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화 세계에 심취하여 있는 한 친구가 4월 25일 오스카상 시상식이 있다며, 그 시상식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알람까지 해 놓고서 기다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면서 내게 관심 있으면 보라고 방영 시간을 알려주었다. 미국 시각으로 일요일 오후다. 나는 시상식을 보지 않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나는 그 어떤 종류의 상이든 별로 관심이 없다. 후에 한국 배우 윤여정이 상을 받았다며 수상 소감 링크를 친구가 보내준 후에, 그 링크를 열어보았다. 고도의 경쟁의 장인 수상식장에서, “나는 경쟁을 믿지 않는다(I don’t believe in competition)”라는 역설적 표현이 수상소감중에서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다. 예측한 대로 오스카상 시상식이 끝나니, 미디어든 SNS 든 온통 오스카상을 받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물론 한국 배우가 상을 받았다는 것은 축하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그토록 모든 미디어의 과도한 관심을 받을 만한 것인가. 아니, 이러한 과도한 관심 때문에 묻혀지는 사건들은 무엇이며, 외면되는 이들은 누구인가.
2. 상이란 결코 객관적일 수 없다. 다층적 권력 구조가 개입되고, 상 수여를 결정하는 이들의 주관적 가치관과 편견들이 개입되고 반영되는 것이 바로 각양각색의 상 제도다. 예를 들어서 한국어로만 시나 소설이 발표된다면 결코 세계적으로 알려진 문학상을 받을 수 없다. 영어로 번역되어야 하는 과정을 거쳐야 간신히 고려 대상에 들어간다. 그러나 애초에 영어로 쓰인 작품이라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 소위 세계적 상을 받은 작품이라고 해서, 상을 받지 못하거나 번역되지 않은 작품보다 절대적으로 훌륭한가. 아니다. 이렇듯 세계적 구도에서의 상 제도 뒷면에는, 강력하게 작동되는 언어 권력이 거대한 토대를 이루고 있다. ‘언어 제국주의 (linguistic imperialism)’ 또는 ‘언어 차별주의(linguicism)’ 등의 개념이 점점 중요하게 부각되는 이유다. 또한 서구에서 주어지는 상 제도에,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이 어떻게 작동되고 있는가도 심층적으로 분석되어야 한다. 이렇게 여타의 권력이 개입된다는 의미에서 ‘정치학’이라는 개념이 사용된다 (정체성의 정치학, 지식 정치학, 대변의 정치학 등등). 이런 맥락에서 소위 ‘상의 정치학 (politics of award)’이 정밀하게 조명되어야 한다.
3. 이러한 다양한 이유에서 나는 여타의 상 제도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이다. 언제부터인가 도처에 이러한 상 제도가 우리의 현실을 지배하고 있다. 노벨상, 각종 영화상, 문학상은 물론, 곳곳에서 각양각색의 상이 우리 현실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내가 일하는 대학교(TCU)는 미국에서 대학 축구(college football)로 꽤 유명한 학교다. 시즌 티켓을 끊어서 경기를 보는 사람도 많고, 대학에는 크고 작은 각종 실내-실외 경기장이 있어서 여러 스포츠 경기가 끊이지 않고 열린다. 경기가 있는 주말이면 대학 근처가 차량으로 혼잡하다. 교수들에게 가끔 이사들이 티켓을 선물하곤 하는데, 나는 이 대학에서 16년째 가르치지만, 한 번도 경기를 보지 않았다. 물론 나의 개인적인 취향 때문에 스포츠 경기 자체에 관심을 두지 않게 된다는 것이 우선적 이유다. 그렇지만 더욱 근원적인 이유는, 모든 상 제도나 스포츠 경기는 지속해서 문제가 있는 가치관을 재생산하고 강화한다는 것 때문이다. 자본주의화 된 상 제도나 스포츠 경기는 우리 속에 결국 우월-열등, 승자-패자, 성공-실패 등의 위계적 가치관을 지속해서 각인시킨다.
