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헌이 <올드보이>의 유지태 역할이었다면, 송승헌이 <낭만자객>의 김민종 역할을 맡았더라면 어땠을까. 캐스팅에 관련한 충무로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모아봤다. 이미 개봉한 영화의 주인공을 다른 배우로 두고, 또 다른 버전의 영화를 상상만 해 봐도 흥미롭다.
세상에나, 아까워라!
세상에, 이렇게 피해갈 순 없다. 정확하게 흥행작만 피해서 캐스팅을 거절하고, 그 거절 뒤에 출연을 수락한 작품들이 이 정도로 흥행에 참패할 줄이야. 이 억세게 운 나쁜 카테고리에 속해 타에 추종을 불허했던 대한민국 대표배우는 차인표다. 그는 <접속>의 한석규 역할을, <친구>의 유오성 역할과 <쉬리>의 송강호 역할을 전부 거절하고 , 이와 반대로 전혀 흥행이 되지 않았던 <짱>과 <닥터 K>를 출연작으로 선택하는 비운을 겪었다. 그래서 그는 한 때, ‘스크린 흥행 참패 배우’라는 비운의 타이틀을 목에 걸었던 시절이 있었다.
차인표만큼 빈번하지는 않았지만, 정준호의 경우는 약속과 의리 때문에 <친구>의 동수 캐릭터를 고사했다고 한다. 800만 명이 넘는 흥행 기록을 달성한 <친구>의 출연 계약서에 서명까지 했던 상태에서 출연을 번복했던 것. 정준호가 곽경택 감독의 <친구>에 출연하지 못했던 이유는 딱 하나였다. 그가 당시 출연하고 있던 영화 <싸이렌>의 제작이 지연되었기 때문이었다. 정준호는 당시 <싸이렌>을 제작한 영화사와의 출연 약속을 지키기 위해 <친구>의 출연료를 제작사에 돌려주고, 자신을 대신해 절친한 친구였던 장동건을 동수 역에 적극 추천했다고 한다. 운도 운이지만, 장동건은 어찌 보면 ‘친구’를 잘 둔 덕에 <친구>에 출연할 수 있었던 거다.
역할 고사로 인해 매력적인 캐릭터와 뛰어난 작품을 놓친, 후회할 만한 케이스는 <올드보이>의 유지태가 맡았던 이우진 역을 고사한 이병헌이다. 나긋나긋한 저음 목소리의 유지태도 이우진 역을 썩 잘 소화해 냈지만, 멋진 목소리에 있어 대한민국 남자배우들 중에 절대 빠지지 않는 이병헌이 연기하는 이우진을 보지 못한 건 관객으로서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그런데 들리는 이야기에 의하면, <올드보이>의 이우진 역으로 가장 처음 캐스팅 물망에 올랐던 배우는 다름 아닌 한석규였다고 한다. 한석규의 캐스팅 섭외는 <올드보이>의 주인공인 최민식의 적극 추천에 의거했던 것이라고.
한편, 유지태를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만들었던 영화 <동감>의 캐스팅 보드 뒤에는 송승헌이 있었다. <동감>의 첫 번째 캐스팅 후보였던 송승헌은 상대역으로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강수연이 출연한다는 이야기에 출연을 고사했고, 그 바람에 제작사에서는 서둘러 김윤진으로 캐스팅을 대체했지만, 여전히 송승헌은 출연 고사를 반복했다. 송승헌의 고사 끝에 새롭게 캐스팅된 커플이 유지태, 김하늘이었다.
엇갈린 역할<말죽거리 잔혹사>를 제작한 영화사의 캐스팅 첫 번째 희망사항은 권상우가 맡은 현수 역과 이정진이 맡은 우식 역에 각각 김재원과 고수를 캐스팅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의 거절로 다시 양동근과 김래원으로 캐스팅 보드가 넘어갔으나, 이 두 사람이 배역을 놓고 제작진과 이견이 생기는 바람에 마지막 캐스팅 희망자로 권상우와 이정진이 낙점되었던 것. 한편, <내사랑 싸가지>의 캐스팅 수락 직전까지 갔던 권상우는 상대역으로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문근영이 출연한다는 말에 출연을 포기했다고 한다. 그래서 권상우 대신 김재원이 ‘싸가지’ 역할을 맡게 된 것. 1순위로 캐스팅을 희망한 영화사를 거절한 두 배우가 각자 상대방의 역할로 대신 출연하게 된재미난 경우다.
권상우-김재원의 경우와 비슷한 또 다른 경우는 배두나-전지현의 케이스다. 2001년 여름을 강타했던 로맨틱 코미디 <엽기적인 그녀>의 ‘그녀’ 캐릭터에 원래 거명되었던 캐스팅 1순위는 배두나였다고. 그러나 당시 정재은 감독의 <고양이를 부탁해>의 태희 캐릭터가 더 탐났던 배두나는 ‘그녀’ 역할을 거절했고, ‘흥행 배우’라는 타이틀을 놓치는 대신 좋은 작품에서 보여주는 참신한 연기력으로 호평을 얻어냈다. 한편, 배두나가 주인공을 맡은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의 첫 번째 캐스팅 후보는 전지현이었다고. 그러나 전지현의 출연 거부로 깜찍하고 귀여운 현채 역할은 그 캐릭터에 훨씬 걸맞는 배두나에게 돌아갈 수 있었다.
