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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인의 음악카페 소식에 나도 그 자리에 있었던 이야기를 띄워봅니다. 카페가 너무 적막하여...
들어줌직한 음악은 하나 없고 쓸데없는 소싯적 애들 이야기라 멋쩍군요...
김진수의 음악카페
- 꽃편지 -
◐ 제가 개인적으로 조금 좋아한 교사 중에 시를 쓰는 사람이 둘 있습니다. 둘 다 전교조와 함께 교육운동에 열심이었던 바 꽤 유명인사가 되었지요. 도종환과 안도현인데요, <접시꽃 당신>의 도 시인은 현재 희귀병으로 투병 중이며, 안 시인은 수년 전 시집 <그리운여우>를 출간한 뒤 어느 날 교직을 그만두었지요. 어느 잡지에서 보니 안 시인더러 "시가 얼마나 좋으면 교육운동을 버렸느냐" 하자 "나에게 시와 교육을 두고 누가 처이고 누가 첩인지 묻지 말아달라" 웃더군요.
그렇게 보자면 저도 안방에 '그림'이라는 처와 뒷채에 '교육운동' 이라는 첩을 두고 오래 갈등한 사내입니다. 더 바람둥이인 것은 평소 흠모하고 지내던 저 젊고 섹시한 '시' 라는 행랑채의 여자 말입니다. 이제 들킬 건 다 들켜버려서 비밀은 없으나 세 여자로 몸이 부서지고 오장육부가 다 허하니 어쩝니까 산천을 뒤져서라도 약초라는 예명과 들꽃이라는 본명의 神仙들을 두루 만날 밖에요...
오늘은 제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내 귀를 흐르던 강물의 소리를 함께 나누는 자리가 되었으면 하는데, 허나 모든 게 순대처럼 빵빵하여 한계이니 주로 제 소싯적 이야기나 하며 짧은 시간을 진행해 볼 생각입니다.
제 고향은 광주 양림동 속칭 ‘흙구덩이’라고 하는 판자촌이었습니다.
지금의 광주기독병원 앞마을이죠. 다섯 살 때까지 이곳에서 살다 광주천을 건너 학동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한국'은 몰라도 '미국' 이라는 이름은 아는 시대 이야기죠. 내게도 미국은 아름다움의 대명사였고 꿈의 에덴동산이었죠. 할머니의 등에 업혀 마실나갈 때 당시 너무도 멋져보였던 제중병원 건물을 가리키며 “할머니, 저것이 미국이여?” 했답니다.^^ 그 미국 한 복판의 광장, 물론 굳세어라 금순아, 쎄드 무비, 아리조나카우보이 같은 노래도 있었지만 당시 내 귀에 아로새겨진 곡은 바로 이 음악이었습니다.
1. ‘워싱턴 광장’(Washington square)
- 양림동과 학동, 유년의 배경이 된 음악
◐ 주먹으로 친구들과 싸우거나 대쪽으로 엄니에게 종아리를 맞아도 울지 않던 제가 밤이면 이불 속에서 할머니의 사타구니에 끼여 부엉이 같이 무섭고 고아 같이 슬픈 옛이야기를 들으면 주루루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납니다. 광주학강국민학교 부잡쟁이가 이런 음악이 흘러나오면 어떤 아스라한 감정에 휩싸여 눈물이 찔금 흘리는것도 같은 맥락이었겠지요.
요즘 'TV 애정만세'에서 배경음악으로 자주 나오더군요, 그래서 그 시간의 배경이 언제쯤 되는가 하고 아내에게 물었더니 전화기 놓는 집이 한 둘 생기는 때라더군요. 문득 무슨 생각이 떠올랐지요. 초등 2학년 때 그 '전화'란 게 나와가지고 무시무시한 담임선생님이 숙제로 자기에게 전화를 하라 하였는데 하필 우리 동네에는 전화기가 있는 곳이 바로 양말공장이었답니다. 시끄러워서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자 네? 네?만 여러 번 했다는 것 아닙니까? 글쎄 다음 날 선생님이 매를 막 때리더군요, 아픈 것 보다 무색하고 창피해서 어쩔줄 몰랐어요.
