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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5-9 KORAIL70회 4인 강진 백련사 다산초당 답사
자유인 조동화는 부질없는 삶의 여로에서 오늘도 내인생의 최초의 날이자 최후의 날인 것처럼 소중한 하루 일과를 아침 6:00에 기상하여 모현공원에 나가 30여분동안 훌라후프 가슴돌리기 3000회 실천하고 누죽걸산하며 세월을 낚고 있노라.
한국인 평균건강나이가 73.1이라고 하는데, 석양은 기울고 세월이 아까운 시간 건강이 최고 재산이여.
<김제 와룡마을 시골 고향집 부엌 처마 앞에서 조동화가 4세적 1954년에 가족들이 함께 찍은 사진이다.
맨앞 고개를 숙이고 개찜에 손을 집어넣은 어린 소년이 네살적(1954년) 바로 조동화로구나.
조동화는 네 살이었고 상할머니(증조모)는 72세였으며 맨앞에 의자에 앉아 사진을 찍었구나.
조동화의 뒤에는 할머니가 서서 사진을 찍었고 이때 할머니 나이는 47세였다.
학생모자와 제복을 입은 학생이 바로 조동화의 숙부님이 20살적 김제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었다.
뒤쪽 안경쓰신분이 조동화의 아버지 28세일 때 모습으로 숙부님과는 8살 차이가 나며 조병옥님이시여.
조동화의 아버지 조병옥님은 나이 드셔서도 시력이 좋으셨는데 아마도 멋이 있으라고 안경을 쓰신 것 같다.
아버지 옆에는 어머님 26세일적 정순봉님이 3살터울의 조동화의 동생 수권이를 안고 있구나.
2025.6.8. 향년 92세로 천수하신 숙부님은 장조카 조동화와 16년 차이로 결혼 1년정도 고향 와룡에서 신혼생활을 하시다가 김제로 제금 날때까지 조동화와 한집에서 살았는바 남원에서 시집온 작은 어머님 박금례님과 금실이 아주 좋았었다.>
꽃 향기 그윽한 4/18 춘삼월에 70친구들과 백련사 다산초당을 안재철총무의 승용차로 관광을 하였다.
다산초당은 다산 정약용이 1801년 신유박해로 인해 강진에서 18년동안 귀양을 와서 유배가 끝날 때까지 생활하며 학문에 몰두한 끝에 목민심서를 비롯한 숱한 저서들을 남겼으며, 사적 107호로 지정되였다.
다산초당은 만덕산 백련사를 지나 산중턱에 자리하고 있으며, 동백나무 숲, 야생 차밭, 백련사에서 다산초당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의 경치가 아름다워 뜻깊은 답사였다.
수년전 만덕산 백련사를 산악회에서 등산온 적이 있는데 무심코 다산초당을 지나쳐 아쉬운 마음이었는데, 다산초당 뜻 깊은 답사 구경 잘했다고 안재철총무한테 감사를 드리는 바이여.
홍안의 시절 부푼 희망을 안고 철도에 부임한지가 엊그제 같건만 시간은 정녕 붙잡을수 없어 무심한 세월은 흘러 흘러 황혼의 시절이 되었네요.
젊은 시절 그져 가족들 먹여 살리느라 일만 열심히하며 살아왔지만 이제는 무엇보다도 건강을 제일로 생각하며 자기자신에 투자하고 남은시간 취미활동도 열심하면서 즐겁고 보람찬 삶을 살아야지요.
한국철도에서 온 젊음을 불사른 인연들, 그들은 이제 황혼의 노을을 멋지고 아름답게 세월을 낚자고 다짐하는 시간이 되었구나.
박종성회장님은 버스로 순천에서 목포까지 버스로 오느라 이른 아침 출발하느라 고생이 많았소이다.
문한봉친구와 조동화는 익산에서 KTX열차편으로 익산역에서 7:53분 출발 목포역에 도착하니 9:06분, 박종성회장님과 안재철총무가 역 대합실에 출영을 나와 기쁘게 맞이하였네.
안재철총무님의 승용차로 강진으로 이동 백련사와 다산초당을 답사하였으며, 점심은 강진수산시장 회타운에서 감성돔과 갑오징어 횟감을 구입하여 2층 회센타로 올라가 소맥으로 건강을 다짐하며 중식하였지요.
70친구들과 세월의 노를 저으며 지나왔던 파란만장했던 옛 시절을 회고하며 추억을 이야기하는 즐거움이 행복한 시간이었지.
인생의 삶이 다 거기서 거기여.
남은 인생 여정 배풀고 배려하고 감사하며 삶을 여행하자고 박종성회장 안재철 문한봉 조동화 다짐했네.
승용차를 운전하며 오늘 하루일정을 계획한 안재철총무님에게 감사를 표시합니다.
목포에 귀로하여 안재철총무님께서 건어물시장에 들러 마른새우를 선물해주어 고맙소이다.
세월의 수레바퀴속에 돌아올수 없는 옛시절, 시시한 일에 시간을 낭비 하지 말며, 세세년년 추억의 만남을 위해 누죽걸산하여 건강합시다.
"누죽걸산"은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이다.
감사합니다.
☛자유인 조동화 정약용 흔적 다산초당 답사 소감
자유인 조동화는 정약용의 흔적을 찾아 안재철친구의 승용차로 국립철도학교 친구들과 남도 강진에서 하루를 보내었다.
18세기 후반 조선사회는 당파싸움의 격동기로서 정조대왕의 총애를 한몸에 받으며 활약했던 정약용이 18년의 유배살이 했던 남도 강진을 찾아 장약용의 업적과 생애를 알아보는 시간이 기억에 남았노라.
천년고찰인 백련사는 1500그루가 넘는 동백나무 숲과 다산 정약용 선생의 흔적이 깃든 다산초당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을 걸으며 나무에서 품어나오는 피톤치드를 마시며 힐링하니 몸과 마음이 가벼운 느낌에 들어 자연에 감사했노라.
힐링이 뭐여.
(Healing)이란 몸과 마음을 치유한다는 의미로, 좀더 풀어서 살펴보자면 마음의 상처나 스트레스 등으로 손상된 심신을 온전한 상태로 회복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200년 전 백성의 삶을 돕는 학문을 펼친 실학자 정약용의 주요저서는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심서이다.
목민심서 (牧民心書, 1818): 지방 관리(목민관)의 올바른 마음가짐과 백성을 다스리는 도리를 다룬 행정 지침서입니다. 백성의 고통을 헤아리고 부패한 관리들을 비판하며, 공직자의 청렴과 실천을 강조한 그의 대표작입니다.
경세유표 (經世遺表, 1817): 국가 통치 체제의 전반적인 개혁을 다룬 책입니다. 중앙 관제, 토지 제도, 세제 개편 등 조선 사회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했습니다.
흠흠신서 (欽欽新書, 1819): 억울한 백성이 없도록 과학적이고 공정한 재판을 강조한 형법 서적입니다. 판례 분석을 통해 사법관이 갖추어야 할 태도를 다루었습니다.
다산 정약용은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하며 500여권에 이르는 저술을 했으며, 당시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고 백성의 삶을 개선하고자 했던 간절한 개혁의 마음이 베어 있음을 알수 있었다.
다산 정약용은 22세에 소과인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했고, 28세 식년문과 갑과로 대과에 급제, 22세 때 정조를 처음 만나 총애를 받았으며, 거중기제작등 업적을 세웠으나 신유박해의 당파싸움에 휘말려 강진에서 18년의 유배생활로 위대한 패배자가 되었다.
정약용은 정조 사후, 18년간을 유배당하는 신세가 되어, 식견과 경륜을 펴지 못한 채 패가망신의 아픔을 삭이는 긴긴 세월 한 많은 인고(忍苦)의 나날을 보내며 저술활동에 몰두하였다.
패배한 개혁가 정약용!
현실을 개혁하려는 실천의지가 강했던 정약용은 정치기구의 전면적 개혁과 지방행정의 쇄신, 농민의 토지 균점과 노동력에 의한 수확의 공평한 분배 등을 주장한 개혁가였다.
국가의 조세와 재정 정책을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지 논한 <경세유표>, 백성을 위해 지방관들이 어떤 정책을 펴야 할지 다룬 <목민심서>, 홍역과 천연두 치료법을 적은 전문 의학책 <마과회통> 등이 모두 이 시기 나라와 백성에 대한 진심을 담아 써내려간 책들로 정약용은 자신의 호마저 유배지인 강진의 산 이름을 딴 다산(茶山)이라 지었다.
조선최고의 천재 정약용!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최고의 천재 학자이자 개혁가입니다. 정조의 총애 속에 거중기(도르래 원리)를 활용해 수원화성을 설계하고 한강 배다리를 건설하는 등 과학기술, 토목, 의학(종두법 연구) 분야에서 불멸의 업적을 남겼습니다.
조선시대 당파싸움에서 지면 몸숨이 날라가거나 유배생활을 하게 되는바, 정약용은 그로 인하여 18년의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다.
오늘 강진에서 하루 안재철친구 덕분에 위대한 패배자 정약용을 다시 기억하고 백련사 다산초당오솔길을 걸으며 피톤치드 많이 마셔 몸이 가벼워 보람있고 감개무량한 시간이었노라.
<마량항 바다를 배경으로 박종성회장님과 문한봉친구 다정한 모습 보기가 좋네.
안재철총무가 다산초당을 답사후 한정식으로 강진에서 점심을 예약하려 하였으나 너무 많은 여행객이 찾는 관계로 예약이 어려워 마량으로 이동하여 마량항에 회를 먹으러 오게 되얐지.
강진 마량항은 청정해역으로서 해산물이 풍부한곳으로 강진수협수산물위판장이 서기도 한다.
강진 마량항(馬良港)은 1417년 조선 태종 때 마두진이 이곳에 설치되어 만호절제도위(萬戶節制都尉)가 관장하였고,
임진왜란 시기에는 거북선이 상시 대기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던 항구이며, 또한 제주에서 말(馬)을 들여오던 곳이다.
1971년 12월 21일 국가어항(1종 어항)으로서 천혜의 미항으로 손꼽히고 있다.>
다산초당
다산초당은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이 강진 유배 시기 머물며 학문 활동을 이어간 대표적인 유적지다. 그는 1801년 신유사옥 이후 유배되어 여러 곳을 거쳐 1808년부터 이곳에 정착했으며, 해배될 때까지 10여 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치고 연구와 저술에 전념했다. 이 시기에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 조선 실학을 대표하는 방대한 저술을 완성하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장소로 평가된다. 다산초당은 단순한 거처가 아니라 학문적 성과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공간으로, 정약용이 실용적이고 현실 중심적인 학문 체계를 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현재는 동암과 서암, 제자들이 머물던 공간이 복원되어 있으며, 정약용이 직접 글자를 새겼다고 전해지는 ‘정석(丁石)’, 차를 끓이던 약천, 다조, 연지석가산, 천일각 등 다양한 유적들이 함께 보존되어 있어 그의 생활과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정약용은 여유당(與猶堂) 등의 여러 호를 가지고 있으며, 천주교 이름으로는 요한(Johan)이라 하였다. 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으며, 유형원과 함께 수원성을 설계하고 거중기 등의 신기재를 이용하여 수원 화성을 쌓기도 했다. 정조가 죽자 신하들의 모함을 받아 투옥되어 유배되었고, 그 후 18년 간의 유배생활 동안 그는 많은 저서를 남겼다.
다산박물관
전라남도 강진에 다산박물관이 있다. 강진은 다산 정약용이 18년이라는 오랜 시간 유배 생활을 한 곳이다. 이곳에서 다산은 제자를 길러내고 학문적 성취를 이루기도 했다. 다산박물관에서 다산이 품었을 감성과 지혜를 만나보자. 유물을 비롯한 모형, 패널, 영상, 디지털 자료를 통해 그의 생애, 업적 등 그를 이해하고 그가 머물렀던 강진의 정취도 함께 느낄 수 있다.
다산은 남인 명문가 출신으로 경기도 광주 마현(현 장주군 부면 능내리)에서 1762년(영조 38년)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고 학문에도 열심이었다. 어린 시절에 지은 시를 모아 <삼미집三眉集>을 만들 정도로 문학적 소양도 뛰어났다. 28세에 문과에 합격하여 벼슬에 오른 후 요직을 거쳐 37세에 형조 참의가 되었고 정조의 신임을 받으며 관직 생활을 이어갔다. 다산은 새로운 문물을 다양하게 수용하고 조선을 실질적으로 개혁하고자 했던 진보적인 지도자였다. 정조가 세상을 떠난 후 반대파에 의해 정조의 측근들은 축출되기 시작하였고 다산은 천주교와 연루되어 있다는 죄목으로 강진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이렇게 다산과 강진의 인연은 유배로 시작되었다. 다산은 강진에서의 유배 생활 동안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고, 강진으로 모인 학자들과 공동집필로 500권이 넘는 저술을 남긴다. 18년 동안 강진에서의 유배를 마치고 1817년 57세 때 귀향하게 된다. 귀향 후 반대파의 저지로 관직에는 다시 오르지 못하였지만 저술을 이어갔고 75세 되던 해 세상을 떠났다.
정약용·정약전 형제 이야기
정약용 선생은 5남 2녀 가운데 넷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여러 형들 가운데 특히 둘째 형인 손암(巽菴) 정약전(丁若銓, 1758~1816)을 잘 따랐다. 정약전은 성호 이익의 학문을 이어받은 권철신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는데, 이러한 영향으로 정약용 선생 역시 이벽, 이승훈 등 여러 남인 인사들과 두루 어울리며 청년 시절을 보냈다.
정약용 선생이 1790년 문과에 먼저 급제하고, 그 이듬해 형 정약전도 뒤이어 합격하면서 1년 차이로 나란히 벼슬살이를 시작하게 된 형제는 서로 의지하며 학문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가장 가까운 벗으로 지냈다. 그러다 정조가 세상을 떠나고, 열한 살 순조를 대신해 수렴청정을 시작한 정순왕후가 천주교 금압령을 내리면서 한때나마 천주교에 몸담았던 두 형제는 고초를 겪게 되었다.
두 사람은 이미 천주교와 거리를 둔 터라 다행히 목숨은 부지했지만 정약전은 신지도로, 정약용 선생은 장기현으로 유배를 떠났다. 이처럼 신유년(1801)에 정약용 선생 형제뿐만 아니라 많은 천주교도가 처형되고 귀양을 떠나자, 황사영이라는 한 천주교도는 조선의 상황을 적어 중국 베이징에 있는 프랑스 주교에게 보낼 생각을 하게 된다. 프랑스가 군대를 파견해 조선을 구원해 줄 것이라는 기대였다. 하지만 흰 비단에 빼곡하게 써 내린 이 편지가 미처 베이징에 닿기도 전에 발각되면서 결국 황사영은 처형당하고 만다. 그런데 이 모든 위험천만한 일을 주도한 황사영이라는 인물은 정약용과 정약전 형제의 맏형인 정약현의 사위였다.
조카사위가 이렇게 큰일을 저질렀으니 두 형제도 화를 피하기 어려웠다. 한양으로 끌려와서 조사를 받은 형제는 흑산도와 강진이라는 더 험한 유배지로 또다시 길을 떠나야 했다. 두 사람은 유배지에 발이 묶였지만 자주 편지로 안부를 물으며 힘든 유배 생활을 버텼다. 그리고 서로를 격려하며 각자 저술에 힘썼다. 정약용 선생이 수많은 저서를 남긴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고, 정약전 역시 <자산어보>라는 책을 집필하였다.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전(둘째)과 정약용(넷째) 형제는 4살 차이로, 우애가 깊었을 뿐만 아니라 학문적 동지로서 평생을 서로 의지했다.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승승장구했으나, 1801년 신유박해로 정약전은 흑산도,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되어 헤어진 뒤 서로의 안위를 걱정하며 편지를 나누다 다시 만나지 못하고 이별했다
1801년 음력 11월 나주의 북쪽에 위치한 밤남정 주막. 정약용이 둘째 형 손암 정약전과 하룻밤을 지낸 후 유배지인 흑산도와 강진으로 헤어지면서 서글픈 작별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형제가 죽을 때까지 끝내 다시 만나지 못한다는 운명을 예감했는지 정약용은 이곳을 떠나면서 밤남정 주막집의 이별(栗亭別)이라는 제목으로 한 편의 시를 지었다.
주막 초가 새벽 등불 푸르스름 꺼지려는데/일어나 샛별 보니 이별할 일 참담해라/두 눈만 말똥말똥 둘이 다 할 말 잃어/애써 목청 다듬으나 오열이 터지네/흑산도 아득한 곳 바다와 하늘뿐인데/그대는 어찌하여 그 속으로 가시나요.
정약전과 자산어보, 그리고 흑산도
정약전은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형이다.
천주교 박해사건인 ‘신유박해(신유사옥)’로 머나먼 섬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흑산도에서 정약전은 섬사람들에게 벗이었고 덕망 높은 선비였으며, 특히 어류학서 『자산어보』를 남겼다. 그리고 1816년 유배지에서 59세에 생을 마감하였다.
동생 정약용은 형을 잃은 슬픔을 편지에 담았다.
“슬프도다!
아! 어지신이께서 세상을 곤궁하게 떠나시다니. 원통하여 이 무너지는 마음을 호소하니 나무와 돌도 눈물을 흘리는데 무슨 말을 더 하리오! 외로운 하늘과 땅 사이에 우리 손암(정약전의 호)선생만이 나의 벗이었는데, 이제는 그 분마저 잃어버렸구나.
앞으로 터득한 지식이 있더라도 어느 곳에 입을 열어 함께 말을 하겠는가”
『자산어보(玆山魚譜)』는 정약전이 흑산도(黑山島) 유배시기에 쓴 어류학서이자 해양생물백과사전이다. 그가 만난 흑산도 백성들은 저마다 물고기를 부르는 이름이나 요리법, 민간요법이 달라 풍부한 수산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지 못했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정약전은 흑산도 주변의 물고기와 해양생물들을 종류별로 분류하여 이름과 모양, 습성, 맛, 건강 효능, 민속, 고기잡이 도구와 방법 등을 『자산어보』에 자세히 기록하였다.
자산(玆山)이란 흑산(黑山)이다. 나는 흑산으로 유배되었는데 '흑산(黑山)'이라는 이름이 검고 어두워 가족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자산'이라 하였다. '자(玆)' 역시 검다(黑)는 말이다.
자산(玆山)의 바다 안에는 어족(魚族)이 매우 번성하여 이름을 아는 자가 드무니 사물에 정통한 자가 마땅히 살펴야 할 바이다. 나는 섬사람들을 널리 만나보았다. 그 목적은 어보를 만들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사람마다 그 말이 다르므로 어느 말을 믿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섬 안에 장덕순(張德順) 창대(昌大)라는 사람이 있었다. 두문불출하고 손을 거절하면서까지 열심히고 서를 탐독하고 있었다. 다만 집안이 가난하여 책이 많지 못하였으므로 손에서 책을 놓은 적이 없었건만 보고 듣는 것은 넓지가 못했다. 성격이 조용하고 정밀하여 대체로 초목과 어조 가운데 들리는 것과 보이는 것을 모두 세밀하게 관찰하고 깊이 생각하여 그 성질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말은 믿을 만했다. 나는 드디어 이 분을 맞아 함께 묵으면서 물고기의 연구를 계속했다. 책을 완성하고는 '자산어보(玆山魚譜)'라고 이름을 붙였으니, 이외에도 바다의 날짐승과 해초류까지 언급하여 후대 사람들이 상고(詳考)하고 증험(證驗)할 자료로 삼았다.
