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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4.02.26 03:30
달을 그린 작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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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 토끼 조각이 TV 모니터에 떠있는 달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어요.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이 1996년 만든 설치 예술 작품 ‘달에 사는 토끼’. /백남준아트센터
지난 24일은 정월대보름이었어요. 정월대보름은 설날 이후 처음으로 보름달이 뜨는 밤을 말해요. 전통적으로 우리 조상들은 정월대보름에 액운을 쫓아내기 위해 오곡밥에 갖가지 나물과 딱딱한 견과류를 먹어 왔어요. 그러곤 마을 언덕에 올라 달을 맞이하죠. 첫 보름달을 보며 한 해 동안 풍요롭고 근심 없이 건강하게 지내게 해 달라고 소원을 빈답니다.
달 토끼도 TV 보며 달 구경
가로등이 없던 시절, 달은 깜깜한 밤을 환하게 비추는 밤하늘의 얼굴이었어요. 그렇게 수백 수천 년 전부터 달은 밤마다 전 세계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면서 사람들이 낮에는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마음속 사연을 하나하나 들어주고 있었을 겁니다.
달은 그 이야기들을 전부 품어 간직하고 있을 거예요. 그래서 달을 쳐다보면 옛사람의 꿈이 보이고, 신비로운 이야기가 들리는가 하면, 미래를 향한 온갖 상상이 샘솟는 것 같습니다. 미술인들의 호기심까지 끌었던 걸까요. 여러 미술 작품에서 달을 그리고 있어요. 작품 속 달을 함께 감상해 볼까요?
비디오 미술의 선구자 백남준(1932~2006)은 이처럼 흥미진진한 달을 가리켜 '달은 가장 오래된 TV'라는 말을 남겼어요. 〈작품1〉은 백남준의 '달에 사는 토끼'입니다. 나무로 깎아 만든 토끼가 이제는 TV 시청자가 되어 자신이 살던 달의 모습을 구경하는 중인가 봐요.
그리움을 달래주는 달
〈작품2〉는 산과 달, 그리고 하늘을 그리기 좋아했던 김환기(1913~1974)가 그린 '산월(山月)'입니다. 밤의 컴컴한 산줄기가 배경에 그려져 있어요. 보름달은 낮에 모습을 감추고 있는 동안 푸른 하늘의 물이 들었는지 짙은 파란빛을 띠고 있습니다. 산 너머 저 높이 달이 걸려있지 않고, 그림 가운데에 놓여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달이 둥글고 커서 훌쩍 내 앞에 다가온 듯 가까이 느껴졌기 때문일 거예요.
김환기가 프랑스 파리에서 지내다가 한국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린 것이에요. 당시 파리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낯선 도시였어요. 외지에서 김환기는 하늘을 보면서 이 하늘이 고향 하늘까지 이어져 있으리라 생각하며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곤 했어요. 달은 고맙게도 그가 어딜 가든 늘 따라왔어요. 아무리 멀리 떠나와도 달은 고향에서 봤던 정겨운 모습 그대로였지요.
〈작품3〉은 황소 그림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중섭(1916~1956)의 '달밤'입니다. 우리나라에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이중섭은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들과 헤어져 지내야 했어요. 전쟁 통에 혼자서 배고프고 힘겹고 외로울 때마다 그는 달을 올려다보며 곧 그리운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지낼 앞날을 상상하곤 했어요. 보름달 아래 팔다리 쭉 뻗고 마음 편한 표정으로 누운 사람이 보이네요. 이렇듯 아무 고민 없이 평화로운 나라에 사는 것, 이것이 곧 화가의 소망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병이 들어 가족을 만나지 못한 채 홀로 숨을 거두고 말았지요.
음악 소리 멎어도 달은 고요히 빛나고
〈작품4〉는 야생의 자연환경과 그 생명력을 예찬했던 프랑스의 화가 앙리 루소(Henri Rousseau, 1844~1910)의 '잠든 집시'예요. 짙푸른 밤하늘에는 하얀 보름달이 또렷하게 떴고, 색동옷을 입은 집시 소녀는 곤하게 잠들었어요. 만돌린(작은 기타처럼 생긴 이탈리아 전통 악기)과 지팡이를 손에 꼭 쥐고 있네요. 소녀는 낮 동안 거리 이곳저곳을 헤매고 다니며 음악을 연주했는지도 모르겠어요. 소리 없이 잠든 소녀 곁으로 다가온 사자는 소녀를 해치려는 맹수가 아니라 마치 달에서 내려온 수호자처럼 지친 소녀를 돌봐주는 듯해요. 소녀가 잠들어 있는 동안 소녀의 만돌린은 달빛에서 얻은 생명력으로 가득 채워질 겁니다. 이 밤이 지나고 내일이 되면 훨씬 더 아름다운 울림소리를 낼 것 같아요.
〈작품5〉는 조선 중기의 왕실 화가였던 이경윤(1545~1611)의 화첩 속에 들어있는 '월하탄금 (月下彈琴, 달 아래 거문고를 타다)'입니다. 화폭 왼편에 보름달이 보이시나요. 그 아래로 낭떠러지인 듯 보이는 비탈길에 어느 선비가 달을 우러르며 앉아 있어요. 오른쪽 구석에는 선비를 모시는 아이가 차를 끓이고 있네요. 선비는 자연 속에서 무릎 위에 거문고를 올려놓은 채 달빛의 영감을 받아 연주하는 중입니다. 그림만 봐서는 어떤 음악이 흐르고 있는지 알 수 없어 아쉽네요.
그런데 그림 속의 거문고를 자세히 보면 현(줄)이 보이지 않아요. 원래 줄이 있는데 화가가 세세히 그려 넣지 않은 것인지, 정말로 무현금(無絃琴, 현 없는 거문고)을 묘사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만일 현이 없다고 한다면, 왜 선비는 손으로 현을 뜯거나 퉁기는 흉내를 내고 있을까요? 아마도 그는 마음으로 거문고의 소리를 상상하며 소리를 즐기는 중일 겁니다. 차 끓이는 아이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선비가 그저 이상스럽게 보이겠지요. 첩첩산중 고요한 달빛 아래, 선비의 거문고 연주를 들을 수 있는 이는 오직 선비와 달뿐입니다. 서로 마음으로 통하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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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두운 밤의 산줄기를 배경으로 커다랗게 빛나는 푸른 달. 화가 김환기의 1960년 그림 ‘산월(山月).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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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가 이중섭이 1950대 그린 그림 ‘달밤’에서는 바닥에 드러누운 한 남자가 하늘에 환하게 뜬 보름달을 올려다 봐요. 가족과 떨어진 그리움을 달래는 화가의 모습인 것만 같죠. /《이중섭, 백 년의 신화》展 도록(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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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록달록 줄무늬 옷을 입은 소녀가 이탈리아 전통 악기 ‘만돌린’을 끼고 모로 누워 자네요. 하늘엔 보름달이, 땅엔 사자가 소녀 곁을 지켜주고 있는 듯해요. 프랑스 화가 앙리 루소의 1897년작 ‘잠든 집시(The Sleeping Gypsy)’. /뉴욕현대미술관(Mo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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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낭떠러지 옆 산길에 주저앉은 두 사람. 선비(왼쪽)는 달을 보며 거문고를 연주하고, 소년은 차를 끓이다 선비를 쳐다봐요. 조선 중기 화가 이경윤이 그린 ‘월하탄금(달 아래 거문고를 타다)’. /고려대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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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은 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기획·구성=장근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