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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교양 강의]
대붕, 남쪽으로 날다
북쪽 바다에 물고기 한 마리가 있다. 이름은 곤이라 한다. 곤의몸체는 몹시 커서 몇천 리가 되는지 알 수 없다. 그것이 변해 새가되었는데 이름을 붕鵬이라 한다. 붕의 등은 몹시 넓어서 몇천 리나되는지 알 수 없다. 그 새가 한번 높이 날아갈 때 두 날개를 활짝펴면 마치 하늘의 구름과 같다. 이 새는 바닷바람이 크게 일어날때 남쪽 바다로 떠나간다. 남쪽 바다란 천지이다.
「소요유」에 나온 내용입니다. 우선 곤이 고래인지 아닌지는 상관하지 맙시다. 왜냐하면 아무리 큰 고래라 해도 크기가 '몇천 리'가 되지는 않으니까요. 붕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큰 새가 날개를활짝 폈을 때 얼마나 될까요. 그런데 몇천 리라고 하니 상상하기가어렵습니다. 더구나 물고기가 새로 변한다니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장자가 말하는 것은 인간의 잠재력입니다. 장자는 『노자』 25장에 묘사된 내용을 이어받습니다.
“넓은 우주에 네 가지 위대한 것이 있다. 도가 위대하고 하늘이 위대하며 땅이 위대하고 인간 역시 위대하다.” (域中有四大, 道大, 天大, 地大, 人亦大.)
인간의 '위대함'은 하늘땅과 함께 나열될 수 있으니 새가 몇천리가 된다고 말하는 것은 그다지 과장이 아닙니다. 물고기는 물을 떠나 살 수 없습니다. 이는 인간의 생명이 변화해 진화하기 이전에 여러 가지 제약 속에 있는 것을 말합니다. 변화하여 새가 된 후에 필요한 것은 공기뿐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발전이고 자유의 폭도 더 넓어진 것입니다. 조건이 무르익어 바닷바람이 크게 일어날 때 대붕은 남쪽으로 날아갑니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간다는 말은 거리가 매우 멀다는 의미입니다. 고대인은 남쪽이 빛을 상징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남쪽이라는 방향은 지혜를 추구하는 각오를 암시합니다.
어떻게 날아갔고, 날아가는 과정에서 또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장자는 이어서 괴이한 일들을 기록한 『제해를 인용합니다.
이 책에서 말하기를 '대붕이 남쪽 바다로 날아갈 때 수면을 쳐서 3천 리 파도를 일으키고 회오리바람을 타고 돌아 9만 리 상공을 날아오른다. 6월에 부는 큰 바람을 타고 날아간다'고 한다. 공기중에 떠도는 아지랑이와 사방에 흩어지는 먼지는 모두 살아 있는 생물이 큰 바람을 맞아서 그렇게 된 것이다. 하늘색이 푸른 것은 원래의 빛깔일까, 아니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끝을 볼 수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 하늘 위에서 내려다볼 때도 이러한 모양이 아닐까.
대붕은 자연 조건에 따라 날아갑니다. 한번 날아가면 9만 리나됩니다. 왜냐하면 9만 리나 날아가 바람 위에 올라탄 후 바람을 타고 푸른 하늘을 등지고 남쪽으로 날아가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9만 리'가 실제 진짜 거리를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우리가 타는 국제 노선의 항공기가 3만 피트 이상을 날아오르는데 9만 리라면 아마도 대기권 밖으로 나갈 겁니다. “말이 사람을 놀라게 하지 않으면 죽어도 그치지 않는다" (語不驚人死不休)는 두보杜甫(712~770)의 표현처럼, 장자는 사람을 놀라게 하는 표현으로 우리에게 평범한 상상력을 버리고 자신을 따라 문제를 더 깊이 생각하라고 권합니다. 높이 날아야 자유롭게 날면서도 힘을 낭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높이 날아야 하늘에서 지구를 보고 지구가 하늘만큼이나 아름답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거리를 가져야 미감이 생깁니다. 세속에서 여러 가지 욕망과 집착을 줄일 수 있다면 주변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을 심미적인 감수성을 가지고 감상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영혼의 세 가지 변화
장자는 '대붕이 남쪽으로 날아가다'라는 우화로 우리가 수양공부에 힘쓰기를 권하고 인간의 비범한 잠재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인간의 가장 위대한 특색은 자기 계발과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최상의 모범을 취해 적절한 것을 얻는다” (取法乎上, 得乎其中)는 말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장자의 말이 너무 현학적이라면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니체F. Nietzsche(1844∼1900)의 관점을 빌려와도 좋을 듯합니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산속에 은거해 10년간 수양하다가 도를 깨닫고 어느 날 아침 태양을 향해 말합니다.
