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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북경.장가계 문학기행 수필 - 詩와 창작 2005년 7.8월호-다음 호에계속 연재
김윤자
여행일: 2004년 9월 6일 월요일-9월 10일 금요일까지 4박 5일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이며 월간 수필문학 주간이신 강석호 선생님과 수필문학의 여러 문인들과 함께 중국북경 문학기행을 다녀왔다. 수필문학은 남편이 등단한 모지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 부부가 함께 다녀왔다. 지난 6월 한국문인협회에서 주관한 캐나다 해외문학 세미나에도 강석호 선생님과 우희정 부장님은 함께 다녀왔기에 문인의 길에서 좀더 친숙해졌고 가까워진 계기가 되었다. 20여 명의 문인들도 대부분 수필가이고 시조시인과 본인을 포함하여 시인이 몇 명 있다. 어느 장르의 문인이던 문학이라는 한 울타리 안에서 우리는 금새 친숙해졌다. 인천국제공항에서의 만남에서부터 중국북경.장가계 문학기행 및 돌아오기까지의 자취를 날짜 별로 적고, 중국 곳곳의 명소를 돌아보며 보고, 듣고, 느낀 점을 적어 보고자 한다.
*장가계 토가족의 삶
1949년에 중국이 해방되고 1950년에 장가계가 해방되었다. 중국은 넓은 대륙이라서 한 지역 인구가 1200만명이 넘으면 북경, 천진처럼 자치구로 정한다. 이곳은 특별행정 자치구다. 북쪽 남방지역 아열대 기후로 습기가 많으나 산족이 살기에는 좋다. 온도가 여름에는 42도까지 올라가고 겨울에는 눈이 1-2회 잠시 온다. 연중 2000mm의 강우량과 연평균 온도가 27도다. 겨울에는 이불의 물을 짤 정도로 습도가 높다. 이곳은 4개 행정구로 인구가 150만인데 70%가 토가족이고 30%가 소수 12개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산아래 토가족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단층은 거의 없다. 습기가 많아 1층은 물이 고여 창고로 쓰고 대개 2층에 산다. 주원장이 명나라를 세우면서 억압하던 청나라와 원만하게 되고 이때부터 토가족이 알려졌다. 이전에는 남방민족으로 분리되어 따로이 살았다.
건물을 18층 이상은 짓지 못한다. 딱 한곳만 예외인데 그것은 통신빌딩이다. 장가계 산을 가린다고 작은 공장 하나 마음대로 짓지 못한다. 순수한 관광산업 마을이다. 호남성 중에서도 이곳은 가난해서 새도 날아가다 똥도 안 싼다고 한다. 먹은 게 없어서 똥도 없다는, 그만큼 빈곤 마을이라는 의미다.
토가족은 아직도 그들만의 톡특한 풍속을 지니고 있다. 이 산중에서 그들 삶의 풍습 일부분을 듣고 보았다. 그 나라 풍속을 알면 여행에 도움이 된다며 현지 중국교포 안내원이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이곳 처녀들은 노래를 불러야 나온다. 그 처녀가 마음에 들면 3곡조의 노래를 주고 받다가 총각의 발을 세게 밟으면 그것이 바로 청혼이란다. 묘족들은 대나무의 묘가체 춤으로 응수하며 짝을 짓는다.
토가족 음식은 말려서 구워 먹는다. 땅에 다니는 것은 뱀을 비롯하여 다 먹는다. 돌산이라서 쥐가 사는데 쥐고기는 귀빈에게만 대접한다. 산쥐 큰 것은 3kg이나 나가며 토가족에게는 귀한 음식이다. 농사는 이모작이다. 한국의 제주도 날씨다. 쌀이 맛이 없어 국수로 만들어 유채나 참깨로 맛을 내어 주식으로 먹는다.
여자는 어려서부터 우는 훈련을 한다. 결혼 두달 전부터 혼자 울거나 가족과 함께 운다. 시집갈 때 울면서 가는 여자가 신랑에게 사랑을 많이 받는다. 시댁에 가서도 우는 기술에 따라 등급이 매겨져 대우를 받는다. 신랑 앞에서 우는 것은 신랑이 자기를 먹여 살려야 하니 고생문이 열렸다고 죄송하여서 운다는 것이다. 이런 마음가짐은 발달된 문명 앞에서 보석으로 빛나는 아름다움이다. 원시의 광채, 그것을 우리는 배워야 한다고 다짐했다. 그런 마음으로 곁에 앉은 남편의 손을 잡아 주었다.
토가족은 총 700만 명이고 그중에서 조선족이 200만 명이다. 200만 명의 조선족은 교육열이 대단하다. 한국족은 밥은 못 먹어도 대학교육까지 시킨다. 55개 소수민족 중 최고로 잘 발달된 민족이다. 토가족은 위신이 없는 소수족이다. 문자, 언어, 나라가 이 세가지를 갖추어야 인정 받는다. 토가족은 나라는 있지만 문자가 없다. 그래서 그들의 언어도 못 알아듣는다. 창가로 부부가 결정되므로 토가족은 발을 밞으면 좋아한다는 뜻으로 통한다. 이곳에서는 남자가 토가족 여자의 발을 밟으면 책임져야 하니 남자 여행객들은 조심하라고 조언한다.
