉를 발표하는 등 개혁 작업을 계속 추진했다. 김홍집은 박영효와의 갈등으로 한때 사임했다가 박영효가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실각하자 다시 돌아왔다. 이때 구성된 제3차 김홍집내각에는 이범진(李範晉) 등의 친러파가 대거 참여했다.
흥선대원군의 실각 후 다시 정권을 잡을 기회를 노리던 민씨는 일본을 몰아내기 위해 러시아와 손을 잡았다. 그리고 3국 간섭을 이끌어내 일본을 압박했다. 3국 간섭이란 청일전쟁에서 승리해 요동 반도를 점령한 일본에게 러시아, 프랑스, 독일이 철수를 요구한 사건을 말한다. 이에 위기를 느낀 일본은 1895년 10월 경복궁에 난입해 민씨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리고 친러파를 몰아내고 제4차 김홍집내각을 출범시켰다. 이때 김홍집은 더 이상 내각의 수반을 맡을 수 없다고 간곡히 사절했다. 그러나 고종이 눈물을 흘리며 권해 어쩔 수 없이 맡게 되었다.
이듬해 2월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하게 되었다. 이는 김홍집 몰래 친러 세력의 주도하에 행해진 일이었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안 김홍집은 고종을 만나기 위해 급히 러시아 공사관으로 갔다. 그러나 이미 친러 세력의 손아귀에 들어간 고종에 의해 체포 명령이 내려진 후였다.
거리로 나선 김홍집은 광화문에 이르러 성난 군중에게 둘러싸였다. 민씨의 시해와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진행된 단발령으로 사나워진 민심에 친일 내각에 대한 분노가 더해져 사태는 통제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겁을 먹은 수행원들이 일본 군대가 있는 곳으로 피신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김홍집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는 조선의 총리대신이다. 다른 나라 군대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부지하느니 차라리 조선 백성의 손에 죽는 것이 떳떳하다. 그것이 천명(天命)이다.”
이 마지막 말을 남기고 김홍집은 죽음을 맞았다. 그의 비참한 최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다.
(조선인) 경관들이 김 총리를 경무청의 문 앞으로 끌어냈는데 인민들이 모여들어서 입추의 여지가 없음을 보자 칼을 뽑아 들고 인민들을 쫓아 버린 다음 김 총리를 차서 쓰러뜨리자마자 경관 수 명이 일제히 난도질해 가슴과 등을 내리쳤다. 시체의 다리 부분을 거친 새끼줄로 묶어 종로로 끌고 와 시신을 드러내 놓게 하고는 거기에다 ‘대역부도 김홍집’이라 크게 쓴 장지를 붙였다. 그러자 길에 가득 차 있던 보부상들이 시체를 향해 큰 돌을 던지기도 하고 발로도 짓이겨 시체에 온전한 곳이 한 군데도 없도록 만들었다.국사편찬위원회, 《주한일본공사관기록》 권9
참으로 참혹한 장면이다. 한 나라의 재상의 죽음이 이토록 처참할 수가 있을까.
그는 조선 말기 외세 침략의 구실이 된 여러 불평등조약을 체결할 때 실무를 담당했다. 또한 일본의 내정 개혁 요구에 따라 구성된 친일 내각의 수반이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그를 매국적인 친일파로 평가하는 것은 가혹하다. 당시 개화는 시대의 흐름이었다. 그러나 조정에서 권력 다툼을 하던 사람들 중 그 누구도 당당히 나서지 못했다. 그래도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할 외교적 실무가 있었고, 그것이 김홍집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온건개화파였던 김홍집은 민중 봉기와 외세의 내정 간섭, 그리고 개화파와 위정척사파가 혼재했던 혼란의 시기에 나라를 위해서 나름대로 제 역할을 다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그의 노력은 조선의 운명처럼 비참하게 끝을 맺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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