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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여행
지난 5월 22일부터 25일까지 안동 일대를 다녀왔다. 지난가을에 칠갑산 휴양림을 다녀온 이후 이번에도 동생 부부와 친구 부부가 동행하였다. 내가 올림픽 공원 부근에 있는 친구의 집으로 이동하여 동승 후 안동으로 내려갔다. 그동안 쌓인 이야기를 나누면서 중간중간 휴식을 하며 내려가 동생 부부와 안동호 휴양림 입구에서 만났다. 오후 3시가 되어야만 입주가 가능하므로 인근 정자에서 동생이 준비한 찰밥으로 점심을 하고서 한 대의 차량에 6명이 동승을 하여 인근에 있는 도산서원을 방문하였다. 도산서원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대학자인 퇴계 이황을 기리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도산서원은 조선 후기 유림의 정신적 근거지며, 영남 유림의 본거지이다. 도산서원의 편액은 한석봉이 쓴 글씨로 선조가 하사하여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었다.
친절한 김정희 해설사의 안내를 받아 입구에서부터 설명을 상세하게 들었다. 이곳을 맹자와 공자가 태어난 지역을 빗대어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고 부른다는 말에 동감하였다. 퇴계 선생이 도산 서당을 지을 때부터 수백 년을 지켜온 왕버들 나무가 서원의 정취를 전면에 흐르는 낙동강과 함께 고적한 풍광을 자아내고 있었다. 퇴계가 제자들을 가르쳤던 도산 서당과 기숙사인 농운정사를 비롯하여 퇴계 사후에 만든 전교당, 상덕사 등을 구경하고, 퇴계 유물 전시관인 옥진각(玉振閣)에서는 청려장(靑藜杖 :퇴계가 사용하던 푸른 지팡이), 서기, 두호(두호), 매화등, 흑단연/매화연(벼루)과 연적, 별자리를 관측하는 혼천의(渾天儀) 등 선생의 유품과 일대기, 펴낸 책 등을 볼 수 있다.
도산 서당은 방과 마루, 부엌이 모두 단칸이다. 선생의 소박함이 그대로 드러난 대목이다. 최소한의 공간에서 독서를 하고 수양하며, 저술하고 교육했다. 마루와 방 사이 기둥에 아담하게 걸린 ‘도산 서당’ 현판은 퇴계가 썼다.
농운정사(隴雲精舍)는 도산 서당을 세운 이듬해에 지은 건물로, 유생이 머무르던 기숙사다. 공부에 열중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공(工) 자형’으로 지었고, 하루종일 어느 한 곳은 반드시 해가 들도록 설계했다.
도산 서당과 농운정사를 지나고 계단 위쪽은 도산서원 영역에 해당한다. 길을 중심으로 좌우 건물이 대칭을 이룬다. 도서관인 동광명실(東光明室)과 서광명실(西光明室)이 마주 보고, 유생 기숙사인 박약재(博約齋)와 홍의재(弘毅齋)가 마주한 형태다. 도산서원의 핵심 건물인 전교당(典敎堂)은 유생이 모여 공부하던 강당이다. 선조가 하사한 ‘도산서원’ 사액 현판이 이곳에 걸렸다. 명필 한석봉의 글씨인데, 당시 선조가 마지막 글자부터 쓰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퇴계는 61세 때인 1561년에 도산 서당과 농운정사를 완공하고 도산기(陶山記)를 지어 이곳에 서당을 지은 경위 등을 남겼다.
강 건너편 시사단은 조선 시대 유일하게 지방에서 과거를 본 흔적이다. 도산 서당을 완공한 때는 1561년, 이황이 타계한 해는 1570년, 도산서원을 지은 것은 1574년이다. 정조는 평소 흠모하던 퇴계의 학덕을 기리고 지방 선비들의 사기를 높이고자 1792년, 어명으로 ‘도산별과’를 실시했다. 한양이 아닌 곳에서 과거를 치른 유일한 경우다. 그때 과거를 본 「시사단」이 강 건너편에 봉긋 솟은 언덕이다.
