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은 전라남도 화순군 남면 검산리라는 산골이다. 광주에서 무등산을 잘라내는 너릿재를 구불구불 넘어서 군 소재지가 있는 화순읍내를 지나 동면을 지나가면 녹동, 벌교를 가는 버스 가는 방향으로 사평읍내가 나온다. 곽 재구시인이 읊은 ‘사평 역에서’를 읽으면서 언제 우리 고을에 기차역이 있었나를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떠오르지 않았는데 떠오를 리가 없는 기차역이었다. 애초부터 기차역은 없었으니까... 닷새만에 한 번씩 서는 사평장은 지금도 나머지 엿새 동안은 폐허처럼 숨을 죽이고 있다가 닷새가 돌아오면 여기저기서 닭 우는 소리며 엿 장수 가위질 소리로 살아난다.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던 꽃그늘 거리를 지나 자그마한 다리를 건너면 바로 장터이다. 이 장터를 지나 넓은 시냇가를 지나서 연꽃이 하늘하늘 피어 있던 연못에 배롱꽃 피는 정자를 지나서 논길을 달려서 한 시간여를 가다보면 산으로 산으로만 둘러싸여 이름도 검산이라는 동네가 바로 나의 고향이다.
이렇게 먼 곳을 걸어서 학교에 다녔으니 오고 가는 길거리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참으로 많았다. 이렇게 추운 겨울이면 고사리 손으로 장작을 한 묶음씩 가지고 가야 난로를 피울 수 가 있어서 손을 불어가면서 가지고 가다가 잠시라도 들어다 주는 굵은 손이 있으면 그렇게도 고마울 수가 없었다. 따듯한 봄날이 오면 모든 게 느슨해지게 마련이지만 학교 갔다가 돌아오는 길은 더더욱 한가로울 수밖에 없는데 의외의 복병을 만나서 길길이 뛸 수도 있었다. 길 가의 땡삐 소굴을 누군가 건드려 놓고 간 것을 모르고 휘파람 불며 가다가 냅다 뒤통수를 쏘여서 목이 붓고 돌아가지 않아 학교도 못 가는 일도 있었다.
50여호가 사이좋게 지내는 동네에 방앗간도 따로 있고 다랑논배미에 물을 주기 위해 만들어 놓은 저수지도 소나무 밭 너머에 있고, 겨울이면 아이들이 모여서 얼음배 타기에 여념이 없는 마을 앞을 흐르는 개울이 지금도 흐르고 있는 곳이다.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지천으로 우러나는 달래를 캐고 어머니가 꺾어다 준 송기 맛을 즐기며 꾸지뽕나무에 붙어 있는 사슴벌레를 잡으러 산을 헤매던 시절이 있었다. 여름에는 삼베옷을 만들기 위해 심은 삼을 베어서 잘 삶아가지고 껍질을 벗겨서 물에 잘 담가 두었다가 불려서 얇게 나누어 삼실을 만들어 베를 짠다. 삼대를 베어서 껍질을 벗기고 나면 개구쟁이들도 신이 나서 달려든다. 삼실은 잘 꼬아서 활시위를 만들고 삼대는 화살을 만들어 쏘면 잘 나가기 때문이다. 마을 뒷산에 있는 대나무를 베어서 불에 잘 휘어가지고 활대를 만들고 삼실을 잘 묶어서 활시위를 만든다. 삼대의 껍질을 벗기고 대나무를 앞 쪽은 뾰족하게 깎고 뒤쪽은 반듯하게 잘라내면 앞이 짐승이라도 잡을 듯한 날카로움으로 무장한 화살촉이 되어 제법 그럴듯한 활과 화살이 되어 전쟁놀이와 사냥놀이를 하는 아이들의 무기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활로 화살을 쏘아야 논배미 서너 개는 지나가는 시원함을 맛볼 수 있다. 서로서로 품앗이로 농사지어 추수도 타작도 같이 힘을 모아서 돌아가면서 삯 받지 않고 해주는 그야말로 정이 넘치는 그곳에서 어른들이 돌아가신 할머니 산소 만들고 있는 사이 집안에 쌓아둔 낟가리에 성냥불을 그어댄 천진난만한 소년이 있었다고 한다. 덕분에 놀란 가슴 쓸어내린 어른들은 반팔 길이밖에 남지 않은 볏단을 손으로 움켜쥐고 매우 힘들게 용을 쓰며 타작을 하였다고 한다.
타작이 끝난 논배미에는 축구장을 만들려는 아이들의 바지런함과 그것을 막으려는 어른들의 눈초리가 심한 각도로 부딪치지만 아이들이 숫자가 많아서인지 꼭 이기게 되어 있다. 축구를 하다가 지치면 발밑에 굵은 철사를 댄 썰매를 챙겨들고 소나무밭을 지나 저수지로 가면 지금 같아서는 수 백 명이 들어가도 별 표도 안 날 것 같은 은반의 스케이트장 아니 썰매장이 성황중이었다.
눈이 내리는 겨울이면 찬바람이 불어도 장터에 가시는 아버지를 따라 우마차를 따라 가면 반드시 소득이 있게 마련이다. 소득이라야 요즘 아이들이 보면 별 가치가 없을 것으로 느껴지겠지만 참 소중한 것이었다. 잘 해서 쌀말이나 갔다가 돈 사서 학용품도 사고 고막이라도 사 가지고 오는 길에 약장수들의 신파극이라도 볼 수 있으면 상등급의 소득이다. 아버지를 따라 나서지 못했으면 누구나 알 건 모르건 아저씨 앞에 찰싹 달라붙어서 아버지라고 우겨야 쫓겨나지 않고 그 재미있는 연극을 볼 수 있다. 연극 보고 돌아오는 길에 장터 움막에 아버지가 들르시면 최상등급의 선물이 주어진다. 아버지의 약주 한 사발에 나에게는 달고 맛있는 빨간 팥죽이 한 그릇 덤으로 붙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동지 팥죽을 먹으면서 40년이 지난 지금도 모습은 변했지만 닷새 장은 살아 있는데 약주 한 사발 들이키시는 아버지는 이 세상에 계시지 않아 날은 추워도 그 달디 단 팥죽을 얻어먹을 수가 없는 것이 안타깝다.
첫댓글 그림이 그려 지네요. 도시에 자란 사람은 추억이 별로 없어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