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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슬픔을 받아 적다☆]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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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받아 적다]
최선묘 시집 / 종려나무시선 007 / 종려나무(2014.10.20) / 값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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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
최선묘
토드득 토드득
온 산에 꽃망울 터지는 소리
기다림으로 빚은 간절한 목소리
세상을 터트리는, 쩌렁쩌렁 울리는
저, 토드득 토드득
꽃으로 진 아이
최선묘
하늘에 별이 하나 또 늘었다
하늘을 나는 새는 날갯짓을 멈추었다
안개처럼 흩날리는 몸을 바람이 안아주고
눈꽃처럼 하얀 몸은 꽃이 되어 흩날린다
온 산이 술렁인다
눈 닿는 곳마다 꽃이다
이쁜 영혼 하나 꽃이 되고
새가 되고 눈물이 되었다고
문상 온 바람이 제자리를 맴돈다
떠난다는 건
영혼에게도 바람에게도 서러운 일이다
머뭇거린다는 것은
자꾸 뒤를 돌아본다는 것이다
차마, 돌아서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봄
최선묘
바람 쓸고 가는 논둑 위에
노란 솜방망이꽃
봄비를 맞고 있다
눈뜨고 만나는 첫 세상이 빗줄기라니
며칠만 참지 그랬어
조금 더 기다리지 그랬어
봄빛 차르르 쏟아지기도 전에
솜털 보송보송한 입술을 내밀고
파르르 떨고 있네
그러나 저 봄비
봄이 저만큼 도착했다는 틀림없는 소식이니
비 맞으면 어때 바람 불면 어때
틀림없이 봄이야!
나이 든다는 것
최선묘
온몸에 가뭄 깊어 먼지 폴썩인다
웃음도 눈물도 흐릿하여
나 언제, 무엇에 감동했었나
아무리 뒤척여도 잡히는 것은 시간의 잔해들뿐
어린아이처럼 맑고 밝은 노스님 뵈올 때면
나 그만큼 갔을 때
그리 웃어 지이다 꼭 그만큼 밝고 밝아 지이다
가만히 빌어보는데
어쩌나, 세월이 갉아 먹은
내 몸이었던 것들
귀 닫아 덜 듣고 눈 흐려 덜 보고
게을러진 다리를 쉬게 하는데
더는 엎질러질 것도 없는 빈 몸
이것은 가뭄이 아니고
간수하기 좋을 만큼 건조시키는
세월의 배려였던 것
그것이 알고 싶다
최선묘
아침마다 기지개를 켠다
그것이 알고 싶다
유행가 가사는 유치할수록 인기가 높다
그것이 알고 싶다
연속극은 갈수록 극으로 치닫는다
그것이 알고 싶다
말세라고 그러는데 세상이 왜 망하지 않는지
그것이 알고 싶다
악이 선을 이기는 이유를
떠나간 사랑이 내속에서 살아있는
그것이 알고 싶다
며느리밑씻개
최선묘
소리도 없도 향기도 없는 것이
다가가면 공격적이다
밭두렁을 무성한 덩굴로 휘감아
사람들 다가오지 못하게
자신을 지키고 산다
스스로를 낮추어
제 영역을 지키는
저것들의 생존방식을
사람이 어찌 짐작이나 하겠나
다시 봄날
최선묘
밤새 봄비 긋고 지나간다
마지막 찬 기운을 휘몰아 밤새
매화 꽃망울 터트린다
겨울바람 온전히 삭히며
새벽 속에 번지는 향기를 바라본다
자취 없이,
자취 없이도 이번 생을 건너가자고
그토록 여러 번 나를 타일렀는데
아무래도 지울 수 없는
그대에게 닿지 못하리
선정
최선묘
얼지 말라고 방에 들여놓은 호박을
여러 날 잊고 있었다
바닥에 닿았던 쪽이 상해서
와르르 속살이 쏟아진다
저렇게, 저렇게 제 안의 것들을 다 비운다
얼마나 더 오랫동안 비워야
한목숨 사라질까
마침내 가벼워질까
앞산 단풍나무도
몸 가벼워지는 가을이다
기다리는 마음
최선묘
아랫마을 할머니가 아프다고
침을 놓아달라는 전갈이다
뱃가죽이 등에 붙어 미라 같은 살가죽에
침 꽂는 시늉을 한다
흰 가래떡을 길게 뉘어놓고
떡가래처럼 늘어진 할머니
떡이 굳기 전에
봄이 먼저 딱딱하다
오늘 침 놓는 시늉만으로도
굳은 몸이 풀어지는
아아, 저 절절한 고독 한 덩어리
꽃
최선묘
빗속에는 천만가지 꽃씨가 들어 있어서
세상이 문득 환해진다
무심히 앉아서 꽃불을 밝히는 절집 마당에는
백구가 한가히 누워 있다
꽃이란 또 저렇게
강아지의 모습으로도 피어
세상이 온통 꽃밭이다
그대도 내게는 한 송이 꽃이다
꽃 공양
최선묘
부처님께 부탁하고 비웠던 절에 돌아오니
누가 다녀갔을까
꽃모종 한 무더기
들깨모종 한 무더기
오래 기다린 듯 고갤 푹 꺾고 있네
누구였을까?
