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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요즘은 카페에 글쓰기가 쉬운 시대는 아니다. 각자의 생각을 올리는 공간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또한 그러한 개별적 형태의 공간들이 갖고 있는 룰에 요즘을 사는 사람들이 익숙해지고 있어서 이기도 하다.
오히려 이제는 카페에 글쓰는 일이 더 낯설다. 그럼에도 이러한 공간에는 많은 것이 축적되어 있다. 공통의 기억과 공통의 학습과 공통의 경험들이 쌓여 있기 때문이다.
오래될수록 무거워진다. 우리는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휘청휘청한다. 기회만 있으면 달아날 생각을 한다. 그런데 달아나지도 못한다. 그러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터전이기 때문이다. 공동 농작지를 경작하듯이 모두 맞물려 있기 때문이며, 그 자신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집을 욕망한다. 그 자신을 쉬게 하고 반면에 그 자신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곳에서 인간은 소속당한다. 소속당한다는 표현이 걸리는가? 그렇다면 소속감이라고 해 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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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되어야 열정이 생긴다. 소속되어야 도취가 있고 거기서 충동적 의지가 솟는다. 합일되기 때문이다. 바깥에서 겉돌면 그런 것은 생기지 않는다.
어떤 집단이 중요한 이유다.
소속감이 없으면 그건 자기와 상관없다.
공동체나 집단의 '질', 즉 결합력이 낮아진 것이다.
그 무엇이든 너무 느슨해지면 에너지가 없다.
소속감을 가지려면 질이 높아야 가능하다. 질이 좋은 것은 유기적으로 맞물리기 때문이다.
가정 사회 국가 세계인으로 인간은 범위가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 '마이너스'해야 한다. 큰 원 안에 작은 원이 포개어지듯이.
그런데 처음부터 지엽적이면 마이너스 할 배후지가 없다. 그러면 내부를 쥐어짜고 그 안에서 적을 만든다. 히틀러 방식이다. 그러면 아이히만이 탄생한다.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의 주된 골자는 '생각의 무능력'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악은 만들어지는 것이지 처음부터 악은 아니다. 악은 환경이 만든 것이다. 환경이 그렇다면 개인으로서는 어쩔 수 없다. 요즘 시대의 악은 무엇일까? AI가 점점 성능이 좋아지고 있는 가운데, 인간에게 악은 무엇일까?
니체가 세계인을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기록상으로 '세계시민'이라는 말을 맨 먼저 사용한 사람은 '디오게네스'라고 알려져 있다. 디오게네스는 소크라테스 학문을 추종하는 학파의 하나로 '견유학파' 라고도 불린다.
디오게너스의 방식에서, 삶의 양식은 지금의 힌두교 일부 분파의 거리 수행자 방식 같기도 하고, 디오게너스의 언설들은 선불교의 공안의 느낌을 주는 거 같기도 하다. 니체는 견유학파에 대하여 '시니컬'하다고 하였다. '냉소적'이라는 것은 단순한 차가움이 아니다. 한겨울에 찬기운이 뼈에 스며들 때의 그 냉기이다. 한마디로 요즘말로 '뼈 때린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러한 것도 하나의 철학 방식이었다. 어찌보면 삶의 방식에서는 극단으로 흐른 형태이다. 하지만 호메로스적 소박함이 극단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 소크라테스와 차이점이 있다. 그것은 '단순성'에 있다. 왜 단순한가? 하면 그만큼 얽히지 얺았기에 단순한 것이다.
원래 기원으로 올라갈수록 단순하다. 그래서 오히려 그리스 철학에서 파생한 현대철학은 어려워도 고대 그리스 철학이나 글은 오히려 복잡하지 않다. 한글 번역본도 읽기에 무난하다.
우리가 이곳에서 기원을 바라보면 그것은 귀납적이다. 귀납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며, 자기의 근시안에 다 끼워 맞춘다. 그리고 안 맞으면 제외시킨다. 반면 시원에서 우리가 있는 쪽을 바라보는 것은 연역이다. 그러므로 서구에서 보는 고대 그리스 사회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사회, 즉 호메로스와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시절의 그리스를 황금기로 보는 것이다. 긴 역사에서 보면 아주 짧고 작은 틈에 가깝다. 이 시대를 사유하고 모방하면서 서양 문학은 성장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은 연역적 사고를 할 때 어떤 시야가 교정된다. 그렇다고 그것이 바로 되는 것은 아니다. 훈련을 통해야 한다. 아마도 고전을 읽는 이유가 거기에 있지 않을까. 그 시선으로 현재를 보아야 전체적으로 조망하게 된다. 그것이 그 자신을 세계를 확장하는 것이다. 세계가 확장되면 풍성해진다. 그 풍성함을 사유하면 깊어진다.