“너 위대한 천체여! 네 빛으로 비추어줄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너의 빛이 무슨 소용인가."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자신에게는 태양처럼 무한한 지혜의 빛이 있지만, 빛의 존재 이유는 대지를 비추어 다른 사람이 함께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그는 산에서 내려와 사람들에게 자신의 철학적 진리를 선포합니다. 이 책은 소설도 아니고 논문도 아닙니다. 수필이나 산문처럼 여러 가지 우화로 가득합니다.
이를테면 니체는 이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의 정신은 세 번 변화한다. 먼저 낙타로 변하고 다음에는 사자로 변하며 마지막에는 어린아이로 변한다."
여기서 말하는 낙타란 다른 사람들로부터 '너는 이렇게 해야 해' 라는 말을 듣는 존재입니다. 수동적으로 타인의 명령을 듣고 일한다는 의미지요. 어릴 적 우리는 어떤 일을 할 때 부모의 지시나 선생님의 가르침에 따랐습니다. 완전히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면 인간은 오히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당황하여 우왕좌왕할겁니다. 서양 사회는 근대 이후로 자유를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자신의 자유를 포기할지언정 그에 따르는 책임을 감당하지 않으려 합니다. 이로 보건대 '수동성'은 삶의 초기에 해당하며, 모든 사람이 이 단계에서 벗어날 결심을 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다음은 사자의 단계로, 자기 자신에게 '나는 어떻게 하고 싶은가'라고 묻습니다. 일반적으로 대학에 들어갈 나이가 되면 부모의 시선에서 벗어나려 하고 교수도 자립정신을 가르치려고 하지요. 이때 각성하면 사자가 되어 수동적 태도에서 능동적 태도의 존재로 바뀔 수 있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안다는 것은 그의 생명에 독립성이 있다는 뜻이며, 독립성이 생기면 그는 스스로 짊어져야 할 책임을 용감하게 감당할 수 있습니다.
용기 있는 사람은 고독을 피할 수가 없고, 항상 다른 사람의 의심과 조소를 참아내야 합니다. 장자의 글에서 대붕이 매미와 참새에게 조롱을 당했던 것처럼요. 여기에서 한 발자국 더 내디딜 수 없다면 생명의 가치를 쟁취할 수 없습니다. 평생 '우리' 혹은 '여러분'이라고 말할 뿐 '자아'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깨달을 수 없다면 그것은 진정 인생의 낭비가 아닐까요. 물론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우주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이기주의자'가 되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영혼은 한 단계 더 도약하여 어린아이가 되어야 합니다.
어린아이는 무엇을 뜻할까요. 지금 현재 자신이 어떠하건 나는 무엇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순수입니다. 영어에서 '나는 무엇이다'에 해당하는 'I am'은 항상 현재형입니다. 이 말은 눈앞에 처한 상황이 좋건 싫건 모두 긍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고, 또 전부 새로운 시작으로 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어린아이는 무한한 희망으로 가득하고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수많은 철학자가 비유할 때 어린아이를 썼습니다. 노자도 “어린아이로 돌아가라" 라고 했고, 맹자도 "대인은 어린아이의 마음을 잃지 않는다"라고 했으며, 예수도 “어린아이를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은 이런 자의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성장하는 경험을 하면 어린아이처럼 단순해지고 이 세상을 즐겁게 다룰 줄 알게 되지요. 이것이 수양의 최고 경지입니다.
아기는 부모에게 온전히 의지합니다. 인간이 도에 대해 비할수 없는 믿음을 가진 것과 같습니다. 도는 어디에나 있지요. 그래서 도 안에서 의존적인 어린아이란 결국 의존하지 않는 경지에 오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건이 형성되지 않아도 어떤 일이든 할 수있습니다. 아기는 원래 "하지 못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뭔가를좋아하면 바로 하면 됩니다. 멈추고 싶으면 자연스럽게 멈추게 되지요. 이것이야말로 대붕이 힘들이지 않고도 바람을 타고 9만 리창공을 단숨에 날아가는 것과 같지 않습니까.