다만 내가 고루하여 이미 본초서(本草書)를 보고도 그 이름을 듣지 못하였거나, 혹은 예로부터 그 이름을 기록해 놓은 것이 없어서 고증할 데가 없는 것이 태반이었다. 그래서 다만 민간에서 속되게 부르는 명칭에 의존하였으나, 표기하기 어려운 것들은 그때마다 감히 이름을 새로 만들었다.
후세의 선비가 이를 보완한다면 이 책이 병을 치료하고 이롭게 활용하여 재화를 다스림에 있어서 말할 나위도 없이 물음에 답하는 자료가 되리라. 그리고 또한 시인(詩人)들도 이들에 의해서 이제까지 미치지못한 점을 알고 부르게 되는 등 널리 활용되기를 바랄 뿐이다.
가경갑술년(1814, 순조 14)
호기심 많은 학자, 정약전은 『자산어보』를 쓰고 싶었다. 글공부만 하던 학자가 물고기의 생태를 연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많은 섬사람들을 만났으나, 평생 고기잡이를 해 온 어부들까지도 사람마다 이야기가 달랐다. 흑산도 바다 속에 물고기는 많지만 알려진 것은 매우 적었다. 이때 정약전은 섬의 20대 청년 어부 장창대(張昌大, 1792~?)를 만났다. 정약전은 그를 바닷가의 선비라 불렀다. 그는 현재의 흑산면 대둔도 사람으로,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총명하고 관찰력이 뛰어났다. 정약전은 신분과 나이를 초월하여 장창대와 벗이 되어 명작 『자산어보』를 완성하였다.
비운의 정약용 형제들
정약용 형제(약현, 약전, 약종, 약용)는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신유박해, 1801년)로 인해 큰 비극을 맞은 인물들입니다. 셋째 약종은 처형당하고, 둘째 약전과 넷째 약용은 오랜 유배 생활을 하며, 학문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개혁의 꿈을 펼치지 못한 채 흩어지는 비운을 겪었습니다.
배다른 맏형 정약현: 천주교 박해 속에서 직접적인 처형은 면했으나, 사위가 천주교 관련자로 처형당하는 등 가문 전체가 몰락하는 고초를 겪었습니다.
정약현의 사위 황사영(黃嗣永, 1775~1801)은 정약용에게는 조카사위가 되는 인물입니다.
황사영은 16세에 진사(進士)시험에 합격했다.
황사영은 황사영 백서 사건의 주역으로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제천 배론 성지의 토굴로 피신하여, 박해의 실상과 대책(외세의 도움 요청 등)을 비단에 적어 북경 주교에게 보내려다 발각되여 능지처참을 당했으며, 부인 정난주는 제주도 대정현의 관노로 유배되었고 아들 황경하는 추자도로 보내졌습니다.
둘째 정약전: 서학(천주교)에 관심을 두어 정약용과 함께 유배되었으며, 흑산도에서 《자산어보》를 저술하고 결국 유배지에서 사망했습니다. 정약용이 "나의 지기(知己)"라 부를 정도로 깊은 우애를 나눴으나 16년간 헤어져 지내다 2년 후 비보를 접했습니다.
셋째 정약종: 가문 중 가장 열렬히 천주교를 믿었으며, 신유박해 때 가장 먼저 체포되어 서소문 밖에서 처형당했습니다.
정약종의 부인 유조이, 아들 정하상(丁夏祥)과 정철상(丁哲祥), 딸 정정혜(丁情惠)는 모두 신유박해와 기해박해(己亥迫害․1839) 때 순교함으로써 정약종의 가족은 모두 순교자가 되었다.
넷째 정약용: 조선 최고의 실학자로 정조의 신임을 받았으나, 형제들의 천주교 신앙 때문에 강진에서 18년간 유배 생활을 하며 수많은 저술을 남겼습니다.
이들 형제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었으나, 천주교라는 서양 학문과 신앙을 접했다는 이유로 박해의 표적이 되어 비극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정약용자찬묘지명(1762-1836)
정약용이 여유당(與猶堂)이라 자호(自號)한 것은 정조 의문사 직후였다. '노자(老子)'의 "망설이면서〔與〕 겨울에 냇물을 건너는 것같이 주저하면서〔猶〕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한다"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정조가 급서한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그는 알고 있었다. 그의 예견대로 노론이 정권을 독차지하면서 정조의 24년 치세를 부정하는 폭정이 자행되었다. 막내 형 정약종은 사형당하고 다산과 함께 유배된 중형(仲兄) 정약전은 흑산도에서 죽어야 했다. 다산 홀로 18년의 유배 생활 끝에 살아남아 글을 남겼다.
☛정약용자찬묘지명
이것은 열수(洌水) 정용(丁鏞)의 무덤이다. 본명은 약용(若鏞), 자는 미용(美庸), 호는 사암(俟菴)이다. 아버지 성함은 재원(載遠)이며, 음직<과거를 거치지 않고 조상(祖上)의 공덕 등으로 얻은 벼슬>으로 진주 목사에 이르렀다. 어머니는 숙인<조선시대 당하관 정3품ㆍ종3품인 문무관의 아내에게 주던 봉작>해남 윤씨(海南 尹氏)인데 영종 임오년(1762년, 영조 38년) 6월 16일에 열수(洌水)<한강의 별칭> 강가 마현리에서 약용을 낳았다.
약용은 어려서 매우 영리했고 자라서는 학문을 좋아했다. 22세(1783년, 정조 7년)에 초시에 이어 회시에 합격해 진사가 된 뒤 변려문<대과시험 문체>을 오로지 연마해 28세(1789년, 정조 13년)에 갑과 2등으로 급제했다. 대신들의 선발에 의해 규장각에 배속돼 월과문신(月課文臣)<매달 내려 받은 과제에 따라 쓴 글로 시험받는 문신>으로 있었다. 얼마 안가 한림원에 뽑혀가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 이어 승진해서 사헌부 지평, 사간원 정언, 홍문관의 수찬과 교리, 성균관 직강, 비변사 낭관을 지냈다. 외직으로 나가 경기 암행어사가 되었다. 을묘년(1795년, 정조 19년) 봄에 경모궁<사도세자와 그의 비 헌경왕후의 사당>에 시호를 올리는 도감의 낭관으로서 공로를 인정받아 사간으로 발탁된 뒤 통정대부로서 승정원 동부승지를 제수 받았다. 또 우부승지를 거쳐 좌부승지에 이르고 병조 참의가 되었다.
가경(嘉慶)<청 인종(淸仁宗)의 연호> 정사년(1797년, 정조 21년)에 곡산 도호부사로 나가서 은혜로운 정치를 많이 베풀었다. 기미년(1799년, 정조 23년)에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서 승지를 거쳐 형조 참의가 돼 억울한 옥사를 처리했다. 경신년(1800년, 정조 24년) 6월에 임금으로부터 ‘한서선(漢書選)’을 하사받았다. 이달에 정종대왕<정조>이 승하하시니 이에 양화가 일어났다.
15세(1776년, 영조 52년)에 풍산 홍씨(豐山 洪氏)를 아내로 맞았는데 무과를 통해 승지 벼슬을 지낸 홍화보의 딸이다. 장가든 뒤 서울에 노닐 때 성호(星湖) 이익(李瀷) 선생의 학문이 순수하고 독실하다는 말을 들었다. 이가환(李家煥)<이익의 종손자이면서 이승훈의 외삼촌>ㆍ이승훈(李承薰)<정약용의 매부, 조선 최초의 천주교 영세자> 등을 따라 성호 선생이 남긴 저술을 보게 돼 이때부터 경학의 서적에 마음을 두게 됐다.
진사로 성균관에 들어간 뒤 이벽(李檗)<맏형 정약현의 처남, 청나라에서 유입된 천주교 서적을 보고 스스로 교인이 됨>을 따라 노닐면서 서교(西敎)<천주교>의 교리를 듣고 서교의 책을 보았다. 정미년(1787년, 정조 11년) 이후 4~5년 동안 자못 마음을 기울였는데, 신해년(1791년, 정조 15년) 이래로 국가의 금령이 엄하여 마침내 서교에 대한 생각을 아주 끊어버렸다. 을묘년(1795년, 정조 19년) 여름에 중국 소주(蘇州) 사람 주문모(周文謨)가 들어와 나라 안 분위기가 흉흉해졌다. 이에 금정도찰방(金井道察訪)으로 보임돼 나가 왕명을 받들어 서교에 젖은 지방민들을 달래고 단속했다.
신유년(1801년, 순조 1년) 봄에 대신 민명혁(閔命赫) 등이 서교의 일을 빌미로 임금께 조사할 것을 요청함으로써 이가환ㆍ이승훈 등과 함께 하옥됐다. 얼마 뒤 두 형 약전(若銓)과 약종(若鍾)도 함께 체포돼 한 사람<정약용의 셋째형 정약종은 배교를 거부하고 순교함>은 죽고 둘<정약용과 둘째형 정약전>은 살아 남았다. 모든 대신들이 무죄로 판명돼 풀어주자는 주장했으나 오직 서용보(徐龍輔)만이 안 된다고 고집을 피워 약용은 장기현으로, 약전은 신지도로 각각 유배됐다.
(그 해) 가을에 역적 황사영(黃嗣永)이 체포되자 악인 홍희운(洪羲運)ㆍ이기경(李基慶) 등이 갖은 계책으로 약용을 죽이려고 모의해 임금의 허락을 얻어냄으로써 약용과 약전은 또 체포돼 조사를 받았다. 조사 결과 황사영과 관련된 정상이 없으므로 옥사가 또 이뤄지지 않았다. 태비(太妃)<영조의 계비이자 사도세자의 계모인 정순왕후>께서 감안하여 처분해주시는 바람에 약용은 강진현으로, 약전은 흑산도로 각각 유배됐다.
계해년(1803년, 순조 3년) 겨울에 태비가 약용을 석방하도록 명하셨지만, 정승 서용보가 이를 막았다. 경오년(1810년, 순조 10년) 가을에 아들 학연(學淵)이 억울함을 호소하자 고향으로 쫓아 보내라고 명하였으나, 당시 사헌부에서 죄가 여전히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의금부가 이를 시행하지 않았다. 그 뒤 9년 만인 무인년(1818년, 순조 18년) 가을에 비로소 고향으로 돌아왔다. 기묘년(1819년, 순조 19년) 겨울에 조정에서 다시 약용을 등용하여 백성을 편안히 하자는 논의가 있었는데, 서용보가 또 저지했다.
약용은 유배돼 있던 18년 동안 경전 연구에 온 마음을 기울였다. 시(詩)ㆍ서(書)ㆍ예(禮)ㆍ악(樂)ㆍ역(易)ㆍ춘추(春秋) 및 사서(四書)에 관한 저술이 모두 230권이다. 정밀히 연구하고 오묘하게 깨우쳐 성인이 말씀하신 근본적 뜻을 제대로 파악했다. 시문집으로 엮은 것이 모두 70권인데 조정에 있을 때 작품이 많았다. 국가의 전장(典章) 및 목민(牧民)하는 일, 옥사를 다스리는 일, 무력을 갖춰 방비하는 일, 국토의 강역에 관한 일, 의약에 관한 사항, 문자의 분석 등에 관해 편찬한 것이 거의 200권이다. 모두 성인의 경전에 근본을 두면서, 시의에 적합하도록 힘썼다. 이것이 없어지지 않으면, 더러 인용해서 쓸 내용이 있을 것이다.
약용은 벼슬하기 전부터 임금께서 알아주시는 은혜를 입었다. 정종대왕께서 총애하고 예뻐하고 칭찬하신 것이 동료들에 비해 훨씬 많았다. 그간 하사해주신 책, 말, 호랑이 가죽, 그리고 진귀하고 기이한 물건은 하도 많아서 다 적을 수 없을 정도다. 국가 기밀에 참여할 때 의견이 있으면 글로 적어 진술하도록 허락하시어, 모두 들어주시고 따르겠다고 하셨다. 일찍이 규장각에서 서적을 교정할 때 직무의 일로 독려하고 꾸짖지 않으셨다. 밤마다 맛있는 음식을 내려 배불리 먹게 해주셨다. 궁중 안에 비장돼 있는 모든 책을 규장각의 감독을 통해 언제든지 열람을 청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셨다. 모두가 남다른 대우였다.
약용의 사람됨은 착한 일을 즐겨하고 옛것을 좋아하며 과감히 실천하고 행동했다. 마침내 이 때문에 화를 당하였으니 운명이다.
평생에 죄가 하도 많아 마음 속에 원망과 후회가 가득 쌓였다. 금년에 이르러 임오년(1822년, 순조 22)을 다시 만나니 세상에서 말하는 회갑으로, 다시 태어난 것 같다.
마침내 긴요치 않은 일을 씻어버린 뒤 밤낮으로 자기성찰에 힘써 하늘이 내려주신 본성을 회복해 지금부터 죽을 때까지 어그러짐이 없길 바란다.
정씨(丁氏)의 본관은 압해(押海)이다. 고려 말기에 백천(白川)에 살았는데, 우리 조선왕조가 열린 이후 마침내 서울에서 살았다. 처음 벼슬한 조상은 교리를 지낸 자급(子伋)이다. 이로부터 부제학을 지낸 수강(壽崗), 병조판서를 지낸 옥형(玉亨), 좌찬성을 지낸 응두(應斗), 대사헌을 지낸 윤복(胤福), 관찰사를 지낸 호선(好善), 교리를 지낸 언벽(彦璧), 병조참의를 지낸 시윤(時潤)이 모두 홍문관에 들어갔다. 그 뒤로는 시절의 운수가 안맞아 마현으로 옮겨 살았는데 고조부 증조부 조부 3대 모두 벼슬을 지내지 않고 돌아가셨다. 고조의 성함은 도태(道泰), 증조의 성함은 항신(恒愼), 조부의 성함은 지해(志諧)인데 오직 증조부께서만 진사를 하셨다.
아내 홍씨는 6남 3녀를 낳았는데 6명이 요절하고 오직 2남 1녀만 제대로 컸다. 아들은 학연(學淵)과 학유(學游)이고, 딸은 윤창모(尹昌謨)에게 시집갔다. 약용의 무덤은 집 뒤란에 있는 자좌의 언덕으로 정했다. 부디 바라던 대로 되었으면 한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임금의 총애 한 몸에 안고 / 荷主之寵
궁궐에 들어가 곁에서 모셨네 / 入居宥密
임금의 심복이 되어 / 爲之腹心
아침저녁으로 가까이 섬겼네 / 朝夕以昵
하늘의 총애 한 몸에 받아 / 荷天之寵
어리석은 마음을 깨우쳤네 / 牖其愚衷
육경(六經)을 정밀하게 연구해 / 精硏六經
미묘한 이치를 깨치고 통했네 / 妙解微通
간사한 무리들이 기세를 떨쳤지만 / 憸人旣張
하늘이 너를 사랑해 쓰셨으니 / 天用玉汝
잘 거두어 간직하면 / 斂而藏之
장차 멀리까지 날래고 사납게 떨치리라 /將用矯矯然遐擧
<출전: 여유당전서 시문집 제16권>
萬德山 白蓮寺
▷위치 : 전남 강진군 도암면 백련사길 145번지
강진 만덕산의 높이는 408m이다.
백련사가 있고, 남쪽 기슭에는 사적으로 지정된 다산초당 등 유적이 있다. 백련사 주변 약 1정보의 땅에 펼쳐져 있는 약 7,000여 그루의 동백나무숲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다.
백련사는 신라 문성왕 때 무염국사(801~888)가 산 이름을 따라 만덕사(萬德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고 전해집니다
이후 쇠락했다가 1211년(고려 희종 7년)에 원묘국사 요세(1163~1245) 스님에 의해 옛터에 중창되었고, 백련결사를 맺어 수행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고려 후기 무시정권 시기에 정치와 종교는 제 기능을 상실했고, 몽고와 왜구의 침략으로 민중의 삶이 살육과 눈물로 점철된 고난의 시대에 요세 스님은 어둠의 한가운데에서 희망을 열어 가고자 했고, 현세의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보여주는 결사운동을 벌였습니다. 이러한 백련결사는 개경에서 멀리 떨어진 남도 땅 끝에서 민중들과 함께 참회와 염불수행을 통해 정토세계를 염원하는 민간 결사운동이었습니다.
당시 요세 스님을 필두로 한 변혁적 열망을 서원했던 스님들과 그 뜻에 공감한 개경의 국자감 유생들(23명), 그리고 지역의 토호 세력들이 주축이었고, 불교적 진리에 가까이 하고자 한 광범위한 대중들의 참여가 있었습니다. 백련결사는 그로부터 120여 년간 크게 번창하였습니다. 세상이 어지럽고 국권이 흔들리던 무렵, 승려들을 비롯한 당대의 수많은 유생들을 비롯한 지식인들과 수령방백들, 불교적 진리로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고자 했던 백성들이 그 주역이었습니다.
그 힘이 전국에 퍼져 당시 경상도 상주 등 각지에 백련결사가 분포되었습니다.
또 국교가 불교였던 고려 조정에서는 결사를 이끈 8분(원묘국사, 정명국사, 진정국사, 원조국사, 원혜국사, 진감국사, 목암국사)을 국사로 모셨습니다. 이 시기 고려사기를 보면 공민왕자가 1351년(충정3년)에 백련사에서 살았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크게 흥했으나 이내 나라가 혼란해지고 왜구가 세 차례나 사찰에 침입하여 폐허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후 조선조가 성립된 뒤인 1430년(세종12년)에 행호대사가 효령대군의 후원으로 동원 20동과 서원 4동을 건립하고 왜구의 침입에 맞서 행호토성을 쌓고 사찰의 기틀을 다시 세웠습니다.
세종의 둘째 형인 효령대군은 불교에 귀의하고 백련사에 입산하여 8년간 큰 법회를 여는 등 다양한 종교 활동을 하며 불/법/승(佛/法/僧) 삼보에 기원하는 수륙제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조선시대 말기에도 백련사는 청허 휴정선사의 의발을 전수 받은 8명의 종사(소요대사, 해운대사, 취여대사, 화악대사, 설봉대사, 송파대사, 정암대사, 연파대사)를 배출하며 법맥을 이어왔습니다. 백련사가 참 세상을 염원하는 상징으로 자리했던 것입니다. 일설에 의하면 ‘백련사에서 8국사와 12종사가 나온다’고 하였는데 8국사는 고려 때 나왔고, 조선시대 8종사가 배출되었으니 이로 볼 때 앞으로 4종사가 배출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이 강진에 유배 내려와 백련사 인근 다산초당에서 여유당전서 500권을 찬술했을 때에는 대흥사 12대 강백을 지낸 아암 혜장선사(1772~1811)가 백련사 주지로 계시면서 다산과 종교와 나이를 초월한 애틋한 우정을 교유한 사찰로 유명합니다.
백련사에는 다산 정약용이 기거하며 저술활동을 펼쳤던 다산초당과 넓은 차밭, 천연기념물 제 151호 동백나무 숲 등이 그런 역사의 숨결을 간직한 채 여전히 오롯하게 남아있습니다.
백련사 동백(冬柏)숲
백련결사와 더불어 백련사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이 동백숲이다.
동백은 여수 오동도, 광양 옥룡사, 장흥 천관산, 고창 선운사 등 우리나라의 서남해안의 섬과 연안지역에서 자생하고 있는데, 지리적으로 백련사는 그 중심지역이다. 예로부터 동백은 따뜻한 ‘남국’의 이미지를 품고 있기 때문에 늘 동경의 대상이었다.