이어서 퇴계 선생의 조부인 이 계양(호는 老松亭)이 지은 진성 이씨 온혜파 종택을 찾아 퇴계 선생의 태실(胎室)을 구경하였다. 마당에는 노송정이 두 아들에게 학업 성취를 격려하기 위한 권학시(勸學詩)가 퇴계 선생이 맏손자인 안도(安道)에게 주는 시가 새겨진 비석을 보았다. 이처럼 학문을 권고하는 아름다운 가학 전통이 후대에 현달(顯達)한 인물과 학자가 많이 배출된 집안으로 이어진 것이다.
다음으로 이황의 장손인 이 안도가 지은 퇴계종택을 구경하고 인근에 있는 퇴계의 묘소를 찾아 경건한 마음으로 참배를 하였다. 길에서 제법 수직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다른 묘소는 없고 하단부에 며느리였던 봉화 금씨의 묘소가 있어 그 사연이 궁금하였다.
숙소로 오는 길에 고산정(孤山亭)에 올라 산과 강이 어우러진 절경을 보았다. 고산정은 낙동강 상류인 가송협(佳松峽)의 단애 아래에 자리 잡고 있다. 주위에는 외병산과 내병산이 병풍처럼 둘러 있고, 가송협 건너에는 송림과 함께 독산이 솟아 있어 절경을 이루고 있다. 금난수(琴蘭秀)가 학문과 수양을 위해 1564년에 지은 정자로 그의 스승인 퇴계의 시가 쓰여있는 현판이 걸려 있으며, 퇴계도 여러 차례 경치를 즐기며 시를 지었다고 한다.
도산서원에서 5분 거리에 「이육사문학관」이 있다. “내 고장 칠월은 /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로 시작하는 〈청포도〉는 이육사(李陸史)가 1939년에 발표한 시다. 본명은 이원록(李源祿)인데 수인 번호 264를 필명으로 썼다. 퇴계 이황의 14대손으로 어릴 때는 한학을 배웠고, 일본 유학 후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무장 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하는 등 혁명가의 길을 걷다가, 1944년 1월 베이징에서 옥사했다. 이육사문학관은 2017년 증축과 더불어 전시물을 교체하고 다시 개관했으며, 야외에 이육사 생가를 재현했다. 문학관 뒷산 언덕에는 베이징, 미아리공동묘지를 거쳐 온 이육사 묘소가 있다. 아쉽게도 도산서원을 오가는 길에 있는 문학관이 문을 닫아 내부에 들어가지 못했다.
다음 날에 찾은 곳은 임청각(臨淸閣, 보물 182호)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石洲 李相龍)의 생가다.
석주는 가산을 모두 처분해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고, 식솔 50여 명을 이끌고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초대 국무령을 지내는 등 독립운동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이다. 임청각은 석주를 포함해 독립운동가 9명이 태어난 고성 이씨 종택이다. 민족의 정기가 살아있는 대한민국 구국운동의 성지이다. 두 명의 며느리를 포함하여 무려 11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명문가의 으뜸이다. 임청각 군자정(君子亭)에는 퇴계를 포함해 선비들의 글씨가 가득하다. 일제는 독립가문의 맥을 끊기 위해 중앙선이 지나가게 하였다. 그나마 최근에 복원을 위해 철로가 철거되어 천만다행이다. 전국에는 아직도 조선 민족의 정신적인 말살을 위해 온갖 만행을 저지른 잔학한 흔적이 아직도 주변에 가득하다. 두고두고 일제에서 벗어나면서 친일행위를 한 반민족행위를 제대로 단죄하지 못한 역사적 실책이 현재까지도 큰 영향을 주고 있다. 더구나 이런 훌륭한 인물을 배출한 지역의 인사들마저 선조의 명예를 제대로 계승하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임청각에서 100m 정도 가면 높은 탑이 나타난다. 통일신라 때 조성된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七層塼塔 : 국보 16호) 이다. 기단부에는 사천왕상과 12지신 등이 양각되어 있다. 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높이 17m 전탑만 남았는데, 우리나라 전탑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됐다.