물건 파는 아이들은 호적이 없다. 자식은 한 명만 낳으려 한다. 맏아들만 호적이 나오고 아래의 아들에게는 호적이 안 나온다. 호적이 없으면 학교도 못 다닌다. 집을 나와 돈벌이를 위해 홀로 떠돌아다니며 산다. 6세에서 18세까지 그렇게 고독하게 산다. 18세가 되면 그때서야 주민증이 나온다. 18세부터 사람 구실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곳 아이들은 돈 버는 눈치만 는다. 실제로 장사 수단을 보았다. 대형 부채 기념물을 1만원부터 부르더니 나중에는 쫓아와 2천원까지 멋대로 가격을 매겨 판다. 너무나 싼 가격이지만 그만큼 거품도 많다는 사실이다. 핸드백과 배낭 모양의 '중국장가계' 마크를 수놓은 기념가방도 1천원이다. 웬만한 기념물은 한화 천원권으로 거의 다 구입이 가능하다.
토가족 장사꾼은 '천원이요, 천원'이라는 한국말을 연달아 내밷고 있다. 한국 관광객이 많이 찾으므로 한국인들을 겨냥하여 그 말만 배워 기계적으로 외우고 있다. 값을 더 싸게 흥정하려 말을 걸면 대충 알아듣고 고개짓으로 긍정과 부정을 표현한다. 모든 물건값이 무척 싸서 필요한 것들을 많이 샀다. 건너편 풍광이 좋은 자리에는 남자 아이가 진을 치고 앉아 사진을 찍어주고 한화 천원을 받는다. 산 곳곳 마을의 길가에는 재래 과일 장수들이 즐비하다. 군밤을 천원이라며 큰 냄비에 한가득 담아 보이고는 실제로 사려하면 밑에서 작은 그릇의 밤을 쏟아 담아주는 눈속임을 하기도 한다.
무릉원 산정의 화룡공원에서 사진 찍는 사람들의 곁에 전문적으로 따라 붙는 토가족 여인을 보았다. 스무살 안팍의 맵시 고운 여자들이 제 멋대로 사진 찍는 사람을 쫓아와 함께 사진 찍고는 무조건 천원씩 주라고 떼쓰는 모습을 보았다. 황룡동굴에 갈 때 굴 입구까지 300m 쯤 걸어서 갈 때 아이들이 사라고 쫓아와도 눈길을 주지 말 것을 당부한다. 한사람의 물건을 팔아주면 벌떼처럼 달려들어 힘들다는 것이다.
장가계는 돼지고기가 쇠고기보다 비싸다. 왜냐하면 소가 대부분 물소라서 그렇다. 장가계의 집 한채는 평균 80평 정도로 중화 35만원, 한화 5천만원이면 3층 집을 짓는다. 길가에 감이 익는 모습은 한국과 비슷하다.
중국인구가 13억이라 하나 실제는 15억이다. 특히 이곳 호남성에 호적이 없는 사람 많아 통계에서 빠져 있다. 손이 미치지 않는 관계로 경제 미개발지가 이곳을 비롯하여 아직도 많다. 장가계 거리는 토가족이 살던 산속 마을인데 지금은 많은 건축물로 제법 도시가 형성된 상태다. 호텔을 짓기 시작하고 아파트와 상가도 많이 지었다. 주로 외국인을 위한 것들이다. 한국인이 대다수다. 곳곳에 '환영합니다' 라는 한국어 간판이 보인다. 중국과 한국, 한국과 장가계의 아름다운 조화가 이어지길 빈다.
장가계 토가족의 생활상.장님의 바이올린 연주와 여인들의 제품짜기
*장가계 출발
장가계 여정을 우리와 동행하며 곳곳 명소를 촬영한 비디오를 받아 다시 장가계 공항으로 이동했다. 장가계 공항에서 밤 9시 북경행 비행기에 탑승하기 위해서다. 이번에는 지연되지 않고 예정된 시간에 비행기가 이륙했다. 그런데 비행기를 탑승하는 마루통로가 작동하지 않고 공항 내의 대형버스가 와서 탑승객을 실어 비행기의 계단 앞으로 옮긴다. 아직 장가계 공항이 완전하게 정비되지 않은 듯하다. 북경까지는 2시간이 소요될 예정이다. 곁에는 이춘미 수필가님이 착석했다. 우리는 많은 이야기로 문우의 정을 나누었다. 창밖은 암흑이다. 산악지대를 지나가기 때문에 불빛도 보이지 않는다.
캄캄한 밤을 가르고 베이징에 밤 11시 30분 정시에 도착했다. 첫날 가이드 김홍일님이 나와 반갑게 만나서 인사를 나누었다. 짐을 찾는 동안 북경공항을 둘러보던 중 한국 소나타 은색 자동차를 큰 통로에 전시해 놓은 것을 보았다. 조국의 드높은 위상을 보고는 참으로 기쁘고 반가웠다. 우리 나라의 자동차가 중국의 수도 베이징에서 사랑받고 있음을 보았다. 오롯이 선 그 자태 앞에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더욱 조국이 발전하기를, 국민 하나 하나가 힘을 모아 지금보다 한차원 더 높은 선진 대열로 굳건히 서길 빌어본다.
공항을 떠나 40분 동안 버스를 타고 북경 스프링스 호텔에 도착했다. 예측하기 어려운 장가계 항공이 우리가 도착하기 전날은, 11시 30분에 도착 예정이던 비행기가 새벽 3시 30분에 도착하여 승객들의 고생이 많았다고 한다. 다들 피곤하고 지쳤으나 연착하지 않아서 다행이라 여기며 안도의 숨을 쉬었다. 두터운 체제의 벽을 넘어온 북경, 신비로움 속에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뜻깊은 밤이다.
