公[공]의 휘는 예원이요 자는 숙부이며 호는 우암이다. 이조참판 휴휴당 형 세째로 1547년에 탄생하였다, 공은 용의가 준수하고 총기와 재주가 뛰어나 어릴적부터 주변 촉망을 받고 성장하였다. 공은 큰 뜻을 품어 1573년에 무과에 급제하고 1574년에 선전관이 되었다.
1577년에는 나주판관에 보임되었다가 2년 후 1579년에 내직으로 돌아와 도총부도사에 비변방을 겸하였다. 1581년에는 다시 외직으로 나가 보성군수에 보임되었고, 1583년에는 보화첨사에 전보되었는데,얼마되지 않아 부하들 잘못으로 문책을 당하여 종성으로 부처되었다.
그때 북방의 오랑캐 이탕개가 경원부를 습격해 왔다. 마침 종성에 부처되어 있던 공이 몇몇 주민과 함께 적이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방향에서 기습하여 격퇴시켰다. 이 공으로 공은 즉시 곽산군수에 기용되었으며,1591년에는 김해부사로 영전하였다.
김해로 부임한지 불과 1년도 안된 1592년 4월 왜적이 부산에 상륙하여 파죽지세로 쳐들어왔다. 다대포를 유린한 왜적이 서로군 (西路軍) 약 5만여명은 낙동강을 따라 북상하여 4월 19일에 김해성을 포위하였다. 공은 군사들을 성곽에 배치하여 진두지휘하였다. 그 중에는 김해 속군인
초계군수 이유검 군사도 있었다. 5만명 왜적들은 깃발을 휘날리며 기세를 돋우고 일제히 조총을 발사하였다. 성안 우리 군사는 활을 쏘아 대항하였다. 성의 주변에는 해자가 있어 적은 쉽게 접근할 수 없었다. 그러자 그 다음날 적들은 들에 있는 풋보리를 베어 성 주변 해자를 메우기
시작했다.우리 군사는 활을 쏘았으나 적은 보릿단 뒤에 숨어 있어 맞추기가 어려웠다. 그런 와중에 해자는 메워지고 그 높이가 성곽과 같게 되었다. 그리하여 왜적은 그 위로 기어올라 조총을 쏘며 성안으로 난입하였다. 이에 초게군수 이유검이 성문을 열고 먼저 달아나니
그 틈으로 적의 대병이 들어왔다. 상황이 이렇게 급변하자 공도 더 이상 버틸수 없게 되어 퇴각명령을 내리고 순찰사 김수 진영으로 갔다. 그간의 전투상황을 보고 받은 순찰사 김수는 이유검을 군법으로 처형하고, 공은 삭탈관직하여 백의종군케 하였다.
그런 중 의병장 김면이 평소에 공의 명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공을 자기 의병진의 중군사로 맞이하였다. 공은 처음에 성주.거진으로 진출하여 적의 배후를 기습하였다. 그곳의 적세는 심히 성하고 아군은 크게 위축되어 있었다.공은 비장 손경종과 함께 적을 기습하였는데 손경종이 한때 적에게 생포될 위기에 빠졌다.이에 공이 활을 쏘아 수십 명 적을 사살하고 손경종을 구출하였다. 그 후 지례 전투에서도 적병 수십 명을 사살했다.
공은 소수의 병력으로 치고 빠지는 일종의 게릴라전을 전개하엿던 것이다. 공의 의병대는 이와같이 여러 전투를 전전하면서 용인에 이르러서는 전날 갈천전투에서 적에게 잡혀갔던 많은 사람과 소와 말을 구출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공의 혁혁한 활약을 보아온 초유사 김성일은 진주목사 김시민이 부상의 휴유증으로 죽자 그해 12월에 공에게 진주 임시 목사직을 맡기고,보임을 상주 [ 상소 ] 하였다.그리하여 공은 익년 4월에 정식으로 진주목사에 임명되었다.공은 취임하자 곧 성곽을 보수하고 병력을 증강하였다.