백련사 동백숲은 화재로부터 사찰 건물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고려 말 원묘국사가 백련사를 중창할 때 조성했는데, 1만평의 부지에 비자나무, 후박나무, 푸조나무 등 남방 수종의 나무들과 섞여 8,000여 그루가 자생하고 있다. 차나무 역시 동백나무과에 속하니 두 나무의 연관성을 따로 떼어내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천연기념물 제151호로 지정되어 있다.
동백은 지역마다 수종의 차이가 있다. 그중 백련사의 동백나무는 다른 지역의 그것들과는 달리 잔가지가 많고, 잎이 작고 색깔이 진하며, 꽃의 크기 역시 다른 지역의 것들보다 더 작다. 꽃은 11월 말부터 듬성듬성 피우기 시작해서 겨우 내내 피어나다가 3월 말경에 만개하며, 4월에는 땅 위에 떨어져 다시 한 번 핀다.
백련사 서쪽 능선을 따라 나 있는 오솔길이 다산초당으로 가는 길인데, 동백숲은 주로 그쪽 방향에 큰 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지름 20-30cm에 키 5-7m 안팎의 동백나무가 빽빽하게 숲을 이루고 있어서 그 안에 들어서면 대낮인데도 어두울 정도다. 추운 겨울날에도 짙은 동백잎과 흰 눈 속에 함초롱이 얼굴을 내미는 백련사 동백꽃은 백련결사 이야기와 더불어 고려시대 때에도 개경 유생들이 선망하던 것이었다.
또 이 숲속 군데군데에 승탑들이 있는데, 월인당(月引堂) 외에는 명문이 없어서 주인을 알 수가 없다. 겨우 내내 꽃을 피웠다가 4월에 이르러 한꺼번에 와락 땅에 떨어져 바닥에 펼쳐진다.
이 동백나무 숲을 지나 행호토성을 넘어서 다산초당으로 가는 길에는 백련사에서 재배하는 차밭이 있고, 석름봉 쪽 사찰 뒤편에는 수백년 전부터 자생해온 야생차가 군데군데 군락을 이루고 있다.
신유박해
1801년(순조 1) 신유년에 일어난 천주교도 박해사건을 말한다.
1801년 신유박해는 정조 사후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하에 노론 벽파가 남인 세력을 숙청한 사건으로, 정약용은 이 사건에 휘말려 형 정약종은 순교하고 정약전과 함께 장기, 강진 등지로 18년간 유배 생활을 했습니다. 이 기간 정약용은 《목민심서》 등 500여 권의 저술을 남기며 학문적 성과를 이룩했습니다.
1801년(순조 1) 신유박해는 조선 정부가 천주교인들에게 가한 대규모 탄압이었다. 사실 천주교가 조선에 소개된 것은 17세기 초반이었다. 이때 명의 수도인 베이징에서 유럽인 가톨릭 선교사들이 활동을 시작하면서 매년 베이징에 방문하였던 조선 사신들이 이들 선교사를 통해 서양 관련 서적과 기물 등을 들여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에서 천주교가 종교로써 곧바로 기능한 것은 아니었다. 조선 지식인들의 관심은 철저하게 서양 과학 기술에 있었으며 천주교가 학문적 대상으로 인식된 것은 18세기의 남인(南人) 실학자들에 의해서였다.
그런데 18세기 후반, 천주교의 전파 속도가 급속히 빨라졌다. 천주교를 학문의 대상으로 인식하였던 기호남인계 일부에서 천주교를 신앙으로 수용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1784년 이승훈(李承薰)의 세례를 계기로 천주교 신자가 증가하였으며, 이는 다시 전교 서적의 유입을 부채질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1780년대 중반에 들어오면서 양반층들이 관련된 천주교 사건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으며 1791년(정조 15) 신해박해(辛亥迫害), 이른바 진산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은 조선 사회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성리학적 예 질서를 수호해야 할 양반층인 윤지충(尹持忠)과 권상연(權尙然)이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사름으로써 성리학적 질서를 정면으로 거부하였다는 점에서, 집권층은 이를 곧 체제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그러나 당시 국왕이었던 정조[조선](正祖)는 진산사건에 대한 처결을 윤지충과 권상연의 사형으로 마무리하여, 이것을 천주교도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의 발단으로 삼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정조는 정학(正學)을 밝힘으로써 사학(邪學)의 확산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서학에 대한 강경한 대응은 피하였던 것이다.
문제는 정조 사후에 발생하였다.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 순조(純祖)를 대신하여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자, 경주 김씨와 노론 벽파(僻派)세력은 정국을 일당전제의 정치형태로 전환하고자 했다. 대왕대비는 1800년(순조 즉위) 12월 18일 정조가 내세웠던 의리를 재해석하였다. 특히 대왕대비는 여기서 영조(英祖)가 내렸던 사도세자(思悼世子)에 대한 처분이 부득이했음을 강조하고 그에 반대되는 의견을 수용할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천명했다. 이는 벽파의 의리를 공식적으로 천명한 것이며, 이후 정국이 벽파를 중심으로 전개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1801년(순조 1) 1월, 대왕대비가 ‘사학(邪學)’에 대한 토벌을 공식적으로 지시하면서 본격적인 신유박해가 시작되었다. 대왕대비는 ‘정학이 밝아지면 사학은 저절로 종식될 것’이라는 정조의 처분을 강조하면서도 내수(內修)와 외양(外攘)을 겸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우며 패륜의 사학도(邪學徒)를 철저히 소탕하도록 지시했다.
2월 사간 박서원(朴瑞源)이 사학의 교주를 체포하고, 사학도를 극형으로 다스리기를 요청하자, 집권세력은 사학을 금지하고 사학의 무리를 소탕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논의했다. 그 결과 정조 대 사학에 대한 교화 위주의 정책을 ‘사람을 살리기 좋아하는 성덕’으로 평가하였지만, 사학에 대한 철저한 탄압과 사학의 무리에게 일벌백계의 극형을 불가피한 것으로 보고 실행에 옮겼다.
이후 천주교의 지도급 인물들인 권철신(權哲身), 이승훈, 정약종(丁若鍾), 홍낙민(洪樂敏), 최창현(崔昌顯), 최필공(崔必恭), 이존창(李存昌), 유항검(柳恒儉) 등이 모두 처형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남인세력 역시 중앙정계에서 재기 불능의 타격을 입었고, 그밖에 그들과 연결될 가능성이 있는 인물들도 함께 제거되었다.
정조 때 탕평정국 아래서 정치적 위치를 확보했던 남인 세력은 사도세자 문제에 있어서 정조의 입장을 뒷받침했다. 또한 이들은 바로 서학을 주도적으로 받아들인 집단이었다. 때문에 신유박해는 천주교도 박해와 더불어 남인세력 제거라는 정치적 목적도 띄고 있었다. 남인 세력은 정조를 도와 주요한 여러 개혁들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던 반면 노론(老論) 벽파는 노비제도, 토지제도 개혁 등 정조의 다양한 개혁정책에 반대하였다. 이러한 대립은 벽파 집권 직후에 일어난 1801년(순조 1) 신유박해가 단순한 종교적 탄압뿐만 아니라 정치적 정적 제거의 수단으로 이용될 가능성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실제로 신유박해 때 희생된 사람들 가운데 정조대에 개혁을 주도한 남인 세력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집권 세력은 정조대에 대립했던 남인세력에 대해 서학 탄압을 명분으로 철저히 제거했다. 이런 집권 세력의 정치적 의도는 채제공(蔡濟恭)의 추탈관작 논의에서 잘 드러난다. 1801년(순조 1) 2월 9일 삼사에서는 이가환(李家煥), 이승훈, 정약용(丁若鏞)을 탄핵하면서, ‘조정을 위협하고 흉계를 은밀히 도모했다.’는 이유로 채제공의 추탈관작을 요청하기 시작했다.
신유박해가 진행되는 기간에 끊임없이 계속된 채제공에 대한 공격은 점차 서학과 관련지으려는 경향이 짙어졌다. 집권 세력은 처음에는 홍낙임(洪樂任) 일파로, 나아가 서학의 비호 세력으로, 급기야 서학의 우두머리로까지 지목하면서 채제공에 대한 공격에 박차를 가했다.
3월 13일 주문모 신부가 자수하자 천주교에 대한 탄압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장령 홍광일(洪光一)은 이승훈 부자가 요서(妖書)를 가지고 온 책임은 채제공에게 있다며, 그를 사학의 비호세력이라고 탄핵했다.
한편 유항검의 ‘대박청래(大舶請來)’사건이 정국의 현안으로 대두되자 채제공을 사학과 연루시키는 공격은 한층 강화되었다. 대사간 정동관(鄭東觀) 등은 채제공이 사학을 비호했을 뿐만 아니라, ‘대박청래’사건과도 연루되어 있다고 비판했다. 황사영(黃嗣永)이 체포된 이후부터는 채제공과 서학의 연루설이 더욱 구체화되었다. 사간 이동식(李東埴)은, 황사영의 백서 사건은 채제공을 위한 것으로서, 이가환, 권철신이 심복이 되고, 유항검, 황사영이 그의 부하가 되었으며, 이승훈, 정약종이 그의 보좌관이 되고, 이학규(李學逵), 신여권(申與權) 등이 그의 행렬이 되어 다른 나라와 내통한 역모를 꾸민 것이라고 공격했다.
마침내 대왕대비는 12월 18일 채제공에 대한 추탈관작 전교를 내리고, 토역반사문(討逆頒赦文)에 채제공의 죄상을 추가토록 했으며, 다음날 채제공에게 내렸던 고신(告身)을 거두어 불태워버렸다. 이어 12월 22일 ‘토역반사문’이 반포되면서 신유박해는 일단락되었다.
그리고 이가환은 사학의 괴수로 지목을 받아 심문을 받다 장살 당하였고, 이기양(李基讓) 역시 사학 괴수로 지목을 받아 심문을 받은 후 단천으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사망하였으며, 정약용과 정약전(丁若銓)도 천주교 신자로 체포되어 심문을 받은 뒤 강진과 흑산도로 각각 유배되었다. 그러나 채제공과 함께 이가환·정약용·정약전은 당시 천주교를 믿지 않았다. 이기양은 천주교인들과 가까웠으나 공초에서 천주교인이라는 증거가 드러난 바가 없었으며, 이가환의 경우 천주교 서적에 많은 관심이 있었지만 천주교를 믿지는 않았다. 또 정약용과 정약전도 한때 천주교를 믿었으나 신해박해 이후로 배교하고 천주교를 믿지 않았다. 이밖에도 오석충(吳錫忠), 이유수(李儒修), 이치훈(李致薰) 등 많은 남인 계열 인물들이 당시 천주교를 믿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학에 연루되어 심문을 받고 유배되거나 관직에서 쫓겨났다. 이런 과정 속에서 남인 계열의 주도로 이룩된 개혁의 주요한 성과들도 신유박해를 전후로 하여 대부분 폐기되었다.
집권 세력이 거의 만 1년을 끌어온 신유박해의 목표 가운데 하나는 정조대 자신들과 대립관계에 있었던 시파(時派), 남인 세력의 제거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 채제공의 추탈관작 문제가 있었다. 이와 더불어 정순왕후 및 벽파세력과 대립적 위치에 있던 홍봉한(洪鳳漢)의 아들이자 정조의 친어머니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의 동생인 홍낙임(洪樂任)과 사도세자의 아들이며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恩彦君) 이인(李裀)을 제거하는 데 신유박해가 이용되었다.
주문모 신부의 자수를 계기로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면서, 벽파 집권 세력은 홍낙임을 서학의 배후로 몰아 공격했다. 3월 교리 윤우열(尹羽烈)은 홍낙임을 채제공 등 역적의 근원이라고 비난하면서, 이들이 사학과 결탁해 나라에 재앙을 가져올 것이라며 신속한 처벌을 요청했다. 한편 3월 들어 은언군 이인도 서학의 배후로 지목받기 시작했다. 은언군의 처 송씨와 그의 며느리 상계군 이담(李湛)의 처 신씨가 영세를 받고, 주문모 신부를 숨겨준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결국 홍낙임과 은언군 이인은 흉악한 역적의 괴수이며 사악한 무리의 우두머리라는 죄목으로 5월 사사(賜死) 당하였다. 집권세력과 대척점에 있었던 홍낙임, 은언군 제거와 함께, 정조의 의리를 받들어 탕평체제를 유지하고자 했던 인물인 윤행임(尹行恁) 역시 신유박해 과정에서 제거되었다. 윤행임은 벽파의 의리론을 비판하면서 자신을 정조의 정책을 추진하는 주체로 설정하고 정치적 입지를 굳히려고 하였다. 그러자 집권 벽파 세력은 이를 막기 위해 그를 서학의 배후로 지목하여 제거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신유박해는 정적을 제거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천주교 신앙을 중심으로 현실 체제를 극복하고자 하는 세력에 의해 광범위하게 확산된 종교운동을 탄압하고자 하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 역시 간과할 수는 없다.
천주교가 확산되었던 18세기 말, 19세기 초는 사회경제적 변동이 급격하게 일어나면서 기존 체제에 대한 저항도 점차 확대되고 있었다.
실제로 6~7년 사이 천주교 신도수의 증가 추세는 정부의 공식적인 금압조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금하면 금할수록 널리 퍼져나가며, 씨앗이 떨어져 또 다른 씨앗을 내듯” 한결같이 번져나갔다.
신유박해 당시 신도들 신분은 상당수가 몰락 양반 출신이거나 중인층이었다. 이들은 봉건체제에 대해 비판하는 과정에서 교회에 접근하고 있었다. 천주교인들은 조상 제사 거부, 신분 질서 무시, 왕권과 친권(親權)의 상대화 등 체제 거부적인 태도를 보였다. 전통사회를 지키고자 했던 집권층과 새로운 사상인 서학을 신봉하였던 천주교도 자신들 모두 서학을 사회변혁 이념으로 생각했다. 천주교도들은 1791년(정조 15) 신해박해 이후 점차 깊은 산골짜기 등으로 숨어들어가 신앙공동체를 형성하고, 경당(經堂)에 모여 그들의 이념을 실천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천주교 신앙운동은 이상향을 추구하던 민중들의 염원을 담아 새로운 시도를 도모했다. 즉 서양의 선박을 불러와 천주교의 자유로운 포교를 달성하려고 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정감록의 변혁사상과 같이 봉건 사회 말기에 나타난 민중의 희원이 담겨 있었고, 이것이 천주교 신앙의 구원사상 내지는 서양 선박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과 결부된 측면이 있었다.
조선 정부는 이러한 민중의 동요 현상에 대해 위기의식을 갖고 적극적 대응 방안을 도모했다. 서학을 믿는 사람들을 ‘어버이도 없고 임금도 없는’ 인륜을 무너뜨리려는 금수 이적이자 중세체제의 기본질서를 뒤흔드는 무리로 인식했다. 게다가 집권 세력의 눈에는 황사영 등의 서양 선박을 불러오려는 시도가 ‘바다 건너 도둑놈을 불러와 문을 열어주고 나라를 바치려 한 흉악한 음모’로 인식되었다.
정부에서는 전통질서를 강화하려는 방안을 다양하게 강구했다. 그리고 서학집단을 철저히 소탕하고, 나아가 이들과 일반 민인을 격리하려는 대책 마련에 부심했다. 먼저 서학도의 체포를 독려하고, 그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오가작통제(五家作統制)나 호패법(號牌法)을 강화했다.
서학도를 격리시키는 현실적인 방법으로 천주교인들을 외딴 섬으로 귀양 보내 격리시키는 방안이 논의되었다. 하지만 이 방안도 이들이 섬 주민을 선동하여 흉악한 역모를 꾸미고 외국과 연락할 가능성이 크며 나아가 그 수가 불어날 수 있다는 우려 속에 철회되었다.
결국 체포한 천주교도를 큰 고을에는 서너 사람, 작은 고을에는 한두 사람 씩 귀양 보내 수령으로 하여금 특별 관리토록 했다.
결국 신유박해의 배경에는 집권 세력의 정적제거이자 정조 시대의 개혁에 대한 반동이라는 측면 외에 중세체제의 모순에 저항하며 동요하는 민중에 대한 적극적 탄압이라는 측면도 있었다. 신유박해 당시에 희생된 사람은 처형 100명, 유배 400명 등 도합 5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것은 천주교 선교에도 커다란 타격이 되었다. 하지만 살아남은 천주교인들은 깊은 산중을 중심으로 교우촌을 형성하여 더 넓은 지역으로 교세를 확산시켰다.
신유박해의 시발 황사영 백서 한글 번역본
황사영 백서(黃嗣永帛書)는 조선에서, 1801년(순조 1년) 신유박해 때 천주교 신자(信者) 황사영이 중국 로마 가톨릭교회 북경 교구의 주교에게 혹독한 박해를 받는 조선교회의 전말보고와 그 대책을 흰 비단에 적은 밀서(密書)이다.
황사영 백서(黃嗣永 帛書)
죄인 도마 등은 눈물을 흘리며 우리 주교님께 호소하옵니다. 지난 봄에 그 곳에 갔던 사람들이 무사히 돌아와 주교님께서 안녕하시다는 소식은 잘 들었습니다만 그 후 날이 가고 달이 바뀌어 이미 해가 저물게 된 이 때도 기체 만안하신지 살피지 못했사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주교님께서는 몸과 마음이 주님의 넓으신 은혜를 충만히 받으사 덕화가 날로 높아지실 것이매 기쁜 마음으로 축하하여 마지 아니 하옵니다.
죄인 등은 죄악이 많고 무거워 위로는 주님의 의노를 범하고 재주와 지혜가 얕고 짧아 아래로는 사람들과 의논조차 못한 채 박해만 크게 일어나게 하여 그 화가 신부에게까지 미쳤습니다. 그리고 죄인 등은 이 위기에 처하여서도 스승과 함께 목숨을 버려 주님께 보답하지도 못하였으니 무슨 낯으로 감히 붓을 들어 우러러 호소하리이까 엎드려 생각하건대 성교가 전복될 위기에 처하여 있고 백성들은 물에 빠져 죽는 고통을 겪고 있으나 어지신 아버지를 이미 잃은지라 그를 붙들고 부르짖을 길이 없고 진실한 형제들은 사방에 흩어져 서로 의논하고 일할 사람이 없습니다. 오직 주교님께서는 온정 깊은 부모를 겸하시고 사목의 책임을 지셨으니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극도에 달한 고통 속에서 우리들은 다른 누구를 불러야 하겠습니까.
이제 박해의 전말을 대강 아뢰고자 하오나 그 일이 일어난 지가 이미 오래 되었고 또 그 실마리가 하도 복잡하여 한꺼번에 진술하기가 어려워 다음에 자세히 적어 보기로 하겠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으로 살펴 주옵소서. 현재 교회 사정은 말이 아니옵고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습니다. 오직 죄인이 요행화를 면하였고 요왕이 아직 발각되지 않았으니 이것이 나라에 주님의 은총이 아주 끊어지지 않은 것이 아닐까요. 오호 죽은 사람들은 이미 목숨을 바쳐 성교를 증명하였습니다. 남아 있는 사람들도 마땅히 죽음으로써 진리를 지켜야 할 것이 오나 재능이 적고 힘이 약하여 어찌 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두 세명의 교우가 비밀리에 모여 당면한 문제들을 의논한 결과 그동안 속에 품었던 사정을 일일이 아뢰 오기로 하였으니 읽어 보시고 이렇듯 외로운 자들을 가엾게 보시어 조속히 구원의 손길을 베푸시기를 바라옵니다.
