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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주로 집에서 불법佛法을 닦으시는 재가불자님들을 위한 백일기도 입재법회入齋法會입니다.
재가불자 가운데서 우리는 가장 존숭할 수 있는 그런 분들을 몇 분 알고 있습니다. 우선 인도에서 유마거사維摩居士, 유마거사라는 분은 부처님 당시에 불지佛地에 올라가신 부처님과 동등한 그러한 법을 깨달으신 그런 분입니다. 또는 중국에서는 방거사龐居士 이분도 역시 우리 출가 승려 못지않은 위대한 그러한 성자입니다. 한국 또한 부설거사浮雪居士 같은 이분도 역시 출가승려 못지않은 위대한 도인입니다.
인도에서 유마거사는 그 당시에 우연득병偶然得病이라. 몸이 좀 불편스러워서 부처님께서 제자님들을 보내서 문병을 했단 말입니다. 그때 그 문수보살文殊菩薩이 1,200명 이상의 제자를 거느리고서 유마거사를 문병했단 말입니다.<주: 팔천보살, 오백성문, 백천천인이 함께 방문> 유마거사가 거처하는 방은 방장方丈이라, 방장의 방은 사방四方열자 방(3평 남짓의 방)입니다 우리 보통 사람들이 거처하는 방보다는 조금 작을 정도입니다. 그렇게 방장方丈밖에 안 되는 유마거사의 방인지라 천명 넘는 그런 수가 도저히 들어갈 수는 그때는 엄두도 못 냅니다.
그런데도 1,200명 되는 수가 방장方丈되는 하나의 방에 딱 들어앉는데도 조금도 방이 좁지가 않단 말입니다. 몇 겹으로 앉았는가 그것은 모르지만 하여튼 조금도 좁지가 않단 말입니다. 유마거사는 그와 같이 갖은 그러한 신통자재神通自在하는 그러한 분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문수보살이나 그런 분들이 염려를 많이 했단 말입니다. 과연 문병을 해야할 것인데 조그마한 방에서 어떻게 우리가 들어가야 할 것인가. 그런데도 그 유마거사의 그러한 도력道力으로 해서 어떻게 앉아있는지 모르지만은 조금도 좁지가 않단 말입니다.
저는 여기 와서 그것을 지금 간절히 느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법당法堂도 좁고 이렇게 벌써 엄동설한嚴冬雪寒인데, 한寒데서(추운 곳에서) 앉아서 계시는 분이, 소중한 우리 불자가 계신다고 생각할 때에 제 마음은 지극히 괴롭습니다. 어째서 공부를 부지런히 못해서 유마거사 같은 그런 법력法力을 내서 이러한 작은 법당에 다 모시게 할 수가 없는 것인가. 비단 저뿐만 아니라 우리 한국 출가 승려는 모두가 다 저와 같은, 같은 마음을 가질 것입니다.
이런 때, 이렇게 혼란스러운 때, 중생들이 갈 길을 모르고서 혼돈을 거듭할 때, 이런 때일수록 꼭 유마거사 같은 그런 법력法力있는 도인이 필요한 때입니다. 그런데 적막하게도 우리는 그러한 분을 지금 만날 수가 없습니다. 우선 제 자신이 삼세三世 부처님과 또는 여태까지(지금까지) 우리 재가신도한테 빚을 지고 살아온 그런 처지에서, 참회懺悔하는 그런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무슨 말씀을 좀 많이 드리고 싶습니다만 장소가 이래서 잡다한 말씀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양을 치는 그러한 목자牧者가 양을 기르는데 가장 그러한 곳에 살기 좋은 양이 아, 튀어나가서 그냥 그때는 우리를 벗어나서 길을 헤맨단 말입니다 그러면 마땅히 목자가 양을 찾기 위해서 뒤를 쫓으겠지요. 헌데 양이 도망간 그런 길이 한 갈래 길밖에 없다고 그러면 지극히 그때는 찾기가 쉬울 것입니다. 허나 이 갈래 저 갈래, 길이 많으면은 도저히 어디로 갔는가, 양을 찾을 길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부처님 당시 같은 그러한 소박한 때, 그러한 미개한 때도 역시 96종 외도外道라. 우리 불교가 하도(너무) 갈래가 많아서 불교 가운데도 역시 많은 파派가 있지만은 딴 종교나 딴 그런 주의나 그런 것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96종이라, 96가지나 그런 외도, 즉 삿된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있단 말입니다. 헌데 하물며 3,000년 세월이 지나간 오늘날은 그 당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굉장히 굉장히 삿된 것이 많이 있습니다. 불교를 믿는다 하더라도 부불법외도附佛法外道라. 말은 불법佛法이지만 이상한 그 삿된 견해를 갖는다 말입니다. 또 불법외외도佛法外外道라, 불법을 믿지 않는 그런 딴 외도가 또 많단 말입니다. 따라서 부처님 당시에 96종의 삿된 견해가 있다고 그러면 현대사회는 그야말로 몇 배, 몇 십 배의 이런 사도邪道가 있을 것입니다. (계룡산의) 신도안新都案 같은데 가본다고 그러면은 자칭 교주를 참칭僭稱하는 그러한 종파가 또 100여 종이나 있습니다.