장가계공항 앞의 대형화보.무릉원 관광을 마치고 베이징으로 가려고 장가계 공항에 와서
2004년 9월 9일 목요일
북경 스프링스 호텔. 만리장성. 명 13릉 지하무덤. 이화원
*북경 스프링스 호텔
스프링스 호텔은 별 4개급 고급호텔이다. 한국으로는 5성급 호텔이란다. 베이징 도심에서는 좀 멀지만 최근에 지은 신식 건축물로 호텔이 깨끗하고 우아하다. 지난 밤 늦게 도착하였지만 곤한 잠을 잤다. 아침 6시에 모닝콜을 울려 북경의 아침을 열었다. 아침 식사는 호텔식 뷔페다. 서양식이 많다. 장가계 란천호텔에서도 그렇고 이곳 스프링스호텔에서도 중국 음식은 거의 없다. 기름진 고기요리를 예상했는데 아니다. 만두를 빼고는 서양의 어느 호텔에 온 듯하다. 호텔 이름에서부터 그렇다. 1990년도에 대만에 갔을 때의 그곳 요리와는 많이 다르고, 2003년도에 상해 쪽 여행과도 상당히 다르다. 빠르게 외국 문화에 적응하는 것으로 보인다. 오전 7시 20분에 호텔을 출발하여 만리장성으로 향했다.
베이징 스프링스 호텔 로비 1층 내부.4성급 최근에 지은 일류호텔.2층에서 뷔페 조식 후
*만리장성
만리장성의 길이는 정확히 12,750리라고 한다. 오르는 길은 세 군데인데 우리가 오른 곳은 베이징에서 북서쪽으로 70Km 떨어진 팔달령 장성이다. 그곳이 경관도 좋고 케이블카가 있어 관광객이 쉽게 오르내릴 수 있어서다. 베이징 도심을 벗어나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웅장한 산을 만나고 성벽을 오르는 케이블카 승차장에 도착했다. 우리가 달려온 이 길은 몽고로 가는 단 하나의 길이며 내몽고까지는 겨우 12시간이 소요된다니 징기스칸의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듯 감격스런 순간이다.
케이블카 한대에 다섯 명씩 앉아 2Km가 넘는 팔달령 긴 능선을 7분 동안 오른다. 시간을 거슬러 잠든 역사를 깨우며 아주 서서히 오른다. 천하를 통일하려 호령하던 황제의 함성이 메아리로 산 계곡에 스러져 부서지는 환상 속에서 중국의 신비를 본다. 사방으로 둘러 쌓인 험준한 산 고갯마루에 거미줄 모양으로 진을 친 끝없는 성벽이 인간의 힘으로 이루어졌다고 보기에는 가슴이 시리다.
만리장성 팔달령.2Km가 넘는 산능선을 오르는 케이블카를 타고 차창 밖으로 찍은 풍경
BC 221년 진시황이 일곱 나라로 갈라져 있던 중국을 통일한 후 북방 유목민족의 침입을 막고 국가를 굳건히 지키기 위해 쌓기 시작하였다는데 사실은 인민을 다스리는 도구였다는 말도 있다. 30만의 군사와 수백만의 농민을 징발하여 대량의 벽돌로 장성을 쌓는 과정에서 진시황은 사람은 많이 죽였지만 앞을 내다보는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다. 각 시대마다 심혈을 기울여 보수하여 명나라에 와서야 장성의 길이가 만리를 초과하였고 그때부터 만리장성이라는 이름도 지어졌다고 한다. 그 당시 1리는 약 400m라 하니 현재 사용하는 1리의 길이보다는 짧지만 만리라 함은 상당한 규모를 상징한다. 지금까지 2000년 동안 끊임없이 다듬고 지켜온 총길이 6000Km의 웅대한 원형성벽으로 중국의 정신적인 상징물이다. 만만디라는 중국의 저력이 서리어 있다. 중국을 돌아보며 아직은 여물지 않은 행정의 어눌함을 보기도 하였지만 만리장성의 위용 앞에서는 숙연해진다. 보일 듯 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깊은 산중의 장성은 베일 속에 가려진 중국의 무서운 힘이다. 13억의 인구가 분열되지 않고 한울로 뭉쳐 사는 것은 장성을 쌓던 뜨거운 혼이 살아 있음이다.
정확히 12750리 길고 긴 장성의 정상에서. 만리장성에 오른 것에 대한 환희
남자로 태어나면 이곳에 와서 성을 쌓다가 죽기도 하고 몇 십 년씩 머무르곤 했다고 한다.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말의 유래를 이곳에 와서 알았다. 한 여인이 장성 쌓기에 차출장을 받은 남편에게 마지막 저녁 밥상을 차려주고 통곡하는데 지나가던 걸인이 들어와 그 이유를 물었다. 여인은 걸인에게 사연을 말하고 부탁했다. 편지를 써 줄테니 당국에 갖다주기만 하면 그 보답으로 당신과 하룻밤을 함께 하겠노라고 여자의 정조를 떨어지는 꽃잎처럼 약속했다. 걸인은 승낙했고 다음 날 아침 여인이 준 서신을 들고 장성 쌓기 담당관에게 갔다. 글눈이 어두운 걸인에게 쥐어준 것은 남편에게 내려진 차출장이었다. 여인은 [하룻밤 만리장성] 이라는 허황된 약속으로 남편을 위기에서 구했다는 이야기다. 참으로 슬픈 전설이다. 수많은 사람의 목숨과 피땀으로 이룩한 만리장성을 이렇게 쉬이 올라도 되는 걸까.
달나라에서도 보인다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라는데 사실은 달나라에서 보이는 것은 아니고 그만큼 웅혼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광활한 준령마다 뻗어나간 성벽이 뽀얗게 빛난다. 그 동안 공산주의라는 두터운 체제 속에서 갇혀 있던 대륙이 닫혔던 성문을 열고 이방인을 불러들여 이곳은 세계관광 산업 1위의 명소가 되었다. 만리장성이 관광 1위 수입인 만큼 세계 많은 여행객이 찾는 이 도로까지도 팔달령로라 명명한다. 30km를 넘으면 10원의 통행세를 내는 잘 가꾸어진 도로다.