진주성에는 이미 제1차 진주전을 승리로 이끈 2천 5백여명의 군사가 있었다. 이에 더하여 공이 병력을 증강시키니 휘하의 병력이 3천여명으로 늘어났다. 이와 같이 진주성이 요새화 되자 주변사람들이 피난처로 알고 모여 들어 피난민을 합하여 6만여 명이 넘었다.공은 현안의 중요 사건을 처리하고
도차사원 [ 명나라 군대를 맞이하는 의식 ]으로 함창 [ 경북 상주군 함창면 ] 에 가 있었다. 그 당시 대체적인 전황을 보면 평양까지 북상한 적이 강화를 빙자하여 남으로 철수하는 중 이었고,조선군과 명나라 군대는 그 뒤를 멀리 떨어져 지켜보는 상황이었다.그러던 왜적이 갑자기 모든 병력을 진주로 집결시킨다는 소문이 함창으로
들려왓다.이에 명나라 장수는 공에게 공성피성 하라고 권했다.즉 진주성을 왜적에게 내주고 후퇴하라는 것이다.공은 공병피성은 불가하다고 말하였다.6만여 명을 피난시키기도 쉽지않고,또 민족적 자존심이 용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은 명군에게 지원을 요청하고,진주 ~ 함창 6백리 길을 단숨에 달려가니 적의 침공 불과 2일 전이었다.한편 체찰사 유성룡은 전국의 관,의병에게 진주성을 외원 [지원 ]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그리하여 전국의 관,의병이 의령에 집결하여 정암나루를 건너 함안으로 들어갔다.그때 함안에는 사람들이 모두 피난갔고,
창고는 텅 비어 있었다.군사들은 먹을 것이 없어 풋감을 따먹는 지경에 이르렀고 군사들 사기는 극도로 저하되었다.
그러던 중에 적의 대포소리가 들리고 얼마 안되어 왜적이 산과 들을 메우고 쳐들어 왔다. 이에 전의를 잃은 도원수 김명원과 전라순찰사 권율이 전라도 쪽으로 철수하고 군사들은 모두 흩어졌다.그리하여 진주성은 홀로 외롭게 싸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공은 군사들을 성곽에 배치하고 임전태세를 갖추어 나갔다. 그런데 뜻밖에도 창의사 김천일.경상우병사 최경회.충청병사 황진 등이 약간의 군사를 이끌고 차례로 입성하였다. [ 7월 경상감사 김근의 전사자 보고에는 성군 [城軍 ]이 2천 4백 명,김천일 등 외지군[外地軍] 830명 으로 되어 있음]
이로 인하여 성안의 사람들은 사기가 진작되어 저마다 필승을 다짐하였다.6월 20일 왜적은 진주 경내에 나타났다.그들은 함안에서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일거에 진주에 당도했다.왜적은 5개군으로 나누어
제1군은 가등군 [加藤軍] 2만 3천 6백 명은 북문을 제2군 소서군 [小西軍 ] 2만 5천 1백 명은 서문을 제3군 우희다군 [宇喜多軍] 1만 3천 6백 명은 동문을 제4군 모리군 [毛利軍]과 제5군 소조천군 [小早川軍] 2만 2천 3백 명은 각각 외곽에 위치하여 아군의 외원 [外援]을 차단하니,합 [ 84600명 ]
진주성은 고립무원 의 고도처럼 되었다.그러나 성안의 사람들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우리 군사들은 성곽에 몸을 숨기고 활을 쏘와 적을 막았다.왜적은 총탄과
화전을 성안으로 퍼부었다. 화전이 간혹 초가에 떨어져 화재가 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신속하게 대처하여 큰 불로 번지지는 않았다.왜적들은 온갖 수단으로 공격을 가했으나 성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으니 적은 점점 초조해졌다.