이런 때는 아까 말씀마따나 갈래가 많으면 잃어버린 양을 찾을 수가 없듯이 하도(너무) 주의도 많고, 하도 주장도 많고 하도 교敎가 많은지라, 어느 길을 가야만이 바른 길을 갈 것인가? 현대사회가 분명히 지금 혼란 가운데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어떠한 것이 바른 견해인가? 이러한 것은 모르기에 개인적으로도 구제 못 받고, 가정도 불화스럽고 민족도 결합이 못 됩니다. 하여튼 모든 분야에서 꼭 바른 길을 알아야 할 것인데, 어떠한 것이 바른 길인 것인가?
우리 불가佛家 내에서 부처님 제자는 누구나가 성불成佛을 바랍니다. 허나(그러나) 성불 이것도 역시 성불할려면 꼭 화두話頭를 의심해야 한다. 더러는 꼭 염불念佛을 해야 한다, 또는 주문呪文을 해야 한다. 아, 지금 저 티베트에 있는 밀교密敎나 그런 파派들은 옴마니반메훔만 꼭 성불의 길이다, 딴 것은 저만큼 저차원의 것이다. 우리 한국도 조계종曹溪宗에서는 어느 문제를 의심을 해야만이 그것이 참선이다. 딴 것은 그런 참선參禪도 아니다. 염불이나 그런 것은 저 하근중생下根衆生이 하는 것이다. 이렇게 혼돈무비混沌無比합니다.
이런때는 아까 말씀마따나 길이 많으면 양을 찾을 수가 없듯이, 잃어버린 양을 찾을 수가 없듯이 잃어버린 진리, 참다운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 이것은 찾을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제한된 시간에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바른 견해(정견正見)를 갖는 것인가? 또는 바른 견해를 가지고서 어떻게 공부해야만이 우리가 바라는 바 성불成佛이라 하는, 자기 성취라 하는, 인격 완성이라 하는 그런 것을 달성할 수가 있을 것인가? 그런 문제를 지각知覺해서 말씀을 하겠습니다.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우리의 신앙 대상은 부처님입니다. 여러분 지금 보시는 바와 같이 우리 법당에도 지금 가운데는 주세불主世佛을 모시고 있고, 저 양편에는 또 신중神衆님들이 계시는 것이고, 또 저편에는 지장보살地藏菩薩님을 모시고 있고, 다 같은 뭐다 부처님인데 과연 그러한 부처님들은 어떠한 연관성이 있는 것인가?
다른 종교에서 본다고 할 때는 마치 다신교多神教라, 불교는 다신교라, 이것도 믿고 저것도 믿고, 다신교 같으면 이것은 원시 종교 같은 그런 형태가 아닌가? 이와 같이 젊은 사람들은 저항을 느끼기도 합니다. 또 상당히 불교를 연구했다는 분도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은 자비스러운 어머니 같은 그런 분으로 따로 있고, 아미타불阿彌陀佛은 또 아버지 같은 그런 분은 따로 있고, 이와 같이 우리 신앙대상인 부처님을 별도로 생각들을 많이 합니다. 지장보살地藏菩薩은 또 따로 있고. 이렇게 보면 참 이렇게 바쁜 세상에 한 가지만 가지고 나가도 어려운 때인데, 이렇게 저렇게 하면 우리 마음이 집중이 안 됩니다. 이래서는 부처님이 우리 마음의 힘으로 해서, 우리 마음의 주인공으로 해서 그때는 자기 가슴에 딱 안 닿습니다.
무변대해無邊大海에서 바람이 불면 바람 따라서 천파만파千波萬波 물결은 이렇게 많이 일어납니다. 그 거품도 수만, 수천 개의 거품이 일어납니다. 그렇게 수천, 수만의 파도가 일어나고 거품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똑같은 그 습성習性(본질)이라는 것은 물입니다. 물 관점에서는 똑같습니다. 그렇듯이 비록 부처님의 이름도 불교 말씀으로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이라, 삼천불명경三千佛名經이라는 경을 보면은 부처님 이름이 삼천불三千佛이나 계십니다. 과거 천불, 현재 천불, 미래 천불, 삼천불이나 계십니다. 삼천불 이름이 다 있습니다.
그와 같이 많은 이름이 있고, 또 우리가 우선 아는 바와 같이 아미타불, 지장보살,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문수보살 이런 이름이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있다 한다 할지라도 부처님이라 하는 하나의 신비로운 원융무애圓融無碍한 우리 중생의 말로나 중생의 글로 해서 표현할 수 없는 그러한 부처님은 한 분뿐입니다. 우리 중생은 한계를 짓습니다. 우리 중생은 대립적으로 한계를 지으나, 부처님의 원생명源生命(근본생명)은 그런 한계가 그때는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불교 말로 해서 원융무애圓融無碍라, 모든 진리를 다 갖추어 있고, 모든 지혜나 또는 가능을 갖추어 있는 그러한 부처님 생명 한 분뿐입니다.
물론 이런 소박한 말을 불교를 좀 연구하신 분들은 그냥 아십니다만은 특히 재가불자在家佛子로 해서 미처 잘 모르신 분들은 제 말씀을 명심해서 잘 들으셔야 합니다.
방금 말씀마따나 부처님의 이름이 많이 있고, 자칫하면 우리가 따로따로 덜 익은 다신교 모양으로 믿게 될 그러한 염려가 있습니다만, 그러한 것은 방편성뿐인 것이고 부처님은 한 분입니다. 한 분이나 한 분 그분이 저 하늘 위에 가서 혼자 계시는 분은 아닙니다. 나의 본래면목本來面目, 내 마음의 본체本體도 부처님이고, 저 사람 마음의 본체도 부처님이고, 일목일초一木一草라, 하나의 풀이나 또는 돌이나 또 하늘의 별이나 천지우주의 모든 본 바탕, 본 실상實相 이것이 부처님입니다.