만리장성 케이블카는 한방울의 땀도 지불하지 않은 사람들을 쉼없이 실어 올린다. 그 옛날 장성을 쌓던 사람들의 노련한 손길처럼 성숙한 움직임으로 관광객을 성벽 위로 끌어올리고 있다.
11시부터 12시까지 만리장성을 관광하고 내려오는 걸음이 아쉬웠다. 북경도심으로 이동하는 버스에서도 한동안 병풍처럼 둘러쳐진 대단한 산속의 성벽을 보았다. 산의 끝 부분에서는 성벽이 끝나고 성루가 있다. 지금은 관광지의 한곳으로 바라보지만 그 옛날에는 병사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저곳에서 생을 바쳤으리라. 오늘의 중국이 있음을 보는 역사적인 세계문화유산 유적지다.
BC211년 진시황이 쌓기 시작한 만리장성에 올라 문인들 기념사진.맨앞 하늘색 티가 본인
*명 13릉 지하무덤
만리장성에서 다시 북경도심으로 들어와 정통 중국 요리점에서 점심 식사를 한 후 명나라 200여 년에 걸친 13황제의 무덤이 있다는 명 13릉으로 이동했다. 팔달령 장성의 산기슭 들판의 평원에 있는 명대 13릉 입구 들어가는 길에 양쪽으로는 복숭아와 사과 과수원이 있다. 그런데 가로수 나무에게서 특이한 점을 보았다. 가로등을 세우지 않고 가로수 플라타나스 나무의 아랫부분에서 1m 정도까지 야광 흰물질을 발라 놓았다. 자동차가 지나가면 그 야광빛이 발하여 거리가 밝다는 것이다. 능 안의 잔디밭 울을 친 철조물에도 더러 그렇게 하얀 야광물질을 발라 놓은 것을 보았다. 전기를 아끼려는 목적이라면 나무의 희생이 너무 크다. 나무가 숨을 쉬지 못하는 피부껍질의 고통을 어찌할 것인가. 아무리 사람을 위한 것이라 해도, 행여 거리 풍경의 멋스러움을 위한 것이라 해도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가는 무덤은 명나라 13번째 만력 황제의 지하무덤으로 정릉이다. 정문인 대홍문을 들어서면 황제릉 앞에는 갑옷으로 무장한 12개의 석상과 사자, 낙타, 코끼리, 기린, 말, 등 동물석상이 늘어서 있는데 이것은 단순한 석상 장식물이 아니고 사후에도 황제가 모든 것을 지배한다는 상징물이다. 북경에는 산이 많다. 1957년 홍수 때 비석이 떨어져 나와 그것을 보고 발견된 27m 지하궁전 무덤이다. 명나라 태조 주원장 묘는 난징(남경)에 있다. 그러나 이곳에 묻힌 13왕은 주원장의 후손들이다.
만력 황제는 22세에 즉위하여 48년 간 그 누구보다도 재위기간이 긴 황제다. 그는 황제로서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다. 정치에는 뜻이 없고 주색으로 세월을 보냈고 자신의 묘인 정릉을 만드는데만 열중했다. 그래서 중국에는 2개의 무자無字 흰비석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명나라 만력제 무자 흰비석이다. 또 하나는 아들을 몰아내고 황제에 오른 당나라 여황제 측천무후다. 측천무후와 만력제는 중국의 불명예스런 하얀 비석을 남긴 것이다. 높다란 만력제의 무자 흰비석이 부끄러운 혼으로 서 있다. 앞 뒤 그 어느 곳에도 글씨가 없다. 기록할만한 행적이 없어 이렇게 하얀 무자로 비석을 세운 것이라니 우리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이색적인 역사의 산물이다.
명대 13릉 중 만력제 능 무비.48년 재위 중 한일이 하나도 없어 글씨가 없는 무비
이곳 만력황제 묘 정릉은 즉위 중 6년의 세월과 국비 2년분의 투자로 생시에 자기 무덤을 준비했다. 그 또한 부끄러운 역사다. 백성의 삶을 돌보아야할 황제가 사후의 개인 집을 짓느라 백성을 얼마나 힘들게 했을까. 무덤의 규모가 엄청나게 크다. 큰 공원을 돌아 지하 계단으로 몇 층을 내려가니 대리석 궁전이 있다. 몇 칸의 방을 거치며 잘 보존되어 있는 붉은 휘장의 관도 만나고, 당시의 문화를 드러내며 전시된 도자기와 향로도 보았다. 그래도 유일하게 두 왕비와 합장한 무덤이다. 만력제는 본처와 후처가 있는데 그의 손자 효정과 효단이 두분 조모의 시신을 이곳으로 옮겨와 합장으로 모셨다. 지하무덤 끝부분의 삼각진 지붕문에 직사각형 조각의 대리석이 양쪽으로 박혀 있는데 그것을 빼어내면 나머지 12릉의 위치도 찾을 수 있다 한다. 이 능도 이곳에서 돌판 하나가 홍수에 빠져나와 지금의 지하무덤 위치가 적힌 것을 보고 찾아냈다. 홍수에 쓸려 내려온 도로의 아치형 굴문을 역사적 현장으로 보존하고 있다.
나머지 12개의 능은 발굴하지 못하고 있다. 발굴 하다가 파손될까봐 손을 대지 못하는 것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후손을 위해서라고 한다. 한번에 문화유산을 다 발굴하면 후손은 무엇을 먹고 살겠느냐는 안내원의 말에 놀랐다. 하얀 무비 앞에서 속살을 키우는 나라임을 보았다.