죄인 등은 마치 양떼가 흩어져 달아나듯이 어떤 이는 산골로 도망쳐 숨고 혹은 떠돌이가 되어 길에서 헤메면서도 울음마저 터뜨리지 못한 체 흐느끼고 있습니다. 실로 목이 메고 가슴이 쓰라리고 뼈가 저려 밤낮으로 바라는 것은 천주님의 전능과 넓으신 사랑뿐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주님의 도우심을 정성들여 빌어주시고 자비의 정을 크세 베푸시어 저희들을 이 물불속에서 건져 주시고 가족들과 함께 정상적인 생활을 하게 해 주옵소서. 오늘날 성교가 온 세상에 널리 퍼져 그 성덕을 노래로 읊지 아니 하는 이 없고 그 영적 감화를 기뻐하며 흥겹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는데 이 먼 끝에 사는 백성들이라고 해서 어찌 주님의 자식들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지방이 멀고 궁벽하여 가장 늦게 성교를 들었고 또 그들의 기질이 약하여 고통을 견디기가 어려운데다 10년 동안이나 갖은 풍파로 눈물과 불안 속에 지냈기에 금년의 박해는 얼마나 참혹한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실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생이 어찌 이토록 극도에 처해질 수가 있습니까. 이 난이 비록 끝 난다 하더라도 주님의 특별한 은총이 없으면 예수의 거룩한 이름이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질 것입니다. 말과 생각이 이쯤 미치고 보니 간장이 서늘합니다. 중국과 서양 교우들이 우리들의 이 위기와 고통을 듣는다면 어찌 동정하지 아니 하리이까.
감히 바라옵건대 교황께 자세히 아뢰시어 이 죄인들을 구원할 수 있는 일을 모두 쓰셔서 세계 각국에 알려 주님의 박애정신을 본받은 성교회가 그 공동체 의식을 드러내어 죄인들을 간절한 희망이 채워질 수 있도록 도와 주옵소서. 죄인들은 가슴을 부둥켜 안고 눈물을 흘려 울며 이 어려운 사정을 피력하오며 목을 늘이고 발돋음을 하여 오직 반가운 소식이 있기만을 기다립니다. 주교님께서는 죄인들이 드리고 싶은 말씀을 글로 다 표현치 못함을 가련히 여기소서. 을묘년(一七九五)에 주 문모 신부를 잡으려다 놓친 후부터 선왕의 의심과 두려움은 날로 깊어져 남모르게 수사를 계속하였으나 끝내 신부의 잠적을 알아내지 못하자 조 화준이라는 자를 시켜 겉으로는 교우인 체 꾸며 충청도 일대의 사정을 탐지하게 하여 드디어 기미년(一七九九)겨울 청주에 박해가 일어나게 되고 충청도의 열심한 교두들은 거의다 잡혀 죽었습니다.
최 도마 필공은 중인 계급의 사람으로서 성질이 곧고 의지가 굳세고 정의로운데다 재물에도 관심을 두지 않고 열심이 대단하여 모든 사람보다 뛰어난 풍채를 가지고 있었는데 신유년(一七九一)박해때 불행히 유혹에 빠져 배교하였습니다. 그러자 선왕이 몹시 기뻐하여 그를 장가 들게 하고 벼슬까지 주니 도마는 하는 수 없이 다 받아들이긴 했지만 근년에 와서는 집에 돌아와 있으면서 과거의 잘못을 몹시 뉘우치며 항상 몸을 받쳐 속죄할 것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기미년 八월에 선왕이 뜻밖에 그를 형조로 불러 들여 네가 아직도 사학을 받드느냐 고 물으시매 도마는 자기가 바랐던 대로 이제야 죽게 되었구나 하고 충효에 대한 성교의 도리와 자기의 잘못을 뼈저리게 뉘우치는 심정을 솔직히 진술하였더니 그 말이 빛나게 밝고 위엄이 있어 옆에서 듣는 사람들이 모두 감동하였습니다. 그러자 법관은 몹시 놀라고 분통이 터져 진술사항을 그대로 임금께 보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선왕은 다시 더 형벌을 내리지도 않고 아무런 판결도 없이 그냥 석방하였습니다. 그러자 대신들이 왕께 상소문을 올려 도마를 사형에 처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선왕은 역시 모호한 대답을 내려 그를 포용하는 뜻을 보여 일은 그 정도에서 가라앉았습니다.
리 말딩 중배는 소론의 一명(첩의 자식의 칭호)으로 경기도 여주에 살았는데 용맹이 남달리 뛰어나고 지조가 쾌활하였습니다. 원래 김 건순과 생사를 같이 하리만치 가깝게 사귀어 왔었는데 건순이 성교를 믿게 되자 말딩도 그를 따라 믿고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열심히 불같이 뜨거웠고 항상 눈을 크게 뜨고 대담하게 행동했으며 남들이 자기의 믿음을 눈치를 챌까봐 무서워하지도 않았습니다. 경신년(一八OO)부활축일에는 개를 잡고 술을 빚어 한 마을 교우들과 길가에 모여 앉아 높은 소리로 희락삼종(부활절에 바치는 三종경)을 외우고 바가지와 술통을 두드려 장단을 맞추며 노래를 부르고 노래가 끝나면 또 술을 마시고 나서는 다시 노래를 부르는 놀이를 날이 저물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원수진 집의 밀고로 그는 한사람의 교우들과 체포되어 관청으로 끌려갔습니다. 교우 중에는 마음이 약한 이도 있었지만 말딩의 격려와 권면에 힘을 입어 혹독한 형벌을 여러 차례 겪으면서 모두 한결같이 버티어 끝내 석방되지 못하고 다들 갇혀 있게 되었습니다. 말딩은 본래 의술을 알고 있었으나 그다지 정통하지 못하였는데 옥에 갇힌 후 혹시 병에 대하여 문의하는 사람이 있으면 먼저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그런 다음 침을 놓고 약을 처방하여 주어 낫지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그의 명성이 크게 퍼져 멀고 가까운 각처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옥문 밖은 늘 장날 같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고을 군수도 금할 도리가 없었고 자기도 병이 나면 와서 약 처방을 얻어 갔습니다. 이래서 옥중 살림이 구차하지 않았습니다. 김 건순은 사람들이 혹시 말딩의 병 고치는 능력을 물으면 칭찬이 너무 과하다 할까봐 열명중에 여덟 아홉 명은 고친다고 대답했지만 사실은 열이면 열 백이면 백 한사람도 효험을 보지 못한 이가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하루는 감옥의 관리가 의서를 좀 보여 달라고 하니까 그는 내게는 의서는 없소 다만 천주님을 공경할 뿐이요 당신도 의술을 배우고 싶거든 천주님을 믿으시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옥리가 책들은 다 불태워 버렸는데 무엇으로 배운단 말이요 하니 말딩은 웃으면서 내 가슴속에 있는 불타지 않는 책이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을 계몽하여 교회에 나오도록 하기에 족하다 고 대답하였습니다.
함께 갇혀 있던 원 요왕에게는 한 늙은 여종이 있어 늘 옥에 찾아와 돌보아 주면서 집안의 따분한 형편을 늘어 좋으며 배교하기를 꾀었었는데 요왕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번은 할멈의 말이 하도 처참하고 간절하여 요왕도 번민을 하며 마음의 동요를 느꼈습니다. 이것을 알아 챈 말딩이 그 할멈을 노려 보았더니 할멈은 겁이 나 말을 다 끝내지도 못한 채 물러가고는 다시는 옥에 찾아오지도 않고 후에 이생원의 눈빛이 하도 무서워서 다시는 못 가겠다고 하더랍니다. 말딩은 옥중에서도 늘 책을 베끼고 경문을 외며 진리를 설명하여 사람들을 권유하였는데 간수 한 사람도 감화되어 교를 믿었으며 나중엔 매우 열심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권 철신은 남인측 대가의 자손으로서 경기도 양근군(오늘의 양평군)에 살았는데 그는 평소에 경서와 예서로 세상에 이름난 학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교가 이 나라에 들어오자 온 가족이 다 믿고 따랐습니다. 본시 이름 난 집안이라 남들의 비방도 대단하였습니다. 그 아우 일신이 신해년(一七九一)박해에 죽고 나서부터는 감히 계명을 터놓고 지키지 못하였는데도 그를 원수같이 취급하고 시기하는 자들의 미움과 원망은 점점 심하여 을미년(一七九一)여름에는 드디어 그의 고향의 고약한 귀신 같은 놈들이 터무니 없는 죄를 꾸며 관청에 고발까지 하게 되었고 이에 권씨 집안의 자체들도 맞서 대항하게 되었으므로 사건은 장차 크게 벌어지게 되었는데 마침 그 고을 군수가 현명하게 처리하여 싸움은 거기서 중재되었고 고발 내용이 사실 근거가 없다는 것도 판명되어 간교한 모략은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간교한 모략을 비밀리에 계속하여 서울에 있는 악질 관리들과 결탁하여 경신년 (一八OO)五월에는 선왕을 직접 뵙고 양근땅에는 그 고을에 사학이 한창 성행해서 아니 배우는 사람이 없고 안 믿는 동리가 없는데도 군수란 자는 태평세월로 사찰조차 아니 하니 이 군수를 마땅히 징계해야 한다 고 아뢰었습니다. 선왕이 그 보고를 듣고는 옳다고 판단하여 양근 군수를 인책 사임시키고 새 군수를 부임시키니 그는 부임하자 곧 묵은 사건을 끄집어 내어 많은 사람들을 체포하였습니다. 그러자 늙고 겁이 많은 철신은 서울로 올라가서 잠시 몸을 숨겼습니다. 그러자 관가에서는 그의 아들을 대신 잡아다가 가두었는데 아들이 아버지의 벌을 대신 받겠다고 여러 번 청하였으나 군수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기어이 철신을 불러 들이려고 하여 사건은 오래도록 종결을 짓지 못하였습니다.
선왕은 성교에 대하여 의심이 많고 두려워하기도 했지만 그는 본래 무슨 사건이든 크게 확대하려고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주 신부 사건은 두 나라 사이에 관계되는 일이라 만일 드러나면 그 처리가 매우 곤란하겠으므로 을묘년 후 여러 신하들이 성교를 엄금하라고 여러번 청하였으나 일체를 말단 관리들에게 내맡기고 자기는 간섭하지 아니한 것처럼 보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각지방의 박해는 비밀 지령이 아닌 것이 없었고 일부러 아니 한 체한 것은 교우들의 마음을 늦추어 놓고 몰래 신부를 체포하여 암암리에 결말을 지으려고 했던 것인데 미처 그 계획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김 여삼은 본래 충청도 사람으로 삼형제가 다 성세를 받고 박해를 피하려고 서울로 이사 와 살고 있었는데 여삼은 근년에 와서 냉담을 하고 배교까지 하더니 부랑자들과 어울려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나 두 형들도 이것을 막지 못하였습니다. 리 안정이라는 사람도 역시 충청도 사람으로 서울에 살고 있었는데 재산이 약간 있는 자로서 여삼이와는 사돈간이었습니다. 여삼은 가난하여 늘 안정에서 돈을 좀 돌려 주기를 바랐지만 안정은 그가 달라는 대로 다 들어 주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여삼은 늘 안정에게 원한을 품고 이를 갈고 있던 중 그는 안정이가 늘 성사를 받고 있음을 눈치채고는 만일 신부가 안정에게 재물을 내게 좀 나누어 주라고만 한다면 거절하지 못할 테지 하는 엉뚱한 생각을 품고는 그 말은 신부께 드렸습니다. 그러나 안정이가 재물을 나누어 주지 않자 이것은 신부가 안정에게서 부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트집을 잡아 이젠 그 분풀이를 신부께로 돌려 모략으로 해치고자 신부의 동정을 살펴 포도부장에게 밀고를 했습니다. 五.六년동안나 수사를 해도 알아내지 못했던 신부의 정체가 알려지니 이 말을 들은 포도부장이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그들은 일이 성공하면 너를 봉급이 많은 관직에 추천해 주겠다고 하며 그 사람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신부는 골롬바의 집에 있었는데 여삼이는 이것까지 짐작하고 있었으므로 부장더러 아무 날 당신이 우리 집으로 오면 알려 주겠다 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런데 여삼이는 약속한 날이 이르기 전에 다른 사람의 집에 갔다가 갑자기 병이 나서 집에 돌아 올 수 없게 되어 부장은 헛걸음만 하였습니다. 다행히 한 교우가 이 사정을 알고 신부에게 알려 신부는 다른 곳으로 피해 가서 안정더러 돈 수십냥 쯤 가지고 가서 여삼이와 화해하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여삼의 원한과 분노는 잠시 누그러졌고 또 며칠 안되어 국왕이 세상을 떠나매 각 관청에선 일이 분주하여 사건은 더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여삼은 이미 신부를 밀고한 뒤요 또 자기로서도 이제는 어찌 할 수 없게 되어 늘 악질분자들과 어울려 음모를 꾸며 기어코 흉악한 짓을 끝까지 저지르고야 말겠다고 했습니다.
또한 이 나라의 양반들은 二OO년 이래 당파가 생겨 서로 대립하고 있습니다. 남인 노론 소론 소복의 네 당파가 있는데 선왕의 말년에 남인이 또 두 파로 갈라져 그 한파는 리 가환 정 약용 리 승훈 홍 낙민 등 몇몇 사람들로서 이전엔 모두 천주교를 믿었으나 목숨을 아껴 배교한 자들입니다.그래서 그들은 겉으로는 몹시 성교를 해치는 척 했지만 마음만은 아직도 믿음 속에 죽을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은 수가 적고 그 세력이 외롭고 위태로왔습니다. 그리고 또 한편은 홍 의호 목 만중 등 진짜로 성교를 해치는 자들인데 一O년 이래 양편은 서로 깊은 원한을 품고 있습니다. 노론도 또 갈라져 두 파가 되었는데 시파(時派)라는 것은 모두 임금의 뜻을 받들어 선왕의 신복의 신하가 되었고 벽파라는 것은 모두 당론을 고수하여 임금의 뜻을 항거하므로 시파와는 원수같이 지났으나 당원이 많고 세력이 크므로 선왕도 두려워하였고 근래에는 온 나라가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리 기호나은 문장으로 세상을 뒤흔들었고 정 약용은 재주와 기지가 누구보다도 뛰어 났으므로 을묘년 이전에는 선왕이 총애하고 신임하였으나 을묘년 후로는 차차 멀어져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벽파에서는 이 두사람을 몹시 꺼려하여 기어코 해치려고 했습니다.
가환 등이 배교하고 성교를 해치는데도 벽파에서는 그를 사당으로 몰고 별 병 중상과 공박을 가했습니다. 그러나 선왕은 번번이 그들을 감싸주므로 벽파에서 마음대로 해칠 수가 없었습니다. 선왕이 돌아가시자 그 뒤를 이은 임금은 나이가 어려서 대왕대비 김씨가 섭정하게 되었는데 대왕대비는 선왕의 계조모요 본래 벽파 출신으로 그의 친정이 일찍이 선왕에게 폐가 당했던 터이라 여래 해 동안 품었던 원한을 풀길이 없다가 뜻밖에 정권을 잡게 되자 벽파를 끼고 학정을 펴 경신년(一八OO) 十一월 선왕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한쪽으로 시파 사람들을 모조리 몰아 내 조정을 반이나 비게 하였습니다. 또 전부터 선교를 박해하던 악당들은 벽파와 계속 서로 연락을 취해 왔었는데 세태가 크게 변하자 요란스럽게 들고 일어나 큰일을 저지를 기세를 보였습니다. 경신년 四월에 여러 교우들이 명도회에 가입한 후로 신공을 부지런히 하고 회원 아닌 사람들은 움직여 자진하여 모두 남을 감화시키는데 힘을 썼으므로 그해 가을과 겨울 사이에 회두 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는데 부녀자가 삼분의 이요 무식한 평민이 삼분의 일이고 양반집 남자들은 이 세상의 화가 무서워서 믿고 따르는 자들이 극히 적었습니다. 을묘년(一七九五)박해때 골롬바는 신부를 보호한 공이 컸고 재능이 출중했으므로 신부는 모든일을 그에게 맡겼고 골롬바 역시 열심히 일을 처리하였습니다. 또 그는 많은 사람들을 감화시켜 벼슬하는 집안의 부녀들이 입교하는 예가 아주 많아 졌습니다. 그것은 이 나라의 법이 역적이 아닌 이상은 양반의 집안 부녀자에게는 형벌이 미치지 않으므로 금령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던 까닭입니다. 신부도 이점을 이용해서 선교를 널리 현양할 근거를 삼고자 하여 그네들을 특히 후하게 대접하매 교회안의 대세는 모두 부녀자 교우에게로 돌아 갔고 이러한 인연으로 선교의 소문이 또한 널리 퍼졌습니다. 성교가 이 나라의 큰 정책 문제로 되어 있으므로 새 임금이 즉위하면 반듯이 먼저 어떤 조처가 있을 것은 분명하였지만 그것이 무었일지 몰라 신부는 더욱더 조심하고 교우들도 모두 속으로 근심하고 걱정하였습니다.
十二 월十七일 형조에서 포졸을 보내어 최 도마를 체포하여 가두었는데 이 사람은 지난해의 송사가 미결중에 있었으므로 이번 체포된 일은 뜻밖의 일이 아니요 또한 그때는 성교를 금하기로 되어 있었을 뿐 조정에서는 아직 금령을 내리지 아니하였으므로 교우들은 경계는 했었지만 그다지 놀라거나 두려워하지는 않았었습니다. 十九일 성모 자헌 첨례날 새벽 최 도마의 종제 최 베드루가 길가에 있는 약방의 안방에서 몇몇사람과 함께 경문을 통경하고 있었는데 마침 창문 밖에서 투전(투전이란 노름의 이름인데 부랑자들이 돈을 걸고 노름을 하므로 사법부가 이를 금지 하였음)을 단속하는 관원들이 지나가다가 창문안에서 가슴을 치는 소리가 나자 투전 던지는 장단소리로 생각하고 창문을 열어 제치고 뛰어 들었습니다. 그러나 투전을 발견하지 못하자 각자의 몸 수색을 하여 첨례표 한 장을 찾아 내었습니다. 그러나 글을 몰라 이것이 무었인지 알수가 없자 글을 아는 관리에게로 가지고 가 보였더니 그것이 곳 성교에 관계되는 그림임을 알려주어 그들은 다시 교우들을 잡으러 돌아왔었는데 그러나 이미 날이 밝아 다른 교우들은 다 흩어져 달아났고 최 베드루 와 오 스더왕만이 붙잡혀 관청으로 끌려가 도마와 함께 갇히게 되었습니다. 이에 포도부장들은 김 여삼이와 부랑배들을 끼고 그들을 정보원으로 삼아 아니가는데 없이 돌아다니며 눈을 부릅뜨고 교우들을 찾아다니메 교중이 물결일 듯이 요란했으나 마침 세모가 되어 사태가 잠시 잠잠해 졌습니다. 그러나 정월 초아흐레 총회장 최 요왕이 잡히고 나서 부터는 부장들이 밤낮없이 돌아다니며 여기저기서 잡아간 사람들이 두 포도청(자포청 우포청이 있음)에 가득히 찼는데 모두들 무식하고 또 새로 입교한 사람들과 여염집 부녀자들이라 의지가 강한 사람은 매우 적었습니다.
