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1217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대림절 제3주일)
기쁨의 비밀
사61:1~4, 8~11; 살전5:16~24; 요1:6~8, 19~28
오늘은 대림절 세 번째 주일입니다. 대림절 각 주일에는 이름이 붙어 있는데, 세 번째 주일은 “가우데테 주일”이라고 합니다. 가우데테는 “기뻐하라”는 라틴어인데, 빌립보서4:5절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다시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말씀을 예배의 첫 찬송(입당송)으로 사용된 데서 유래합니다. 그러니까 “기뻐하라 주일” “기쁨의 주일”은 목전에 다가온 성탄을 기뻐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오늘 우리가 읽은 교회력 말씀 속에는 “기쁨” 혹은 “기뻐하라”는 메시지가 공통적으로 등장합니다. 제1독서 이사야서의 말씀에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모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게 하셨다”라고 합니다. 또 그 다음 절에는, “슬픔 대신에 기쁨의 기름을 발라주시며, 괴로운 마음 대신에 찬송이 마음에 가득 차게 하셨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10절 말씀에는 “”내가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할 것이다.“라고 노래합니다.
오늘 시편 말씀에도 “주님께서 우리 편이 되시어 큰 일을 하셨을 때에, 우리는 얼마나 기뻤던가!...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사람은 기쁨으로 단을 가지고 돌아온다”고 노래합니다. 또 제2독서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말씀과 동일하게 “항상 기뻐하십시오...”라는 말씀으로 권면합니다. 비록 말씀의 역사적 시대적 배경은 다르지만, 오늘 전해지는 대림절 셋째 주일의 말씀 속에는 이처럼 “기쁨”이 스며있고 “기뻐하라”는 권면이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기뻐하고 있습니까? 기쁨이 있으십니까? 저는 전에 바울이 오늘 데살로니가 교회에 권면하는 “항상 기뻐하십시오”라는 말씀이나, 빌립보서에서 말하는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라는 말을 들으면, 사실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는지? 저는 젊었을 때부터 그렇게 밝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친구들은 저보고 너 혼자 세상 짐을 다 짊어지고 다니는 거 같다고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대체로 우울한 사람이었던 거지요. 그래서 그런지, 교회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말을 들으면 기질적으로 좀 거부감이 들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주눅이 들었다고 해야 할 겁니다. 내가 기독교에서 주는 뭔가 근본적인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기쁨은 성령과 관련이 되어 많이 언급되는데, 그러면 내가 성령을 받지 못한, 성령을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도 젊었을 때는 부흥회에 가서 소위 은혜 받고 기뻤던 적도 있습니다. 철야기도도 하고 방언도 하면서, 죄사함을 받고 기뻐했던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쁨이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고, 무엇보다도 지속적인 삶의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냥 그때뿐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점점 “기쁨”은 나와는 맞지 않는 기질처럼 생각되었습니다. 오히려 고통, 슬픔, 아픔, 이런 것들이 더 친숙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면서 온갖 감정을 억압하고, 참고 견디는 쪽으로 더 나가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자신의 모든 희노애락의 감정을 억압하면서 참고 견디는 쪽으로 가는 사람이 어떻게 “기쁨”을 알고, 그 기쁨을 있는 그대로 누릴 수가 있었겠습니까?
사실 저는 지금도 기쁨에 차서 활기 있게 생활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저는 기질적으로 내성적이고 좀 우울하다 할까 차분하다고 할까 좀 조용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말했던 기쁨, 또 성경 곳곳에서 말하는 기쁨을 마음 깊은 곳에서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왜냐하면 그 기쁨은 기질적인 “들뜸”, 사람들에게 보이는 “외향적인 태도”, 현실에 대한 도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들의 기쁨이 거짓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누가 다른 사람의 기질이나 더구나 기쁨을 판단하겠습니까? 저의 기쁨에 대한 의미가 바뀌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기쁨”에 기죽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뿐입니다.