명대 13릉 중에서 우리가 들른 만력제 능. 관람 후 문인들 기념사진.명 13릉 정원에서
*이화원
이화원은 서태후가 기거한 개인 별장이다. 베이징에서 북서쪽으로 16Km 떨어진 만수산 아래, 복숭아 모양의 230ha(1ha=4천평) 규모로 지은 북경에서 가장 큰 공원이다. 역대 황제의 행궁으로 쓰였던 800년의 역사를 지닌 곳인데 청조 말기 서태후가 자신의 은거장소로 쓰기 위해 1888년 대규모의 재건 공사를 하였다. 이화원을 조성할 때 청나라는 열국의 압박으로 피폐한 상태인데 해군확장 기금을 도용하여 이런 개인 별장을 지으므로 군사력 미비로 청조의 멸망을 재촉한 원인이 되었다는 말도 있다. 북으로 만수산과 남으로 곤명호는 인공으로 조성된 것들이다. 서태후는 청나라의 악덕 황후다. 함풍 황제의 애첩이었는데 천한 집 여자로 태어나 이화원에 궁녀로 들어왔다. 야망있는 여자로 내시를 꼬득여 함풍 황제를 모시고 오도록 한 후 산 위에서 노래를 불러 황제의 환심을 사 애첩이 되었다.
서태후 개인 별장 이화원.그녀가 가무를 즐겼다는 건물.패왕별희 촬영한 곳
황제의 본처인 동태후가 아이를 못 낳자 서태후는 아들까지 생산하고 결국은 남편인 함풍 황제까지 죽였다. 이화원 뒤뜰 큰 곤명호 연못에 남편 함풍황제를 죽이려고 배에서 빠뜨렸는데 다른 이의 도움으로 살아나자 1년 동안 음식에 독약을 넣어 죽였다. 혹자는 함풍제가 마약으로 죽었다 하나 사실은 서태후의 손에 죽었다는 설도 돈다. 기가 막힌 일이다. 권력에 눈 멀어 아들까지 글자를 가르치지 않아 밖으로 돌며 계집질을 하게 만들어고 결국 아들도 성병으로 죽었다. 서태후는 아들이 동치제로 황제일 때부터 수렴청정를 했다. 그러다가 아들이 죽자 여동생 아들을 황제로 놓고 권력 행사했다. 함풍황제가 총애하던 다른 후궁의 네 다리, 사지를 잘라 항아리에 담아 죽일 정도로 질투심이 강했다.
여동생 아들인 조카가 즉위하자 광서 황제는 서양문물로 자본주의 지향이고, 서태후는 봉건주의로 대립되었다. 그때 서태후가 이김으로 오늘 날 중국은 서양에 비하면 100년 뒤질 정도로 이렇게 발전이 늦다고 말한다.
그러나 서태후는 결국 조카 광서 황제도 이곳 이화원에 10년을 가두어 두다가 어느 날 밤 독극물 음식으로 죽이고 자신도 독극물을 마시고 뒤따라 이곳에서 죽었다. 22세에 과부가 된 그녀는 이화원에 미남을 불러들여 수없이 죽였다. 단 한사람 내시 1명만 제외하고는 모두 하룻밤 정사를 나눈 후 소문을 막기 위해 죽여서 내보냈다. 그 내시는 원래 궁에 들어올 때 뒷돈을 주고 거세를 하지 않았는데 서태후의 머리를 잘 빗겨주다가 눈에 들어 알고보니 완전한 남자임을 알고는 정사를 해온 것이다. 내시와의 사이에 두 아이까지 낳았는데 잔인하게도 그 아이들은 비밀리에 민가에 보냈다.
이화원 연못.함풍제 남편을 배에 태워 물에 빠뜨려 죽이려 했다는데 그날의 배는 아닐런지
여기까지 중국 현지 안내원의 말을 들으며 소름이 돋았다. 서태후는 영화도 제작되어 본 적이 있고 부와 권력에 눈이 멀어 부족한 황후로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악독한 줄은 몰랐다.
이화원은 꽤 넓다. 특히 연못이 바다처럼 넓고 산과 어우러져 절경이다. 멀리 호수 가운데 17개의 구멍이 뚫린 아치형 모양의 십칠공교 다리가 진풍경이다. 그외 호수 위에 대리석으로 만든 2층 석배가 집모양으로 떠 있고 그 주위를 넘나드는 유람선이 한껏 역사의 현장을 재현하고 있다. 묻고 싶다. 저 호수의 물은 그날의 슬픈 역사를 아느냐고. 아무렇지도 않게 잠잠히 눈감은 호수의 물이 죄인 같다. 그날의 아픈 상처를 잊었는지 세월 모르고 유유히 떠다니는 배가 눈물겹다.