十一일 대왕대비가 교서를 내려 상교를 엄금하기를 선왕이 늘 말씀하시되 참다운 학문이 밝혀지면 사학은 저절로 꺼져 버릴 것이라 하셨는데 이제 듣건데 사학이 여전히 수도로부터 경기와 충청지방에 이르기 까지 기세를 보인다 하니 어찌 소름이 끼치고 한심한 일이 아니랴 서울과 지방에 다섯집씩 통합한 통반제도를 엄격히 세워 그 통에 사학을 하는 자가 있으면 통장이 관청에 고발하여 징계하게 하라 그래도 뉘우치지 아니하면 반역죄를 적용하여 모조리 사형에 처하여 씨를 남기지 말도록 하라 고 하니 각처가 소란하여 지고 환란의 불길이 더욱 맹렬해져 교우들은 손발을 둘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명도의 회장 정 아오스딩은 정 약용의 셋째 형으로 본시 양근서 살다가 경신년(一八OO) 五월 박해때에 온가족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는 벌써 사학자로 비방을 받아왔던지라 그해 여름에 한 악질 관리가 선왕의 면전에서 그의 이름을 지적하여 처형하기를 청하였으나 선왕이 꾸짖어 화를 면한 바 있었습니다. 이제 와서는 사태가 이미 변하여 재난의 불길이 점점 맹렬하게 타오름을 보고 자기도 도저히 면할 수 없음을 두려워하여 성물과 서적과 신부의 편지등을 농속에 넣어가지고 다른 집에다가 맡겨두다가 그집도 곧 습격을 당할까 두려워 본집으로 도로 가져다 두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부장들에게 빼앗길까 무서워서 임 도마라는 사람을 나무장사로 꾸며 농을 마른 솔잎으로 싸가지고 十九일 해질녘에 짊어지고 거리로 나오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농은 크고 솔잎은 엷어서 아무래도 나무짐 같지가 않았습니다. 그때 한성부에 밀도살 감시원이 이것을 보고 몰래 잡은 쇠고기가 아닌가 의심이나(무허가 도살은 엄금하였음) 그사람을 관청으로 끌고가 농을 열어보니 모두가 성교에 관한 서적과 상본과 신부의 편지였는지라 부윤(俯尹)이 크게 놀라 그농과 사람을 포청으로 압송하니 이것은 불에다 기름을 끼얹는 격이 되어 환란이 더욱 확대 되었습니다. 책과 농이 압수당하자 교우들은 놀라 조석으로 불안에 떨고 있었습니다만 十O여일이 지나도록 잠잠하고 아무 동정이 없더니 二월초에 포도대장 리 유경이 정근되고 신임된 신 대현이 집무하자 옥에 가득했던 배교자들은 모두 석방하고 최 도마형제와 최 요왕과 임 도마만을 석방하지 않았는데 이들을 때려 죽이려 한다고도 하고 멀리 귀향보내기로 방금 의논중이라고 하였습니다. 밖에서 검거가 잠시 그치니 교우들이 기뻐하며 이대로 계속해서 무사하기를 바랐습니다.
이때에 소북의 박 장설 노론의 이 석우 남인의 최 현중 등이 잇달아 성교를 몹시 헐뜯고 반역죄로 처벌하기를 청원하며 아울러 신 대현이 교우들을 가볍게 처리한 것을 죄로 몰았습니다. 그러나 대비가 크게 노하여 대현을 잡아 가두고 이사람을 금부로 옯겼습니다. 이나라 국법에 조정의 관리와 역적은 군부에서 처리하고 포도청에서는 도적들만 취급하고 평민의 범죄는 형조에서 다스리게 되어 있습니다. 교우들은 평민이지만 포도청에 속하게 되어 도적으로 처단되어야 하는 데 금부로 옮긴 것은 역적으로 처벌하려고 한 것입니다.
二월 초아흐렛날 리 가환 정 약용 리 승훈 홍 낙민을 금부에 가두고 十一일에는 권 철신과 정 약종을 체포하고 포도청에 엄명을 내려 전에 석방한 사람들까지 재구속하게 하고 여주와 양근에 가둔 사람들을 금부에 올리도록 하니 경향에 이름있는 교우들은 한 사람도 모면한 이가 없었습니다. 길에는 포졸들이 깔려 이리 뛰고 저리 뛰어 밤낮 그치지 아니 하고 금부와 양 포도청과 형조도 만원이 되어 더 수용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二四일에는 골롬바의 온가족이 체포되고 이어 양반집 부녀자들도 제법 많이 체포되었으나 상세한 것은 잘 듣지 못했습니다. 정 아오스딩이 관가에 이르자 관원이 농 속에 든 책들에 대해 그 내력을 물으니 아오스딩은 다 자기의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관원이 농 속의 편지를 내 놓고 하나하나 캐어 물었으나 아오스딩은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관원이 사람을 그 가족에게 보내어 너의 남편 너의 아버지가 신부의 성명과 있는 곳만 알리면 절대로 죽을 리가 없는데 혹독한 매를 맞으면서도 끝내 입을 열지 아니 하니 너희들 가족은 틀림 없이 알고 있을 터이니 가장의 목숨을 생각하여 바른 대로 말하라 고 하였으나 가족들도 한결 같이 모른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에 신하들이 회의를 열어 대역부도 죄로 판결하고 二六일에는 아오스딩과 최 요왕 최 도마 홍 방지거 사베리오 홍 낙진 리 승훈 여섯 사람들을 목을 베어 죽이고 그 후 아홉 사람 역시 참수형에 처하였는데 그 중 여자 세사람이 있었지만 가운데 한 사람 골롬바를 제외하고는 다른 두 여자와 남자 여섯명은 누구인지 알 수 없어 최 베드루 등이 아닌가 하지만 전해들은 말이 정확하지가 않아 단정할 수가 없습니다. 또 여주와 양근에 갇혔던 사람들도 모두 본 고을로 돌려보내 거기서 참수형에 처하였는데 아직 사실을 조사하지 못하여 일일이 아뢸 수가 없습니다.
총회장 최 요왕 창선이는 중간계급 출신으로 을묘년에 순교한 최 마디아의 조카이며 진실한 교훈이 전해 내려오는 집안에서 자라 성교가 이 나라에 들어오자 남보다 먼저 입교하였고 몸가짐이 평화스럽고 언행이 공정하여 二O년을 하루같이 지냈습니다. 그는 외모가 순수하고 말수가 적으면서도 정의로와서 누구든지 의혹이 생기거나 곤란을 당하거나 혹은 마음이 우울하고 답답할 때면 그의 얼굴만 한 번 보아도 자기가 당하고 있는 일이 그다지 큰 일이 아니며 어려운 일이 아님을 스스로 깨닫게 되고 또 그의 말은 두어 마디만 들어도 가슴이 시원해 졌습니다. 도리에 대한 강론도 자세하고 명백하여 재미가 있으므로 비록 듣기 좋게 말할 생각이 없이 나오는 대로 말하더라도 사람들이 즐겨 들으며 싫증을 내지 아니하고 또한 그 말이 마음 속 깊이 들어가므로 사람들이 받는 신익이 컸습니다. 그의 순명과 겸손은 천성에서 우러나온 것이었고 남보다 특별히 뛰어나는 점도 없고 꼬집어낼 결점도 없었습니다.
그는 교우들 중에서 덕망이 제일 높아 그를 사모하고 신뢰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집이 입정동에 있었으므로 교우들은 그를 관천이라는 별명으로 불렀습니다. 조 화진이 충청도를 수색할 때 관천이가 교우들의 영수임을 알았으나 그의 이름과 있는 곳을 몰라 체포할 수가 없었는데 이 때 최 요왕은 박해가 장차 커질 것을 알고 다른 교우의 집에 피해 있다가 신유년(一八O一)정월 초닷새날 몸이 불편하여 부득이 자기 집으로 돌아와서 조섭하던 중 초아흐렛날 밤중에 김 여삼이 포도부장을 데리고 와서 집을 둘러싸고 체포하는 바람에 포도청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一O여일 후 치도곤으로 열 세 대를 맞았는데 매를 맞는 동안에는 기절하여 죽어 엎드러진 것 같았으나 매질이 끝나고 관원이 그의 죄목을 셀 때면 그는 벌떡 일어서서 성교의 一O계명을 강론하여 밝혔습니다. 관원의 말이 네가 부모를 효도로 공경한다면 어찌하여 제사를 지내지 않느냐 하니 그는 잘 생각해 보시오 밤에 잠이 든 때는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 있더라도 맛볼 수가 없지 아니 하오 그렇거늘 하물며 이미 죽은 사람이 어떻게 음식을 먹을 수 있겠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니 관원도 대답을 못하고 그를 옥에 가두라고 명령하였는데 그 후 소식이 끊어졌더니 그 후 정 아오스딩과 함께 한날에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그의 나이는 四三세이었습니다.
정 아오스딩 약종은 성질이 강직하고 의지가 굳고 상세하고 치밀함이 남보다 뛰어났습니다. 일찍이 선도(仙道)를 배워서 오래 살뜻이 있어 천지 개벽설을 그릇 믿었다가 탄식하여 말하기를 천지가 다시 변하는 때는 신선도 역시 함께 사라짐을 면치 못할 터이니 이것 역시 결국 길이 사는 길이 아니니 배울 것이 못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성교의 도리를 듣게 되어 독실히 믿고 따르게 되었습니다. 신해년(一七九一)박해에 그의 형제와 친구들은 모두 움츠려졌으나 그만은 유독히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세속이야기에는 서툴렀으나 교리를 강론하기를 가장 좋아하여 비록 병이 들어 괴롭고 양식이 없어 굶주릴 때에도 그런 괴로움은 모르는 사람 같았습니다. 도리의 한 끝이라도 모르는 것이 있으면 잠과 음식의 흥미마저 잃은 듯 전심전력 연구하여 반드시 해득하고야 말았습니다. 그는 말을 타고 가거나 배를 타고 가면서도 묵상 공부를 그치지 아니 하고 우몽한 자를 만나면 힘을 다해 가르치고 깨우쳐 주기를 혀가 피로하고 목이 아플 정도까지 하여도 실증 내는 기색이 조금도 없었으며 아무리 막힌 사람이라도 그의 앞에서 깨치지 못하는 자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는 일찍이 무식한 교우들을 위하여 이 나라의 언문으로 <주교요지> 두 권을 저술하였는데 성교의 여러 책을 인용하고 자신의 의견을 보태서 아주 쉽고 명백하게 썼으므로 어리석은 부녀자와 어린 아이들 까지도 책을 펴 보기만 하면 환히 알 수 있고 의심나거나 모호한 대가 없었습니다. 이 책이 이 나라에서 목초나 땔나무 보다도 더 중요하다 하여 신부는 간행을 인준 하였습니다. 그는 여러 해 동안의 학문 연구가 습관이 되고 성품이 되어 교우들을 만나면 안부 인사나 하고 나서는 곧 도리 강론을 펴 놓고 날이 저물도록 계속해 다른 이야기는 할 겨를조차 없었습니다. 혹 자기가 모르던 도리 한두 가지를 알아 깨닫개 되면 만족하여 기뻐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혹 냉담하고 태도가 명확하지 못한 자가 강론 듣기를 좋아하지 아니 하면 딱하고 민망하게 생각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사람들이 가까지 도리에 대해 물으면 마치 주머니에서 물건을 꺼내듯이 생각해 내는 기색도 없이 척척 풀어주어 끊어지는 일이 없었고 어려운 문제를 늘어 놓아도 가려내는데 조금도 막히지 않았습니다. 그의 말은 질서가 있어 어긋나거나 뒤바뀜이 없었으며 정확하고도 기묘하였으며 또한 아름답고도 상세하고 확실하여 사람들의 신덕을 굳세게 하소 애덕을 더욱 왕성하게 하였습니다. 덕망은 관천만 못하였으나 도리에 밝기는 그보다 훨씬 더 낳았습니다. 그는 또 천주의 모든 덕과 여러 가지 도리가 광범하고 방대하여 여러 가지 책에 흩어져 총론이 없으므로 독자들이 납득하기가 어렵다 하여 장차 여러 책에서 가려 뽑아 부분별로 구별한 것을 한데 모아 한 책으로 만들어 제명을 <성교전서>라 하여 후배들에게 남겨 주려고 하였으나 그 책의 초를 절반도 답지 못하고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그가 감옥에 들어가자 관원이 국왕의 명을 거스렸음을 문책하니 그는 성교의 진실한 도리를 솔직하게 진술하고 그것을 금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라고 밝혀 말했습니다. 그러자 관원이 크게 노하여 국왕의 명령을 반대한다고 해서 반역죄를 선언하였습니다. 옥에서 끌려 나와 수레 위에 올라 처형장에 갈 때에도 그는 큰소리로 사람들에게 여러분은 우리를 비웃지 마시오 사람이 세상에 나서 천주를 위하여 죽은은 당연한 일이요 공심판 때 우리들의 울음은 즐거움으로 변할 것이요 여러분의 기쁜 웃음은 변하여 참된 고통이 되리니 웃지들 마시오. 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처형을 당할 때 구경꾼들을 둘러보며 이것은 당연히 해야 될 일이니 당신들은 겁내지 말고 이를 본받아 이 후 이렇게 하시오. 라고 말했습니다. 처형장에서 그는 칼에 한번 맞아 목과 머리가 반쯤 잘렸었는데도 벌떡 일어나 앉아 손은 크게 벌려 십자성호를 크게 긋고는 조용히 엎더졌습니다. 최 도마와 함께 처형되었었는데 이 때 그의 나이는 四 二세 이었습니다.
최 도마는 병이 많았고 옥중에서 오래 시달려 지쳐서 수레에 오르자 곧 인사불성이 되었는데 형장이 가까워 오자 비로소 얼굴에 즐거운 표정이 나타났으며 그는 맨 먼저 형을 받았는데 그의 나이는 五六세 이었습니다.
홍 사베리오 교만이는 권 철신의 외숙으로 경기 포천현에 살았으며 젊어서 진사에 올랐고 만년에는 경학(經學)을 좋아하였는데 권씨 집안이 입교하자 그도 따라 믿게 되어 관계(官界)에 나설 뜻을 단념하고 고향에서 이웃 사람들을 권유하자 그들을 감화시켜 온 고을의 영수가 되었습니다. 그의 딸이 아오스딩에게 시집을 가자 그로 인해 남들의 비방을 받게 되어 드디어 체포되어 치명하였습니다. 홍 바오로 낙민은 본래 충청도 예산현 사람으로 젊어서 진사시헙에 합격하였고 서울로 이사한 후 리 승훈 정 약종과 어울려 갑진년(一七八四)과 을사년(一七八五)사이에 성교를 믿고 봉행하였습니다. 그는 열심하고 도리에 밝아 교중 사무를 잘 보아 칭찬을 받았으나 남의 이목을 거려 계속 과거를 보아 기유년(一七八九)엔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사간원(詞諫院)정언(正言)에 이르렀습니다.
신해년 박해 때는 선왕이 억지로 배교를 명하니 나쁜 표양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그와 함께 배교한 자들은 전면 계명을 지키지 않는데 비해 바오로만은 신공 드리고 재지키는 것을 그만 두지 않았습니다. 을유년(一七九五) 성사 볼 때가 이르러 보례하고 고해성사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판공때가 오기 전에 큰 박해가 일어났습니다. 그의 성명이 한 영익이란 자의 고발에 들어 있어 선왕이 또 배교하라고 압박하였습니다. 그 뒤로 그는 집에 있을 때는 계명을 완전히 지키고 외출했을 때는 세속사람들이 하는 대로 따랐습니다. 을미년(一七九九)에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그는 신주를 모시지 않았습니다. 근래에 이르러선 열심히 약간 일어나 앞으로는 전심으로 주님께 귀화할 작정이었는데 이 거룩한 뜻이 이루어지기 전에 체포되어 참수형을 당하였습니다. 옥 안의 사정은 엄격한 비밀에 붙어져 있으므로 자세히 알 도리는 없었습니다. 그의 죄목이 본래 큰 것이 아니었으니 만일 관청에 이르러 배교만 하였더라면 죽지는 않았을텐데 참수형을 받은 것으로 보아 그가 성교에 어긋난 일을 한 것은 아님을 알 수가 있겠습니다.
리 승훈 베드루는 이 가환의 생질이요 정 아오스딩의 매형입니다. 젊어서 진사에 급제하고 학문궁리를 좋아하여 선비 리 벽이 크게 기특히 여겼습니다. 그 때 리 벽이 성교의 서적의 비밀히 읽고 있었으나 승훈은 아직 이를 몰랐습니다. 계묘년(一七八三)에 아버지를 따라 북경으로 가게 되매 리 벽이 그에게 은밀히 부탁하기를 북경에는 천주당이 있고 그 안에 서양 전교사들이 있었으니 찾아보고 신경 한부룰 얻은 후 동시에 성세 받기를 청하면 서양 선비들이 자네를 크게 사랑할 것이니 신기한 물건과 패물을 많이 얻어 가지고 오고 빈 손으로는 돌아오지 말라 고하였습니다. 승훈이 그의 말대로 천주당에 가서 상세를 청하매 여러 신부들이 영세하기에 필요한 도리를 모른다고 영세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 량 신부가 힘써 우겨 성세를 주고 또한 성서도 주었습니다. 승훈이 집에 돌아오자 리 벽 등이 놀라 함께 전심전력으로 그 책을 읽어 보고 비로소 진리를 터득하고는 가까운 친구들을 권유하여 당시 이름 난 많은 선비들이 그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승훈을 추대하여 영수로 세웠고 그는 그의 아버지의 엄한 반대와 약한 벗들의 많은 비방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참아 견디며 성교를 봉행하였습니다. 선왕이 그의 재주를 사랑하여 경술년(一七九O)가을에는 벼슬을 주어 평택 현령까지 지내게 하자 그는 신해년에 체포되어 배교하고는 성교를 비방하는 글을 여러 번 저술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모두 자기 본심에서 우러나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을묘년에 신부가 이 나라에 온다는 말을 듣고 그는 마음이 움직여 회개하고 성사의 은혜 받기를 준비했으나 며칠 안 되어 박해가 일어나매 승훈은 두려워 다시 움츠려들었습니다. 그는 제일 먼저 성서를 전파하였기 때문에 악한 무리들이 성교를 공격하고 배척할 때에는 반드시 승훈에게도 그 죄를 돌렸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선왕은 그를 두호 하였습니다. 그는 겉으로는 세속을 따랐으나 혹 옛 가까운 친구를 만나면 옛 깊은 정을 잊지 못하여 떠나기를 아쉬워하며 항상 다시 떨치고 일어날 생각을 하다가 화를 당하였는데 그는 서적을 전파한 죄가 있어 아무리 배교한다 해도 사형을 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니 그것이 선종인지 아닌지는 아직 알 수가 없어 더 두고 조사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 가환은 어려서부터 재주와 지혜가 뛰어났고 성장하매 풍채가 늠름하고 도량이 크고 문장으로서는 나라 안에서 으뜸이었으며 아니 읽은 책이 없었고 기억력이 강하여 신과 같았습니다. 또 천문과 기하학에도 정통하였는데 일찍이 그는 탄식하기를 이 늙은 몸이 죽으면 이 나라에는 기하학의 씨가 끊어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기학(理氣學)을 약간믿던 그는 천체를 둘러보며 마음 속으로 이처럼 웅대한 조직에 주재하는 이가 없다 하리요 하고 감탄한 적도 있었습니다. 三O세가 넘어 진사에 오르고 대과에 급제하니 선왕이 그를 인물로 중히 여겼습니다. 갑진 을묘년(一七九四,一七九五)무렵에 리 벽 등이 성교를 믿는다는 말을 듣고 책하여 말하기를 나도 서양 서적 몇권을 읽어 보았는데(자기 집에<직방외기><서학범>등이 있었음) 기이한 글이요 궁벽한 저술에 지나지 않고 다만 내 식견을 넓히는데 그쳤는데 어찌 족히 인생을 안정시키고 인명을 확립시킬 수 있으리요 하였습니다. 리 벽이 이치를 따저가며 답변하니 가환이 그의 말에 굴복하여 드디어 책을 구해다 비밀히 읽었습니다. 리 벽은 그에게 초보 입문서 몇 권을 주었는데 그 때 (성년광익,聖年廣益.)한권이 있었으나 가환이 영적을 믿지 않을까 하여 빌려 주지 않으려고 했으나 가환이 기어코 싸우다시피하여 그 때 있던 성교 서적을 모두 가져다가 정신을 쏟아 거듭 읽고 또 읽어 믿기로 결심하고는 말하기를 이것이 과연 진리요 정도로다 진실로 사실이 아니라면 서적 가운데 쓰인 말은 전부 하늘을 모함한 것이요 하늘을 소홀히 여긴 것이니 만일 그렇다면 서양 바다를 건너와 이렇게 전교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반드시 벼락을 맞아 죽었으리라 하였습니다. 드디어 그는 제자들을 권유하여 교리를 가르치고 아침 저녁으로 리 벽 등과 비밀히 희합하여 열심히 대단하였습니다.