어린아이는 '목적' 없이 일을 완성하려 합니다. 그래서 생명의매 순간이 모두 목적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어떤 상황 아래에서도즐거운 감정이 있고 존재 자체가 기쁨입니다. 니체가 말하는 '영혼의 세 가지 변화'는 모든 사람이 원하던 바이겠지만 정말 이런 차례로 변화할 수 있는 사람은 지극히 드물겠지요. 또한 장자가 묘사했듯이 곤에서 붕으로 변화하고 다시 높은 상공으로 날아오를 수있는 경우도 극히 드물 겁니다. 그러나 이런 힘든 도전이 가져다줄결과는 풍부합니다. 시도해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인생의 방향
장자의 '대붕이 남쪽으로 날아가다'라는 우화 가운데 아주 작은 새가 대붕을 조롱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는 보통 사람이 장자와 같은 철학자를 어떻게 대우하는지를 암시합니다. 장자는 자신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았고, 다른 사람이 그를 어떻게 조소하는지도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매미와 참새가 대붕을 비웃으며 말합니다.
“우리는 힘껏 날아올라도 느릅나무와 다목나무에 이르러 머무르고, 어떤 때는 높이 날지 못해서 땅바닥에 떨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어째서 9만 리나 높은 하늘에 올라가 남쪽으로 가려 하는가?"
물가의 참새가 대붕을 비웃으며 말합니다.
“저놈이 몇 리를 날아가려는 것인가. 나는 한번 날아올라도 몇 길을 가지 못하고 떨어져서 쑥풀 사이를 날아다닌다. 이것도 날아오르는 대단한 기술인데 저놈은 도대체 몇 리를 날아가려 하는 것인가?"
보통 사람들은 일찍부터 현실에 직면해 운명의 지배를 받습니다. 프랑스의 계몽사상가 장 자크 루소Jean-Jaeques Rousseau (1712∼1778)는 “인간은 태어날 때는 자유롭지만 가는 곳마다 족쇄가 깔려있다"고 말했습니다. 가장 큰 족쇄는 인생의 목표가 장수, 재물, 관직과 명예 등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세상의 상대적인 가치관입니다. 이런 가치관은 자아실현이야말로 우리의 정확한 선택이라는 사실을 무시하지요.
왜 하필 저렇게 높은 곳까지 날아올라야 합니까? 왜 하필 세속의 가치에 대해 고상한 척을 해야 합니까? 왜 하필 숭고한 이상을 향해 가야 합니까? 왜 하필 자아를 초월하는 길을 가야 합니까? 우리만큼이나 비소한 존재인 작은 새도 날아오르는 대단한 기술을 알고 있습니다. 날아갈 수 있는 데로 날아가면 되지 왜 하필 9만리를 날아올라 남쪽으로 날아가야 합니까?
고대인의 관념에서 남쪽은 태양의 빛이 있는 지역을 상징합니다. 『주역』周易에는 “성인이 남면하여 천하를 청정한다. 밝음을 향해 다스린다" (聖人南面而聽天下, 向明治)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남쪽 방향을 향해 공명정대하게 백성을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보통은 새에게 남쪽이나 북쪽이 반드시 어떤 특정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장자』에서 '사마귀가 매미를 잡을 때 나오는 괴이한 까치는 남쪽에서 날아왔고, 장자가 혜시惠施에게 알려준 원추라는 새도 남쪽 바다에서 북쪽 바다로 날아왔습니다. 그러나 '대붕이 남쪽으로 날아가다'라는 우화에서는 먼저 곤에서 붕으로 변화했다고 말하고 다시 대붕이 높이 날았다고 했으니 이 '남쪽으로 향해 날아갔다'는 말에 어떤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먼저 물질적인 속박을 줄이고 점차 정신적인 속박을 풀어야 높이 날고 멀리 나아갑니다. 이때 특정한 방향이 없으면 이전에 이루었던 여러 가지 수양의 노력이 뿌리 없는 나무나 근원이 없는 물처럼 될 수 있습니다. '방향'이란 정신적인 고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언제 태어나고 어디에서 성장하는지는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자신의 가정환경과 교육과정, 교유하는 친구, 직종은 대체로 나 자신이 자유롭게 고를 수 없습니다.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은 자신의 정신적 고향이지요.
인생에는 방향이 없을 수 없습니다. 가장 좋은 방향은 정신적인 추구입니다. 그리고 고대인의 지혜를 자양분으로 삼는 겁니다. 이러한 방향을 찾았다면 인생은 놀라운 빛을 낼 것입니다.
장자에게는 노자만이 고대의 박학하고 위대한 진인眞人'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장자 자신은 어땠을까요. 물론 더 미묘한 경지에 이르렀지요. 천하 편에서는 장자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는 사상이 충만하여 알기 힘든 사람이다. 위로는 조물주와 함께 노닐고 아래로는 생사를 초탈하며 시작과 끝을 잃어버린 사람을 친구로 삼는다."
이것은 일종의 환상일까요, 아니면 인간 정신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경지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