광서 황제를 가두었다는 사방으로 울타리 쳐진 곳은 두 군데다. 양반가의 대가집만한 공간을 정사각형 네모진 틀로 만들어 마당을 중심으로 사방에 네 개의 궁을 이어서 지어 붙여 한치의 틈이 없이 건물로 막았다. 광서제가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가두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얼마나 정치적 수단이 뛰어나면 장장 10년씩이나 일국의 황제를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아래의 정치인들을 모두 하수인으로 만들었다는 해석이 나오는데 그것은 어디 쉬운 일인가. 이화원은 이모의 손에 황제가 되고 이모의 손에 삼십 대에 죽어간 한 남자의 한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그림으로 도배하듯 명화로 꾸민 728m의 장랑은 유명하다. 긴 복도와 천장에 서유기, 삼국지연의 등 중국의 유명한 이야기들을 화려한 색채의 그림 1만 4천여 개로 꾸며져 있다. 장랑의 양측은 측백나무 가로수가 있어 절경이다. 연못을 바라보며 지날 수 있도록 밖으로 길게 놓여 있다. 나도 그녀처럼 우아하게 걸어보았다. 세월의 무심함도 느끼고 권력의 허망함도, 부와 명예가 부질없음도 보았다. 만수산 중턱에는 이화원의 중심 건물이며 불전인 불향각이 높이 솟아 있다. 나무 사이로 보이는 사중 기와지붕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패왕별회를 촬영한 대화루 궁전도 보았다. 서태후는 가무를 좋아하여 이곳에서 자주 향연을 베풀었다. 부속 건물도 많고 기이한 동물상과 돌덩이도 서 있다. 서태후가 황후로 있을 때 장수하기 위해 세운 인수전 앞의 태호석 장수돌비와 권력을 지켜준다고 믿은 호신의 상상 동물상, 그리고 거대한 돌덩이를 옮기다 한 집안이 몰락했다는데 그 엄청나게 큰 돌덩이를 이곳으로 옮겨와 아직 보존되고 있다. 자신의 울을 그렇게 튼튼히 쳤건만 70대의 연륜으로 비참하게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여인, 서태후의 족적을 보는 가슴 아린 여행지다.
서태후 별장 이화원 장랑.그녀가 걸어 다녔을 긴 복도.복도 위와 사방 화랑의 그림이 절경
2004년 9월 10일 금요일
천안문 광장. 자금성. 왕부전 쇼핑가. 중의학 연구 한방원. 북경공항 출발
*천안문 광장
오전 7시 30분에 스프링스 호텔을 출발하여 천안문 광장으로 향했다. 북경 도심에서 아침 출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대만에서도, 상해에서도 그랬듯이 이곳 북경에서도 자전거 행렬은 여전하다. 자동차와 함께 집단으로 모여 대로의 한도막을 차지하며 차량을 위한 신호체계에 맞춰 자동차의 흐름 따라 움직여 간다. 아직도 이런 풍경은 본받아야할 사항이다.
천안문 광장은 열린 공간으로 멀리 버스 안에서부터 시야에 들어왔다. 티브이에서 자주 보던 그 붉고 우람한 건물이 보일 때 중국의 역사와 우리의 역사는 결코 무관하지 않음에 묘한 감정이 일렁임을 느꼈다. 천안문에 시선이 고정되고 있을 때 광장 앞 큰 대로의 맞은 편에 중한버스를 주차하고 내렸다. 대로를 건너야 하는데 광장 앞 큰 도로에는 신호등이 없다. 안내원은 붉은 깃발을 높이 들고, 한손으로는 질주하는 차들을 멈추게 하고 차량 행렬 속으로 진입하며 우리를 데리고 길을 건너갔다. 수많은 사람과 차가 교차하는 천안문 대 명소 앞의 거리에 신호들이 없다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맞은 편 광장 앞 인도에는 국기 게양식에 참석하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다. 모택동 기념당에서는 매일 8시 30분에 96명의 군위병이 국기게양식을 하며 지하 23m에서 모택동 관이 오른다. 1만 명 이상이 천안문 광장 정면 모택동 기념관 건물의 한 블록을 꺾어 돌아 장사진으로 줄 서 있다. 어느 종교 행사에 모인 순례자들의 대집단으로 보여진다. 자본주의 체제와 공산주의 체제의 차이점을 육안으로 보는 현장이다. 모택동은 아직도 중국의 어린아이에서 어른까지 모든 국민으로부터 추앙받는 인물이다. 그를 존경하는 중국 자국인은 사는 곳이 멀어 하루에 당도하지 못할 경우 인근 숙소에서 하룻밤을 자고 이곳 국기 게양식에 참여한다. 질서는 없으나 기념관 관람시는 줄을 서서 근엄한 자세로 관람한다. 모택동 수령은 나라의 국부로 중국인에게 위대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대외적으로 확인되는 현상이다.
천안문 광장 앞 도로.모택동을 존경하며 국기 게양식을 보려고 각지에서 모여드는 사람들
천안문에는 모택동의 사진을 크게 확대하여 중앙에 걸어놓았다. 양쪽에는 빨간 색의 큰 글씨로 두줄기 문구가 붙여 있다. 좌측으로 '중화인민공화국만세'와 우측으로 '세계인민대단결만세'라는 구호가 붉은 바탕에 한자로 크게 쓰여져 걸려있다. 천안문 광장 집회장 앞에는 붉은 중국 국기가 높이 솟아 펄럭인다. 모택동 기념 박물관 바로 앞에는 모택동 기념 돌비가 아주 큰 키로 서 있다. 10월 1일 국가행사로 공사 중이었다. 분수를 마련하려 쇠파이프가 여러 모양으로 진을 치고 있고 사방에 공사 장비가 들어 서 있어 좀 어수선하다. 그래도 수많은 내.외국 관광객들이 모여들어 집회를 방불케 한다. 천안문 광장은 국가행사를 하는 곳으로 44만평 면적이다. 33만 평인 여의도보다 크다. 명나라 영락 15년 1417년에 승천문으로 건설되어 1651년에 재건되면서 천안문으로 불린다. 명.청나라 때는 황제의 칙서를 발하는 의식이 이곳에서 행해졌다. 고궁의 남문이며 지붕은 이중이지만 단층이다. 광장 앞 양 옆의 건물은 박물관과 국가 행정회의를 비롯한 주요 행사를 하는 곳이다. 이십 대의 젊은 나이에 중국 공산당에 입당한 모택동이,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선포식을 이곳에서 했다. 주 건물이 10채나 되고 지금성으로 이어지며 세계 10대 명소 중 하나다.