인간이 알 수 없는 그 무엇, 그 무엇인 생명 이것을 불교에서는 이제 주인공이라, 여래如來라, 또는 법성法性이라 또는 법신불法身佛이라. 그와 같이 말을 이러고 합니다만 이름은 그때그때 붙인 것이고, 아무튼 하나의 원융圓融한 우리 중생들이 헤아릴 수 없는 그러한 우주적인 생명 이것이 부처님입니다. 따라서 다시 바꿔서 말하면 그러한 부처님 위에 우주의 모든 존재는 거기에서 건립建立이 되었습니다. 다시 적극적으로 말씀하면 천지우주가 바로 부처님입니다.
그 부처님을 성품性品으로 우리가 말할 때는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불성佛性이라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고, 부처님은 생명이기 때문에 우리가 생명이듯이 일체생명의 본질인 부처님 또한 생명이기 때문에, 생명적으로 인격화시켜서 우리가 말할 때는 그때는 법신法身부처님, 바로 부처님입니다. 이것은 부처'님'입니다. 일체만유一切萬有의 본성本性이라는 점에서는 불성佛性이라고 표현하는 것이고, 그 불성이 인격이기 때문에 부처님 또는 법신불法身佛로 그렇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의 우주대宇宙大의 부처님 우주 전부가 바로 부처님 덩어리인데, 이러한 부처님은 다만 그러한 원리일 뿐만 아니라, 우리 중생을 영원한 해탈解脫로 인도하는, 영생永生의 길로 인도하는 원래 목적의식이 있습니다. 하나의 풀이 자라면 꽃을 피우고 또 열매를 맺고 하듯이, 우주의 본생명 부처님 또한 부처님한테서 이루어진 모든 중생을 다시 부처님 품안으로 끌어들이는 그런 목적의식이 있습니다. 불교 말로 하면 원력願力이 있습니다. 그런 원력이 간추려서 말하면 사홍서원四弘誓願이지요. 조금더 퍼드려서(자세히 풀어서) 말하면 아미타불阿彌陀佛 48원願이나 그와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만 아무튼 부처님의 원래 목적 원래 부처님한테 갖춰있는 우주의 그러한 우주의지 이것은 한도 끝도 없이 많으나, 간추리면 아까 말씀마따나 일체 중생을 다 부처님 품 안으로 이끌어 드리는 그러한 목적이 있고, 그러한 원력願力이 있습니다. 간추리면 아까 말씀마따나 발사홍사원發四弘誓願이라, 모든 중생을 다 제도한다, 모든 진리를 다 깨닫는다. 그러한 원력이 우주에는 원래 있습니다.
물론 우리 중생은 눈에 보이는 것이 한정되어 있고, 아는 것도 한정되어 있어놔서 이러한 부처님의 그러한 정신을, 우주의 의지를 우리가 알 수가 없습니다. 다행히 석가모니를 위시한 그 뒤에 나오신 깨달은 분들, 우주의 본성을 깨달은 분들 이러한 분들의 말씀 따라서 우리는 알고 있을 뿐입니다.
아까 말씀마따나 바른 견해를 가지고 바르게 산다는 것이 불교의 목적인데 어떠한 것이 바른 견해(정견正見)인가? 이러한 것은 제가 어렴풋이 말씀해 왔으나 부처님이나 각 도인들이 깨달으신 우주의 본뜻 불교 말로 해서 법이자연法爾自然이라, 우주의 대원리大原理에 입각은 그러한 진리, 이것이 바로 정견正見입니다. 이것이 바른 견해입니다. 그러면 정견正見은 어떤 것인가? 대체로 말씀해 온 바와 같이 우주 이대로가 바로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비록 내가 깨닫지 못해서 내가 탐심貪心도 부리고, 진심瞋心도 부리고 또는 남을 미워도 하고 그렇게 한다 할지라도 나의 본질뿐만 아니라 우주 전체 본질이 바로 그때는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이러한 부처님을 자비로운 면에서 본다고 할 때는 그때는 관세음보살입니다. 지혜로운 면에서 본다고 할 때는 그때는 대세지보살이고 또는 문수보살입니다. 우리 중생의 영혼을 인도하는 그런 면에서 본다고 할 때는 그때는 인로왕보살이고 또는 지장보살입니다. 하나의 원융圓融한 우주의 덩어리인 생명체인데 생명체 가운데서 방금 말씀마따나자비로운 방면에서 본다고 할 때는 그때는 관세음보살이고, 또한 전부 통틀어서 총체總體를 본다고 할 때는 그때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인 것입니다. 하나의 어느 사람의 어머니가 자기 남편이 본다고 할 때는 그때는 아내고 또한 그 어머니의 언니가 본다고 할 때는 동생이겠지요. 자식이 본다고 할 때는 그때는 어머니이고 말입니다. 똑같은 또 하나의 여성이지만 보는 각도에 따라서 남편이 보면 그때는 아내고 그렇게 되듯이 부처님도 원융圓融한 우리 중생이 알 수 없는 하나의 우주 대생명인데, 생명을 아까 말씀마따나 자비로운 면에서 본다고 할때는 관세음보살이란 말입니다.
우리 불자는 그러한 것을 분명히 알으셔야 합니다. 그래야 바른 견해 바른 정견正見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또한 그러한 부처님 가운데는 일체공덕一切功德이 갖추어 있습니다. 비록 부처라는 것이 우리의 본질이라 한다 할지라도 부처 그것이 별로 재미도 없고 능력이 없으면 그것은 별로 가치가 없습니다. 허나(그러나) 그러한 부처 가운데는 행복이나 또는 지혜나 신통神通이나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불교 말로 해서 일체종지一切種智라.