내 사랑 이고 들고 온 사람
행복
최선묘
찾아갈 곳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찾아가 만날 사람이 있다면 더욱 행복하다
나의 벗이 거기 그렇게 있는 줄 알지만
행여 만나지지 않을 석만 같은 두려움은
지극한 그리움의 또 다른 모습이다
찾지 말고 멀리 두어
오직 짐작만으로 안부를 붇는
미련한 사랑이, 그립기도 한 가슴이,
여름 한 나절처럼 펄펄 끓는다
풍문
최선묘
등짝 흠씬 젖도록 절하고 또 절하네
잘 지내라고
많이 웃으라고
내가 보낸 기도가 다 거짓이었을까
그곳은 안녕하더라는 풍문이
비수처럼 가슴을 도려내는데
나도 잘 있다고
여기도 해가 뜨고
바람 알맞게 분다고
나는 또 부질 없는 안부를 적어보네
시도 때도 아닌 바람에도
화들짝 놀라며 창문을 여네
바람도 없는 한밤중에
쓴 맛
최선묘
시간이 갈수록 사람이 무서워진다
세상의 그늘을 밟고 사는 사람들이 찾아오는 산사
나는 늘 그들에게 빛을 말하지만
내 안의 그늘은 점점 깊어진다
누가 있어 내 그늘을 위로 받을 까
부처는 마냥 웃기만 하시는데
아무나 잡고 울고 싶은 날이 내게도 있는데
쓴맛도 보아야 인생이 깊어진다는 건
쓸 데 없는 말이라고
함부로 소리치고 싶은 날이 내게도 있는데
꽃천지
최선묘
빈 창문을 열고 뒤란 가득한 꽃들을 본다
꽃이야 세월이 데려온 인연이고
내게는 오직 하나 그가 꽃인데
저기 그득한 꽃들을 다 무엇하나
내 눈 앞의 세상에는
오직 허공만 남아
꽃인들 다 무엇이고하고
기억은 또 무엇하나
지나간 것들은 어떻게든 다 멀어지는 것을
꽃은 꽃대로 다시 피겠지
그는 그대로 피고 지겠지
끈
최선묘
세상은 수없이 많은 끈으로 묶여
미래로 끌려가고 있는 것이라는데
나는 무슨 끈으로 묶여
네가 있는 쪽으로 끌려가는 중인가
꿈속에서만 보이는 그 끈은
끊어지고 끊어져도 다시 이어져
나는 한없이 끌려가고 있는데
가도가도 네 모습은 보이지 않고
지금도 꿈속에서 네게로 가고 있다
세상이 모두 끌려간다는 그 끈이
어느 순간 후드득 끊어져
사랑도 증오도 모두 떨구고
나도 네게서 멀어지는 순간이 오면
그때 나는 무슨 끈을 잡고 울어야 하나
생각만으로도 온몸에 오스스 소름 돋네
편지
최선묘
편지함에 눈이 쌓였습니다
혹시나 하고 편지함을 열어보았습니다
손위로 눈이 쏟아집니다
손의 열기에 눈이 사르르 녹아 없어집니다
한참을 생각했습니다
추녀 어아래 편지함에 소식을 전한 것은
바람이었습니다
복풍입니다
북쪽 저 멀리 아니면 지구 반대쪽에서
왔을지도 모릅니다
아무 말이 없지만 짐작이 듭니다
보기도 전에 말하기도 전에
사라지는 말입니다
내가 말하기도 전에 떠나버린 사람입니다
허무
최선묘
마음 다치고 나니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다 무섭다
마음이 삶을 지탱하는 중심축이었던 것
가끔은 몸 따라 마음이 간다고 믿기도 했었는데
몸은 그저 마음을 옮기는 그릇이었던 것
마음 없는 몸이 빈 그릇이라는 걸
가슴 텅텅 울리는 오늘 다시 깨닫는다
오체투지
최선묘
신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엎드려야 한다
낮은 곳에 엎드리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는다
스스로 저를 낮춘 자에게 주는 세상의 보답이다
바람이 불면 깨진 함지박에
돌멩이 하나씩 안고 바람이 잦아들기를 기다린다는
제주 해녀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돌멩이를 올려놓아야만 비켜가는 바람이
삶의 고단함을 닮았구나 감탄하는데
돌을 안고도 비켜갈 수 없는 운명이 있어서
숨비 소리 고르던 해녀가 바다하고 한 몸이 되던 날도
바람은 불고 돌이 굴렀다는데
검은 고무 옷은 찢기어 나가고
팔십 두 살 해녀는
더 이상 돌을 안고 버티지 않아도 되는
홀가분한 몸으로 돌아갔다고
제부 바다가 상복을 입은 듯
허옇게 뒤집어져 한참을 울더라고
시 쓰기
최선묘
글을 쓴다는 건
내 마음의 지도를 꺼내보는 일이라고
점 하나 찍는 일도 함부로 하면 안 된다고
지도를 잘못 그리면