천안문 입구에 걸린 모택동 초상화와 양쪽에 걸린 구호. 근엄한 자세의 중국 경찰
역사 속으로 잠들어 가고 있지만 한때 이곳 천안문 사태 폭동시에는 인권탄압에 반항하는 자들을 진압하기 위해 탱크를 밀고와 기관총을 들이밀며 수많은 인명을 사살한 참혹한 현장이다. 스스로 이곳 천안문 광장에서 분신하는 자들도 많았다. 찬란한 명소만은 아님을 느끼게 하는 소슬한 광장이다. 등소평 때 사건으로 우리의 4.19와 유사하다. 광장바닥에는 대리석 돌이 50만장 깔렸다. 돌 한장에 두사람이 설 수 있으니 100만 명 집회가 가능한 곳이다. 바라보는 눈길이 시리도록 엄청난 규모의 광장이다. 자금성을 비롯하여 명.청 시대 24명의 황제가 정치하던 생활처를 본다. 그 옛날 화려함 속에서 황제의 옷을 벗던 비운의 마지막 황제 부의가 슬픈 걸음으로 이곳을 더듬던 영화 한 장면이 떠오른다.
천안문 안으로 들어오니 열병식 연습을 하는 군인들이 보였다. 교과서에서나 본 공산당 복장의 꼿꼿한 모습이다. 국기게양식을 준비하는 훈련병 모임이라 한다. 그 바로 앞에서 입장표를 사고 겹겹의 천안문으로 들어갔다. 뒤로 첩첩이 보이는 궁궐들이 그 유명한 자금성이다.
천안문 최근경.구호-중화인민공화국만세,세계인민대단결만세.중국의 우상 모택동 초상화
*자금성
천안문에서 들어온 자금성은 그야말로 광활한 궁이다. 거대한 나라 중국의 화려한 한 시대를 장식했던 자취가 물씬 배인 자금성 건물이 눈 안에 가득 들어온다. 붉은 '자紫' 금지 '금禁'자 자금성紫禁城이다. 72만평 규모로 동서 800m 남북 900m인 땅에 방이 8,760개나 되는 부속 궁이 있다. 이런 모든 유적을 고궁박물원이라 칭한다. 황제가 출생 후 방마다 하루씩만 자도 27세가 되어야 자금성의 방을 다 거치게 된다니 그 넓음을 다 볼 수는 없지만 상상으로 가늠해 본다.
자금성은 우리나라의 경복궁과 같은 곳으로 명.청 황제가 살던 고궁이다. 천안문을 비롯하여 북쪽 끝문인 신무문까지 일직선으로 전삼전, 후삼궁이 있다. 전삼전은 태화전, 중화전, 보화전이고 후삼궁은 건청궁, 교태전, 곤녕궁이다. 외조라 부르는 전삼궁에서는 국가적인 행사나 의식이 행해졌다. 내정이라 부르는 후삼궁은 황제가 정무를 보거나 황후나 궁녀들과 생활하던 곳이다. 정전인 태화전은 듣던 바대로 규모가 웅장하다. 계단 난간이 모두 옥돌이고 층계 난간마다 빗물이 빠지도록 용의 머리 형상을 조각하여 놓았다. 그 돌출된 용의 입 모양 구멍으로 빗물이 빠져나간다는데 그 또한 장관이다. 향로 12개가 아래에서부터 위로 길게 놓여있다. 양 지붕 위에는 11개의 작은 짐승상이 세워져 있다. 정전에는 최고 많은 동물상을 세웠기 때문이다. 정전 양옆으로는 끝이 보이지 않는 궁전의 붉은 기와 지붕들이 곱다.
자금성고궁 본전 건물 앞에서.마지막 황제 부의가 오르내리던 중국 한 시대 역사를 보다
자금성에는 나무와 화장실, 이 두가지가 없다. 그 중에서도 궁에 나무가 한 그루도 없다는 것이 큰 특징이다. 나무가 자라므로 황제를 넘어 권위에 도전할까봐 궁전을 지을 때 절대로 나무는 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세월의 연륜에 비해 나무가 왜 저리도 작을까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마저도 후일에 심은 것이라 한다. 그런 아기 나무가 많은 것도 아니다. 궁전과는 떨어진 외진 기념 건물 앞에서 보기 드물게 몇 그루 만났다. 거의 궁 끝자락에 이르렀을 때 상록수 종류로 보이는 조금 키 큰 나무가 붉은 기와 지붕 위로 보였다. 여느 궁이라면 저런 풍경은 당연한 것인데 자금성 안에 워낙 나무가 없다보니 오롯이 솟아오른 그 나무가 참으로 아름답다. 밑부분은 보이지도 않고 상단의 머리만 푸르게 빛나는 나무가 진풍경이다. 역시 본전과는 거리가 있는 궁 안에 심은 나무다. 또한 자객이 죽일까봐 화장실도 짓지 않았고 임금 외에는 모두 요강을 가지고 다녔다. 황궁의 안위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철저했던가. 그냥 지나칠 수도 있지만 자세히 보면 푸르름이 없는 참으로 삭막한 뜨락이다. 울창한 나무로 찾아오는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우리 나라의 궁과는 엄청난 차이다.
자금성.권위를 제압한다 하여 나무를 심지 않은 것이 특징인데 보기 드물게 만난 나무
천안문 광장의 첫문에서 직선으로만 걸어가도 자금성의 태화전, 교태전 등 열 개의 궁전을 거친다. 자금성 동쪽에는 본처 동태후가 살고 서쪽에는 서태후가 살았다. 그래서 태후 앞에 동과 서를 붙여 부른 것이다. 서태후가 머무르던 궁을 보수 중인 것이 많았다. 곳곳에 철근 골조물이 높다랗게 서 있다. 서태후가 자던 궁의 방은 황후의 거처로서는 아주 작은 편이었다. 침실은 영혼이 달아날까봐 일부러 작게 지었다 하니 이런 모습도 자금성의 기묘한 풍경 중 하나다. 악덕 황후로 불려지는 서태후의 영악한 단면을 본다.