어째서 선생님들은 그랬는지 1학년 때 여선생님은 교실에서 늘 거울만 들여다보는데 아주 신경질적이셨고, 3학년 때 거인 선생님은 일제고사 점수가 낮은 아이들을 남녀 구별없이 엉덩이를 까고 매를 때렸으며, 4학년 때 그림을 잘 그리는 얼굴이 까만 선생님은 소풍 가면 술이 벌개져서 묘똥 위로 올라가 이상한 막춤을 추었지요. 모두 무섭고 이상한 분들이었어요.^^! 나는 하굣길에 늘 이 '워싱턴스퀘어'가 흘러나오는 어느 골목에서 늘 먼 이국처럼 서성거리곤 하였지요...
그 당시 제가 아주 좋아했던 노래는 또 학년마다 음악책에 실려나오는 '자장가'들이었고, 지금 듣게 되실 바로 '바닷가에서', '섬집아이' 같은 것이었답니다. 가사는 또 어떤가요...
2. 바닷가에서
- 몽당크레파스(첫 화가의 꿈)
◐ 위의 그 4학년 담임선생님과는 그래도 각별한 인연이 있었답니다.
장래 화가가 되려는 첫 데뷰장인 셈인데, 하루는 담임선생님의 연구수업이 있는 날 우리는 창고에서 낡은 책상들을 날라다 한 8파트로 나누어 설치하고 그 위에 올라앉아 정물화로 화분의 선인장을 그렸는데, 장학사님들이 순회를 하다가 내 뒤에 멈추는가 싶더니 한 분이 내 그림을 보고 "흠, 잘 그리는데?" 라 했것다. 그때 담임선생님이 “ 이 애는 그림을 잘 그립니다.” 하는 거에요... 윽...!
나는 거의 무아지경에 빠졌지요. 이를 시작으로 선생님은 내게 미술대회에 자주 출전시켰고, 그러나 난 입선 한 장 정도나 기억이 있을 만치 상을 받아오지 못해 선생님과 아이들 앞에 늘 불안했었죠. 사직공원에서 호남예술제던가? 선생님으로부터 도장이 찍힌 캔트지 한장을 받아들면 모두 흩어져 구도를 잡으러 다닙니다. 그러던 중 깜짝 놀랄 일을 만나지요. 아, '이젤'과 '화판', 그리고 '미술 박스', 내 엄지손가락보다 훨씬 굵은 2층짜리 크레파스..... 나는 그 '물건' 들을 보는 순간 그만 기가 팍 죽어버렸죠. 나는 될수록 사람이 없는 숲속으로 숨어들어가 누나와 형으로부터 대물림한 저 와글거리는 지저분한 몽당크레용들을 바위에 쓱쓱 그어가며 후딱 그려서 나왔죠.
[ 섬집아이 ]
- 대나무저금통과 교내백일장(시인의 꿈)
◐ 이 노래의 배경은 제가 나중에 시 쓰기를 즐기게 된 하나의 서정적 배경 위에 포개집니다.
제 소년은 감정의 기복이 꽤 요란하고 컸던 것 같아요. 당시에 걸인들이 하루에도 두세번씩 집에 오는 때가 많았는데 그래서 어른들이 귀찮아하고 가끔 세숫대야나 구두도 잃어버린 집에선 야단들이었지요. 나는 '정의의 사또' 처럼 나서 골목에 들어서는 '소년거지'를 막았지요. 한편 학강국민학교에서 구역 별로 나눠 5학년이 시작되면서 남국민학교로 '집단이송' 되었는데 그곳은 우리 동네보다 훨씬 가난했고 신작로와 논두렁을 한참 걸어가는 촌이더군요. 나는 꽤 괴로워했고, 그 소년거지가 너무 미안하여 어느날 내 왕자같은 꿈의 대나무저금통을 작신 깨어 그 소년을 찾습니다. 문예반이었던 나는 교내 백일장에서 이 이야기를 산문으로 써서 최고상을 받게 되지요. 이 내용을 담은 詩가 한나 있는디 [시인의 파도]방에 한번 실어보겠습니다...