왜적은 동문과 남문 앞에 몇 개의 고루를 세우고 그 속에 숨어서 조총을 쐈다. 우리 군사들도 축대를 높여 대항하였다.이와 같은 싸움이 6월 22일부터 29일까지 8일간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되었다. 우리 군사 3천명이 왜적 9만 명과 싸우는 대혈전이었다. 밖에서 조금만 지원해 주어도 왜적은 전의를 잃고 퇴각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바랐던 외원군은 오지 않고 궂은 비만 내렸다. 계속되는 장마에 활은 아교가 녹아 못 쓰게 되고,왜적은 비에 젖어 약해진 성곽을 허물기 시작하였다. 우리 군사들은 돌과 열탕을 부어 적을 물리쳤다. 그러자니 손이 모자라 집에 있는 아녀자까지 나와 적과 싸우게 되었다.27일 동문 근처 성곽 일부가
무너졌다.왜적이 개미떼처럼 기어 올라왔다.군사는 물론 아녀자까지 나와서 돌을 굴러 내리고 무너진 틈을 가시로 틀어 막았다. 28일 저녁에는 동쪽 성곽 일부가 또 무너졌다.그 곳 우리 군관민은 돌과 열탕을 퍼부어 적을 간신히 막았는데, 이를 먼 발치에서 바라본 북문 우리 군사 [김천일군] 가 성이 함락된 줄 알고
미리 겁을 먹고 흩어졌다.이를 성밖에서 바라본 왜적이 대거 북문으로 몰려와 성안으로 난입하였다. 우리 군사는 힘써 막았으나 중과부적 이었다. 왜적은 군과 민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 살상하였다. 그리하여 다음 날 6월 29일에 성이 함락되고 성을 지키던 6만 여명의 군.관.민 모두가 큰 피해를 입었다.
제2차 진주전은 비록 전투에서는 패했으나 전략적으로 승리한 전쟁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왜적은 이 전투에서 정신적으로 패해서 저희 나라로 철수했기 때문이다. 즉 진주 6만 군.관.민이 일치단결하여 죽음으로써 우리의 민족적 자존심을 빛낸 위대한 승리였다.이와 같은 전투를
훌륭하게 지휘한 공은 진실로 위대한 인물이었다. 체찰사 유성룡이 공의 친형 감사공 [監司公] 인원 [仁元] 에게 말하기를 제가 계씨 [季氏] 예원 [禮元] 의 인품을 잘 아는데, 계씨는 의분에 넘치고 지용을 겸비한 진실한 충신이라 했다. 충무공 이순신 난중일기에는 진주목사 서예원이 전사했다니 믿지 못할 일이라고 통탄한 구절이 있다. 또 영의정 정철이
명나라 사신 사헌 [司憲 ] 에게 보낸 글에는 전란 중의 충신 20인 중에 공은 10번 째로 기록하였다. 그러나 당시 조정은 공을 겨우 선무원종공신 [宣武原從功臣] 2등에 녹훈하는데 그쳤다. 하여간 공은 나라를 위하여 충절을 다했고,정부인 이씨 [貞夫人 李氏] 또한 그러하였다.
정부인 이씨는 부사직 이겸 딸로 양녕대군의 5세손이었다. 전투가 시작되자 자부[子婦]와 딸, 그리고 여종들을 거느리고 군대들의 취사장으로 나가 밥을 짖는 일을 돕다가 부군과 장자 계성이 전사했다는 말을 듣고는 자부 노씨와 미혼의 딸을 데리고 남강에 몸을 던져 수절했다.