여러분, 다시 한번 나 자신과 여러분들에게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여러분은 기뻐하고 있습니까? 기쁨이 있으십니까? 우리가 연말에 뽑는 성령의 열매 카드에 “기쁨”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이 카드를 뽑은 분이 있을 겁니다.
토마스 키팅은 이 기쁨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기쁨은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체험에 근거를 둔 영원한 행복감이다. 이것은 내가 자아로부터 해방되었다는 표시이고 참자기가 성장하고 있다는 자각이다. 기쁨은 우리로 하여금 자유롭게 현재의 순간을 받아들이게 하고, 그것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하지 않고도 그것에 만족하게 한다. 하느님과의 가장 깊은 친밀감(지복직관)은 가장 충만한 기쁨이 된다. 그것은 영원히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존재라는 의식이며, 그분의 영원한 현존 안에 머물고 있다는 의식이다. 이것은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계신 신적 원천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수를 체험하는 것이다.”
어려운 말이지요? 제가 지난 주일에 드린 설교 제목이 “복음의 시작, 힌네 엘로헤켐”이었습니다. 풀어보면, 기쁜 소식(복음)의 시작, “자 보라, 여기 하나님이!”입니다. 그러니까 기쁨은 바로 여기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 하나님의 현존에서 누리는 행복감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행복감은 추상적이거나 개념적인 것이 아니라, 아주 실제적이고 구체적이라는 거지요. 사실, 우리 기독교에서 말하고자 하는 성육신이 바로 이 사실을 말하는 겁니다. <힌네 엘로헤렘>, “자, 보라 하나님이 지금 여기에!”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우리의 구체적인 역사 속에, 우리의 육이라고 하는 실질적인 물질 속에, 그리고 우리의 냄새나고 구차한 마굿간에 하나님이 탄생하신다~! 그러니까 기쁨은 자기 삶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는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자기 삶의 구체적인 긍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는 성육신을 “하늘과 땅이 겹치는 경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의 말과 활동에는 하늘과 땅, 한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 일상적인 것과 신비로운 것이 분리되지 않고 서로 섞여 있고 서로 엮여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비유에서는 여인이 반죽하는 밀반죽에 섞인 누룩이, 앞마당에 심은 겨자씨가, 바닷가의 내린 그물이, 땅에 묻힌 보물이 신성을 드러내는 암호들이었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먹고 마심이, 어린애가 드린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나병환자, 중풍병자, 손마른 사람이나 혈루병의 여인의 환부가 하나님의 신성을 드러내는 자리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죄인을 처형하던 십자가가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온전히 현시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이 모든 것 속에 “힌네 엘로헤켐” “임마누엘”이 보였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이런 예수님의 말씀과 활동에서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을, 신성을 발견했을까요? 마굿간에서 아기 예수를 경배한 사람은 들에서 양을 치던 몇몇 목자들이었고,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힌네 엘로헤켐” “임마누엘”을 발견한 사람은 아주 소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기도를 드린 적이 있지요.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이 일을 지혜 있는 사람들과 똑똑한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 어린 아이들에게는 드러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의 은혜로우신 뜻입니다.”(눅10:21)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구차한 일상에서 신성을 발견할 수 있고, 우리의 비루한 삶에서, 우리의 살벌한 역사에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힌네 엘로헤켐”이라고 외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눈이 그것을 보는 눈이어야 합니다. 모든 물질 속에서 하나님을 보는 눈은 바로 우리 안에서 하나님을 보는 눈입니다. 누가의 표현대로 하면, 냄새나고 비참한 마굿간 말구유에 놓인 아기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누가의 성탄의 표징이었고, 기쁨의 원천이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해 준다.... 너희는 갓난아기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것을 볼 터인데,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표징이다.”(눅2:12)
여러분, 우리의 기쁨은 “영원히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존재라는 의식”에서 나옵니다. “그분의 영원한 현존 안에 머물고 있다는 의식”에서 나옵니다. 이것은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계신 신적 원천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수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나라는 사람이 한번 부는 바람에 일었다가 금방 사라지고 마는 파도가 아니라 거대한 바다, 대양이라는 것을, 아니 바다와 동일한 물이라는 것을 깨우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삶에 대한 은밀한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삶과의 깊은 친밀감을 가져다줍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 가운데서 “힌네 엘로헤켐”을 경험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구약의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상한 마음을 싸매어 주고, 포로에 갇힌 사람에게 석방을 선언하고, 주님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언하고, 모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게 하셨다.”