안 하길 잘했지!
<낭만자객>의 얼빵한 자객 요이 역에 김민종 대신에 송승헌이 캐스팅됐다면 어땠을까. 당시 ‘흥행불패’로 통했던 윤제균 감독의 <낭만자객> 주인공 요이로 출연하기를 원했던 송승헌은 캐스팅 계약을 앞두고 출연을 고사했다. 당시 캐스팅 제안을 받았던 윤석호 PD의 드라마 <여름향기>의 남자 주인공 역이 훨씬 탐났던 것. 김민종에 미안한 말이지만, 더 이상 처참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던 요이 캐릭터를 송승헌이 거절한 건 지금 봐도 백만 번 잘한 일이다.
최민식이 더할 나위 없는 호연을 보여줬던 <파이란>의 강재 캐릭터가 다른 배우에게 갔었다면 어땠을까. 강재역으로 당시 제작사가 가장 원했던 배우는 한석규였다고 한다. 연기력에 있어서는 한석규도 훌륭한 배우지만, 그의 거절 덕분에 우리는 인생의 막장까지 가버린 한 사내의 기가 막힌 눈물 연기를 스크린을 통해 볼 수 있는 행운을 얻게 됐다. 조금 루머성 짙은 스토리이긴 하지만, 믿거나 말거나 하나 더. <무간도>의 양조위 캐릭터를 두고 제작진 측에서 한 때 장동건을 섭외하려고 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장동건도 양조위만큼 기품 있는 배우지 만,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깊고 슬픈 눈의 소유자인 양조위를 <무간도>에서 볼 수 있었던 건, 어쩌면 장동건 덕택일지도 모르겠다.
대타 출연으로 행운을 거머쥔 배우들
이 외에도 대타 출연으로 행운을 거머쥔 배우들은 충무로에 비일비재하다. 가수 활동에 전념하겠다는 유진의 캐스팅 고사로 한가인은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성공적인 스크린 데뷔전을 치를 수 있었고, 전도연은 심은하와 김남주 등이 거절한 <접속>으로 ‘멜로의 여왕’자리를 다지는 발판을 마련했다. 고소영은 심은하가 거절한 <비트>로 아쉬운 필모그래피를 채울 수 있었고, 문소리는 김혜수가 드라마 <장희빈> 때문에 출연을 번복한 <바람난 가 족>으로 흥행 배우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한편, 신성우가 <은행나무 침대>의 황장군 역을 거절하는 바람에 시 신인에 가까웠던 신현준은 스타덤에 올랐고, 이성재는 박신양이 포기한 봉준호 감독의 <플란다스의 개>로 흥행의 행운은 놓쳤지만 연기 면에서는 호평을 얻어내기도 했다. 그리고 <비트>의 유오성은, 그 당시 브라운관에서 뜨거운 호응을 얻던 정찬이 그 역할을 거절하는 바람에, 남성적 카리스마가 넘치는 태수 캐릭터를 멋지게 연기할 수 있었다.
드라마 캐스팅 비하인드
<파리의 연인>의 한기주 역에 박신양이 아니었다면? 이제 와서야 한기주 역에는 박신양만한 캐스팅이 없다고 다들 말하지만, 본래 <파리의 연인>의 제작사에서 캐스팅 1순위로 고려했던 사람은 ‘욘사마’ 배용준이었다. 당시 캐스팅 섭외 시기에 드라마보다는 영화 쪽에 관심이 더 많았던 배용준은 한기주 역을 거절했다. 두 번째 섭외 순위였던 배우는 이정재. 그러나 이정재 역시 출연을 거절해 한때 <파리의 연인> 한기주 역 캐스팅은 난항을 겪기도 했다. 드라마 방영 후 마니아 팬들을 이끌었던 <네멋대로 해라>의 고복수와 전경 역에는 양동근, 이나영이아닌 차태현, 송혜교가 캐스팅 우선순위에 있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그 때 다른 작품의 스케줄 조정이 이뤄지 지 못해 이 역할을 포기해야 했다.
한편 <올인>의 송혜교가 맡은 민수연 역은 김희선이 송혜교보다 먼저 캐스팅 후보에 올랐다고 한다. 그러나 당 시 김희선은 <화성으로 간 사나이>의 촬영 때문에 <올인>의 캐스팅을 고사했다고. 이외에도 김희선은 <겨울연가>의 최지우가 맡았던 유진 역할을 거절했고, <명랑소녀 성공기>의 장나라가 연기했던 차양순 캐릭터를 거절하기도 했다
(읽고보니, 정말 어떤 배역과 작품은 한배우에게 운명처럼 돌아가게되는 경우도 있는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죠. 알고있던 것들도 있엇지만, 이병헌의 이우진도 멋졌을것 같네요. 유지태도 좋았지만 그런데 김재원의 현수는 좀 매치가 안된다는 생각이 드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