세상이 온통 뒤죽박죽이 되어버릴 테니
그렇지만 내가 시를 쓴다는 건
너에게로 지도를 그리는 일이어서
아이들 그림처럼
그렸다 지우고 그렸다 지우고
간혹 찢어버린 적도 있어서
날마다 밤마다
길 안에서 헤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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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백팔번뇌란 무엇인가?
번뇌와 망상의 경계는 어디쯤인가?
질문만 있고 대답은 없는 이번 생을
그대와 더불어 건너가면서
혹은 넘어지고 혹은 울음 터뜨리며
그러나 어쩌랴,
이 또한 갚아야 할 업장인 것을.
다시, 108편의 서투른 기록을 묶는다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가슴에
한 줄기 위로가 되기를 감히 바라면서
가을이 깊다.
쌍지암 뜨락에서 선 묘 합장
2014.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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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묘 詩集 [※슬픔을 받아 적다※]
[ 해설 ] -
참‘나’를 찾아가는 길
―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조용숙(시인)
1.
의봉(儀鳳) 원년(676)에 남해(南海) 법성사(法性寺)를 흔든 선문답이 있다.
어느 날 인종 스님이 《열반경》을 강의하고 있었다. 그때 거센 바람에 깃발이 펄럭이는 것을 본 두 스님이 서로 다투기 시작했다. 한 스님이 “바람이 움직이는 것이다”라고 말하자 다른 스님이 “아니다, 깃발이 움직이는 것이다”논쟁을 끝내기 위해서 강사인 인종 스님에게 해답을 구했으나 인종 스님조차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때 누군가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닙니다.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고 있을 뿐입니다” 행자들 속에 숨어있던 혜능이 모든 논쟁을 종식시킨다. 이는 마음이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에 가 있었기 때문에 바람이 움직인다거나 깃발이 움직인다는 논쟁이 가능했다는 뜻이다.
혜능은 마음이 향하고 있는 곳 즉 ‘지향성’에 대한 인식이 있었다. 지향성이란 객관적 대상이 존재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의식(시선)에 따라 의미(해석)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선문답은 실체가 없는 바람과 실체가 있는 깃발을 두고 벌이는 논쟁이면서 다시 마음과 몸의 논쟁으로 변주된다. 몸은 분명 실체가 있지만 마음은 실체가 없다. 하지만 몸을 움직이는 것은 마음이고, 마음은 또한 몸이 없으면 그 실체를 드러내지 못한다. 이 문제 또한 몸이라는 객관적 대상이 존재하지만 내가 무엇을 바라볼 것인가에 따라서 그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2.
‘若集滅道’라는 큰 타이틀로 구성된 선묘스님의 이번 시집은 “글을 쓰는 작업이 마음의 지도를 꺼내 보는 일인 동시에 너에게로 가는 지도를 그리는 일”인 것이다. 여기에서 마음의 지도를 꺼내 본다는 것은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우리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동시에 너에게로 가는 지도를 그린다”는 것은 현상 너머에 있는 ‘너’라고 할 수 있는 선묘 스님 자신을 만나러 가는 일이다.
