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몬의아들들
르호보암(Rehoboam)이란 '백성을 번성케 함'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으로 암몬 여인 나아마와 솔로몬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영명한 왕의 아들이었으나 그는 소심한 자였습니다. BC 931년 경 솔로몬 왕이 죽자 이스라엘 12지파의 대표자들은 법적 상속자인 그를 왕으로 추대하기 위해 세겜에 모였습니다. 당시 백성들이 르호보암에게 와서 솔로몬 왕의 통치에서 성전과 궁전의 건축으로 무거운 짐을 졌음을 말하면서 짐을 가볍게 해달라고 청원했습니다. 이에 르호보암은 3일 후에 다시 오라고 하고 그들을 돌려보냈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를 섬기던 노인들을 불러 그들의 의견을 들었으며 그들은 백성의 의견을 존중해 주는 것이 좋다는 조언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르호보암은 자기와 함께 자란 젊은 보좌관들에게도 의견을 물었으며 그들이 노인들과는 정반대로 백성들이 다른 생각을 못하도록 더욱 억압해야 된다는 의견을 말했습니다. 르호보암은 이 두 가지 방법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했고 3일 후에 백성들이 그에게 나아오자 그는 노인들의 의견보다 친구들의 의견을 선택해 그쪽 방식으로 백성들에게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다윗의 집안과 자신들은 아무 상관이 없다 하고 유다와 베냐민 지파를 제외한 열 지파가 분리해나가 여로보암을 왕으로 세우고 나라를 분리했습니다. 결국 르호보암의 잘못된 선택으로 이스라엘은 둘로 나뉘어졌습니다.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르호보암은 감역관 아도람을 보냈으나, 그들은 아도람을 돌로 쳐 죽였으므로 르호보암은 신변의 위험을 느껴 예루살렘으로 도망쳐 왔습니다. 그의 곁에는 유다와 베냐민 사람들만이 남았을 뿐이었으나 그는 비록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자신의 지배하에 있는 지파의 정예 18만을 선발하여 반역 부대의 정벌을 꾀하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북쪽 여로보암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것을 벧엘과 단에 두고 서민을 제사장으로 임명하고 예배를 보게 했으므로, 제사장과 레위인의 전부가 남쪽으로 이동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르호보암 왕의 국력은 증강하였습니다. 그러나 3년 후에는 이 르호보암 왕 자신이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결국 르호보암 왕의 치세 제 5년에 이집트의 시삭 왕이 유다의 땅을 침해하여 그의 세력을 매우 약화시켰습니다. 이 침략의 결과 솔로몬에 의해 축적되었던 성전의 모든 보물이약탈 당하였는데, 그 안에는 황금 방패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부득이 왕은 청동 방패로대신하고, 이를 특별한 경호를 하여 보존했으며, 성전에 올라갈 때에만 이를 사용했습니다. 그는 유다와 베냐민의 많은 성읍을 성채로 공고히하고 요새를 견고히 구축하는 한편, 군대를 정비하면서 유다와 베냐민을 확보하는데 진력하였습니다. 르호보암에게는 18명의 아내, 60명의 첩, 25명의 아들, 60명의 딸이 있었으며 41세에 즉위하여 17년간 치세하고 BC 915년 경 죽었으며 그의 아들 아비얌이 뒤를 이어 왕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