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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헌서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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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나라 걱정하기를
산여울 추천 2 조회 530 18.10.20 19:18 댓글 6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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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8.12.01 07:38

    첫댓글 좋은자료... 감사합니다 .

  • 작성자 18.12.07 22:51

    엔카에서
    뵈었는데
    여기서 또 뵙습니다.

    두 번씩이나
    말씀 남겨주시어
    정말로 감사합니다.

    즐거운 하루되시기를

  • 18.12.07 19:51

    오늘은 덕분에 역사공부를 잘 하였습니다.
    중종이 처음에는 조광조를 아주 가까히 하였는데 나중에는 조광조의 세력이 두려웠군요. 사람파의 강해진 세력을 훈구파를 이용하여 사림파를 제거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기묘사화 때 화순으로 귀양온 최산두는 동복에 거주하며 김인후, 임억령 등 유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을 뿐만아니라 많은 후학을 양성하였다고도 하더군요.

  • 작성자 18.12.07 22:35

    최산두가 귀양와서 지내면서
    경치가 아름다워 [적벽]이란 이름을 최초로 붙인 사람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담양 창평에 있는 [소쇄원]도
    조광조와 관련이 있습니다.
    (소새원은 양산보가 지은 집)

    양산보는 조광조의 제자로 현량과로 등용되었으나
    기묘사화가 발생하자 창평으로 낙향하여 더 이상 정개 진출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조광조가 귀양오자 화순까지 찾아왔던 인물 중 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 작성자 18.12.07 22:43

    위키백과에 적힌 양산보 이력

    양산보(梁山甫, 1503년~1557년)는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제주, 자는 언진(彦鎭), 호는 소쇄옹(瀟灑翁)이다
    총명·단정한 성품으로 어렸을 때부터 글을 깨우쳤다. 열다섯이 되던 해에 정암 조광조 문하에서 글공부를 하여 1519년 기묘년에 현량과에 급제하였으나 숫자를 줄여 뽑는 바람에 낙방하였다.

  • 작성자 18.12.07 22:29

    이를 안타깝게 여긴 중종이 그를 친히 불러 위로의 말과 함께 지필묵을 하사하셨다. 그해 겨울에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가 괴수가 되었다 하여 화순 능주로 유배되어 사약을 받고 죽자 원통함과 울분을 참을 수가 없어서 세상 모든 것을 잊고 산에 들어가겠다는 결심을 하고, 무등산 아래에 소쇄원이라는 별서정원을 짓고 두문불출하며 스스로를 소쇄옹이라 하였다.그 후에도 여러 번 벼슬길에 나갈 것을 권해왔으나 끝내 버티어 나가지 않고 한가롭게 산중에서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연구하며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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