그 길은 쉽게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라서 그렸다 지우기를 반복하는 작업인 동시에 길 속에서 헤매는 작업이다. 풀이해 보자면 이번 시집의 화두는 ‘내 안의 또 다른 나’라고 할 수 있는 참‘나’를 찾아가는 수행의 작업이다.
너무 먼 바다를 바라본 탓일까
갑자기 시력이 떨어져 사물이 겹쳐 보인다
없는 너를 허공에 세워두고
내가 내 눈을 속인 탓일까
너무 많은 네가 허공중에 가득하다
그 많은 중에서 진짜인 너는 어디 있는지
이제 나는 정말 너를 찾지 못하겠다
나도 찾지 못하겠다
-「나를 보다」중에서
구도의 길은 결국 참 ‘나’를 찾는 일이다. 그래서 시적 화자는 「나를 보다」에서 보이지않는 나를 찾기 위해 너무 골몰한 나머지 사물들이 겹쳐 보이기까지 한다.하지만 허공중에 가득한 나는 어떤 것이 참‘나’인지 알 수 없다. 그럴수록 ‘나’를 찾기 위한 갈증은 더욱 더 커져만 간다.
‘나’를 찾기 위한 열망은 「벤자민 버튼의 시계는 거꾸로 간다」에서도 드러난다. “거꾸로 가는 시계 없이도/뒤돌아서서 한사코 뛰어가면/거기, 너 서 있을까” 시간을 되돌려 보면 있을까 싶은 것이다. 또「끈」에서는 “세상은 수없이 많은 끈으로 묶여/미래로 끌려가고 있는 것이라는데//나는 무슨 끈으로 묶여/네가 있는 쪽으로 끌려가는 중인가”라고 질문한다. 또 「멀다」에서는 “이렇게 너한데 가고 있는데/그대 나의 기척을 짐작이나 하시”냐고 묻는다.
지나간 시절이 어두웠다고
뒤돌아 주먹질 하지 마라
현재란 내가 어제 지나온 길 위에 있으니
내일은 오늘의 기록일 뿐
한순간
한생각이
삶을 이끌어 가도록
신발 반듯하게 벗어라
정갈한 자리를 가려 앉아라
길은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
더러 풀이 돋고 숲이 우거졌다면
그것은 길에서 만나는 또 다른 도반인 것을
-「길을 찾아서」전문
위에 인용한「길을 찾아서」에서는 “지나간 시절이 어두웠다고/뒤돌아 주먹질 하지 마라//현재란 내가 어제 지나온 길 위에 있으니/내일은 오늘의 기록일뿐//한순간/한생각이/삶을 이끌어 가도록/신발 반듯하게 벗어라” 즉 모든 진리는 과거에 있는 것도 아니고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에 있는 것도 아니다.
참 진리는 ‘순간’ 즉 찰나에 있는 것. 따라서 그 찰나의 순간이 삶을 이끌어 가도록 신발을 반듯하게 신고 정갈한 자리를 가려 앉아 길을 만들어 가라는 것. 그런데 그 길에 “더러 풀이 돋고 숲이 우거졌다면/그것은 길에서 만나는 또 다른 도반”이라는 인식에서 시적 화자의 수행이 깊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3.
항상 마음이 문제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번뇌망상’을 다 떨쳐 버리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 숨 쉬는 동안에는 이 마음의 문제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서 「허무」라는 시에서는 “마음 다치고 나니/사는 것도 죽는 것도 다 무섭다”고 깊은 속내를 드러내더니「산책」에서는 “산다는 것은 그렇게/모두가 비슷한 무늬의 통증을 함께 앓는 것”이라는 깨달음에 이른다. 이러한 깨달음은 「세상 살아내기」에서 더 확대되어 나타난다.
나 혼자 우는 줄 알고
나 혼자 웃는 줄 알고
문밖에 가득한 세상의 소리 듣지 못하고
비명은 모두 내 것인 줄 알고
문득 고개 드니
그대 거기서 울고 계신 것을
-「세상 살아내기」중에서
처음에는 세상 모든 슬픔이 다 나에게로 향하는 것만 같다. 하지만 내 슬픔에 겨워 실컷 울고 나면 세상의 슬픔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래서 아파본 사람만이 타인의 아픔에 동참할 수 있는 너른 품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울어서 될 일이라면 비밀일 것도 없지
소리쳐 풀릴 한이라면 슬플 것도 없지
세상무엇을 불러와도 지워지지 않는
상처투성이의 마음자리를
어쩌나, 혼자서 쓸어보며
가슴에 일어나는 천둥소리를
못 들은 척 돌아눕는다
-「비밀」중에서
울어서 풀릴 슬픔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아무리 울고 아무리 소리쳐도 풀리지 않는 깊은 한과 슬픔도 있다. 그래서「비밀」에서는 “가슴에 일어나는 천둥소리를/못 들은 척 돌아눕는다” 세상 사람들은 도무지 듣지도 알지도 못할 이 비명을 그냥 비밀이라고 이름 붙여놓고 가슴 한켠에 묻어 둔다.