이어서 찾은 곳은 병산서원(屛山書院)이다.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이 죽은 후 문충(文忠)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안동의 병산서원에 셋째 아들인 류진(柳袗) 공과 함께 배향한 서원이다.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유교 건축물이다. 몇 해 전에 왔을 때보다 도로가 구간 구간이 포장되어 있어 접근에 편리하였다. 복례문(復禮門)을 거쳐 병산서원 최고의 건물인 만대루(晩對樓)에 오르니 낙동강의 은빛 백사장과 맑은 물이 굽이쳐 흐르고, 강 건너 우뚝 솟은 병산 봉우리가 녹음에 쌓여 부드럽고 멋들어진 산등성이가 마치 용이 하늘로 나는 듯한 형상이었다. 맨 윗부분에 있는 강학 공간이던 입교당(立敎堂)에 앉아 풍광을 즐기면서 옛 선비들의 향학열과 나라를 생각하는 충절의 마음을 기렸다. 경내에는 백일홍 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는데 꽃이 피면 더욱 아름다운 자태를 보인다고 한다. 그리고 달팽이 모양을 한 화장실은 매우 특이한 모습이다.
1589년 정여립의 옥사가 발생하여 하마터면 화를 당할 뻔했다. 그 이전부터 류성룡은 정여립과 두터운 친분이 있었다. 1590년 다시 예조 판서에 이르러 정여립의 사건(己丑獄事)으로 역옥(逆獄)이 일어나자 많은 사대부와 함께 그 이름이 정여립의 여러 글에 나타났다. 이때 서인(西人) 정철이 유생 정암수(丁巖壽)를 사주해 그와 이산해 등을 얽어 넣으려고 했으나 류성룡과 이산해에 대한 선조의 신임이 두터워 뜻을 이루지 못했다.
나중에 정철의 처리 문제로 이산해와 갈등하였다. 바로 정철을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이산해, 정인홍의 주장과 정철의 사형이 지나치다는 류성룡, 우성전 간에 논쟁이 벌어졌다. 이산해는 기축옥사와 정여립의 난으로 연좌되어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원한을 어떻게 풀 수 있느냐며 온건론을 강하게 비판하였고, 정철의 처벌수위 문제를 놓고 동인(東人)은 심한 내분에 휩싸인다. 이로 인해 임진왜란 발발 직전에 정철의 치죄 문제와 이조전랑(吏曹銓郎) 천거 문제 등을 놓고 동인 세력 간 대립하여 동인은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지게 되는데, 이는 정철을 죽이자는 강경파(北人)와 죽이지는 말자, 유배를 보내자는 온건파(南人) 사이의 갈등이 표면화된 것이다.
여하튼 그는 임진왜란 때의 상황을 기록한 징비록(懲毖錄 : 국보 제132호)을 작성하였다. 징비(懲毖)란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뜻이다. 이 책을 저술한 시기는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류성룡이 조정에서 물러나 향리에서 지낼 때 전란 중의 득실을 기록한 것이다. 내용을 보면 임진왜란 이전에 일본과의 관계, 명나라의 구원병 파견 및 제해권의 장악에 대한 전황 등이 가장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좀 더 일찍 이 책의 교훈을 통해 대비했더라면 병자호란의 참화를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이 역사의 교훈이다. 오히려 이 책은 훗날에 숙종 21년(1695) 일본에서도 간행되어 연구 대상이 되었으며, 1712년에는 조정에서 『징비록』의 일본으로 유출을 금할 정도로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았다. 이 책은 임진왜란 전후의 상황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난중일기』와 함께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런데 옥연정사로 가는 입구에는 류성룡의 형인 류운룡(柳雲龍)을 배향한 화천서원(花川書院)이 있다. 그리고 낙동강과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진 부용대(芙蓉臺)에 오르면 강 건너의 하회마을이 그림처럼 보인다. 이곳에서 산길을 따라 3분 정도 내려가면 류운룡이 세운 겸암정사(謙菴亭舍)가 있다. 겸암은 “겸손한 군자는 스스로 자기 몸을 낮춘다”는 뜻으로 겸암정(謙菴亭)의 현판은 스승인 이황 선생이 써준 글씨다. 이들 형제는 뛰어난 선비로 후세의 귀감(龜鑑)이 되었으며, 형은 학식에 비해 크게 중용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형제가 나란히 서원에 배향되고, 정자를 지어 후학들을 양성한 전례가 매우 드문 일이니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가.