3. 김성태 작곡 ‘한송이 흰 백합화’
- 김대원선생님과 풍금
◐ 5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은 내게 서예와 국어토론수업, 그림, 원예(관찰기록) 심지어 방학과제인 퇴비 숙제검사까지 내게 맡기셨죠. 잊지못할 은사님이십니다.
지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의 경향도 그 선생님이고 내가 선생으로 일하면서도 그 분을 늘 앞세웠으며 오늘의 그림, 시, 들꽃 들도 어쩌면 그때 그 김원식선생님 덕분이다 생각하지요. 선생님의 음악시간에 ‘조약돌’ 가사붙이기를 잘한 계기로 나는 학교 '어린이음악대'에도 들게 되었는데, 내가 꼭 배우고 싶었던 것이 그곳에 있었죠. 풍금! 얼마나 누르고 싶었던지... 그러나 내 음악적 끼를 모르는 악대부선생님은 그 난색의 타악기 '목탁?'을 주셨고, 내 행복은 휴일이면 어김없이 이가 서넛 빠진 풍금이 있는 양노원의 교회당을 찾는 일이었답니다. 나는 아무도 없는 교회당에서 열심히 '해당화'를 누르며 노래를 불렀지요. 노래 '해당화'에 대한 가족의 일화는 지금까지도 우스겟거리로, 누나가 중늙은이가 된 나를 놀릴 때 종종 쓰는 이야깁니다. 크리스마스날 '해당화'는 중등반 누나들의 '백조의 호수' 공연 중에 난입하여 무대를 싹 망쳐버린 꽃이랍니다!
누나... 거울 앞의 쏘프라노 우리 누나는 아침마다 '한송이 흰 백합화'를 아주아주 잘 불렀지요...
이러다저러다 모자 쓰고 중학교에 들어갑니다. 중 1. 나는 첫 눈에 미술선생님을 반합니다. 이번 음악은 러브스토리의 주제곡 가운데 '눈싸움'입니다. 누나나 형이 즐겨 듣는 덕에 어린 저도 아주 행복하게 감상했던...
4. 러브스토리의 주제곡 중 ‘눈싸움’
- 짝사랑, 김정희 미술선생님
◐ 학교에서 단체관람했던 동시상영 '로빈슨가의 모험'과 '그레이트 왈츠' 영화가 생각납니다. 특히 왈츠는 종종 꿈속에서 '그녀'를 보듬는 꿈의 배경이 되었는데 그 '슬로우비디어'의 영상은 어린 저를 눈부신 환상으로 매료시켰어요. 나는 사막의 모래 위에서 그녀를 보듬고 한없이 뒹굴었어요. 김원식선생님이 밀고 김정희선생님이 잡아끈 내 몸은 달구지...
◐ 고등학교 시절의 풍경은 마치 아침노을에 날아오는 철새와 저녁놀에 사라지는 새떼의 모습으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흔히 청소년기의 방황일 수도 있고, 희망을 찾아헤매는 모습이기도 해서 절망하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는 날들이었습니다. 그 나이에 흔치 않을 '종교갈등'도 있었고, 미대를 반대하는 부모님 '몰래' 그림을 그렸으며, 또 햇사랑에 빠졌지요... 당시 고등학생 미술클럽이었던 '그림Y' 에서 불우이웃돕기 ‘카드 만들기’와 '연극제' 행사준비를 하게 되는데, '첫사랑' 그 애와 나는 여름 날 옛 간호대 캠퍼스를 배경으로 나란히 연극(지킬박사와 하이드) '소품' 역을 맡았지요, 주연들은 열심히 연극을 연습하고 우리는 저만치 나가서 배짱이들처럼 통기타를 치며 그림같은 애정행각을 하였지요.