여자는 가슴을 찢으며 고함을 친다
내게는 다만 바람소리일 뿐
나의 허기는 이미 오래되었으므로
사랑 따위로 채울 수 없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 어찌 순서가 있으랴
가벼움과 무거움을 따지랴
우리가 함께 한 사람을 사모하여
마침내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면
그때 이 허기는 사라질 것인가
나눈다는 것은 마음을 다하지 못함이고
잊는다는 것은 기다림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리
그대와 나
우리는 잠깐 바람 부는 언덕을 함께 넘고 있을 뿐
언덕 너머 허허벌판을 짐작치 못하고
쓸데없는 꽃나무를 가꾸고 있는 것
울지 않는 새 한 마리 기르고 있는 것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내가 내 가슴을 다독이며 가리라
허기 따위 다시는 나를 범하지 못하도록
-「허기」전문
슬픔이나 아픔은 구도의 길에서 채워질 수 없는 ‘허기’로 변주되기도 한다. 결국 삶은 허기를 채우기 위한 과정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하지만 구도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허기진 배를 꽉 움켜쥐고 스스로의 가슴을 다독이며 가야 하는 것이다.
비우고 비워야 다시 채울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누구나 안다고 하지만
빈자리를 무엇으로 채울 지 알 수 없으니
나는 그만 나라는 그릇을 깨뜨려버리고 싶어서
빈 찻잔만 바라보는데
-「빈그릇처럼」중에서
“비우고 비워야 다시 채울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누구나 안다고 하지만//빈자리를 무엇으로 채울 지 알 수 없으니//나는 그만 나라는 그릇을 깨뜨려버리고 싶어서/빈 찻잔만 바라보다”보니 찻물이 아주 잘 우려져 있었던 것, 그 순간 찻물처럼 따라 버리지도 못하는 마음이 걱정인데 햇볕은 내 마음은 아랑곳없이 눈이 부시다.
4.
인생은 자기 존재의 실체를 발견하기 위한 과정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이 세상은 온통 질문들로 가득하다.
「질문」에서는 “세상은 온통 질문뿐이어서/해답을 구하는 발길이 분주”하다. 하지만 누가 해답을 제시해 줄 것인가에 대한 대답처럼「집으로 가는 길」에서는 “누가 누구에게 길을 일러줄 것이며/어찌 남의 손끝을 따라 길을 잡을 것인가”라고 말한다. 결국 깨달음이라는 것은 스스로 도를 구하여 본래의 자기를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자운암」에서는 “허공에 대숲을 부려 세속의 길을 지웠다/길이란 처음부터 없었던 것/머무는 그곳이 길이고 집이고/마음”이라고 말한다. 결국 우리가 그토록 찾던 ‘길’은 처음부터 없었다는 인식에 가 닿는다. 우리 눈에 보이는 실체로서의 길은 처음부터 없었고 다만 마음이 향한 곳이 길이고 집이다.
「기다리는 마음」에서는 ‘아래 마을 할머니가 아프다고/침을 놓아달라는 전갈’을 받고 달려가서 “뱃가죽이 등에 붙어 미라같은 살가죽에/침 꽂는 시늉을 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굳은 몸이 풀어진다. 시적 화자가 찾은 답은 보이는 실체라고 할 수 있는 현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에 대한 깨달음이다.
이러한 진술은 「마음자리」에서 “중요한 건 마음이지/세상의 시선이 아니다”로 표현되는가 하면「동안거」에서는 “오직 나의 화두는/존재의 거처를 묻고 묻는 것”이라고 진술한다. 종국에는 존재의 거처가 어디인가를 묻는 것이 인생이고 구도의 길이다. 그런데 그토록 찾아 헤매던 존재의 거처는 전혀 뜻하지 않은 곳에서 해답을 제시한다.