우리 불교인들이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 내 본바탕 우주의 본질이 바로 부처고, 부처 가운데는 일체의 공능功能이 다 갖춰있다. 이렇게 확실히 믿어야만이 그래야만이 불교의 바른 신앙 그래야 정신正信입니다. 이걸 못 믿으면 팔만장경八萬大藏經을 독파하고서 외인다 하더라도 바른 신앙은 그때는 못 됩니다. 비록 내가 부처가 못 된다 하더라도 석가모니께서나 그 뒤에 나오신 도인들이 다 일구여출一口如出로 말씀하신지라, 우주 전체가 바로 부처님이고, 부처님은 신비부사의神祕不思議해서 일체공덕一切功德을 다 갖추고 있다. 대체로 우리 불자들이 아시는 바와 같이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마음이 바로 부처라는 그런 말씀들을 합니다.
우리들은 나같은 이와 같이 못난 마음이 어떻게 부처일 것인가? 허나 이것은 다만 우리가 우리 본질을 못 볼 뿐이지, 우리 마음도 역시 부처라는 그 불심佛心의 이것은 한 국부局部입니다. 그리고 형상에서는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마음은 조금도 불심佛心하고 내 마음 지금 내가 쓰는 마음하고 그때는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 마음 깊이가 얕아서 마음의 초점만 좀 쓰고 있어놔서 부처님의 무한공덕無限功德을 우리가 발휘만 못할 뿐이지, 내내야 지금 나의 본 마음인 부처님 그 불심佛心하고 내 마음은 그때는 조금도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좀 닦은 사람들은 그때는 부처한테 있는 무량공덕無量功德을 조금 더 쓰고 말입니다. 덜 닦고 업장業障이 무거우면 그때는 좀 덜 쓰고 하겠지요. 이렇게 우리는 소중한 불교를 믿고 있는 것입니다.
허나 증도가證道歌(영가현각永嘉玄覺선사, 665~713)에서도 말씀하고 또는 신심명信心銘(승찬대사僧璨大師, ?~606)이라는 그런데도 말씀합니다만, 지도무난至道無難 유혐간택唯嫌揀擇이라.<신심명信心銘> 대도大道(지극한 도)라 하는 것은, 큰 진리라 하는 것은 별로 어려운 것이 없고 바로 대자연의 길인데, 우리가 자꾸만 낯비(차별해서 일일히) 헤아려서 그때는 우리가 못 본다 말입니다.
밖에 계신 어른들한테 참 죄만스럽습니다. 이렇게 제가 말씀을 드려도, 죄만스러운 마음이 자꾸만 앞서서 말이 막히고 합니다.
중국에서 어느 위대한 참 이름난 그런 스님네가 계신단 말입니다. 마치 갖다가 그 스님이 계시는 절 근처에 가서 이제 또 신도님들이 계신단 말입니다. 그러니깐 이제 신도님들이 (그 스님이) 마땅히 참 도인인지라, 그 스님을 숭배 안 했겠어요. 숭배하고 그때그때 그 스님께서 필요하신 것을 다 이제 갔다가 보급해 드린단 말입니다. 근데 신도님의 한 딸이 그냥 그 어떻게 마음을 잘못 먹고서 남자하고 같이 사통私通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냥 임신을 했단 말입니다. 그러니깐 이제 임신을 해 놓으니깐 자기 부모님들이 알게 안 되겠어요.
근데 옛날인지라, 어떻게 변명하자니 그것이 큰 탈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그 여식이 즉 말하자면 임신한 아가씨가 생각하기를 우리 부모님께서 저기 있는 저 스님네를 하도(너무) 숭배하니까 스님네하고 같이 통했다고 그러면 이제 별로 허물이 없겠지, 그렇게 그 단순한 마음에서, 자기 부모님이 추궁하니깐 제가 부덕不德해서, 스님네하고 통해서 임신을 했다고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깐 참 자기 부모님들의 마음이 그야말로 억장이 무너지거든요. 그와 같이 그 생명의 은인恩人같이 귀한 분인데 그 분이 하필이면 그런 몹쓸 짓을 했다고 생각할 때에 참 한탄스럽거든요.
그렇지만 그걸 할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절에 가서 여태까지 숭배해 왔지만 스님한테 대해서 그대로 아니꼽게 말씀했단 말입니다. 그게 무슨 짓이냐고 말입니다. 일반 속인俗人도 감히 할 수 없는 것을 갖다가 청정 스님네가 그게 무슨 짓이냐고? 그러니깐 그 스님네가 '아, 그렇습니까?' 조금도 무슨 기다(옳다) 아니다 말도 없이 '아, 그렇습니까' 그러니깐 더구나 자기 부모님은 그때는 더 불안하거든요. 그래서 막 (말을) 해대고 갔단 말입니다.
그래서 입고(임신) 되어서 그때는 다 차서 산달이 되어서 어린애를 낳았단 말입니다. 그렇게 기가 찬 부모님들은 더욱더 괘씸했겠지요. 그래서 낳았으니깐 그놈을 키울려니 옛날인지라, 비판 지탄도 하기 때문에 뒤도 안 보고 저질렀으니까 그러면 스님한테 갔다가 맡겨버려야 하겠다, 그래서 어린애를 품고 와서 맡겼단 말입니다. 그때도 보나 안 보나 뭐다 쓸말 못 쓸말해서 스님네를 궁지에 몰아넣었겠지요. 헌데 또 그 스님 말씀이 '예, 그렇습니까?' 그 어린애를 받아서 기른다 말입니다. 그렇게 되어서 이제 해가 지나서, 아가씨도 역시, 그렇게 이제 그 스님네가 그랬을리는 만무하겠지요. 허나 그 아가씨가 말하니깐 할 수 없이 사람들이 곧이듣고 절에도 그냥 신도들도 안 가고 그때는 했겠지요.