앉으면 시작한 노래가 바로 이 노래였답니다.
5. 김정호의 ‘이름모를 소녀’
그러나 몇 달이 못 가 주변의 시샘으로 곧 멀어졌는데 나는 조금 아팠고, 일부러 목각에 취했고, 공부 핑계를 대고 친구의 아틀리에에 빈대도 붙어 그 애를 잊으려고 했지요.
‘엘콘도파사’(철새는 날아가고)
◐ 그 아뜨리에는 지금의 광고 옆 헌 책가게 2층이었어요. 우리 사이를 이간질?한 박아무개 친구는 미안했던지 늘 침대 밑에 따뜻히 밥공기를 묻어놓곤 하였지요. 처음에 ‘비 새는 화실’이라고 지금의 '소리모아' 가수 박문옥(전대 미술과 1회)이 썼던 곳이다가 ‘동키호테 화실’ 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고 바로 내가 그 다음 주인이었어요. '엘콘도파사'는 그 시절을 끝없이 날아간 첫사랑의 아쉬운 내 그림노래죠.
이듬해 난 대학시험을 위해 서울로 떠납니다. 서울생활은 한 마디로 이 노래와 같았습니다.
6. ‘어디로 갈꺼나’(김영동)
◐ 대학 시절의 노래는 주로 김민기의 ‘친구’나,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 양희은의 ‘아침이슬’ 같이 시대성이 강한 곡들이었지요.
서울을 실패하고 낙향하다시피하여 전주에서 살 때 어느 날 역전의 내 화실에 낯선 총각이 하나 찾아들었습니다. 나보다 두어 살 아래 광주의 후배였어요. 이영채...
초췌한 모습으로 몇 일 묵어갈 수 없냐 묻더군요. 그때가 오월이었고, 광주는 집과도 통신두절이 되어 뭔가 걱정되고 궁금하고 심란하고 답답했던 터라 혹, 이 일과 관련되지 않았나 짐작하면서. 이틀 쯤 뒤엔 돈을 꿔달라더군요. 뭐에 쓰려하느냐 물었더니 그림을 그리고 싶대요. 주었더니, 마름모꼴 캔버스와 물감, 연필 등을 사와서 곧장 밑그림을 그리는데 황토빛 바탕색에 연필로 그린 그림은 십자가였는데 예수님 머리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원근법이 강조된 그림이었지요. 그는 끝내 그림을 완성하지 못한채 매일 술만 먹었지요.
하루는 야외스케치를 갔는데 대낮부터 취해 찔레꽃 가시덤불에 뒹굴며 만신창이가 되었는데 어르고 달래서 물어봐도 결코 대답이 없었어요. 짐작대로 그는 광주항쟁과 관련하여 전대 상황실에서 탈출한 친구였어요. '오월 광주'는 제게 이렇게 다가왔습니다. 아무튼 나는 대학생이었고 그 틈에도 이러한 무거움으로부터 해방감을 맛보았던 노래가 있었으니 미국의 슬램가를 대변하는 ‘바람만이 아는 대답’의 '밥딜런'이나 특히 이스라엘계 미국 폭가수 '존바에즈'는 내가 당시에 가장 사랑했던 가수였죠. 대학 방송 디제이 후배에게 두 사람의 노래를 매일 점심에 한번씩 틀게 했고 오후엔 내가 술을 샀지요. 들어보시죠.
7. ‘The river in the pines’(솔밭 사이로 흐르는 강물) -존바에즈-
- 쓸쓸하고 행복했던...
