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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또 스승을 한 분 만나서 그를 존경하게 되었다. 얼마나 복이 많은 나인가. 그들이 일생 동안 보듬어온 지혜를 송두리째 훔쳐서 내 것으로 삼으니.
전설의 배무이 신영수
이북(以北)에서는 배를 만드는 사람을 ‘배무이’라고 한다. 북한 피란민들이 전남 목포로 내려와 배를 만들면서 남도에서도 배 만드
는 사람을 배무이라고 불렀다. 그 목포에 사는 신영수(申泳洙·62)는 배무이다. 가난해서 중학교를 2학년 때 중퇴하고 배를 만들었
다. 올해로 47년째 그는 배를 뭇고 있다. 신영수가 말했다. “정석을 배우지 않고 응용부터 하게 되면 배는 침몰하는 것이여.” 전설
적인 배무이, 신영수 이야기.
제재소 잡부 아들 신영수
아버지는 배무이들이 모여 살던 목포 삼학도 근처 제재소 직원이었다. 나무를 켜면 배무이들이 가져가 목선을 만들었다. 동력선
에 끌려가 망망대해에 닻 내려놓고 하염없이 고기를 잡는 멍텅구리 배였다. 가난한 시절, 어업은 활황이었다. 배무이도 활황이었
다. 가난한 아버지는 가난한 아들 손을 잡고 배무이 밑으로 들여보냈다.
정신 없이 일했다. 나무를 나르고, 밧줄을 자르고, 비질을 하고, 쌀도 팔아오고, 온갖 잡일을 다 했다. 피란민 출신 배무이들에 에
워싸인 유일한 목포 사람이었다. 이북 사투리 모른다고 맞기도 엄청 맞았다. 돈 되는 배 뭇는 법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작
심을 하고서 강대현이라는 배무이 집으로 들어갔다. 목포에서 하나뿐인 선박 설계사였다.
종살이 3년 만에 그가 신영수에게 종이와 자와 연필이 들어 있는 공구통을 건넸다. 배를 설계할 수 있는 기법, 현도법(現圖法)을
그가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스승이 그에게 이르길, “수평과 수직을 맞춰라. 그게 기본이다.” 또 다른 설계사가 죽고서 그가 간직하
고 있던 현도법 교본을 물려받았다. 일본어로 된 교본이라 읽지는 못했지만 도면과 숫자를 보면서 현도의 비밀을 하나둘씩 풀어
나갔다. 이 교본은 지금 목포대학교 해양공학과에 보관돼 있다. 스물이 되기 전 신영수는 목포 최고의 목선 설계사가 되었다.
목선의 퇴출과 FRP선의 등장
스물 다섯 늦은 나이에 군대를 갔다 와보니 목선의 세상은 끝장이 나 있었다. “FRP선이 등장했어요. 강화 플라스틱을 주물에 부어
서 만드는 가볍고 빠른 배죠. 목선은 경쟁이 되지 않으니, 배무이들한테서 일감이 사라지고 말았어요.” 그가 회상한다. 종살이 하
며 배운 기술인데 아무도 목선을 사러 오지 않았다. 그 어마어마한 위기가 그에게 기회가 됐다.
FRP선 주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목형이 필요하다. 나무로 배 틀을 만들고, 거기에 플라스틱을 부어 선박을 만든다. 나무로 만드는
배 틀, 그게 바로 목선이었다. 목형 만들어달라고 천지사방에서 신영수에게 몰려왔다. 제주도에서, 부산에서, 포항에서, 인천에서,
울릉도에서 그를 찾았다. 스승에게 배운 대로, “정석과 기본을 지키며” 목형을 만들어줬다. 그리고 깨우친 또 하나의 원리가 “응
용”이었다.
“바다마다 성격이 다 달라. 동해는 파도가 거칠고 빨라. 그런 바다에서는 배 선수를 높게 만들어야 침몰하지 않는 거여. 제주도 바
다도 비슷했고. 서해는 북서풍이 부니까 옆파도가 세지. 배가 넓어야 해. 앞머리는 낮아야 하고.” 똑같은 용도를 가진 배도 그렇게
응용을 해야 그 바다를 거침없이 항해한다. 기초를 제대로 알아야 그런 응용이 되고, 응용을 할 때엔 정석을 버려야 한다는 명제.
바다가 가르쳐줬다. 조금씩 신영수는 전설이 되어갔다. “신영수한테 배웠다”고 하면 무조건 조선소 취직이 보장됐고, “신영수가
그렇게 말했다”고 우기면 아무리 틀린 이론이라도 감히 반박하지 못했다.