그런 아가씨도 양심이 있는지라, 항시(항상) 그 양심에 가책을 받는다 말입니다. 저런 훌륭한 스님한테 갖다가 이런 말을 해서 내가 큰 죄가 되겠구나. 그런데 다행히도 인연이 되어서 그 사통私通한 남자하고 같이 결합되어서 결혼하게 되었단 말입니다. 그때는 내가 참말해도 부모님도 나를 책責하지 않겠구나. 그래서 부모님한테 가서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그때는 고백한단 말입니다. 실은 저하고 그렇게 사통한 분이 스님네가 아니라 이번에 결혼하게 된 그 남자라고 말하거든요. 러니깐 또 자기 부모가 얼마나 성을 내고 할 것입니까. 그렇게 낯을 못 들고 고개를 숙이고서 스님한테 가서 사정 말씀을 한단 말입니다. 죽여달라고 말입니다. 이런 참 큰 죄가 있을 것이냐고, 그러니깐 그 스님 말씀이 '참 그렇습니까?' 그때는 또 그 말 뿐이란 말입니다.
영원적인 진리를 내다보는 사람들은 별로 말이 없는 것입니다. 형상만 보고 근본 본질을 모르는 사람들, 물결만 보고 물의 본질을 모르는 사람들, 그분들은 자꾸만 시야비야是也非也 시야비야是也非也 합니다. 그런 시비是非에 걸립니다. 돈오頓悟만 있고 또는 점수漸修가 없다. 또는 점수漸修만 있고 돈오頓悟가 없다. 그런 말도 하고 별말 다 합니다. 별말. 그러나 근본을 딱 본 사람들은 그런 말이 그때는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다만 그때그때 본체本體에 따라서 불심佛心에 따라서 그때그때 행동하고 그때그때 방편方便만 세울 뿐입니다.
지금 다행히 우리 문화의 가장 가장 소중한 꽃 그건 역시 다시 말할 것도 없이 아전인수我田引水가 아니라 우리 불법佛法입니다. 불법 가운데서 불법의 정문正門은 무엇인가? 불법의 정수精髓는 무엇인가? 이것은 참선參禪입니다. 그런데 우리 지금 한국에서는 무슨 화두를 어느 문제를 의심하면 선禪이고 그 외에는 선이 아니라고 합니다. 여기 계시는 분들은 참선參禪도 하시고, 염불念佛도 하시고 그런 분들입니다마는 그런 문제에 고민을 하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참선 이것이 불법의 가장 그 정문正門인데 참선을 해야 하겠는데, 참선을 할려면 어느 스님한테 무슨 문제를 의심을 하라는 그런 화두를 타야 할 것인데, 그런 기회는 없고, 또는 무슨 문제를 의심해대면 그때는 마음이 불안스럽고, 별로 마음에 딱 닿지도 않고, 또 기도 모시면 관세음보살도 해야 하고, 근데 그것은 또 선禪이 아니라고 하고, 이런 것은 아까 말씀마따나 우리 불교가 분명히 부처님의 참다운 정견正見에서 일탈되어 버리면 벗어나면 이것은 한 가지 견해입니다.
우리 불교는 그와 같이 좁은 것이 아닙니다. 대도大道가 무문無門이라,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 큰 도는 그때는 문이 한군데만 있지가 않습니다. (광주의) 무등산無等山은 이쪽만 올라가는 길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화순에서나 저편에서나 다 올라갑니다. 불교는 일체 종교의 그 종합적인 일체 진리를 다 함장含藏시킨 그런 대종교大宗敎인지라, 불교에 들어가는 문은 입처현인立處現印?(입처즉진立處即眞, 입처개진立處皆眞)이라, 자기 선 자리에서 바로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뱅뱅 돌아서 꼭 무슨 옴마니반메훔만 해야 하고, 또는 화두만 의심해야 하고 그래서만 들어가는 문은 아닙니다. 문문가입門門可入이라, 문마다 문마다 주문하는 문이나, 염불을 하는 문이나 또는 화두를 의심하는 문이나, 문마다 다 성불成佛할 수 있는 그런 문입니다. 이와 같이 불교는 광대무변廣大無邊한 것이 불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돼야만이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불교의 정문正門 불교의 가장 골수인 참선參禪을 할 수가 있을 것인가? 꼭 참선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이 성불이 되니깐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가 말씀드리는 요체要諦 역시 아까 말씀마따나 바른 견해 바른 신앙인 그런 바른 견해 그런 정견正見을 말씀드리고자 하고 또 한 가지는 무엇인고 하면 불교의 정문正門인, 불교의 골수骨髓인 참선을 모두 헤야 하겠다는 그런 뜻으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참선參禪은 무엇이 참선인가 하면 부처님이나 조사스님들 말씀에 선시불심禪是佛心이라. 부처의 마음자리, 부처의 마음이 바로 이것이 참선의 체體입니다. 참선의 본체本體가 부처의 마음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 자세가 불심佛心을 안 떠나면은 불심을 안 여의면 그때는 참선입니다. 