◐ 그녀의 목소리에 반해 내가 남겼던 어록이 있어요. “존바에즈가 물이면 나는 화장지다.” ^^
◐ 그럭저럭 대학을 마치고 84년 다소 늦게 교단에 입성합니다. 여천의 사립 여양종고로 8:1의 공채경쟁을 뚫고 입사했는데 참 힘든 학교더군요. 나름 열심히 가르치고 열심히 주장하면서 이듬해 생애 첫 개인전을 갖는데 우울하고 불순한 시대가 낳은 예술은 '민족민중미술'이었고 저는 곧바로 탄압을 받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일이 당시엔 고통이었지요. 개인전이 열린 곳은 한국미술 사상 초유의 탄압사건이었던 '한국미술20대 힘전'이 열렸던 인사동 근처 아랍문화회관 전시실이었는데 바로 그 장소에서 참여 작가의 한 사람이 개인전을 연다고 하니까 글쎄 백골단을 한 차나 풀어 전시장을 에웠지요. 두루말이 그림들을 채 펼칠 엄두가 나지 않았어요. 하여 관장과 함께 종로경찰서장을 만나 댓거리하다 <충장로> 그림 한점을 빼고 전시회는 이루어졌지요. 지금의 목포대 원동석교수와 문화유산답사기를 쓴 유홍준교수 그리고 힘전 작가들이 절 위로해주었지요. 이후 서울에서는 되로 푸니 2차전으로 예약된 광주에서는 말로 푸고, 근무하던 학교에서는 학교장이 '자르겠다고' 최후통첩을 하고.....
친구들과 그 시절 통음하던 곳 중에 사직공원 아래 '방공호' 굴이 있었어요. 중년의 주모가 북을 치며 노래를 불러주었는데 거기서 배운 노래가 한 시절 내 '18번'이 되기도 하였던, '부용산' 입니다.
8. ‘부용산’
- 화가의 돛대, 교사의 삿대 (민족미술운동과 교육운동)
◐ 비슷한 시기에 전국에서는 교육운동이 일어나고 곧 결성에 참여하였다는 이유로 교단에서 쫓겨납니다.
때를 맞춰 친구인 시인 곽재구는 곳곳의 여행기를 쓰던 참이었는데 나를 불러 함께 돌아다녔고 당시 광주매일 문화부장이었던 김준태시인은 내게 문화칼럼과 삽화 등을 통해 생활의 보탬을 주었지요. 그렇게 해서 그럭저럭 외롭지 않은 해직기간을 보냅니다. 이 시기는 외형적으로야 안됐다 혀를 찼지만 스스로는 꿈 같은 자유에 행복한 가난을 즐기던 가슴 터진 시절이었습니다.
이때 즐겨 불렀던 노래가 있습니다.
9. ‘떠나가는 배’(정태춘)
◐ 곧 복직을 하게 되었고 학교 인근의 산이나 바닷를 쏘다니는 버릇이 생겼는데 해남 우수영에서 두륜산 근처 현산으로 옮겨가서도 이 일은 계속됩니다. 수업이 1시간 비면 앞산 2시간 비면 뒷산 오후가 비면 함흥차사로 몰입합니다. 들꽃은 아이들을 쏙 빼닮았고 내 본능의 깊숙한 고향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거의 절대적으로 자연의 신에 매달렸고 그 덕에 제법 많은 풀꽃들을 사귀게 되었지요. 이 학교에는 외로움으로 따져 나와 비슷한 축의 한 벗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 자리에 함께 온 태너 정태석선생님과 사물패 백두선선생님. 나는 풀꽃들을 보느라 땅만 두리번거릴 때 정선생은 먼 바다 쪽을 향해 가곡을 불렀지요. 산속은 둘의 우정을 쌓기에 충분히 싱싱하였습니다. 그는 얼마 후 내게 신동민 작곡가를 소개해주었고 신동민은 내 시에 곡을 달아 세번째 개인전을 멋지게 장식해주었지요.
10. 찬조출연 - ‘도라지꽃’
정태석(목포여중, 테너), 로뎀트리오(바이올린, 첼로), 신동민(작곡가, 플룻)
도라지꽃
내가 만약 소년이라면
저 산도라지 흰꽃 같은 소녀를
만나고 싶다.