오늘 이사야서의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는 아무런 감흥 없이 읽을 수도 있고, 이 말씀이 오늘 지금 여기서 이루어지는 말씀이구나, 놀라움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이 말씀은 유다백성들이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온 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바빌론 포로 후의 상황은 그렇게 밝고 희망찬 것이 아니었습니다. 페르시야의 왕 고레스의 칙령으로 해방이 되어 고향인 팔레스틴으로 되돌아오기는 했지만, 거기에 남아있는 것은 온전한 행복이나 기쁨이 아니었고, 혼란과 가난과 갈등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가 일제에서 해방되어 겪었던 혼란과 갈등과 비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좌우가 나뉘고 온갖 욕구들이 분출되면서 큰 혼란을 맞았지요. 거기다 전쟁까지 겪지 않았습니까?
유다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400년 후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처음 이 말씀으로 당신을 드러내실 때의 유다도 그랬습니다. 그리고 숱한 역사의 순간들마다 거의 대부분 이런 상황을 겪어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문득 우리 자신을 진지하게 들여다보면, 이런 혼란과 갈등, 어둠과 그림자가 우리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이런 상황들이 매우 익숙한 풍경이라는 것을 느낍니다. 그런데, 예언자는 그런 상황에서 이렇게 노래하는 겁니다.
“시온에서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재 대신에 화관을 씌워주시며, 슬픔 대신에 기쁨의 기름을 발라 주시며, 괴로운 마음 대신에 찬송이 마음에 가득 차게 하셨다.”
“그들은 오래 전에 황폐해진 곳을 쌓으며, 오랫동안 무너져 있던 곳도 세울 것이다. 황폐한 성읍들을 새로 세우며, 대대로 무너진 채로 버려져 있던 것을 다시 세울 것이다.”
여러분, 이 말씀이 어떻게 들리시는가요? 종말론적 비밀의 이야기, 다시 말해, 이미 작용하고 있고 그것에 의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라는 보이지 않는 힘(다니너미즘)으로 들리시나요? 예수님은 이천년 전에 이 말씀을 읽어주시며,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눅4:21)”라고 선포하십니다.
오늘 이 말씀은 우리 안에서도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쁨의 원천입니다. 여러분이 자금 당장 이 기쁨을 온전히 누리지 못해도 좋습니다. 이 기쁨은 억지로, 강박적으로 누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여러분 안에 하나님의 사랑받고 있음이 점점 자라는 중에 나타날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을 계속해서 기억하고 선택하는 중에 여러분 삶에 쌓이게 될 것입니다.
키팅 신부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기쁨은 우리로 하여금 자유롭게 현재의 순간을 받아들이게 하고, 그것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하지 않고도 그것에 만족하게 한다.”
바로 오늘 세례요한의 증언이 바로 그 말입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여러분이 말하는 그 유명한 엘리야도 아닙니다. 나는 다만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일 뿐입니다. 그는 사람들이 이상화하는 대로 우쭐하지도 않았고 사람들의 시선에 자신을 맞추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소박한 삶을 살았지만, 진짜 자기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런 세례요한을 향해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이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다.”
여러분, 기쁨이 어디 멀리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이 충족되어서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기쁨은 생각보다 훨씬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자유롭게 현재의 순간을 받아들이는” 순간에, 이것이 바뀌어야 내가 행복하고 기쁠 것이라는 우리의 생각이 사라지는 순간에, 우리는 기쁨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기쁨은 우리의 소박한 삶 가운데, 혹은 비루한 삶 가운데서도 빛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