이것이 뭐있고나 저것이 뭐있고나 또는 똥마른 막대기나 뜰앞의 잣나무나 그런 화두話頭를 의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이 참선의 체體가, 선禪의 체가 바로 불심佛心이기 때문에 불심을 안 떠나면 우리 마음이 불심에서 안 떠나려고 애쓰면 이것이 참선입니다. 허나 화두를 의심해야만이 참선이라고 하는 분들도 역시 아무리 '이뭣고'를 몇 십 년을 한다 하더라도 그 사람 마음이 불심을 떠나버리면 그때는 선禪은 못 됩니다. 참선은 그건 아닙니다. 관세음보살님을 맨날 외인다 하더라도 관세음보살님은 외이는 그 마음 자세가 불심을 안 여의면 그때는 바로 그건 참선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때는 염불念佛과 참선參禪이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불교가 무엇인가? 불교가 성불成佛하는 것입니다. 성불하는 것이니깐 순간찰나도, 순간순간, 앞생각 뒷생각 가운데서 부처님한테서 마음을 안 떼어버리는 그러면 성불합니다. 안 떼어버리면 그때는 이제 차근차근 우리가 그 마음을 다시 간직하고 불교 말로 해서 일행삼매一行三昧라. 자나깨나 앉으나 서나 꼭 그 생각, 바른 생각, 불심佛心을 지향한 생각 그 생각을 가지면 그때는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서 자기 암시가 되어서 그때는 우리가 부처님하고 딱 하나가 되고만다 말입니다. 그럼 성불이겠지요. 따라서 다시 바꾸어서 말씀드리면 참선 이것은 정견正見을 가지고서 공부하면 다 참선입니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부른다 하더라도 아미타불은 저 어디 가서 계신다, 극락세계極樂世界의 교주敎主로 해서 우리하고는 (떨어져서) 저 멀리 계신다. 이렇게 생각하면 그때는 참선은 못 됩니다. 그때는 마치 기독교인들이 하느님을 저만큼 멀리 구하는 그런 신앙하고 똑같습니다. 아무리 불교가 좋다고 큰소리를 친다 하더라도 역시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은 저만큼 저 멀리 계시는 그런 분이고, 우리가 복을 빌면은 복을 주시고 하는 그런 분으로 생각할 때는 기독교의 하시는 신앙하고 그때는 똑같습니다.
이것이 불교일 때는, 불교가 불교가 될 수 있을 때는 이것은 아까 말씀마따나 부처님이라 하는 것은 우주에 언제나 어디에나 계시는 것이고, 나의 본질이 부처님이고, 단지 내가 못 닦아서 못 닦아서 부처님을 내가 모른단 말입니다. 도인들이나 그분(성자)들은 부처님을 본질인 본 바탕의 부처님을 아는 분들이고, 우리는 못 닦아서 미처 모를 뿐이란 말입니다. 모르고 한다는 그 차이뿐입니다. 본래성불本來成佛이라, 본래부처란 말입니다. 따라서 참선이라 하는 것은 본래성불.
보조국사(普照知訥, 1158~1210) 어록을 보면 이런 대목이 있어요. 자성청정自性淸淨 자성해탈自性解脫이라. 닦아서 청정하고 닦아서 해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청정淸淨한 안목眼目으로 본다고 그러면, 먼저 이렇게 딱 깨달은 뒤에 즉 보조국사 말씀으로 보면 돈오頓悟라, 선오先悟라. 먼저 이치를 깨달은 뒤에 그 다음에 인제 자기 인연 따라서 간다 말입니다. 오후수悟後修라, 즉 깨달은 뒤 일체가 부처고, 내 본질이 부처임을 먼저 깨달은 뒤에 닦아야만이 비로소 그것이 참선이 됩니다. (돈오頓悟)자성청정自性淸淨 자성해탈自性解脫이라. 연후然後(점수漸修) 이구청정離垢淸淨 이장해탈離障解脫이라.
비록 우리 자성自性이 부처고, 본래가 부처라 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과거 전생에 지은 무량無量의 그런 번뇌煩惱, 금생에 지은 잘못 듣고 잘못 생각하고 잘못 배운 그런 번뇌, 이거(번뇌가) 쌓여놔서 그때는 우리가 정녕히 조심해서 정진도 하고 염불念佛도 하고 참선參禪해야만이 고놈이 녹아집니다. 우리 지금 잠재의식은 과거 번뇌나 금생번뇌가 그것이 꽉 차 있습니다. 불교 말로 해서 훈습薰習이 딱 되어있습니다. 훈습이. 고놈을 녹여야 합니다.
그런 녹이는 것이 이제 이구청정離垢淸淨 이장해탈離障解脫이라. 떠날 리離자 때 구垢자 원래 때가 없고 원래 부처가 되어 있고 원래 성불이 되어 있지만 또는 우리가 상대적인 의미에서 본다고 할 때에는 과거번뇌, 금생번뇌가 딱 우리 마음에 끼어있어놔서 고놈 녹여야 하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이구청정離垢淸淨이라. 떠날 리離자 때 구垢자, 때를 여의고 그때는 비로소 청정이 되는 것이고, 이장해탈離障解脫이라, 장애를 없애고 그때는 우리가 해탈한단 말입니다. 이것이 이제 보조국사의 돈오점수頓悟漸修입니다. 돈오점수란 말입니다.