4. 내가 의미를 부여하는 상이 있다면, 그것은 ‘개근상’이다. 나는 어릴 때 소위 약질이어서 개근상을 타 본 적이 없다. 학년말이 되어 상 주는 시기가 되면, 개근상 타는 아이들이 제일 부러웠다. 개근상이란 누군가가 기준을 정해서 선택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자신에게 주는 상이지 않은가. 자신이 노력해서, 자신의 능력대로 받는 상이며 경쟁구조 속에 넣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약질의 몸을 가지고 학교생활을 하던 내게 개근상은, 별로 큰 의미 없이 주어지는 것 같은 우등상 보다 훨씬 멋지고, 당당하고, 공평한 상으로 보였다. 물론 어린 나이에 나의 이런 내면적 감정을 섬세하게 분석했을 리가 없지만, 이제 돌이켜보니 개근상에 대한 나의 부러움은 이런 연유에서 기인한 것 같다.
5. 내가 일하는 대학에도 학년말이 되면 갖가지 상을 수여 한다. 교수, 직원, 학생들은 다양한 이름으로 상 줄 사람을 선택하는 투표도 하고, 상 줄 사람을 선택하기도 한다. 나 자신도 상금과 함께 주는 이런 저런 상을 여러 번 받기도 했지만, 매년 이러한 상 제도에 관여해야 할 때마다 나는 깊은 딜레마와 씨름한다. 예를 들어서 일 년 동안 가르쳤던 학생 중에서 한 명을 골라서 주는 “교수 도서 상(Faculty Book Award)”을 결정해야 할 때, 내 머리에는 지난 일년 동안 나의 수업에 함께 했던 수십 명의 학생들의 얼굴이 떠 오른다. 각기 다른 특성과 품성을 지닌 여러 학생 중에서, 다른 사람들을 제외하고 오직 한 명을 선택해야 한다. 얼마나 불공평한 제도인가. 나는 교수회의에서 이러한 상 제도의 딜레마에 대하여 밝힌 적이 있다. 그러나 오랫동안 지속하여온 상 제도, 누군가가 기금을 기부하여 기부자의 이름으로 주어지는 상 제도가 나의 ‘상에 대한 철학’ 때문에 폐지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안다. 다만, 당장 해결할 수는 없지만, 문제를 문제로 느끼는 것은 새로운 변화의 시작이라고 생각하기에 나의 생각을 나누는 것이다.
6. 내가 갖가지 상 제도에 대한 변화를 촉구한다고 해서 지금의 현실에서 바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잘 안다. 다만, 온갖 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에 승자-패자 또는 성공-실패 등의 가치구조가 작동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나의 개인적 ‘사전’에서 오래 전에 삭제한 단어가 있다. 바로 ‘성공-실패’라는 것이다. 독일과 미국에서 9년여의 긴 유학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서 오랫동안 전임직을 구하지 못해서 시간강사 일을 한 적이 있다. 출판한 책이 여러 권이 되었을 때도 대학내의 권력구조들은 내가 안정되게 교수직을 수행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렇지만 시간강사직을 할 때나, 후에 다시 한국의 대학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도 나의 삶을 ‘실패’라고 규정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 당시 누군가에게는 나의 삶이 실패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또한 어쩌다가 운 좋게도 상당히 치열했던 경쟁을 뚫고 미국 대학에 채용이 된 후에도, ‘성공’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런저런 일들은 각기 다른 색채의 사건일 뿐이다. 물론 어떤 사건은 큰 아픔과 고통을 경험하게도 하고, 다른 사건은 또 다른 종류의 경험을 가져오기도 하지만, 그것은 결코 ‘성공’ 또는 ‘실패’라는 표지로 범주화할 수 없다.
7. 살아감이란 정밀화가 아니라 추상화 같은 것이기도 하다. 이것과 저것이 성공인가 실패인가의 경계를 그을 수 없는 무수한 색채들이 어우러져서 늘 새롭게 해석하고 만들어져야 하는 ‘여정 (journey)’이다. 어떤 것들은 우리의 통제 안에 있지만, 우리의 통제 밖에 있는 일들도 많다. 우리의 통제 너머에 있는 것들에 성공이나 실패, 또는 승자나 패자라는 가치를 부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다만, 자신에게 보다 의미로운 삶, 그리고 진정한 행복을 가져올 삶을 스스로 만들어가기 위한 부단한 용기와 결단, 그리고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이 필요할 뿐이다.
내가 규정하는 ‘실패’가 있다면, 외적 기준이 아니다. 이러한 용기와 결단을 작동시키지 않고 유일무이한 자신만의 인생을 ‘수동적인 삶’의 늪으로 자신을 집어넣는 것—이런 삶이 내게는 실패의 삶이다.
첫댓글 정밀화가 아니라 추상화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