이어서 「미스터 선샤인」 촬영지로 유명한 만휴정(晩休亭)을 찾았다. 말년에 쉬는 정자라는 의미이며, 조선 초의 문신인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이 1500년에 지은 정자이다. 수려한 경관은 빼어나며 부근에 있는 바위와 소(沼)는 높고 깊어 수량이 풍부한 여름철에는 절경을 연출할 것이다. 입구의 길 건너에는 묵계서원(墨契書院)이 있다. 보백당 김계행과 응계(凝溪) 옥고(玉沽) 선생을 봉향하는 서원인데 서원 철폐령으로 헐린 뒤 복원하였는데 입구의 읍청루(挹淸樓) 등의 시설이 다소 관리 상태가 양호하지 못하였다.
셋째 날에는 먼저 봉정사(鳳停寺)를 찾았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된 천년 고찰이다. 우리나라의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극락전(極樂殿, 국보 제15호)은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맞배지붕 주심포(柱心包) 건물로 고려 시대의 건물이지만 삼국시대의 건축양식을 내포하고 있다. 기둥의 배흘림, 공포(栱包)의 단조로운 짜임새, 내부 가구의 고격(古格)함이 이 건물의 특징이다. 특히 건물의 안쪽으로 들어가면 아직도 싱싱한 서까래 나무들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더구나 불상 위를 장식하는 나무 조각이 일품이다.
조금 뒤편으로 올라가면 영산암(靈山庵)이 나온다. 이곳은 염화실, 송암당, 삼성각, 우화루, 관심당 등 5개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화루와 송암당 간을 누마루로 연결하여 공간의 활용도를 높혔으며, 각 건물의 구조미(構造美)와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모습은 우리 고건축의 아름다움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봉정사의 명칭이 유래한 봉황이 머물던 곳으로 봉황의 벽화가 그려진 곳으로 유명하다.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과 「나랏말싸미」가 촬영된 곳으로 한국의 10대 정원이라 부른다. 바위와 소나무가 어우러진 곳으로 일상의 편안함을 느끼게 하는 곳으로 문 대통령이 잠시 휴가차 들린 곳인데 정원의 규모가 작은 것이 아쉽다. 봉정사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방문하여 극락전, 삼층석탑, 대웅전, 만세루에서 법고(法鼓)를 치는 모습 등을 둘러 보았다.
이어서 소수서원(紹修書院)을 찾았다.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안향(安珦)을 배향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다. 이곳 순흥 출신 안향을 기리기 위해 사당을 지어 위패를 모시고, 강당을 건립하여 백운동서원을 세운 후 유학 교육을 시작하였다. 이황이 명종에게 건의하여 소수서원이라는 현판을 받아 최초의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었다. 소수(紹修)는 ‘학문을 이어서 닦는다’라는 뜻이다. 이곳에는 원래 「숙수사」라는 절터였다고 하는데 무슨 사연으로 그렇게 되었는지 분명하지 않아 매우 궁금하였다. 잘 자란 소나무 숲과 수백 년 된 은행나무가 서원의 품격을 더해 준다. 안향 초상(국보 제111호) 등 주요 문화재가 보관되어 있다.