먼저 갖다가 일체가 부처인 것을 '나'나 누구나 바로 그대로 부처인 것을, 깨달은 뒤에가 아니라 바로 보면 부처인 것을 우리가 먼저 딱 깨닫고서 부처 가운데는 일체종지一切種智라, 일체 공덕과 지혜와 자비가 갖춘 것을 분명히 믿고서 그래가지고서는 우리가 (나아)간다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염불하나 참선하나 주문하나 뭣하나 그때는 다 선禪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 불자님들 다 그대로 자기가 하는 그러한 자기 생활이 바로 선禪인 것을 이렇게 느끼셔 가지고서 금생今生에 이와 같이 편리한 세상에 하루빨리 성불成佛하시기를 간절히 바라서 마지않습니다.
여기서 제가 한 말씀을 더 부언해 드릴 것은 무엇인고 하면은 법화경法華經 보면 상불경보살常不輕菩薩이라.<법화경 제20 상불경보살품常不輕菩薩品> 상불경보살은 무엇인고 하면 항상 상常자 아니 불不자 가벼울 경輕자 항상 남을 숭배하고, 남을 가볍게 안 본다는 말입니다. 상불경보살이라. 누누이 말씀드렸습니다마, 우리 본질이 갑이나 을이나 병이나 박가나 김가나 모두가 다 바로 보면은 다 불성佛性이고 다 부처님이고 한다고 하는 그런 견해를 딱 갖는다고 그러면 그때는 남을 절대로 무시할 수 없습니다. 비굴한 마음도 낼 수가 없는 것이고, 또는 우리 생명을 경시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무서운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주: 1980년대는 신냉전의 시대> 공산주의 사회라는 것은 그야말로 참 무서운 인류의 이것은 무지의 독소입니다. 이것의 제거 없이는 이것의 극복이 없이는 우리는 바로 못 살아갑니다. 먹히는가 먹는가 하는 것은 이것은 금세기나 21세기에서 우리가 당면할 가장 큰 문제입니다. 이러한 가장 큰 문제, 가장 큰 문제 해결은 어떻게 어떻게 본다 하더라도 원인으로 본다 하더라도 불법佛法이 아니고서는 절대로 해결하는 길이 없습니다.
어째서 그런고 하면, 지금 과학주의 자체는, 과학 자체는 유물론唯物論을 극복을 못 합니다. 현대 철학 역시 어렴풋이 희망적인 변화만 보일 뿐이지, 분명히 물질의 본질, 인간성의 본질, 마음 본질을 다 풀지는 못합니다. 저같은 중이 이것을 아전인수我田引水로 해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면으로 보나, 어떻게 보나 공산주의의 극복은 이것은 불교와 같은 그러한 물질이나 정신의 본질을 다 긍유하는 그런 종교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극복을 못합니다. 저 같은 사람 대에 희망이 안 보여도 그때는 무방합니다. 아무튼 앞으로 몇 백 년 되나 몇 천 년 되나 이 세계에서 가장 큰 문제, 공산주의 극복은 아까 말씀마따나 불법이 아니면 도저히 그때는 해결할 수 없는 중요한 과제입니다.
헌데 앞서 말씀하다가 말씀을 중단 했습니다만 그러한 부처님의 성품, 우주의 본질, 즉 다시 말하면 물物 자체, 지금 물리학자들은 물질의 근원이 무슨 중성미자(中性微子, neutrino)라고 해서 이제 그런 소립자를 말합니다마는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물物 자체, 물物의 본질은 모릅니다. 다만 무엇인가 있다, 무엇인가 광명이 빛난다. 전자나 원자 가운데는 방사광명放射光明이 있다. 그러한 부사의不思議한 말들을 하는 과학이 따로 있습니다만 물질 자체가 무엇인가? 그냥 다만 그 무엇인가라고 말할 뿐이지, 본질은 모릅니다. 그러한 본질을 부처님께서나 도인들은 분명히 부처님의 성품 불성佛性이다 또는 마음이다 이러한 것을 말씀을 했습니다.
헌데 그러한 본질을 아는 사람들은 아까 말씀마따나 자기 스스로 비하卑下도 할 수가 없는 것이고, 아만我慢도 낼 수가 없는 것이고, 헌데 그러한 아만도 안 내고, 일제중생을 다 똑같이 보는 그런 안목眼目을 가지신 분이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상불경보살常不輕菩薩이라. 항시 남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는 그런 보살이란 말입니다. 이 보살은 이제 길에 가나 어디 가나 그냥 사람 만나면 이렇게 합장하고서, 당신은 꼭 성불을 할 것이니까 제가 이렇게 합장合掌하고서 배례拜禮합니다. 이런단 말입니다. 불교를 믿으나 안 믿으나 간에 사람 만나면 그때는 그렇게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깐 이제 불교를 소중히 믿는 분들은 덜 저항을 느끼지만, 일반 사람들은 그냥 저놈의 중이 사람 만나면 그냥 이렇게 당신은 성불합니다 그러니까 숭배합니다. 그때는 역시 저항을 느낀단 말입니다. 그때 싫어한단 말입니다. 욕은 피하면서 한단 말입니다. 때리면 도망가면서 그때는 당신은 성불합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을 숭배합니다. 이런단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남한테 얻어맞기도 하고 남한테 욕도 많이 듣고 했지만, 하여튼 자기 평생 동안에 그냥 항시 말하는 말이 사람만 보면 이제 당신은 성불하십니다. 당신은 꼭 성불하십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을 숭배합니다. 이런단 말입니다. 너무 그렇게 오래하고 또는 때리나 맞으나 그렇게 욕을 얻어먹으나 그렇게 하는지라, 또는 그분의 행동이 계행戒行도 청정淸淨하고 자비스러운지라, 그때는 그것이 나중에는 숭배로 변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이분은 임종 때는 위음왕불威音王佛이라. 천지 우주의 부처님한테서 그때는 설법을 듣고서 대도인大道人이 되었다는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법화경 상불경보살품>