내가 만약 소녀라면
저 산도라지 흰꽃 같은 소녀와
만나고 싶은 소년을
만나고 싶다.
둘이서 손잡고 언덕에 올라
초가을 흰 구름과
깊어만가는 저 쪽빛하늘을
해 종일 우러르고 싶다
◐ 제 졸시 <꽃편지> 하나 낭송해 올리겠습니다.
꽃편지
살다보면,
아심찮은 듯 애틋한 것들이 있다.
마냥 비를 맞고 다니는 장닭을 보거나
개밥그릇에 앉은 벌 나비,
갈라진 벽 틈새의 민들레를 보는 것처럼,
등 굽은 소나무 위에서 터지는 나팔꽃송이,
그 넝쿨손이 가리키는
교실 창문의 청개구리들이나
고만한 계집애들의 이마에 핀 여드름,
그 여드름처럼 도도록이 내 머리칼
쥐엄질하여 찔러주는 꽃나비 핀,
이놈들이 내 손에 놓아주고 뽀르르 내빼는
꽃편지,
그런 것들이 있다
◐ 꽃을 보러 다닐 땐 꽃이 아이들로 아이들이 꽃으로 보이던 때입니다. 세상은 온통 꽃으로 뒤덮여 우리가 살고 있음을 깨달았지요. 세상은 사람들의 세상이 아니라 자연과 야생초들의 거대한 집이었고 나는 그 틈을 잠시 빌려 쓰는 오소리나 너구리 한마리쯤 되는 자로 느끼게 되었지요. 벌레 한 마리가 내게 일러주는 생명의 소리 그것은 너와 내가 근본적으로 하나의 생명을 타고 났다는 인식에 이르게끔 가르쳐주었어요.
나는 아이들 하나하나에게 그의 이름과 생월, 생김, 성격 등을 더듬어 그와 가장 비슷한 이미지의 들꽃 이름을 달아주고 그 이름을 불러주었더랍니다.
◐ 끝으로 신동민선생이 작곡하여 축가로 불러주었던 ‘옥잠화’ 를 들으며 오늘의 만남을 맺을까 하는데, 아쉬움이 많군요...
첫댓글 마음은 바람 부는데로 소리를 내는 한그루 앙상한 겨울나무만 같아요 그리고 찾아갈데없는 나는 사랑하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관심사를 궁금해하고? ..그러면서도 관심사와는 동떨어저 그저 썰렁하여 또 다른 무엇을 계획하거나 여행하는 모습만 남아 있는것이 분명해요..일상속에서 아름다운 것들을 이어묶는 것만큼을 보람이라고, 생의 과정을 위한 참된 용기라고 생각했었는데....지난 시절 좋은 추억 보기에도 좋고 듣기에도 좋습니다.. 아주오래된 외출과 옥잠화!! 눈에 선합니다.
두선이와 셋이서 월평 원정을 가면 거 잼피 넣은 추어탕에 장어구이 지글거리는 주막이 어떻던가... 출출한 저녁무렵을 달려와 갑오징어 먹통은 우리들의 입술을 얼마나 더럽혔는가! 조금은 쓸쓸할 수도 있는 그 무슨 포구였제? 두모리? 불미나리에 몸을 섞은 그 간재미회는 말일세...
선생님^^ 공감가는 글 잘 읽었어요.
ㅋ 홀애비맘 과부맘 아니겄소? 동시대가 그렇고 그림이 그렇고 훈장질이 그런...
준비를 잘 하셨었네요. 저는 간단한 곡 소개와 음악만 들었을 뿐이었었는데...어제는 때맞춰 내린 눈 때문에 오봇하게 음악을 즐겼지요. 분위기 하나는 아주 그만이었어요.