그동안 가본 사찰 중에 가장 아름답고 자연과 더불어 조화를 이루는 곳이 부석사(浮石寺)다. 사찰 마당에서 멀리 바라다보이는 풍광은 최고의 광경이고, 굽이굽이 겹쳐 이어지는 소백산의 산세도 절경 중의 절경이다. 더구나 가람의 배치도 층계를 이루며 알맞게 이루어져 어느 쪽에서 바라봐도 자연과 조화를 이룬다. 676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부석사는 무량수전(無量壽殿 : 국보 제18호)의 배흘림기둥으로 더욱 유명하다. 무량수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조 건물 중 하나로 손꼽힌다. 범종루(梵鐘樓)와 안양루(安養樓)를 지나 무량수전에 이르는 길은 마치 선계에 온 느낌을 준다. 무량수전 옆의 부석(浮石)은 마치 위아래가 붙지 않고 뜬 것처럼 보이는 명물이다. 그리고 무량수전의 소조여래좌상(塑造如來坐像 : 국보 제45호)은 다른 불상과는 다르게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삼층석탑과 조사당(祖師堂 : 국보 제19호), 자인당(慈忍堂)에 들리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의상대사의 상(像)을 안치한 조사당에는 이슬만 마시고 자란다는 선비화(禪屝花)가 자라고 있으며, 자인당에는 세 개의 보물 석불이 보존되어 있다.
마지막 날에 간 곳은 영주의 무섬마을이었다.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과 서천이 마을 동쪽 500미터 지점에서 합류하여 마을 전체를 태극 모양으로 돌아나가는 형세가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섬과 같다고 하여 무섬이라 부른다. 반남 박씨와 선성 김씨의 집성촌으로 마을 내 고택과 정자들이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고풍스런 옛 향취를 느끼게 한다. 다리가 놓이기 전에는 유일한 통로가 외나무다리였는데 최근에는 이 마을의 상징이 되어 많은 관광객을 부르고 있다. 누구라도 외나무다리를 오가며 시골의 깊은 정취를 즐길 수 있는 명소이다. 산과 내가 이루어 낸 음양의 조화는 땅과 물의 기운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명당 터이다. 400년의 역사를 지닌 무섬마을은 마을 전체가 문화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전통한옥에서 체험이 가능한 민박을 할 수 있는 곳이다. 지조론(志操論)을 쓸 만큼 지조에 대하여 관심이 많았던 청록파 시인 조지훈의 처가 집도 이곳에 있다.
여행하면서 전반적으로 느낀 점이 많았다. 우선 안동이나 영주지방은 산자수명(山紫水明)하여 살기에 좋은 지역이다. 어디를 가나 맑은 물과 산세의 기운이 충만하여 가히 선비의 고장으로 충분한 지리적 요건을 갖추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보니 대대손손으로 객지로 떠나지 않고 살게 되어 집성촌이 발달하고, 곳곳에 종택이 잘 보존되어 유교 전통문화를 자랑한다. 더구나 이황 선생과 류성룡이라는 거목의 영향이 구석까지 배어 있어 후손뿐 아니라 다수의 주민에게 긍지와 자부심을 주고 있다. 물론 농토는 상대적으로 적지만 과거의 인구비례를 보면 크게 우려할 정도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요인으로 각 서원에서 교육기관의 역할을 충실히 하여 18~19세기에 걸쳐 200년간 노론(老論)에 밀린 경상도 남인(南人)들의 수난 시대에도 그 학맥이 이어진 것이다.
무엇보다 독립운동의 성지이고 유교 문화의 중심지다. 나라와 백성에 충성을 다하는 전통이 이어져 독립운동의 성지다운 자양분으로 역할을 한 것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투쟁한 인사들이 많은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누구보다 불의에 굴하지 않고 나보다 못한 일반 백성을 아끼는 애민정신이 있었던 까닭이다. 임진왜란과 일제 식민시대에 가장 적극적으로 항쟁한 수많은 위인이 바로 이 지역에서 배출되었다.