공의 장자 생원 계성공도 종자 김이,춘년과 함께 적군으로 돌진하여 적 5 ~ 6인을 죽이고 전사하였다. 그리하여 공의 혈육으로는 세째 아들인 갈곡공 계현은 일찍 명암공 후로 출계하여 진주에 없었고, 둘째 아들인 계철은 얼마전에 장가들어 초행으로
함양 처가에 있었다.나이 불과 15세인 계철은 진주성 함락 소식을 듣고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무작정 진주로 달려가서 왜적에 항거하다가 포로가 되었다.왜장 가등청정은 그가 바로 진주목사 아들임을 알고는 일본 휘원 집으로 보냈다. 이렇게 한 왜장 가등청정의 진의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그런데 휘원 조상은 백제 태자를 따라 도일한 백제계 인물이었다. 그래서 휘원은 계철을 특별히 대우했다.하여간 그는 13년 만에 억류생활에서 벗어나 귀국하였다.
공의 일가충절 [一家忠節] 과 그 수난이 이와 같은데도 역사에서는 과소평가되는 것에 불만을 품은 그 손자 중 탁심, 유, 부자가 그 억울함을 상주하였다 [ 상소 ] 그 결과 순조 17년 [1817] 정축에는 공에게 충신의 정문 [旌門] 이 내리고, 광무 6년 [1902] 임인에는 공에게 자헌대부 군부대신을 추증하였다.그리고 순조 32년 [1832] 계사에는 정부인 이씨와 의인 노씨와 생원 계성 ,그리고 출가하지 않은
딸에게 각각 열녀,효자,효녀의 정문이 내려졌다.그러나 공에 대한 이와 같은 평가는 아직도 부족하다. 아직도 일부에서는 공에 대한 어불성설을 매도를 하고 있다.이는 선조실록의 왜곡된 기록에서 연유한다.
선조실록에는 목사서예원외겁전도 예원탈립기마제읍이행 서예원선주제군일지궤산 의 잘못된 기록에 근거하고 있다.[한문생략] 이는 그 당시 체찰사였던 유성룡의 징비록에 수록된 내용과는 너무나 판이한 것으로 선조실록에는 그 당시 전투의 실제 상황을 극도로 왜곡한 것이라
할 수 있다.실록의 편찬 자료는 처음에는 사초와 시정기로 제한했는데 시대에 따라 의정부일기.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일성록 등이 첨가되었다. 사초는 임금도 볼 수 없게 규제한 것은 그만큼 왜곡없는 정확한 실록을 만들기 위한 조처였다. 이와 같이 엄격한 편찬의 원칙과 규제는 실록의 수정을
원칙적으로 불가능하게 하고 편찬자가 자의로 항간의 잡문이나 낭설을 삽입할 수 없게 한 것이다. 그러나 선조실록은 당파적 알륵이 극히 치열했던 광해군8년 [1616] 병진에 편찬되었고, 인조 21년 [ 1643] 계미와 효종 8년 [ 1657] 정유에 두 번이나 수정 개편되었다. 이는 당파적으로 세번이나 조작된 것을 의미한다.더욱이 공에 대한 위의 기록들은 당시 실록의 편찬자료가 되는 의정부일기나
비변사등록 등 어디에도 찿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편집자가 항간의 낭설을 삽입한 것으로 이해된다. 즉 선조 때 없었던 것을 광해군 때 고의로 조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실록에는 당적이 서인인 [西人人] 김천일.최경회 등를 실제 역임하지도 않는
도절제.절제 등의 호칭으로 미화하고 과장하는가 하면 남인인 [南人人] 공을 혹독하게 매도하는 것으로 보아 이는 당시 집권세력인 북인,또는 서인들 농간으로 추측된다.이상과 같은 선조실록의 왜곡성은 서필량이 지은 임진왜란에 잘 조명되어 있다.
그리고 근래에 다수의 사학자들이 선조실록의 왜곡된 부분을 인정하고 공 [公] 에 대한 평가도 선조실록과 달리하는 것은 다행한 일이라 하겠다. 서씨통사 [ 徐氏通史 ] 에서 옮김
첫댓글 김성일 유성룡 김천일 김명원 권율 이순신 등 많은 인물들이
나오니 지루하더라도 읽으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