자넨 반야와 더불어 관록의 디제이 아닌가! 난 사실 남 앞에만 서면 어색한 것이 춤이고 떨리는 것이 노래네. 그런 면에서 내가 평소 부러운 사람이 이쪽의 '카수 조르바'이고 저쪽의 '절세카인 강물'이라네. 얼마나 되었을까.. 한 오년 전? 글만 그럴듯하제 난 영판 재미 없는 디제이였네.
내가 만난 김진수샘은 삶 속 작고 큰 틀속에서 언제 어디에서나 그 누구와도 재미없거나 거리낄것 없이 편안한.,.그래서 항상 틈만나면 만나뵙고 싶어했던 바다색을 닮은 이땅에 없어서는 안될 사람이셨습니다.생활은 누구에게나 소중하겠지만 그저 흔하디 흔한 일과 생각이 반복되는 일상속에서 꽤나 힘들어하며 예술과 예의를 존중하며 살고 싶어했던 조르바의 마음속 고민을 만나면 언제나 이야기로 해결해주셨던 입담가(?)셨으며, 내가 그토록 간절히 찾아헤메다 30대 후반에서야 만나볼수 있었던..비로서 시든꽃에게 한줄기 생명수였고 희망이되어 주셨던 그대(김진수님)는 ? 진정 내가 만난 한국의 조르바셨습니다. ㅎㅎ
후후.. 내 맴이 땅콩 껍질 속으로 지금 들어가고싶은 땅콩 같네^^ 조르바는 별 말씀을... 자네의 '예술과 예의'가 조르바면 난 핫발세^^
조르바를 핫바에 연결시키다니요..너무하십니다 ㅎㅎ 말주변은 횡설수설 조르바지만 마음속 직관력과 향기만큼은 들꽃향기(형님)와 동격일 수 있는 조르바르 ㄹ 으, 흐흑..(슬픔에 겨워 눈물없이 가슴으로만 우는 소리 ㅋ ) 형님! 다음주 월요일은 한해를 마무리하는 아니 저에게는 학교4년, 목포지역8년을 마무리한다는 마음으로 작은음악회를 기획했답니다. 그날은 방학하루 전날인데..아이들에게는 멋진 열린음악회가 될 것이라 봅니다. 멀리서나마 박수와 응원보내주시와용^^2009년도 달콤한 입맞춤으로 안뇽~하ㅏㅏㅏㅏㅏㅏㅏㅏㅏ할 께용>> >> 들꽃회원님 모두 사랑해요 그리고 내년도 더욱 힘차게 시작해요^^화이팅^^??
기타솔로/ 기타듀엣/교직원,학생 기악 앙상블(에델바이스- 플륫,바이올린,섹소폰 베이스기타,건반) 교직원독창 및 중창 그리고 J I 어울림 밴드와 관악합주!! 순으로 진행하다가 전교학생 제창 "꽃이피는 날에는" 노래를 끝 곡으로 마무리하는 프로그램이랍니당^^그건 그렇고, 12월 30일 저녁시간 좀 비워두실래용~그때 연락드리렵니당^^
자기의 몸을 떨어 우는 악기보다 그것을 울리고픈 입술의 떨림이 더 잘 보이는 음악회를 연다니 여릿여릿 좋겠네. 즐겁게 잘 마무리하고 나중에 보세. 참고로 베토벤이나 쇼팡도 잘 모르는 할머니가 들으면 벤또나 쇼파 쯤 되고, 핫바나 조스바도 모르는 할아버지가 들으면 핫바지나 쫄바징깨 용서하드라고...
생각 젖다 보면, 그만, 숨 탁 막힐, 그랬던 날들......내 탓 스며들 어느 한 구석도 없이 세상 탓만으로 내게, 그래, 우리에게 주어진, 주어졌던 그 때 그 시절의 부질없던 잉태와 내던져짐, 그리하여, 내게 오롯이 전가된 앓이와 부스럼..... 함에도, 누구랄 것도 없이 다 그렇듯 견뎌온 시절의 저 편, 저 아늑하고 슬픈 강, 저 쪽...... 이만한 나이에 들어 새삼, 노을지는 어느 언덕배기에 나앉아, 담배 한 모금 빨며 저으기 건네보는 저 노을, 저 노을이 그만, 신산하고 아련해, 눈물 찔끔, 내 모르는 사이, 볼을 타고 내리는 아, 아, 저민 아픔이여!