우리는 이와 같이 아까 말씀드린 대로 바른 정견을 가지고서, 바른 정견을 안 놓치는 상황 이것이 참선입니다.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밥은 먹으나 얘기하나 아까 그 상불경보살이 누구나 간에 다 부처로 보이고서 또는 부처를 볼려고 애쓰면서 그렇게 하듯이, 바로 보면 다 부처인 것이니까
부처님 경전에 일수사견一水四見이라는 말씀이 있어요. 같은 똑같은 물이지만 사람이 보면 그때는 물로 보이는 것이고, 귀신이 보면 그때는 귀견수鬼見水라, 귀신은 물을 그때는 불(고름과 피)로 본다는 것입니다. 저는 귀신이 안 되어봐서 모릅니다만 하여튼 귀신이 보면 그때는 물을 불(고름과 피)로 본다는 것입니다. 하늘 사람들이 본다고 할 때는 물을 청정영롱淸淨玲瓏한 구슬로 본다는 것입니다. 또는 고기는 거기 사니까 이제 그때는 물을 자기 집으로 보겠지요. 허나(그러나) 도인들은 어떻게 볼 것인가? 도인들은 묘본심妙本心이라. 청정무비淸淨無比한 일체공덕一切功德을 갖춘 그때는 불심佛心으로 본단 말입니다. 같은 똑같은 물이라 하더라도 사람 같은 업력業力에서 보는 때와 또는 귀신이 보는 때와 또는 천상이 보는 때와 또는 도인이 보는 때와 도인이 보는 때만이 그래야만이 그것이 그때는 참다운 실상實相입니다. 우리 중생은 항시 가상假相만 봅니다. 우리는. 우리 불자는 그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지금 어느 스님 법문이나 옛날 스님(청원유신靑原惟信선사, ?~1117) 법문에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 그런 법문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한 황룡스님(黃龍慧南, 1002∼1069, 임제종 황룡파)이나 그런 분들은 그 산은 산이요. 산 그것이 우리가 보는 그런 산을 말한 것은 아닙니다. 도인이 보여지는 청정적멸淸淨寂滅로 보여지는 광명光明 충만한 그런 산, 무차별의 그런 산, 물도 역시 우리가 보는 그런 수구습기隨舊習氣가 있는 그런 물이 아니라 광명으로 이룩된 그런 물, 극락세계極樂世界에 태어난 중생은 산도 빛나고, 물도 빛나고 다 빛납니다. 그런 것은 바른 견해(정견正見) 불심佛心을 자기 마음으로 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은 그것은 우리가 보는 산 그대로 산이요, 우리가 보는 물 그대로 물이 아니라 때를 다 벗어나버린 본래적인 실상實相에서 보는 산, 실상의 물, 광명 영롱한 그런 물, 그런 산을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렇게 못 봅니다. 그렇게 못 보는 것을 우리는 원통冤痛히 생각하고서, 내내야 본래는 바로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인데, 그렇게 바로 못 보는 것은, 원통히 생각하는 것은 과거에 게을러서 참선도 못하고 염불도 못해서 그럽니다. 염불도 하시고 참선도 하시고, 하시는 것은 이것은 인연因緣에 맡깁니다마는 아무튼 아까 말씀마따나 부처님의 정견正見 일체 모두가 다 청정무비淸淨無比한 그런 공덕이 갖추어 있는 부처님을 분명히 믿고서, 그 자리를 안 떠나고 우리가 지낼 수 있는 그런 생활 그렇게 하셔서 하루빨리 성불하시기를 간절히 바라 마지않습니다.
원각사에 이렇게 와서 보니 허두에 말씀드렸습니다마는 참 좁습니다. 우리 불자가 지금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역시 그 아늑한 그런 도바(도량)내에서 우리가 공부하는 그런 일입니다. 저같은 서투른 말도 집이 우람스럽고 아주 그야말로 환경이 좋은 그런 강당에서 말씀한다고 그러면 참 제 마음도 좋고, 제 말씀도 훨씬 더 돋보일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산만하게 말씀을 드리니까 저도 참 말씀할 기분도 안 납니다.
아무쪼록 부처님의 그 소중한 가르침 그런 가르침을 바로 전달할 수가 있고 바로 공부할 수 있는 그런 도량이 꼭 필요합니다. 우리 주지스님을 여러분들 보십시오. 이와 같이 참 성실하고 참 좋은 분입니다. 이런 스님은 금생今生에만 원력願力을 세운 분이 아닙니다. 다생겁래多生劫來로 중생을 위해서 바치겠다는 그런 원력願力을 세우신 분입니다. 이런 분이 와서 계실 때에 같이 우리가 동참해서 힘을 합쳐서 꼭 우리 정법正法을 홍포弘布할 수 있는 그런 전당을 세우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부탁을 드려서 마지않습니다.
오늘 산승山僧의 법문을 마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마하반야바라밀>
- 19831120 청화큰스님 원각사 백일기도 입재법문

첫댓글 큰스님께서 설법하신 43년 전의 대중법회 초기법문으로 재가불자님들을 위한 주옥같은 말씀들이 담겨있는 법문입니다.
아침에 영상법문을 업로드 예정이오니 육성으로 함께 보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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