이 때 리 승훈 등이 망녕되게 함부로 성사를 집행하였는데 가환은 남에게 권하여 그 들에게서 성세를 받도록 하였으나 자기는 그러려고 하지 않았으니 그것은 자신은 사신으로 북경에 가서 서양 사람들에게 성세를 받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세태가 어려워지자 그는 마침내 모든 신공하기를 그쳤는데 그 때 성교를 믿는다고 비방을 받는 사람들은 대부분 가환의 사돈과 일가 친척들이었습니다. 그런고로 악한들이 항상 그를 불러 교주라고 규탄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 신해년 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광주 부윤으로 있으면서 교우들을 많이 해침으로써 자기 변명의 계책을 삼았었는데 교우들에게 도둑 다스리는 형법을 맨 처음 적용한 이도 가환이었습니다.
신해년 이후 선왕이 남인을 많이 기용하자 가환은 그 세력을 타 여러 벼슬을 지내고 공조판서에까지 임명되었습니다. 그러나 을묘년에 새 사람이 순교한 후 악한 무리들이 신부의 사정을 모르므로 그 죄를 리 승훈과 리 가환에게 뒤집어 씌어 잇달아 상소하고 공격하매 선왕도 할 수 없이 리 승훈을 예산으로 귀양 보내고 가환은 좌천시켜 충주 목사를 시켰습니다. 충주엔 마침 한 교우가 있어 평소에 다른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았는데 가환은 그를 혹독한 형벌로 다스려 억지로 배교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교우들에게 주리형을 처음 사용한 이도 가환이었는데 주리란 도둑을 다스리는 독특한 형벌입니다. 그는 또 관의 기생을 첩으로 삼았는데 이런 것은 모두 다 자기에 대한 비방을 벗으려고 한 짓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부터는 버림을 받아 다시는 등용되지 아니 하여 집에서 글이나 읽고 쓰면서 스스로 즐겼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원래 신앙이 깊어 딸과 며느리와 첩과 여종들을 권화하였는데 가끔 서책이 탄로가 나도 가환은 조사하거나 금하지 않았습니다. 가환은 무오(一七九八,一七九九)사이에 지방에서 박해가 잇달아 일어난다는 말을 듣고 자기의 신념을 은밀히 말하기를 이것을 비유하면 막대기로 재를 두드리는것과 같아 두드리면 두드릴수록 더욱 일어나는 것이니 상감이 아무리 금할지라도 어찌 할 수 없을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처음 금부에 잡혀 들어갔을 때에는 아직도 자기는 염려 없다고 믿었으나 옥의 일을 보는 자들이 다 평소에 원수처럼 미워하던 자들이라 기어코 사지에 몰아 넣으려고 하여 도저히 면할 수 없음을 스스로 깨닫자 변치 아니하여 혹독한 매질과 불로 지지는 형벌을 받다가 목숨이 끊어졌는데 그때 나이는 六O세였습니다.
여섯사람이 순교하기 며칠 전 권 철신도 역시 매를 맞고 순교하였는데 그가 착하게 잘 죽었는지 아닌지는 아직 알 수 없사오니 탐지하여 알려 드릴때까지 기다려 주시옵소서
최 베드루는 필제는 (字)가 자순이요 도마의 종제로서 집이 가난하고 부모가 늙어 약종상을 하여 생활을 했는데 값이 싸고 약재가 좋아 모두 그를 신용하였습니다. 진실하고 충직한 표정이 얼굴에 나타나 바라다 보기만 해도 그가 얼마나 어진 사람인가를 알 수 있었습니다.
도마는 의지가 굳고 성품이 뛰어난 사람이지만 베드루를 항상 우러러 보고 어렵게 대해 비록 나이로는 아우이지만 모든 일을 그와 문의한 다음에야 행하였고 자기 나름대로는 하지 않았습니다. 도마에게는 친 아우 하나가 있었는데 그는 교를 훼방하고 배척하고 교우들이 라면 모두 비난하면서도 베드루만은 감히 비방하지 못하고 천주교 안에는 자순이 한 사람밖에 없고 그 나머지는 모두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라 고 늘 자순을 칭찬하였습니다. 신부가 일치기 베드루를 기특히 여겨 칭찬하기를 부부간에 정덕을 지키는 자로서 끝까지 상공하는 이가 적은데 자순 부부는 결심이 굳고 고신극기를 갈수록 부지런히 하니 참으로 훌륭한 사람들이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루의 아버지는 본래 외교인이었는데 아들이 체포되매 놀라고 걱정한 나머지 병이들어 죽게 되자 천주교를 믿고 세를 받았습니다.
베드루는 옥에서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관에 출감을 청하니 관은 집에 돌아가 장례 지낼 것을 허락하고 또 은근한 말로 훈수를 주어 달아나 피하라고 했지만 베드루는 그 말대로 하지 아니 하고 장례를 치른 뒤 기일 안에 감옥에 돌아와 마침내 목이 잘려 순교하였습니다. 나이는 三二세 이었습니다. 일찍이 베드루는 몇몇이 친구들과 함께 서로 자신의 소원을 말할 때 그는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는 것이 바로 자신의 소원이라고 하였는데 결국 그 말대로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의 말로는 베드루가 매를 이기지 못해 배교하였는데도 관가에서 석방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다시 성교를 설명하고 사형을 받았다고도 하나 확실한 바가 없고 아직은 의문일 뿐입니다. 김 요사팟 건순은 노론 대가의 자손이요 집이 경기도 여주에 있었습니다. 그의 선조 상헌이 나라에 큰 공훈을 세웠기 떄문에 자손들이 대대로 벼슬을 받아 나라 안에서 으뜸가는 집안이 되었습니다. 요사팟은 어릴 떄부터 특이한 데가 있어 아홉 살 때에 선도를 배울 생각이 나 서당에서 훈장에게 논어를 배웠는데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 할 것이라는 대문에 와서 마땅히 공경해야 할진대 멀리 함은 옳지 않은 일이요 마땅히 멀리 해야 할진대 공경함은 옳지 않은 일이거늘 공경하고 멀리 하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고 물으니 훈장이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집에는 전부터 (기인 십 편<畸人十篇)이라는 책이 있어 요사팟은 그책 읽기를 좋아했고 一O여세에는 (천당지옥론)을 저술하여 천당과 지옥이 반드시 있음을 밝혔고 더 자라면서부터는 문학에 널리 통달하여 <경사자집> (經史子集)과 의서(醫書)와 지리에도 통달하고 불교와 노자와 병서(兵書)에 까지도 정통하지 아니 한 것이 없었습니다.
열 여덟 살 때 양부의 상을 당했는데 이 나라와 상복은 송나라의 제도를 본 딴것이라 옛날 법과 틀린 데가 많았으므로 이것을 다시 뜯어 고쳤습니다. 그러자 민간의 선비들이 크게 놀라 들고 일어나 글을 보내 힐책하였더니 요사팟이 글을 지어 이에 응답하였는데 그 인용한 증거가 넓고도 많고 문장이 아름다워 리 가환이 읽어 보고 나는 감히 바라다 보지도 못한다 고 탄복하였습니다. 그는 집안에서는 충직하고 신의가 높으며 독실하고 효성스러워 그 명성이 인근 이웃에 널리 알려 졌습니다. 본래 가산이 부유하여 재물을 나누어 희사하면서도 자기가 먹고 입은 것은 검소하기가 가난한 사람과 같아 그 명성이 대단해서 서울에 나들이 갈 때마다 가마와 말을 타고 모여 들었는데 그를 한번 만나 보는 것을 신기하게 여겼습니다.
그는 리 말딩등 五.六명과 생사를 같이 하기로 친교를 맺고 장차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강절(江浙)을 거쳐 북경에 이르러 서양 선비들과 만나 잘 사는 방법을 많이 배워 가지고 본국에 돌아와 가르치려고 하였으나 입교하였기 때문에 실현치 못하였고 이 五.六명이 모두가 천주교를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이 때 성교를 봉행하는 사람은 모두 남인이었고 노론 측에서는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요사팟은 성교를 몹시 부러워하고 사모하였으나 들어갈 길이 없다가 우연히 한 시골 교우를 통해 미카엘 대천신 상본을 얻어 보고 성교가 술법과 서로 통한다고 오해를 하고는 강 이천 등과 함께 술법(術法)에 종사하였습니다. 강 이천이란 자는 소북의 명사로 심술이 단정치 못하여 이 나라가 필연코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나라안이 소란해지면 이 술법을 익혀 시기를 보아 집권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요사팟은 그것을 모르고 그를 사귀었던 것입니다. 신부가 요사팟이 어질다는 말을 듣고 글을 보내 그를 권유하였는데 그는 크게 감복하여 전에 배우던 것을 모두 버리고 진심으로 천주께로 돌아왔습니다. 그 떄 나이 二二세였습니다. 그와 함께 가까운 친구들이 입교하였는데 오직 이천만이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몇 달이 안되어 이천의 진상이 탄로나 결국 입건이 되었는데 사실 진술에 요사팟이 관련되어 있었으나 선왕이 전부터 그의 재주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극력 두호하여 화를 면케 하였습니다. 그는 영세한 후 열심히 불같이 일어나매 부형들이 알고 엄히 말리게 되어 三 . 四년간은 집안 박해가 없을 때가 없었고 따라서 비방이 더욱 심해졌습니다.
그의 체포된 경위와 환을 당할 때의 태도에 대하여서는 아직 자세히 알 수 없었습니다만 들리는 말로는 그가 처형될 때에 사람들에게 이 세상의 벼슬이나 명예는 모두 헛되고 거짓된 것이로다 나 역시 약간의 명망이 있고 벼슬도 할 수 있었지만 그런 것이 헛되고 거짓되므로 포기하였노라 오직 천주의 성교만이 지극히 진실하므로 이를 위하여는 죽음을 사양치 않노니 그대들은 이 뜻을 자세히 생각할지니라 말하고 마침내 순교하였습니다. 그 때 그의 나이 二六세라 장안 사람들이 모두 애석해 했습니다.
김 백순은 서울 사람이요 건순의 일가 형으로 집안이 몹시 가난하였으나 공명을 구할 생각은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의 선조 성용은 벼슬이 나라의 재상이라 숭덕 병자년(一六三六)에 청나라 군사가 강화도를 함락하자 상용은 의리를 굽히지 않고 스스로 불에 타 죽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그의 사당과 정문이 세워졌고 나라에서는 대궐 안에 대보단을 세워 전의 명나라 황제였던 만력과 승정 두 황제에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국왕이 병자란에 죽은 이의 자손들을 데려다 전배(展拜)의 예를 드리고 예식이 끝난면 과거를 베풀어 제사에 참여한 사람에게 시험을 보였는데 이것을 충량과(忠良科)라고 하였습니다. 백순은 이제사에 출석하지 아니하고 제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주나라를 존중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과거에 급제할 기회를 노리는 것으로 성실하지 못한 것이기에 나는 참여하지 않노라 고 하였습니다. 그는 처음 몇 해 동안은 남을 따라 덩달아 성교를 비방하며 과거 공부에 힘쓰더니 세태가 위험함을 보고는 관계에 투신할 마음을 버리고 송나라 유학자들의 저서를 읽고 성리학을 연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이치가 의심스럽고 분명하지 않아 전적으로 믿을 수 없음을 깨닫고는 드디어 노자와 장자의 서적을 읽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은 죽어서도 멀치 않는 것이 있음을 깨닫고는 새로운 이론을 내세워 친구들에게 강의하였더니 친구들은 이 사람의 이론이 새로운 것이니 반드시 서양의 교를 쫓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백순이 듣고 의심하기를 내가 남보다 뛰어난 견해를 얻었는데 남들이 서교라고 하니 서교에는 반드시 오묘한 이치가 있을 것이라 하여 마침내 교우들과 상종하게 되어 여러 해 동안 서로 토론한 결과 굳게 믿고 따라 계명과 법규를 엄격히 지켰습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도 입교하여 열심하였습니다. 그
러나 그의 아내는 성질이 억세고 사나와 자기 남편이 높은 벼슬에 올라 유명하게 되기를 바라다가 하루 아침에 장래 끊어지매 분하고 원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온갖 욕을 퍼부으며 일가 친척과 친구들까지 헐뜯고 욕을 했습니다. 그러나 백순은 조금도 요동하지 않았고 또한 그의 외숙이 그를 설복시키려 하였으나 설복 당하지 않자 외숙은 네가 내 말을 듣지도 아니 하면 너와 절교하겠다 고까지 했지만 백순은 차라리 외숙과는절교할지언정 주님과는 절교 못하겠다 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그의 친구들은 모두 절교 통고문을 보냈고 종중 모임에서는 그를 문중에서 축출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백순은 태연하였습니다.
그는 늘 내가 천주를 믿고 나자 내 마음이 산과 같아 요동하지 않는다 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건순이와 함께 한날에 참수형을 받았는데 그의 나이 三二세요 입교한지가 오래되지 않아 상세를 받지 못해 본명이 없었습니다.
리 희영 루가는 요사팟의 아주 가까운 친구로 여주에서 살다가 서울로 이사한 사람인데 본래 화공(畵工)으로 성인들의 상본을 잘 그렸습니다. 그도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홍 비리버 필주는 골롬바의 전실 아들로 성품이 선량하여 어머니를 따라 교에 나왔으나 처음엔 별로 부지런하거나 열심하지 않더니 신부를 모신지 一년만에 아주 딴 사람이 되어 모두 놀라 기이하게 여겼습니다. 그는 집에 있으면서도 늘 미사에 복사를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체포되어 옥에 들어가매 관원이 신부의 동정을 물으면서 혹독한 형벌을 가했으나 비리버는 고통을 참아 견디며 긑내 실토하지 아니 하여 마침내 참수형을 당하였는데 나이 二八세 이었습니다.
강 골롬바는 한 이름 있는 집안의 딸이었습니다. 그는 언변이 있고 강직하고 용감하였으며 생각과 취미가 고상하여 어려서 방안에 앉아 있을 때부터 이미 성녀가 될 생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나아갈 길을 몰라 남을 따라 염불을 읊었는데 지식이 약간 열린 一O여세가 되자 그것이 허황하여 믿을 것이 못됨을 알고 다시는 따르지 않았습니다. 자라서 덕산 홍 지영의 후처로 들어갔는데 남편이 옹졸하여 마음에 맞지 않아서 늘 속세를 떠나고 싶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충청도에 처음 성교가 들어갔을 떄 골롬바는 천주교라는 세 글자를 듣고 혼자서의 짐작에 천주라 함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라 교의 이름이 옳으니 도리도 틀림 없을 것이라 하여 책을 구해 한 번 읽어보자 마음이 기울어져 믿고 따랐습니다.
그의 총명하고 부지런함과 민첩하고 열심한 극기는 아주 뛰어나 아무도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온 집안을 권유하여 귀화시키고 이웃 동리까지 전했는데 오직 남편 지영이만은 주견이 전연 없어 아내가 권유하면 옳다 옳다 하며 쫓다가는 악한 무리가 할뜯으면 그래 그래하고 그들의 말을 믿었습니다. 아내가 나무라면 눈믈을 흘리며 참회하다가도 나쁜 친구가 오면 금시 전과 같이 되었습니다. 골롬바가 아무리 힘을 써도 아무런 효과가 없어 그와 함께 일을 할 수 없었으므로 신해년 박해에 자기 고향이 시끄러워지자 그는 남편에게 농토를 맡기고 자녀를 데리고 서울로 와서 사바의 북경 왕래를 많이 도와 주었습니다.
을묘년에 영세를 했는데 신부는 그를 심히 기뻐하며 회장으로 임명하여 여교우들을 보살피는 임무을 맡겼습니다. 五월 박해에 그는 피신할 계획을 먼저 주장하고 혼자 주선하여 신부를 자기 집에 숨겨 두고 힘을 다해 미리 막아 보호함으로써 포졸들이 체포하러 문앞까지 왔다가도 그냥 돌아가게 만들었습니다. 박해가 지난 후에도 신부는 그의 집을 거처로 정하였으며 골롬바는 六 년이나 교회의 모든 요긴한 사무를 도와 신부의 총애와 신임은 누구도 그와 비교할 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골롬바는 안으로는 신부를 받들어 거처와 의식을 모두 알뜰하게 보살피고 밖으로는 교회 사무를 처리하여 경영과 수응에 조금도 차질이 없었습니다.
그는 처녀들을 많이 모아 가르쳤고 그것이 끝나면 각기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천주님을 믿으라고 권고하도록 하고 자신도 역시 두루 다니며 전교하기에 밤낮을 가리지 아니하여 편히 잠자는 시간이 없었으며 도리가 밝고 구변이 좋아 누구보다도 많은 사람을 귀화시켰고 일처리를 과감하게 하고 위엄이 있어 사람들이 다 두려워 하였습니다. 체포되어 관청에 이르자 관원이 신부의 거처를 물으며 주리를 여섯 번이나 틀었으나 음성과 기색이 조금도 달라지지 아니 하매 양쪽에 늘어섰던 형리들이 이것은 귀신이지 사람이 아니라 고 하였습니다. 그는 마침내 참수형으로 순교했습니다. 나이는 四一세이었습니다.
선왕에게는 서형(庶兄)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아들이 반역죄로 죽은 뒤 선왕이 그를 강화도로 추방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온 나라가 들고 일어나 그를 사형에 처하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허락하지 아니하고 그의 아내와 며느리를 본래 살던 궁에 그대로 살게 하였습니다. 신해 임자녀(一七九一, 一七九二)무렵 한 여교우가 있어 그를 가련히 여겨 권유하여 감화시켰더니 사람들이 모두 우환의 근거가 이런 데 있을 것이라 하여 그들과 내왕하기를 꺼렸지마는 골롬바는 꺼림낌이 없이 주선하여 이미 성사를 받게 하고 명도회에 입회시켰는데 이 일을 아는 사람은 모두 우울하고 금심해 했습니다.
결국 발각되어 극약을 내려 자살하게 하고 강화도의 죄인도 성교는 믿지 않았으나 공범으로 몰아 역시 극약을 내려서 죽었습니다. 그런데 두 부인의 성과 본명도 모르고 최 베드루 이하 여러 교우들의 순교한 날짜도 모릅니다.