아기가 태어나 하룻밤씩만 자도 27세가 된다는 8760개 방이 있는 거대한 규모의 자금성
자금성을 돌아보느라 지쳤을 때쯤 어화원 쉼터에 이르렀다. 이곳은 황제가 달아나 꽃을 감상하던 곳으로 자금성의 정원이다. 작고 예쁜 모양의 궁궐이 대나무 사이에서 장난감으로 조립한 듯한 자태로 관람객의 시선을 끈다. 꽃과 나무를 만나는 아름다운 공간이다. 안내원은 저기가 화장실이라며 볼일을 보라고 큰 목소리로 외친다. 이 넓은 궁 안에 화장실이라고는 이곳 단 한군데 뿐이다. 제일 좋은 5성 급 화장실로 지정되어 건물 외벽 입구에 안내문과 함께 붙여 놓은 별 다섯 개가 금빛으로 빛난다. 하나의 궁전으로 들어서는 느낌이 든다. 화장실 담장 문에서부터 우아하고 곱다. 휴식할 수 있는 정자도 있고 의자를 설치해 놓아 앉아서 담소를 나누며 쉬었다. 뒤켠으로 가보니 기념돌을 전시해 놓기도 하고 돌로만 연결하여 세운 낮으막한 돌문이 있다. 안에는 야생화와 푸른 식물이 자라고 있다. 지금까지 보아온 자금성의 소슬한 분위기와는 다른 아기자기한 공간이다.
자금성 뒤 뜨락 쉼터 어화원.중국교포 3세 가이드 김홍일님과 함께
다시 보화전의 문을 지나며 큰 대리석 한장으로 된 돌판에 머리가 아홉개인 용의 꿈틀거리는 조각품을 만났다. 계단을 오르는 길 중앙에 직사각형 모양의 기다란 용형상 돌판이 상하로 길게 비스듬히 놓여있다. 용은 황제를 상징하는 것으로 다른 곳에서도 이런 조각품은 종종 보인다. 궁의 뒤켠인데도 모두가 으리으리하다. 영화 '마지막 황제 부의'에서 부의가 황제에서 물러난 후 장성한 중년으로 이곳을 더듬던 장면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초라한 공산당 인민의 제복을 입고 한 시대의 찬란했던 영화가 잠든 자금성 구룡 계단을 고뇌에 찬 걸음으로 오르던 부의가 잔상으로 보인다. 이곳은 들어오면 안된다며 어린 문지기에게 내어 쫓기던 부의와 이곳을 거쳐간 수많은 황손들, 영욕의 시간들이 햇살과 찬비로 교차하며 떨고 있다.
자금성 뒤켠 길게 놓인 한장의 돌에 용의 장식 무늬를 새긴 거대한 돌판
내시가 서태후에게 '시간 잡을까요?'라고 묻던 침궁이 있다. 사실인지는 그 누구도 모르지만 그런 야화가 있다하여 우리 일행은 '시간 잡을까요?'라는 말을 농으로 건네며 웃었다. 수많은 인파로 일행 한명을 교태전 앞에서 잠시 잃어 애를 태우기도 했다. 자국인은 물론 외국인의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다. 신무문을 나왔을 때 산위의 높은 곳에 궁궐같은 집이 세채 보인다. 경산공원의 이 세채 정자는 원나라 때 자금성에서 쓰던 연료인 석탄을 쌓아두던 곳으로 큰 도로가 산을 갈라 놓았을뿐 연결된 건물이다. 고궁과 베이징 시내가 다 내려다보이는 높은 산이다.
중국에는 10대 명물이 있다. [1.만리장성 2.계림 산수 3. 서호(항주) 4.자금성 5.소주 졸정원 6.황산 7.장강산역 8.성덕산장 9. 진시황릉 10.일월담(대만)] 자금성은 그 10대 명물 중 하나다. 학자마다 다르지만 세계 7대 불가사의로 들어갈만큼 신비한 곳이다. 여기서 숫자 7은 완벽함과 신성함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1.이집트 피라미드 2.이집트 룩소 3.인도 타지마할 4.페루 마추피츠 5.이집트 시리아 캐러반 6.앙코르 와트 7.그리스 파르테논 신전 9.만리장성 10.자금성] 사진으로는 다 담을 수 없어 마지막 고궁의 북문인 신무문을 나와 자금성 책자를 샀다. 신무문 앞은 주차장이다.
자금성 맨끝 신무문 앞에서 바라본 산 위의 건물.자금성에서 쓰던 연료를 저장하던 집
그 옛날 중국 황제는 옥황상제를 자신의 아버지로 여겨왔다. 그래서 황제로 오르면 옥황상제의 위패를 앞세우고 천단공원 기년전에 찾아가 기도를 하며 끈질기게 왕권을 이어왔다. 백성을 통치하기란 예나 지금이나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권좌 뒤에는 그만큼 큰 희생도 따르고 울분도 깃들어 있다. 자금성에는 성벽 밖으로 둘러싼 동과 서의 기다란 연못이 있다. 그 중에서 신무문의 우측에 흐르는 한도막의 호수를 본다. 아린 역사의 흔적을 지우고 청빛으로 새 역사를 여는 잔잔한 물결이 관람객을 배웅하고 있다.
중국 북경 최대 관광지인 자금성.맨끝 신무문을 나와 차도로 나가는 길에 큰 연못 앞에서
[중국 북경. 장가계 문학기행 수필(지난 호에 이어 자금성까지)]-2005년 詩와 창작 7.8월호-다음호에 계속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