조선소를 차리다
1988년 자기 조선소를 차렸다. 이름은 삼아(三亞) 조선소. “세계는 몰라도 아시아에서만큼은 최고의 기술로 배 만들겠다”고 결심
했다. 또 있다. “작업을 하면서 후배들한테 이거저거 가르쳐줬죠. 나중에 보니 그 친구들이 돈을 더 법디다. 아, 나도 내 조선소 만
들어야 겠다 하고 생각이 들었어요.” 신영수의 기술을 믿은 주위 사람들이 돈을 대줬다. 신나게 일했다. 한때 연매출이 12억 원까
지 간 적도 있었다. 조선소 직원이 50명이 넘어 기숙사를 만들기도 했다. “가난으로 시작했지만, 배 뭇는 일이 좋아서 더 열심히
했고, 그 덕에 돈도 벌었으니 정말 행복했어요.” 주름 자글자글한 신영수가 그때를 회상하며 웃는다. 1998년 1월 8일 조선소에 불
이 났다. 누전이었다. 백주 대낮에 신영수가 보는 앞에서 전 재산이 녹아버렸다. 가건물이라 보험도 들지 않았던 조선소였다.
저항 못 이기면 배는 침몰하제
“거짓말 한 적도, 나쁜 짓 한 적도 없는데 왜.” 직원들이 보면 슬플까 봐 남 안 볼 때 울었다. “신영수 부도 내고 도망갔다”는 소리
듣기 싫어서 새벽 같이 시커먼 사무실로 출근해 별을 보고 퇴근했다. 그 자리에 새로 만든 사무실에 앉아서, 그가 말했다. 목소리
가 비장했다. “바다의 저항계수를 줄이는 게 배 만드는 요체요. 저항계수가 0인 배는 없지. 그러면 그게 밴가, 확 날아가버리제.”
인생도 그러하다고 했다. “배무이가, 고깟 불 한번 났다고 저항에 무너지면 안 되제. 또 내 이름이 뭐여, 납 신(申)에 헤엄칠 영(泳)
에 물가 수(洙) 아닌가. 천상 배무이 해야제.”
그래서 전설이 다시 일어났다. 수주 받았다가 녹아버린 배들 다 다시 만들어줬다. 의리 있는 선주들이 그의 재기를 기다려줬다. 그
사이에 아내가 보험설계사로 일했다. 쌀이 떨어져 10㎏짜리 쌀을 팔아 먹기도 했다. 술자리가 생기면 “약속 있다”며 피하기도 했
고, 밥 때가 되면 “나 먹었다”고 도망가기도 했다. 5년 동안 죽을 고생했다.
대학 강사 신영수
그 무렵 조선소 이름을 ‘신영조선소’로 바꿨다. 이제 내 이름 걸고 배를 만들 것이다. 신영수가 만든 배는 어느 바다든 거침없이 달
렸다. 문선명 통일교 총재의 어선인 ‘천승호’를 사진 한 장과 길이, 폭만 알고서 석 달 만에 모형선으로 복원시켜주기도 했다. 2002
년, 목포대학교에서 의뢰가 들어왔다. “해양공학과에서 강의를 부탁한다”고. 중학교 중퇴가 전부인 배무이가 대학생들에게 강의
를 했다. 과목은 ‘모형선 제작’. 신영수가 공책 하나를 꺼냈다. 막 산 듯한 깨끗한 공책 뒤쪽에 강의 노트가 적혀 있다. 모두 일곱 페
이지다. “여기에 내 인생이 다 있어요. 이거면 배 만들죠. 나머지는 다 내 머리에 있고.” 종살이 하며 배웠던, 조선소 불태워 보내며
배웠던 이론을 학생들에게 다 가르쳤다. 올해까지 270명이 그에게 배를 배웠다. “늘 강조해요. 정석을 먼저 배우라고. 그 다음에
응용을 하라고. 자기 배를 만든다는 생각에, 아이들이 정말 진지하게 내 말을 들어요.” 늙은 배무이 얼굴에 자부심이 가득하다.
배무이의 넋두리
“기술자라는 게 그래요. 기술이 좋은 거라. 돈이 안 보이는 거지. 배무이는 그저 좋은 배를 탐내고 그 기술을 익히려 사는 거여. 그
러다 보니까 놀러를 가도 산에 안가고 바다만 가지, 허허. 바다 가보면 내가 만든 배는 척 알아봐. 안 그러면 배무인가, 그게. 좋은
배 잘 만들고, 고등학교도 안 나온 사람이 대학에서 가르치고. 돈 빼고 다 이뤘지. 돈 빼고 전부. 가장이라는 것이, 집에 경제를
줘야 하는데, 그걸 못 혔어. 마누라 고생 시키고. 불 나고서 애들한테 그랬어. 이제부터 아버지 없는 줄 알아라. 인생 니들이 사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 학비도 취직도 다 지들이 다 알아서 했어. 대견해....”
어업은 어렵다. 목선은 더 이상 바다로 가지 않는다. 지구온난화로 어장이 바뀌며 신영수의 조선소에도 불황이 닥쳤다. 한국 나이
로 예순 둘인 노(老) 장인과 마흔 넘긴 기자는 지구온난화와 어민들을 한참 걱정했다. 그러다 기자를 힐끗 보며 신영수가 말했다.
“나 같은 사람 많이 만나봤을 거 아니여. 짐작컨대, 다들 못 살지? 자기가 좋아서 자기 일 하고 살지?” 그렇다. 돈 빼고 다 있는 사
람, 전설의 배무이 신영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