조 베드루는 양근 사람입니다. 그 아버지가 홀아비로 빈궁하여 힘써 농사를 지어 살아갔는데 베드루의 나이가 三O이 되도록 관례도 못하고 장가도 못 갔습니다. 그는 몸이 몹시 쇠약하여 외양도 보잘 것 없었거니와 세상 일에도 어두워 사람들이 그를 비웃고 사람 축에 넣지도 않았습니다. 정 아오스딩의 집에 가서 공부했는데 아오스딩만이 그의 큰 열심을 칭찬하였습니다. 경신년(一八OO) 四월에 그의 아버지와 함께 여주 리 말딩의 마을에 갔다가 말딩이 체포될 때 부자가 함께 붙들려 관청으로 끌려갔으나 베드루가 굴복하지 않았으니 관원이 노하여 네가 내 명령을 쫓지 않으면 네 아버지를 당장에 죽이리라 하고 아버지를 끌어내어 그가 보는 앞에서 혹독한 매질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루는 하는 수 없이 배교하는 말을 했습니다. 석방되어 문을 나올 때 말딩 등이 깨우치고 권면하매 베드루는 마음을 돌이켜 회두하고 다시 들어가 성교를 증명하였습니다. 관원이 크게 노하여 그를 재수감하고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고문을 당할 때마다 다른 사람들은 예사로운 매를 맞았지만 베드루만은 가장 혹독한 매를 많이 맞았습니다. 그것은 담당관이 그의 사람됨을 보고 마음 속으로 멸시하여 이런 자는 쉽사리 항복을 받을 수 있으리라 고 생각 했었는데 뜻밖에 오히려 크게 완강 하므로 몹시 미워져서 기어코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의 감옥생활 十一개월동안 아름다운 말과 착한 행실이 매우 많았습니다. 다 기억하지 못하고 후에 사실을 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베드루는 옥중에서 대세를 받았는데 신유년(一八O一) 二월에 관원이 또 다시 몸 쓸 형벌을 가하며 억지로 배교하기를 명령하니 하늘에는 두 천주가 없고 사람에게는 두 마음이 없소 그러니 한 번 죽는 것 외에는 더 할말이 없소 라고 답변했습니다. 그러자 관원이 명하여 다시 옥에 가두었는데 며칠 후 옥 안에서 목숨을 거두었습니다. 때는 二月 一四일이었습니다.
이 루수는 충청도에 전교했다는 죄로 공주에서 참수형을 당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그때 아직 배교중에 있었는데 죽을 때 어떠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이는 그가 선종했다고 하나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정산과 예산에도 순교자가 한사람씩 있다 하나 누구인지 모릅니다.
전라도는 신해년 이후 一O 년동안 박해가 없어 교우가 대단히 많았습니다. 四월 초 전주의 류 아오스딩과 고산의 윤 방지거등 二OO여 명이 체포되었는데 오직 김제의 가난한 선비 한씨라는 사람과 전주의 평민 최 여겸이라는 사람만이 의지가 굳어 참수형으로 순교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굴복하였습니다. 서울과 지방에서 배교한 사람들을 모두 먼 곳으로 귀양 보냈는데 그 수가 대단히 많았습니다.
류 아오스딩 형제와 윤 방지거는 지도자였기 때문에 바로 귀양 보내지 아니하고 서울로 올려다가 가두었습니다. 김 도마는 체포되었을 때 자기가 그들과 내왕한 일이 있다고 실토 함으로 그 역시 서울로 올려다가 가두었는데 죽였는지 아니면 귀양을 보냈는지 아직 모릅니다. 외교인들에게 전하는 말에 의하면 정식으로 처형된 자와 옥중에서 죽은 사람이 三OO여명인데 지방의 숫자는 포함되지 않은 것이라 합니다.
조선 건국 이래 사람을 죽인 수가 올해처럼 많은 적이 없었다 하나 믿을 만한 말인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또 헛되이 죽은 자가 누구이며 순교한 사람이 몇인지도 잘 알 수가 없습니다. 조정에서 기어코 죽여 없애려 하는 자는 지위가 높고 글을 잘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몽한 평민들을 혹 알아도 모르는 체 내버려 두고 취조도 혹독하게 아니 하여 서울 장안 평민들은 살아 있는 수가 상당히 많았습니다. 二 월 보름 전의 일은 죄인이 친히 목격하였으므로 꽤 상세하게 아오나 그 이후 일은 전하는 말을 얻어 들은 것이기에 매우 간략하고 탐탁하지도 않습니다.
순교자들의 사적은 분명히 들은 것과 평소에 전부터 잘 아는 것을 추려서 적은 것이라 대강에 지나지 아니 하고 그 나머지는 감히 함부로 기록하지 못합니다. 기록한 것 가운데도 오히려 진실되지 못한 데가 있을까 염려됩니다. 좀더 자세히 알아 보아야 하겠습니다.
신부께서는 을묘년 이래 늘 골롬바네 집에 살면서 간혹 딴 곳에 돌아다녔는데 이것은 오직 골롬바만이 알았고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박해가 일어나자 한 남자 교우가 사태가 긴박함을 보고 신부의 처신이 위험할까 하여 지방으로 내려와 숨어 사는 교우들을 찾아보고 적당한 자리 두군데를 마련해 놓고 서울로 돌아와 골롬바를 만나 신부님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킬 계획이 있어서 그러니 신부님을 한 번만나 보게 해 달라 고 했으나 골롬바는 이미 안전한 곳이 마련되었으니 구태어 다시 옮겨 갈 필요가 없다 고 하였습니다. 이 교우가 여러 번 간청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하는 수 없이 그냥 돌아갔습니다. 五.六일후 화가 일어날 기미가 점차 커지자 이 교우는 화가 자기에게 미칠까 두려워 온가족과 함께 먼데로 피해 갔습니다.
정 아오스딩이 관처에 잡혀가 공술하지 아니하니 관청은 골롬바 모자를 잡아다가 혹독한 형벌로 고문하였으나 죽기를 각오하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골롬바의 여종을 데려다가 주리를 틀어 문초하니 여종이 혹형을 이기지 못하여 사실대로 진술하고 아울러 나이와 얼굴 모습을 알려 주었습니다. 관원이 골롬바를 보고 너의 집 종이 다 불어 놓았으므로 너도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으니 신부의 처소를 말하라 고 하매 골롬바는 그 사람이 전에는 우리 집에 있었지마는 떠나간지가 오래서 지금은 그의 처소를 모른다 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에 신부의 얼굴을 그린 그림을 돌려 상금을 걸고 각 지방으로 두루 탐색하였습니다.
三월 중순께 신부는 자수하였는데 (그때 어디 누구의 집에 살았으며 무엇 때문에 자수 했는지 그리고 자수한 날짜는 언제인지 등은 모릅니다) 그가 바로 금부로 들어가 관졸들이 놀라 누구냐 고 물으니 그는 나 역시 천주의 가르침을 받드는 사람으로 조정에서 이것을 엄중히 금하고 무죄한 사람들을 많이 죽인다고 하니 살아 있는 것이 무익하므로 스스로 죽기를 구하러 왔노라 고 대답했습니다. 관졸들이 그를 붙들어 관원 앞에 데려가 그가 신부임을 알고 옥에 가두고 양 발에 쇠고랑을 채우고는 형벌과 문초는 하지 않았습니다. 옥중에서 필기 문답한 것이 매우 많았다고 하나 얻어 볼 수가 없고 다만 외교인의 전하는 말에 의하면 자수한 사람은 자기가 서양 사람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에 앞서 여섯 사람이 반역죄로 처형되었는데 신부가 자수하자 서울 사람들이 서로 서양사람이 옥 중에서 천주교인들은 역적이 아님을 변명하고 있다 고도 하고 또 서양 사람이 그냥 죽음을 당하려 하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한 다음에야 사형을 청하려 한다 고도 했는데 이런 소문은 거짓이 아닌 것 같습니다.
四월 보름 후 정부에서는 어영대장(御營大將)에게 명하여 신부를 군문효수(사형한 다음에 보내는 형벌) 하게 하였는데 대장이 병을 핑계하고 사흘동안이나 출근하지 아니하매 사흘 후 그를 파면하고 새로 임명한 대장을 내 보내 사형을 집행하게 하였습니다. 신부를 옥에서 끌어내어 처음으로 형벌을 가해 문초하고 나서(무릎을 서른 번 쳤습니다) 데리고 거리로 나갔습니다. 신부는 길가 좌우 구경꾼들을 둘러 보고 목이 마르니 술을 달라 하매 군졸이 술 한잔을 바쳤습니다. 다 마시고 나서 성 밖 남쪽 一O리되는 연무장(강가의 모래밭이요 지명은 노량임)으로 갔습니다. 귀에 화살을 꿴 후 군졸이 죄목이 적힌 판결문을 주어 읽어 보게 하였습니다. 그 조서는 꽤 길었는데 신부는 조용히 다 보고 나서 목을 늘여 칼을 받았습니다. 때는 四월 一九일 성삼첨례 저녁 六시였습니다.
목을 베자 졸지에 큰 바람이 일고 검은 구름이 하늘을 덮고 번개가 번쩍이고 천둥 소리가 요란하니 장안 사람들이 모두 놀라 황급해 하지 아니 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 때 한 교우는 三OO리 밖에서 길을 가고 있었고 또 한 교우는 四OO리밖에 피난해 가서 있었는데 바람과 천둥이 심상치 않음을 보고 필연코 이 날이 이상한 일이 있으리라고 하여 날짜를 기억해 두었는데 그 후에 들으니 신부가 순교한 날이 바로 그 날 그 시였습니다. 머리를 닷새 동안 거리에 달아놓고 밤낮으로 지켜 사람이 근접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 후 대장이 훍으로 덮으라고 명령하고 여전히 엄히 지키게 하였는데 교우들이 묻은 곳을 몰래 알아 두었다가 후에 옯겨 장사 지내려 하였으나 악질 관리가 위에 아뢰기를 이 사람은 매장하는 것이 옳지 않으니 파내어 드러내 놓도록 명령하십시오 하니 대왕대비가 이를 허락하였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묻으라고 명했던 대장이 이왕 묻어 버린 것을 그렇게까지야 할 것이 있겠느냐 고 간하여 일이 끝났는데 무덤을 지키는 군졸들이 지키기가 귀찮아 몰래 딴 곳으로 옮겨 버렸습니다. 그래서 교우들이 암장한 곳을 두루 찾아 다녔으나 아직까지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형을 집행 할 때 관리들이 이 사람은 제주 사람이라 고 선언하였는데 그것은 중국 정부에 보고하지 아니 하고 종적을 덮어 버리려 한 것입니다. 신부가 순교한 후 박해의 대세가 약간 누그러지기는 했으나 사찰(査察)과 체포는 여전히 끊어지지 않아 감옥에 갇힌 사람이 아직도 많습니다. 어떤 사람의 말로는 참수형을 당하여야 할 사람이 아홉명이나 된다고 하나 사실 여부를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 신부가 이 나라에 오자마자 고발한 자가 있어 이미 선왕이 알고 있었으므로 七년동안 조심하고 또 두려워서 일을 줄일 수밖에 없어 감히 성사를 널리 집행하지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은혜를 입은 자가 많지 못하고 그 태반이 여교우들입니다. 지방의 교우들과 장안에 사는 평민들로서 열심한 이가 적지 않았으나 은혜를 받은 이는 극히 드물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많은 고통을 참아 받으며 여러 해를 두고 큰 기대를 걸고 있었으나 세태가 불안하여 비록 사사로운 집 방안에서라도 감히 입을 열어 신부라는 두 글자를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뜻밖에도 악인들에게 피살되어 그 머리를 매어 단 다음에야 그 얼굴을 보게 되니 一O년 동안이나 애쓴 정성이 하루 아침에 허사로 돌아가 영혼과 육신이 멸망할 지경에 이르고 생사를 의지할 데가 없게 되어 모두 얼빠지고 실망하여 어찌 할 바를 몰랐습니다. 죄인 등이 그들에게 신부님이 오신 것은 오로지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니 어찌 널리 구원을 베풀고자 아니 하셨겠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갖가지 장애로 마음 속에만 사랑을 참고 드러내지 못하시다가 이제 이미 순교하셨으니 천당에서 우리를 보호하시는 힘이 세상에 계실 때 보다 훨씬 더할 것이요. 그러니 우리들의 의지할데와 그대들의 소망도 전에 비해 배로 커져야 하고 털끝만큼이라도 실망해서는 안되오 하고 위로 헀지만 그들은 믿는 것 같기도 하고 의심하는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슬퍼하는가하면 한편으로는 스스로 마음을 달래기도 합니다.
아마 이러한 광경은 옛날에도 없었을 것입니다. 옛날 서양의 박해가 오늘이 나라의 참상보다 더 심했다 해도 성직자가 대를 이어 성사가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성교가 멸망하지 않고 인생의 영혼이 다 구제되었는데 이 나라에서는 형편이 너무 달라 그런 희망이 전혀 없었습니다. 양이 목자를 잃고도 풀을 뜯어 먹고 자라고 젖먹이가 어머니를 잃고도 살아 나가기를 바랄 수는 있지만 저희들은 백번 생각해 실로 살 길이 없습니다. 죄인등은 예로부터 침침하고 어두운 지역에 태어났으나 다행히 천주의 백성이 되었으므로 몸과 마음을 다하여 주님의 이름을 현양하여 특별한 은혜의 만분의 일이라도 갚기로 생각하였는데 중도에서 이런 일을 당할 줄이야 어찌 알았습니까 일찍이 듣건데 순교자들의 피는 성교의 씨라 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불행하게도 동으로 일본과 이웃하고 있어 섬나라의 오랑캐들이 잔인하고 흉악하여 스스로 천주와의 관계를 끊어버렸는데 우리 조정에서는 오히려 그것을 잘한 것으로 받아 들이려고 하니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오리까 우리나라 사람들의 인품은 부드럽고 약하고 법령이 해이하여 일본처럼 그렇게 각박하고 악독하지는 않겠지마는 현재 교우중에 지식 있고 의지가 굳은 사람이 몇이 안되어 우몽한 자와 부녀와 아이들을 대충 합하면 수천 명에 내리지 아니 하나 그들을 지도할 사람이 없어 일으킬 방도가 없습니다. 이런 형편으로야 어찌 오래 갈 수 있겠습니까 一O년이 못가서 비록 정부의 박해가 없더라도 저절로 소멸하고 말 것이니 아 참으로 슬픈 일이옵니다. 죽기 전에 성교가 끊어져 없어지는 것을 어떻게 차마 보겠습니까 죄인 등은 금년에 화를 면하여 고마움과 두려움이 엇갈립니다. 인자하신 은혜의 보살핌으로 생명을 보존하게 되었으니 고맙고 죄악이 크고 많아 간선자 중에 들지 못하였으니 두렵습니다. 이 남은 생명으로 주님을 위하여 힘을 다하고자 하오나 지혜가 모자랄 뿐 아니라 힘도 없으니 장차 이 분통을 이대로 안고 땅 속에 들어가야 하며 이 원통한 한을 이대로 품고 이세상을 마쳐야 하겠습니까 슬프고 답답한 가운데 누가 우리를 불쌍히 여기며 누가 우리를 위로해 주겠습니까 주교님의 인자하신 존전에서 통곡하며 호소하고자 하오나 관문과 산하가 가로 막혀 우러러 보아도 뵈올 수 없으니 더욱 더 속히 타고 답답하옵니다. 장차 어찌 하오리까 죄인 등이 신부께 자수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고 슬퍼했음은 말할 것도 없었지만 더욱 크게 당황하고 걱정한 것은 혹시 이 일이 중국 조정에 보고 되어 그 누(累)가 북경 본당에까지 미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 나라의 교회일은 다시는 가망이 없게 될 것이므로 그 때문에 밤낮으로 이 나라 일보다 더 근심하고 걱정하였었는데 다행히 극진한 보우하심으로 근본이 흔들리지 아니 하고 아울러 죄인이 죽지 않고 요왕도 무고한 것으로 보아 주님의 뜻이 이 나라 일을 주교님께 맡긴 것이 틀림 없습니다. 그러니 죄인 등이 어찌 심중의 이 간절하고 애틋한 마음을 하소연 하여 이 은혜를 우러러 받들지 아니 하겠습니까 모두 말씀드리오니 원컨데 굽어 살피소서 모든 나라 중에 이 나라가 제일 가난하고 교우들은 더욱 더 가난하여 겨우 굶주림과 추위를 면하는 자가 一O여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갑인년에 일(청나라 주 문모를 우리 나라에 맞아 들인 일)이 있었을 때 신부를 영접하는 절차를 미리 준비하지 못하고 신부가 이 나라에 도착한 후에야 겨우 움직이게 되어 일마다 군색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비록 생소한 일에 경험이 없는 탓이라 하지마는 사실은 가난하여 힘이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근년에 입교하는 사람이 약간 많아지고 재정도 전보다 조금 나아졌습니다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다하지 못하고 또한 합당치 못한 사람을 끌어 들여 화난이 이처럼 참혹 하게 된 것도 그 태반이 재정난 때문입니다.
금년 박해가 끝난후 화를 입은 사람은 전재산이 없어졌고 살려고 했던 자들은 홀몸으로 도망하여 가난한 형편은 도리어 갑인년 이전보다 더 심해 설혹 무슨 계획이 있다 하여도 실행할 길이 없습니다. 지금 비록 다 파괴된 뒤이지만 재정만 있으면 할 일이 있습니다. 교우들로 말하면 아직 현저히 나타난 자는 없지만 몇몇 쓸 만한 사람들이 있어 끌어 들일 수도 있고 정세로 말하면 을묘년 이후 해마다 더 어려워 졌는데 거기에서는 두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선왕이 신부를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기어코 찾아 내려고 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노론이 남인을 꺼리고 미워하여 애써 함정에 빠뜨리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선왕의 의심하던 것도 이미 깨어졌고 노론이 미워하던 것도 다 없어졌으며 교우 중에 이름 났던 사람들도 다 죽었으므로 금년만 지내면 잠잠할 것입니다.
지방으로 말씀드리자면 서울에는 비록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이 있어 교우들이 살고 있는 마을에는 그 법이 몹시 엄하지만 교우가 살지 않는 곳에서는 통법을 만들었어도 유명무실하여 모두 마음 놓고 지내 게 되니 발을 붙일 수 있습니다. 실정으로 말씀 드리면 경기 충청 전라 三도는 본래 교우가 많고 경상 강원 二도는 금년에 피난간 사람이 더러 살고 있는 까닭에 탐정관이 이 다섯도를 두루 다니고 있습니다. 황해 평안 도는 본래 교우가 없었고 이사간 교우도 없어서 잠잠하고 의심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변문(邊門)에서는 조사와 감시가 있지만 一. 二년 이래 전연 의심할 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감시나 조사가 차차 소홀해 질 것이므로 손을 쓸 수 있을 것입니다. 경륜(經綸)으로 말씀 드리면 이전 사람들은 모두 널리 드러내기를 힘썼지만 이제는 그렇지 못합니다. 마땅히 보존하기에 힘써야 하니 도랑을 깊이 파고 담을 견고히 쌓고 삼가 자신을 엄격히 지키며 이미 입교한 자들의 믿음을 굳게 하고 미성년자들은 훈계하고 가르쳐 주의 도우심을 정성되이 기구하고 잠잠히 기회를 기다리면 가히 보존하기에 걱정이 없겠습니다. 갑인년(一七九四)에 있은 일에 교우들이 분수에 넘치도록 기뻐하고 다행스럽게 여겨 엄히 근신치 않은 까닭에 첫 번에 한 번 실수한 일이 차차 어쩔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앞수레의 엎어짐이 얼마되지 않았으니 이제는 더욱 더 삼가고 또 삼가 스스로 파탄만 일으키지 않으면 환난이 일어날 리가 없습니다.