저 편, 저 아늑하고 슬픈 강, 저 쪽...... 추억을 잘 씹는 눈을 가진 사람은 올기쌀 같아요. 오물오물 되새김질하는 염소처럼 먼산도 잘 보는 입을 가진 사람은 소설을 쓰죠. 내 막내동생이 흑백사진의 옛 가족이야기를 엮어보라 주문도 했었는데 난 도무지 지나간 것은 아리고 부질없고 슬프고 노을지고 신산하여 내키지 않죠. 시도 그림도 좀체 흘러간 강물은 건드리지 않습니다. 한형의 '부스럼'으로 지금 내가 긁습니다...
제게 들려주셨던 익숙한 내용들이라..선생님 곁에 앉아 배시시 웃고 있는 제가 보입니다...^^
그래^^ 통키타를 튕기면서 '고요한 밤..', '에델바이스'나 '철 지난 바닷가'라도 함께 부르고 싶고나... 한없이 행복하고 따뜻한 새해 맞이하길 빌게...
글로써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사는 사람들은 복짓는 일을 하고 사시는거지요.. 물론 노래를 하시는 분은 노래로,, 그림은 그림으로,, 그 많은것을 누리고 사는 이는 더 많이 복을 짓는일이구요,, 왜냐구요? 더불어 행복하게 할 꺼리를 선물하는거니까요,, 나도 복을 짓고 사네요..
댓글을 못 볼뻔했어유. 모두는 살면서 조금씩 늘고 돕고 사는데 예술도 종국엔 큰 복을 짓는 일... 평화와 자유와 가치와 조화와 아름다움과 기쁨과 바로 그거 '행복' 같은 걸 생산하는 힘이니...
와~ 영원한 청년 예술 선생님....선생님을 떠올리면 김영동의 " 어디로 갈꺼나? "만 떠오르는 샛노란 제자 입니다^^
꽃편지 시도 좋고, 시집 아주 오래된 외출도 좋을 것 같고, 시인의 인생이 묻어나는 음악들도 좋았을 것 같습니다. 아, 이 공연할 즈음이면 내가 광주에서 기고 날았을 즈음인데 왜 몰랐을까나? 전고필 선생께 따져야겠다. 왜 연락도 안 했냐고...
양순샘 댓글을 모르고 있었어요. 그날 북구문화센터의 분위기도 모르고 앉았는데, 다들 싱거워 죽었을거에요... 그래 미안하여 오신분들께 제 졸시집을 나눠드렸을 겁니다. 하도 심심하여 백두선이라는 후배는 일어서서 절더러 노래나 한나 부르고 디제이하라며 윽박지르잖아요... 하여 윽, 그 '부용산'을 부르고야 말았답니다. 인자도 객쩍어요.ㅎ
부용산... 월북작곡가 故 안성현 선생이 목포 항도여중(목포여고 전신)에 근무할 때 동료 교사 박기동 선생이 누이동생을 잃은 슬픔을 담아 지은 시에 곡을 붙였다죠? 아무리 들어도 빨강을 안 나오드만 어째서 참... 안성현 선생과 저희 아버지가 한 동네서 형님동생하던 인연으로 공부좀 했습죠. 드들강에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 시비도 세워지고 해서 소월의 고향 구성군과 안성현의 고향 나주의 자매결연을 추진해볼까 하고 방북기획취재요청을 했다가 천안함 때문에 거절당했습니다. 제 블로그에 남평중 학생들과 한영애가 부르는 부용산 숨겨놓았으니 비오는 목요일 아침 홀로 적적하시거든 같이 한번 불러보시죠. 객쩍지 마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