다만 부분적으로는 외부에 폐쇄적이다. 개방적이지 못하고, 끼리끼리 문화의 전형을 이루는 한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다 보니 이 지방 출신의 인물을 발탁하고 양성함에 인색한 면이 있다. 멀쩡한 인물을 엉뚱하게 배신자로 낙인을 찍어 도태시키거나 앞장서 큰 인물을 만들 좋은 기회를 헌 신짝 버리듯 걷어차고 말았다. 더구나 유교의 측면에서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 있더라도 실리를 얻는 일이라면 설령 함량이 미달인 무리와도 손을 잡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다소 어려워도 명예를 따르는 수백 년 전통이 무너지면 다시 복구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과거에 번득이던 날카로운 비판의 칼날은 무디어지고 현실에 안주하는 처지로 서서히 침잠하고 있어 선비정신의 구현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지. 하지만 언젠가는 도도한 역사의 전면에 나서 과거의 영화를 되찾길 바란다.
이번 도산서원과 봉정사를 돌아봄으로써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9개의 서원과 7개의 사찰 순례를 마쳤다. 햇수로는 제법 몇 년이 소요되었다. 그 중에도 서원으로는 도산서원과 옥산서원 및 소수서원, 병산서원이 가장 인상에 남는다. 모두 주변의 자연과 어우러져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곳이다.
사찰로는 부석사, 봉정사와 선암사 그리고 대흥사를 다시 가보고 싶은 사찰로 기억에 남는다. 모두 자연경관이 빼어나고 건물의 배치도 적절하며 오랜 문화재도 간직하고 있는 공통점이 있다.
특히, 일정을 함께한 동생과 친구 부부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더구나 곧 미국에서 방학을 맞아 귀국하는 외손 가족에게 만찬과 국내 최고 호텔의 숙박권을 선물로 준비해 준 친구의 우정에 심심한 사의를 표한다. 다음 기회에는 충주와 단양권으로 여행을 하기로 개략적인 합의를 보았다. (2022. 5. 30)
※ 금주와 다음 주에 각각 지방에 가게 되어 그 대신에 개인 카페에 보관된 글을 게재합니다. 기독자는 이미 아는 내용이나 문우회란에 올리니 참고하세요.
첫댓글 남당 덕분에 안동 여기저기를 다 보게 되었네요. 나중에 유학의 본 고장을 가 봐야겠네요. 안동이 고향인 한 동기에게 "양반의 고을에서 태어나셨으니 참 좋겠다." 했더니 손사래를 치더군. "1, 2할도 안되는 양반들이 8할의 상놈과 천민들을 천대하고 능욕하는 일이 다반사였으니 그들의 횡포를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해서 안동에서는 양반의 고장 이런 말을 안 쓰려 한다네." 충격을 받고 양반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면서 긍정이 있으며 그 반대 면이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더군.
임란 3년 전에 기축옥사로 1천여 선비를 죽이는 일을 벌였으니, 사실 임란에 임하는 국가의 에너지는 이미 소진되고 없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당시 정철의 마음이 무엇이었는지는 늘 의문이기도 하지요.
'미스터선샤인'이란 말에 귀가 번쩍하는군요. 기억하는 한 가장 재밌게 봤던 드라마로서 지금까지 잊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여러곳 여행 잘 하고 오셨군요. 박수칩니다. 짝짝짝!
역사의 숨결과 문화의 향기가 가득한 여러 곳을 어지간히 압축된 일정으로 여행하셨군요.
한두번 가 본 곳도 있지만, 남당의 순례지 이곳 저곳을 좀 더 나이를 먹은 눈으로 순례하면 그 소회가 남다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선은 남당의 역사문화 기행문으로 사전 순례 잘 했습니다~
갈헌의 본관이 진성 아닌가요? 퇴계 선생의 자손이라 긍지가 대단하시겠습니다. 덕분에 안동 여행 잘 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