현재 사태가 이렇다고 해서 반드시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것은 아니지만 이런 일은 모두 재물이 있은 다음에야 논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지역의 성교회의 존망과 영적 생명의 살고 죽음이 악한 맘몬(재물)에 달려 있음을 미처 헤아리지 못하였습니다. 재물이 없는 관계로 성교가 망하고 영혼이 죽는다면 그 원한이 또한 어떠하오리까 이제 몽매함을 무릅쓰고 감히 말씀올려 청하오니 엎드려 바라건대 이 일을 위하여 서양 여러 나라에 애걸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이 나라에 성교를 유지하고 생명을 구제하는 자본이 되게 하시면 면밀히 운영하고 올바른 준비를 갖춘 뒤 다시 살아날 은혜를 청하오리다 청컨대 주교님은 가련히 보시고 살펴 주옵소서 이런 청은 번거롭고 수고를 끼쳐 드리는 일이라 외람된 줄 아오나 묵묵하여 구하지 않거나 구하여도 얻지 못하면 이는 영영 죽는 것과 같은지라 구하다가 얻지 못하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기에 입을 열어 말씀 드리나이다.
죄인등은 몸과 마음을 숨김없이 우러러 부탁하오니 주교님께서는 위로는 자비하시고 지선하신 은주를 본받으시고 아래로는 가난하고 궁색하고 잔약한 자식들을 생각 하시와 우리의 부탁을 만족히 채워 주시고 우리의 소원을 성취시켜 주시면 성교는 물론 인생들에게 크게 다행한 일이 되겠습니다. 죄인등에게는 버림받지 않는 은혜를 내리시어 재생하는 길을 허락하시면 반드시 힘을 다하여 분부를 받들겠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며칠이나 몇 달 동안에 될 것으로 기대할 수 없고 제대로 경영하고 주선하는데 적어도 三 .四년은 걸려야 할 것입니다. 국경을 넘어가는데 두 가지 난관이 있으니 하나는 머리털이요 또 하나는 언어입니다. 머리털은 쉽게 자라도 입과 혀는 변하기 어렵습니다. 만약 말만 능통하면 그다지 위험한 곤란이 없겠습니다.
죄인 등의 생각으로는 이 나라 사람 하나가 먼저 그곳 천주당에 들어가서 그곳 연소한 교우 학생들에게 이 나라 말을 가르쳐 후일에 대비하는 것이 극히 타당할 것으로 생각하옵니다만 높으신 의향은 어떠하신지요 만약 허락하신다면 피차간에 암호를 정하고 어쩐 소리로 약속하여 동문을 기약하고 동문(冬門)이 불편하다면 다시 춘문(春門)으로 기약하면 순조롭게 될 가망이 있습니다. 또 가장 편리한 것으로는 열심하고 근신한 중국인 교우 한 사람을 책문(柵門)안에 이사시켜 극히 조심하여 소문이 나가지 않도록 가게를 차리고 숙소를 열어 행인들을 받아 들이면 왕래할 때와 서신 교환에 별로 힘들지 않을 것이요 그렇게 되면 그 중에 이뤄지는 묘한 일을 다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이나라 사람들의 생명이 관련된 것이요 실행하기도 과히 어렵지 아니 합니다.
만약 우리 신부와 같이 이 나라를 불쌍히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틀림없이 기꺼이 받아 들일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데 열심하고 신중한 사람들에게 널리 물어 보시고 꼭 이루어 지도록 주선하심니 어떠한가 하옵니다. 이 나라는 방금 위태롭고 불안하고 문란한 지경에 처해 있어 무슨 일이나 막론하고 황제의 명령이 있으면 감히 쫓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때를 타서 교종께서 황제에게 서한을 보내시어 내가 조선에 성교를 전하고자 하는데 듣건데 그 나라는 중국 조정에 속하여 있어 외국과 상통하지 아니 한다 하므로 이렇게 청하오니 원컨데 폐하는 그 나라에 따로 칙령을 내리시어 서양 선교사를 받아 들여 그들로 하여금 충성하고 효도하는 도리를 가르쳐 백성들이 황조에 충성을 다하여 폐하의 덕에 보답케 하옵소서 하고 간청하면 황제는 본래 서양 선교사의 충실하고 근실함을 잘 알고 있으므로 그 허락을 받을 가망이 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천자(天子)를 끼고 제후들을 호령라는 격이니 성교가 평화롭게 나아갈 것입니다. 중국의 형세가 이 계획을 실행할 수 있을런지는 모르겠습니다.
원컨데 유의하옵소서 이 나라에 있어서의 천주의 은혜는 다른데보다 월등하게 컸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일찍이 전교사가 온 일도 없이 천주께서 친히 특별하게 교리를 가르쳐 주셨고 이어 성사를 베풀어 줄 이를 주시는 등 내리신 갖가지 특은을 손가락으로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금년의 이 벌은 죄인들이 은혜를 저버린 탓으로 일어난 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주의 자비하심이 우리를 아주 버리지 아니 하시고 이처럼 잔혹하게 파괴된 가운데도 한 줄기의 길을 남겨 놓으신 것은 이 나라를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표증임이 밝혀 보증된 것입니다.
천주님의 도우심이 이와 같으니 만일 중국과 서양 여러 나라의 천주교 봉행자들이 합심하고 전력을 다해 도우려고만 든다면 재난을 길복으로 바꾸어 이 손바닥 만한 땅을 어찌 구원해 살리지 못하겠습니까. 죄인 등은 이렇게 스스로 위로하고 남도 위로해 주면서 죽음을 참고 목숨을 늘리고 있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천주의 의향대로 하시어 속히 구원을 베풀어 주시기를 간원하옵니다. 엎드려 듣건데 근년에 중국은 서쪽에 도둑의 무리가 창궐에 관군이 여러 번 패하여 국토가 날로 죽어간다고 하니 황제의 마음은 틀림없이 근심되고 괴로울 것입니다.
이런 기회에 언변 좋고 수단 좋은 사람으로 해서 황제가 평소에 신임하는 자가 있으면 황제께 말씀 드리되 편안할 때 위급함을 잊지말라고 건재할 때에 패망함을 잊지 아니 함이 오래 존속하는 길입니다 이 나라가 동쪽으로부터 일어나 전국을 통치한 지가 二OO년에 가까워 이제까지 이르렀습니다.천하의 대세는 그 전복을 예기치 못합니다. 후세에 불상사가 일어난다면 의례 영고탑(寧古塔)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지만 그 지역은 외지고 좁아서 쓸 만한 곳이 못 됩니다.
조선은 영고탑에서 강 하나가 격해 있을 뿐이요 조석에 굴뚝 연기를 바라보며 또 소리 질러 부르면 서로 들리는 거리인데 그 지역의 길이가 三OOO리나 됩니다. 동남방은 땅이 기름지고 서북방은 장정들과 말들이 날세고 굳셉니다. 산악이 三천리를 연해 있어 목재를 이루 다 쓸 수 없고 바다가 三면을 둘러 있어 생선과 소금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경상도의 인삼은 천하도록 많고 제주도의 좋은 말은 그 수를 헤아릴수 없습니다. 산물 역시 천연석으로 많고 좋은 나라이지만 이씨(李氏)가 미약하여 실오리 같아 겨우 끊어지지 않고 여군(女君)이 정치를 하니 세력 있는 신하들이 권세를 부리므로 행정이 문란하여 백성들이 탄식하고 원망합니다. 이러한 때에 내정(內政)을 펴 의복을 차별없이 입게 하고 서로의 왕래를 터 이 나라를 영고탑에 소속시킴으로써 황제의 영토를 넓히고 안주와 평양 사이에 안무청을 설치하여 친왕(親王)을 임명하고 그 나라를 감독 보호하게 하되 은덕을 후이 베풀어 민심을 굳게 단결시켜 놓으면 전국에 사변이 일어나더라도 요동과 심양 동쪽을 갈라 근거로 삼아 그 험한 산악 지대를 방위할 수 있고 또한 장정들을 모아 훈련을 시켰다가 유사시 출동시키면 이것이 튼튼한 기초를 만대에 이루도록 마련하는 것입니다.
또 들으니 그 나라 왕이 나이 어려 아직 왕비를 맞지 않았다 하니 만약 종실(宗室)의 딸 하나를 골라 공주라 하여 시집을 보내어 왕비를 삼는다면 왕은 사위가 되고 이 다음 왕은 외손이 되므로 자연 황조에 충성을 다할 것이요 또한 몽고를 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때를 놓치고 계획을 세우지 아니 한다면 하루 아침에 다른 사람이 불쑥 일어나 점거하고 질서를 잡아 병력을 강하게 할 것이니 그렇게 되면 우리에게는 유리하지 아니 할뿐만 아니라 오히려 재난을 가까이 준 것이 되지나 않을까 하여 두렵습니다.
때가 왔는데도 실행치 아니하면 나중에 후회하여도 어쩔 도리가 없으니 원컨데 폐하께서는 결단을 내리소서 대강 이런 뜻으로 말씀 드리되 중국 조정의 정세에 맞도록 조절하시어 전하시길 바라옵니다. 만약 황제가 이를 들어주고 교우들이 중간에서 일을 주선만 한다면 성교가 차차 크게 퍼져 막아 낼 수 없는 세력으로까지 이를 가망이 있습니다. 중국에는 이미 교우가 많고 접촉할 길도 넓으니 어찌 황제에게 진언할 길이 없겠습니까.
곁에서 듣건데 작년에 칙사로 왔던 영국 학사가(英學士)왕후의 친적이고 또 주교님과 가까운 사이이며 그 집안 남자 종 중에 교우가 있다 하오니 혹시 그 인연으로 이 계획을 추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만약 이런 인물이 있어 힘써 주장한다면 황제는 받아 들일 것으로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그렇다 할지라도 이유 없는 내복(內服)을 명할 수는 없으니 반드시 한 두 가지 죄과가 있은 다음에라야 이것을 구실로 계획을 추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나라에는 불공평하고 불법한 행동이 허다 하오나 일일이 다 말씀 드릴 수는 없고 다만 역서(時憲書)사사로 만든 일과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사사로이 만든 일 이 두가지는 중국 조정이 평소에 알면서도 문책하지 아니한 일이오니 한번 조사해 보면 족히 죄목이 드러날 것입니다.
이 계획은 황실에도 유익할 뿐 아니라 이 나라에도 해 될 것이 없습니다. 현재 이나라는 형세가 위급하여 결코 오래 지탱하기 어려운데 만일 내복(內服)이 되면 간신들의 눈초리가 저절로 그칠 것이요 따라서 리씨의 명성과 위세가 배로 커질 것이매 어찌 이것이 성교의 안정뿐이겠습니까. 이 또한 국가의 복이기도 합니다. 청컨데 현실에 맞지 않는 것으로 생각지 마시고 채납하옵소서. 지난해 내리신 편지에 수년 후에는 큰 배를 보내 시겠다는 분부를 박았습니다만 이제 는 정세가 이미 변하였으므로 무턱대고 와서는 성공을 바랄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조선 사람으로 하여금 꼼짝 못하고 명령에 복종시킬 수 있는 계책이 있습니다. 하오나 그대로 실행하기는 대단히 어렵습니다만 진술하게 허락하옵소서. 이 나라의 병력은 본래 미약하고 모든 나라 가운데 맨 끝인데다가 태평세월이 二OO년을 게속해 왔으므로 백성들은 군대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게다가 위에는 뛰어난 임금이 없고 아래로는 어진 신하가 없어 불행한 사태가 일어나기만 한다면 흙더미처럼 무너지고 기와장처럼 흩어질 것이나 그대로 보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할 수 있다면 군함 수백척과 정예군 五六만명을 얻어 대포와 무서운 무기를 많이 싣고 겸하여 말도 잘하고 사리에도 밝은 중국선비 三,四명을 데리고 해안에 이르러 국왕에게 서한을 보내되 우리는 서양의 전교하는 배요 여자와 재물을 탐내어 온 것이 아니고 교종의 명령을 받고 이 지역에 생령을 구원하러 온 것이니 귀국에서 한 사람의 정교사를 용납하여 기꺼이 받아 들이신다면 우리는 이상 더 많은 것을 요구할 것도 없고 절대로 대포 한방이나 화살하나 쏘지 않고 티끌하나 풀 한 포기 건드리지 않을 뿐 아니라 영원한 우호 조약을 체결하고는 북치고 춤추며 떠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천주의 사신을 받아들이지 않으시면 반듯이 천주의 벌을 집행하고 죽어도 발길을 돌리지 않으리니 왕께선 한사람을 받아들여 나라에 벌을 면하게 하시려는지 아니면 나라를 잃더라도 그 한사람을 받아들이지 아니 하실는지 그 어느 하나를 택하시기 바랍니다. 천주 성교는 충효와 자애를 가장 힘써 의무로 삼으니 온 나라가 봉행하면 실로 한국에 한없는 복이 올 것이요 우리에게는 아무런 이익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왕께선 부디 의심치 마옵소서 라고 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서양 여러나라가 참된 천주를 흠승하므로 오래 태평하고 길게 통치하는 결과를 동양 각국에 미치게 하리니 서양선교사를 용남하여 맞아 드리는 것은 매우 유익하며 결코 해 받는 것이 없음을 거듭 타이르면 반드시 온나라가 놀라고 두려워 감히 쫒지 아니하지 못할 것입니다. 군함에 척수와 군대의 인원수가 앞에서 말씀드린바와 같은 숫자면 대단히 좋겠지만 힘이 모자란다면 배 수십척에 군인 五六천명이라도 족할 것입니다.
수년 전에 서양상선 한척이 이 나라에 동네에 표류하여 왔을 적에 한 교우가 배에 올라 자세히 보고 돌아와서 말하기를 그 배 한척이면 우리나라 전함 백척은 족히 대적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나라 사람들이 성교를 혹독하게 해치는 것은 그 인간성이 잔악해서가 아니라 실은 두가지 이유가 있어서 입니다. 하나는 당파끼리의 논쟁이 몹시 심하여 이런 것을 빙자하여 남을 배척하고 모함하는 자료로 삼기 때문이요 다른 하나는 견문이 넓지 못해 안다는 것이 오직 송나라 학문뿐이므로 자기와 조금만 다른 행위가 있으면 그것을 친지간의 큰 괴변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이를 비유하면 궁벽한 시골의 어린 아이가 방안에서만 자라 바깥사람을 못 보다가 우연히 낯선 손님을 만나면 반듯이 깜짝 놀라 우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이나라에 광경이 이와 같은데 실은 의심이 많고 겁이 많고 어리석고 무식하고 약하기가 천하에 둘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부께서 자수한 뒤에도 교우들이 소란을 일으킬까 두려워 오래동안 감히 사형 집행도 못하다가 교우들이 어찌하여 못할 것을 확실히 알고 나서야 담이 커져 신부를 학살하였습니다. 이처럼 의심과 두려움이 아직 가라앉지 않은 때를 타서 꼭 처부술 기세로 임하여 그 마음을 떨리게 하고난 다음 근심할 것이 없다는 이치로 잘 타일러 그 어리석음을 깨우쳐 인도하면 받아들이고 않고 간에 이해(利害)가 비교될 것이요 또 위력을 두려워하고 편안을 원하는 마음에서도 감히 거절하지 못 할 것입니다.
이 계책이 어렵기는 하나 실현만 된다면 반듯이 조금도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형편이 허락하여 극력 추진해 주시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와 같은 행동은 그 실행이 쉽고 어렵고 간에 성교의 표양에 맞지 않는 방법이라고 하나 죄인은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이 나라에서는 一O년 이래 순교한 이가 극히 많아 성교회의 사제와 국가의 중신들까지 꼼짝 못하고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악질 도당들이 역적의 누명을 그들에게 억지로 뒤집어 씌었지만 사실상 털끝만큼도 나라에 충성하지 않은 증거를 얻지 못했고 그들의 착하고 어진 태도는 이미 사람들 마음속에도 간직해져 있습니다. 만일 이 나라에 교우들이 시끄럽게 떠들어 내란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악한 표양 일 것입니다.
서양으로 말하면 성교의 본 고장으로 二천년 이래 모든 나라에 성교가 전파되어 귀화되지 않은 곳이 없는데 이 탄알 만한 이 나라만이 순종치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완강히 대항하여 성교를 잔인하게 박해하고 성직자를 학살하였습니다. 이런 것은 동양에서 二OO년 동안 없었던 일이니 군사를 일으켜 그 죄를 문책하는 것이 어찌 옳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거룩한 가르침에 의거하면 전교를 용납하지 않는 자는 그 죄가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중하다 했으니 이 나라를 전멸한다 해도 성교의 표양에 해로울 것이 없을 진대 지금의 이 밥법은 오직 명성과 기세를 크게 벌려 전교를 용납하게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백성이 살해되지 않고 재물을 빼앗김이 없으니 인애와 정의의 극치로서 오히려 뛰어나는 표양일 것입니다. 그러나 어찌 표양이 아름답지 못할까 걱정하리이까 다만 힘이 미치지 못할까 걱정할 뿐입니다. 또 어떤 이는 이와 같이 하면 그것이 중국에 보고 되어 북경 천주당에 해가 미칠 것이라고 합니다만 저는 이것은 아주 쉬운 일이라고 말합니다.
편지 가운데 설명하기를 교종께서 일찍이 신부 아무에게 명하여 귀국에서 전교하게 하였던 바 귀국이 용남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학살하였고 이제 또 전교사를 받아 들이지 아니 하니 우리는 마땅히 사절을 보내어 귀국의 죄를 중국에 알리고 압박 받는 백성을 위로하고 학정하는 나라의 죄를 밝히리라 하면 이 나라는 중국 선비를 불법 학살한 죄가 드러나게 중국 정부에게 문책을 당하게 될까봐 감히 보고조차 못할 것이니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책문(柵門)안에 가게를 차리는 일이 현재로선 가장 요긴하고 시급한 일로 빨리되면 될 수록 더욱 다행하겠습니다. 그 외의 계획도 三四년 안에 시행하여야 가히 성공을 바랄 수 있겠습니다. 이 때를 지나면 세상이 또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습니다. 죄인들은 하루를 보내기가 한 해와 같은데 스스로 할 힘은 없고 바라는 마음만이 심히 간절하오니 불쌍히 여기시어 속히 구원하여 주옵소서. 금년 박해에 이름이 알려진 교우로서 화를 면한 사람이 극히 적은데 남아 있는 사람은 숨을 죽이고 엎드려 아주 멸망하여 없어진 듯이 보여야만 성교가 보존되겠으므로 혹은 장삿군이 되어 돌아다니고 혹은 살던 곳을 떠나 다른데 이사를 가는 등 길에서 헤매는 사람들이 허다합니다. 또한 대재와 소재 날을 당할 때 마다 신자라는 것이 폭로되기 쉬우므로 감히 간청하오니 현재 이 나라 교우들로서 여행하는 자에게는 대 소재를 막론하고 일체 면제해 주셔서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숨겨 생명을 보존하게 하심이 어떠하겠습니까.
한 사람이 지난 번 고해 때에 다음번 고해 때 까지 한 주일 동안에 이틀씩 대재를 지키기로 허원을 했었는데 박해가 일어난 뒤로 이 사람이 집을 떠나 피신하여 헤매다가 산골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산 중 음식이 영양이 적을 뿐 아니라 또 객지의 형편이 몹시 불편하여 하는 수 없이 재를 지킬 수 없게 되었습니다. 허원을 깨뜨린 죄가 있을 것 같아 감히 간청 하오니 너그러이 용서하시옵고 아울러 여쭙건데 기왕에 지키지 못한 것이 죄가 되지는 않겠는지요.
천주 강생 후 一八O一년 시몬 다두첨례 후 一일 죄인 도마 등은 두 번 절하옵고 삼가 갖추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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