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인간 - 김동식 (요다출판사)
김동식의 회색 인간은 20여 편의 짧은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극단적인 사건을 통해 인간성에 대한 고찰을 불러일으키는 공포스러우면서도 매력적인 단편집이다.
하루아침에 말도 안 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인간들이 어떻게 상황을 인식하고 받아들이고 행동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대체로 소수자의 이야기가 많지만, 첫 번째 이야기인 '회색 인간'이 가장 큰 화두를 담고 있다.
어느 날 지하에 살고 있는 지저인들 이 지상의 인간 만 명을 납치해서 땅속을 파게 하다. 납치된 인간들은 지저인들의 무서운 능력에 놀라며, 빼도 박도 못하고 땅을 파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지저인 이 시키는 대로 땅을 파는데, 먹을 것도 입을 옷도 잠잘 곳도 마땅치 않은 곳에서, 고된 노동과 배고픔에 지쳐가다 하나둘씩 죽게 되고, 절망과 좌절을 겪으며 자살까지 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고된 삶이 그들을 점차 무감각, 무감성, 무감정의 인간으로 만들어간다.
투박한 곡괭이 하나로 지저인 이 충족하는 만큼 땅을 파주고 다시 지상으로 올라가려는 목적의식! 그것 하나가 유일한 희망으로 남아 그들을 움직이게 한다.
실오라기 같은 희망마저 없다면 무엇으로 이 삶을 버틸 수 있단 말인가.
땅속에서 벗어나기 위한 '절망의 곡괭이 질'을 하는 그들을 김동식은 '회색 인간'이라 부른다.
감정, 감각, 감성을 모두 잃어버린 회색 인간.
감정의 동물인 인간이 감정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것이 불문율이 돼버린 음울한 땅속에서 한 여인의 노랫소리가 삐져나온다.
회색 인간들은 노래가 감정의 사치라고 여겨졌는지 여인에게 돌멩이를 집어던지지만 돌멩이 세례 속에서도 여인의 노래는 멈추지 않는다. 메마르고 갈라진 입술 사이로 삐져나오는 노랫소리.
그녀는 왜 노래를 불렀을까?
인간이 동물들과 다른 점은 아마도 반추하는 삶일 것이다.
자신의 삶을 돌아 보았을 때 지상에서 평범하지만 가장 완벽했던 삶이 철저히 파괴되고 굶주림과 육체의 고통,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는 상실을 겪으며 마음의 문을 닫았지만 " 이렇게 살다 죽으면,,, 그만"이라는 마음속 웅얼거림이 더 끔찍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
들끓어 오르는 그 감정들을 눈물이 아닌 그 무엇으로 표현해야 하는가.
그녀는 뱃속에서 올라오는 (나는 아직 살아있음을) 그 감정을 노래로 표현한 것이 아닐지.
그녀의 노래로 사람들은 영향을 받고 확산되어 글로 노래로 씨앗을 심는다.
이제 회색 인간들은 땅속의 처절한 삶을 남기고 싶어 한다.
먼지처럼 사라져 버리는 그런 사람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흔적이라도 남기고 싶은 것이다. 여전히 곡괭이로 땅을 파야 하지만, 그 몸짓이 예전의 몸짓과는 달라진 것이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 아닐까. 매일매일 반복되는 지긋한 일상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삶을 살 수 있음을 회색 인간들이 알려주고 있다.
--18기 박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