그 사람을 이해하려면 그 사람처럼 생각해야 한다. 즉 그 사람이 어떤 툴을 쓰고 어떤 관점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지 이해해야 한다. 이 방식이 연역적 방식이다. 이를테면 호메로스 세계를 이해하려면 호메로스처럼 생각해야 하고 아이스킬로스를 이해하려면 아이스킬로스처럼 생각해야 하고, 니체를 이해하려면 니체처럼 생각해야 한다. 이것이 모방이다. 모방은 형식을 모방하는 것이다. 그들이 어떤 도구를 사용하였는가이다. 그런데 그들이 모방한 도구는 모두 '동일한 것'이었다. 예술의 원리다. 인간안에 내재된 도구를 사용한 것이다. 결국 인간의 삶은 이것을 계속 연마하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 것.
어떤 복잡해 보이는 것이 실상은 가장 단순하다. 단지 눈에 보이는 것에 의해 복잡해보일 뿐이다. 딱 하나만 남기고 다 삭제하였다면, 거기서 풍부함을 보아낼 그 자신이 먼저 만들어져야 하며, 또한 그것을 감상하는 이 역시도 그 자신이 먼저 만들어져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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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공간이든 그 공간에 맞는 창의가 일어난다. 그럴 때 그 공간이 발전하는 것이다.
그런데 SNS에서는 되는 것이 카페에서 안 된다면 어떤 문제가 있다. 결국 관심도와 시선집중이 멀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이것도 저것도 모두 흥미와 멀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각자 하는대로 하는 것이지만, 원래 멍석 깔아주면 추던 춤도 안추는 것이 인간이다. 굳세게 잘 놀다가 갑자기 누군가 위로해주면 화를 내는 것도 인간이다. 결국 사람은 피곤한 동물인 것이다. 그러니 너무 가까이도 너무 멀리도 말고 딱 적당한 거리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간혹 훅 들어오거나 또는 냉소적이거나 또는 과하게 친절하거나 또는 과하게 어색어색하거나 또는 과하게 불친절하거나 또는 과잉 방어하거나 또는 과잉 꼰대거나 또는 과잉 친한척 함이거나 또는 감정과잉이거나 또는 무기력하거나 또는 잠적하거나 또는 남탓하거나 등등 수도 없이 열거가 가능하겠지만, 이 모든 특성들이 인간이다. 반면 이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는 것도 인간이다. 어쨌든 인간이 적당한 중간을 유지하기는 쉬운 일도 아니고 가능한 일도 아니다. 어떻게든 치우침이 있는 것이 인간이다. 이 치우침에서 아주 조금만의 균형을 회복하면 인간의 삶은 무난해진다. 자기 안에 균형이 회복되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자기만의 기울기를 가지고 산다. 그 기울기에는 각자의 균형회복 방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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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동안의 인터넷 생활에서, 카페도 다른 SNS방식처럼 '자기만의 글 통합 관리'가 가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처럼 '자기 담벼락'에서 글 관리가 가능해야 한다고 본다.
지금처럼 관리자가 따로 있기 때문에 서로가 어떤 불편함이 있는 것이다. 각자가 SNS처럼 관리하면 되는데, 카페는 누군가가 대신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 서버 방식의 문제도 있으니, 이것은 일단 미뤄두어야 한다.
한편으론 DAUM 브런치 방식은, 다음 서버에 연동되어 있기 때문이겠지만, 메인 화면이 카페처럼 다음 브런치 운영 방식의 의지가 드러나 있다. SNS처럼 뉴스피드 방식이 아니다. 그렇기에 글들이 강물처럼 흐르고 있는 방식은 아니다. 알림으로 친구형성 되어 있는 사람들의 글이 뜬다. 각자의 담벼락을 방문하려면 일일이 찾아가야 하는 것은 동일 하다. 나는 이 방식에서 내가 페북이나 인스타에 익숙해져 있었구나를 자각하게 된다. 반면에 자기 글 완성하고 정돈하기에는 용이하다. 카페와 블로그와 페이스북의 기능이 섞여있다고 보인다. 그리고 글쓰기 포맷이 예쁘다. 글 쓰는 도구 환경이 좋다. 반면에 글을 쓰고자하는 사람들이 모인 공간이다. 그런데 글만 쓰고 싶을 때는 좋아요 교류를 안하면 미안해진다는 단점이 있다.
DAUM 카페 앱은 그야말로 성의가 없는 앱이라고 생각한다. 악간 뉴스피드 방식이기는 하지만, 그것의 형식은 아름답지 않다. 더구나 카페는 이미 만들어진 형태상 어쩔 수 없이 공간성이 중요한데, 카페 앱은 공간성을 느낄 수가 없다. 게시판 찾기도 뒤섞여있다. 이 정도면 그냥 카페 글 보는 차원에서 접속하기 편하라고 서비스 해주는 정도에 불과하다. 카페는 개별 공간이어서 글이 올라오지 않으면 멈춰 있기에 더 그렇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변화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인스타그램은 원본 사진대로 안 올라가는 단점이 있다. 그래도 이것저것 구경할 것이 많다. 영상 만들 때 음악제공 되는 것은 페북이나 유튜브와 동일한 기능이어서 영상 만들기에 좋다.
