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나잇 앤 굿럭
조지 클루니 감독. 아직도 우리는 그의 이름 뒤에 붙는 [감독]이라는 단어가 낯설기만 하다. 하지만 그의 데뷔작 [컨패션]을 본 사람들이라면 그가 크린트 이스트우드나 로버트 레드포드, 워렌 비티 같은 할리우드 명배우 출신 명감독의 반열에 올라갈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 것이다. 그리고 그의 두 번째 작품 [굿나잇 앤 굿럭]은 아직도 감독으로서의 그의 능력에 의심을 갖는 사람들에게 결정적 확신을 제공한다.
[굿나잇 앤 굿럭]은 냉전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던 1950년대 초반, 미국 지식인 사회를 공포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던 매카시 광풍을 다루고 있다. 사회 각 분야에 수많은 공산주의자들이 몰래 암약하고 있다는 매카시 의원의 공격으로 시작된 이 정치적 광풍은, 조국을 수호한다는 대의명분 아래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시켰다. 특히 지식인들은 자신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증명을 받아야만 했다.
매카시즘은 정치적 반대파를 숙청하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했고, 올바른 말을 할 수 없는 사회적 억압의 분위기를 조성했다. 사회적 몰락과 정치적 패배를 각오하지 않는다면 누구도 감히 매카시즘에 맞설 수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알면서도 바른 말을 하지 못하고 집권세력의 눈치만 봤다. 그것은 홍위병을 동원한 모택동의 혁명이나 제3세계의 파쇼적 군부독재와 크게 다를 게 없었다.
그것은 보수/진보의 이데올로기 싸움이 아니라 비양심세력/양심세력의 싸움이었다. 그리고 결국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 사회를 건전하게 끌고 가려는 양심세력들이 승리했다. 그 승리의 꼭지점에 CBS 뉴스팀의 앵커 에드워드 머로우가 있었다. 이 영화는 머로우를 중심으로 한 그 싸움의 영화적 재구성이다.
[굿나잇 앤 굿럭]이 특히 우리에게 다가오는 이유는, 우리 역시 냉전 이데올로기의 기나긴 터널을 거쳐왔기 때문이며, 1961년부터 1992년까지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군부독재 정권의 집권 32년동안 불행하게도 머로우같은 언론인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냉전 이데올로기를 등에 업고 사회를 동맥경화에 걸린 것처럼 얼어붙게 하던 보수주의 세력은 당시 국무장관인 덜레스의 목까지도 죌만큼 무서운 위력을 발휘했다. 그들을 물리친 것은 언론인 머로우 혼자의 힘만은 아니다. 그가 방송을 통해 진실보도를 할 수 있게끔 함께 움직인 스텝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CBS의 [SEE IT NOW] 팀은 머로우의 입에서 진실이 나오게 만들었고 결국 미국 두려움에 사로잡힌 시민들의 양심을 움직이게 된다. 매카시 의원을 비롯한 행정부-군-FBI로 이어지는 보수세력들은 진실보도에 의해 서서히 그 힘을 잃어간다.
조지 클루니 감독은 이 영화의 제작, 각본, 감독, 조연을 겸하고 있다. 머로우 역에는 [L.A 컨피던셜]의 인상적인 형사반정 데이빗 스트라던을 기용해 차가운 이성으로 두려움 없이 진실을 이야기하는 머로우를 재현해 냈고, 조지 클루니 자신은 머로우가 진실을 이야기 할 수 있게 하는 프레드 프렌들리 역을 맡았다. 흑백 필름의 뚜 려산 콘트라스트를 강조하여 양심 세력과 비양심 세력 사이의 선악의 대립을 강조하면서, 이성적 지지를 이끌어내 결국 감성의 뜨거운 용광로에 피를 끓게 만드는 연출력은 매우 탁월하다.
하지만 내러티브 전개가 너무나 심플하다. 긴장감은 오직 TV 뉴스쇼를 진행하는 머로우의 화면과 거기에 답변하는 매카시의 화면으로만 표현된다. 감성보다는 이성에 호소하는 차가운 영화이기 때문에 너무 많은 것을 대사에 의존하는 것도 비영상적이다. 그리고 너무 설교적이다. 가르치려고 한다. 도덕적 정당성을 갖고 있다고 해도 그것이 대중들에 대한 우월감이나 선민의식으로 연결되어서는 안된다. 관객들 위에 영화가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영화는 벼랑 끝으로 떨어진다. [굿나잇 앤 굿럭]은 그 벼랑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