우리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카페는 이러한 대상들과 경쟁 아닌 경쟁을 하게 된 셈이다. 조용한 섬처럼 고요한 상태에서 번화한 곳들과의 경쟁이다.
또한 카페는 무언가 확실한 것이 없으면, 요즘은 경쟁 자체가 안 되는 것 같다. 이것은 유튜브나 인스타그램도 마찬가지다. 페이스북이나 브런치는 글과 사진이 주가 되니까 그나마 덜 영향을 받는다.
유명하거나 유입할 상업성이 없으면 사람들도 찾아오지 않는다. 사고 팔것이 없으면 요즘 시대는 그 공간이나 사람들이 유입되어야 할 의미도 상실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무엇인가를 계속 광고하고 알리는 사람들은, 알리고 홍보해야 할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반복적으라도 하게 된다. 반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그럴 이유도 목적도 없기 때문에 아예 안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것을 계속 생각해야 하고 다듬어 나가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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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어떤 자리에 가든, 또는 삶에서 간혹 인상적인 순간은 있다. 그런 것에 대해 짤막한 글 사진하나 정도의 시간을 내는 일은 성의 표현에 해당할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항상 한 사람에게 그것을 다 맡겨버린다. 그러다보면 결국 사람은 많은데 한 사람만 뭔가를 하고 있다. 그 자신이 안 하니까 한 사람만 부각되는 것이고, 나머지는 모두 증발되는 것이다. 나서는 게 싫어서, 비교 당하기 싫어서, 자신은 근엄하니까, 나이도 먹었는데 굳이 뭘 그런 걸, 참석한 것이 어딘데, 뒤에서 묵묵히 있겠..., 오프에 나오면 되지 인터넷에 글과 사진을 왜 올..., 그런 거 할 시간이..., 한가한 사람이나 인터넷 하지, 인테넷은 시간 낭비..., 피곤해..., 기분이 나빠서, 서운해서..., 취향에 안 맞아서, 조회수가 떨어져서, 댓글이 없어서..., 심심무미함이 좋아서....등등 이유는 무수히 많다.
그런데 공간이 있으면 그 공간에는 무엇이든 유입이 되어야 한다. 살아있는 근거는 바로 소화하는 기능일 것이다. 그것은 먹는다는 행위일 것이다. 자기가 거주하는 집도 살아 있다.
나는 차맛어때 메인화면과 게시판 정비와 각 게시판 공지가 차와 차맛어때가 나아갈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일단은 현재에서, 게시판 정비로 만족한다. 그 외의 일은 세월의 시간 안에서 해결되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2023년에 차맛어때 집단장 새로 한 그것에 만족하며, 정리된 공간에서 그것을 잘 사용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글을 쓰는 이유는 강요의 목적이 아니다.
어차피 시간 안에서 무르익어야 할 것들은 시간을 보내는 과정에서 무르익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각자의 시간을 잘 보내면서 한번쯤 차맛어때 카페에 대해서 다시 잘 생각해 보자는 의미이다. 어떤 일을 하면 그것에 능통하도록 그 자신을 모두 연마한다. 카페의 일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생활은 늘 바쁘고 어느덧 모두 중년을 넘어가고 있다. 어쩌면 그것이 가장 문제일 것이다. 그런데 바로 거기에 우리의 균형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이제는 어떤 기울기의 분기점을 지나고 있기 때문이다. 차맛어때는 이제 23살이지만, 그 안의 사람들은 이미 노쇠해졌다. 젊음의 묘약을 각자 잘 구비하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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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은 폰으로 카페 앱에 접속하여 생각나는 대로 써본것입니다. 어딘가에서 쓴 글이 아닌, 카페에 바로 접속해서 바로 글 써서 올리기는 정말 간만입니다. 그러니 제 문체대로 썼으니, 그렇게 양해를 바랍니다.
* 요즘은 이래저래 조금 바쁩니다. 겉으론 한가한데 속으론 바빠요. (게다가 주말엔 틈틈이 캠핑도 가야 합니다. 이스크라님 유일한 낙이니 제가 협조해야 합니다~)
글과 책 정리할 것들이 밀려 있어서 올해는 그렇게 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 카페는 틈 나는 대로 생각나는 글 있으면 써서 올리려고요.
독락차도도 틈틈이 하구요.
그 외에 게시판까지는 손을 미치기가 쉽지 않습니다. 다 책을 읽고 써야 가능한 것이니까요. 차관련 글 역시 가볍게 쓰면 되겠지만, 하고 있는 것과 분리가 쉽지 않아서 그것도 여의치가 않습니다.
어쨌든 차차로 이루어지겠지요.
그럼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