돌도 나무도 번쩍 들어 옮기는 포크레인 기사에게
조경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함부로 놓인 것들에게 마땅한 자리를 찾아주어
오래전부터 있던 것처럼 자리를 잡아주는 것이라고
-「어떤 화두」중에서
위에 인용한「어떤 화두」에서 말하는 존재의 거처는 “함부로 놓인 것들에게 마땅한 자리를 찾아주어/오래전부터 있던 것처럼 자리를 잡아주는” 작업이다. 이는 곧 모든 세상의 이치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사람 많은 곳에 가서 살거라
마을로 입양 시킨 강아지
새벽 예불 가는 발자국을 따라온다
울타리를 넘어 왔겠구나
밤새 귀 기울여 목탁 소리를 기다렸겠구나
찬 이슬 흠씬 젖으며 논길 밭길을 달렸겠구나
그립다는 것이
핏줄이라는 것이
녀석을 당기고 당겨 새벽을 열었구나
-「목탁 강아지」중에서
「목탁 강아지」에서는 사람 많은 곳에서 살라고 마을로 입양시킨 강아지가 새벽 예불 소리를 따라 어미를 찾아온다.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알고 찾아드는 강아지가 한소식을 전해주는 불법승인 것이다.
죽은 이의 영혼이 반딧불이라는데
비오는 날에도 빛나는 너는 누구냐
검은 옷을 입고 불을 밝힌 너는 누구냐
새날이 밝으면 한걸음 더 죽음에 다다르는 것
내가 누구며 어디서 왔는지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른다
잠깐씩 내가 나를 잊고 사는 것도
그래, 어쩌면 아름다운 일이지
스스로 빛난다는 건 아름다운 일이지
내 빛이 네게 닿아 환해 질 수 있다면
내가 나를 잊어도 아름다운 일이지
-「반딧불」전문
삶은 곧 죽음을 실천하는 또 다른 이름이다. 그래서 우리는 삶과 죽음이라는 커다란 숙제 앞에서 “내가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지” 끊임없이 질문한다.
다시 서두에서 나왔던 깃발과 바람의 논쟁을 종결시킨 ‘마음’으로 돌아가 보면, “내가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가”에 대한 물음은 나의 마음이 존재의 근원을 향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새로운 해답이 제시된다.
무문관의 편찬자 무문 혜개는 앞에서 제시한 법성사 에피소드에 대해서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마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라고 또 한 번 뒤집는다. 여기서 무문 혜개가 말한 ‘마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라는 말은 우리의 마음이 지향하고 있는 ‘고정된 마음’에 대한 부정이다.
처음부터 다시 정리하면 혜능의 첫 번째 부정은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에 고착되어 있는 집착을 깨워주기 위한 것으로 “바람도 깃발도 아니고 당신들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두 번째 부정은 혜능의 말에 따라 자신의 ‘마음’에 고착되어 있는 상태에 대한 부정이다. 그래서 무문은 “마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첫 번째 혜능의 부정과 두 번째 무문의 부정에는 뭔가에 집착하고 있는 마음의 활동성을 깨우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따라서 마음은 어느 한곳에 고착된 고정된 관념이 아니라 항상 깨어 움직여야 하는 활동성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시로 돌아오면 “내가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지” 즉 존재의 근원에 대한 물음을 살짝 던졌다가 곧바로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른다”로 앞의 진술을 부정한다.
“잠깐씩 내가 나를 잊고 사는 것도/그래, 어쩌면 아름다운 일이지” 따라서 이 시의 시적 화자는 존재의 근원에 집착해있던 마음의 활동성을 깨워낸다. 그리고 모든 경계와 집착을 끊어냈을 때 비로소 찾아드는 아름다움을 체험한다.
이러한 깨달음에 대해서 임제 스님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친척 권속을 만나면 친척 권속을 죽여라”라고 했다. 그래야만 비로소 해탈하여 어떤 것에도 구속받지 않고 일체의 모든 것에서 벗어난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의 핵심은 임제 스님이나, 혜능선사의 깨달음을 머리로 이해한다는 것과 그것을 몸소 체현하고 산다는 것 사이의 간극이다. 지식과 체험 사이의 간극은 등산지도 한 장으로 설악산을 눈으로 더듬어 가는 것과 몸소 차가운 눈보라를 맞으며 설악산을 한 발 한 발 오르는 것 사이의 차이이다.
이 시집 속에 담긴 선묘 스님의 깨달음은 등산 지도 한 장으로 설악산을 눈빛으로 오르는 것이 아니라 실제 체험에서 체화된 깨달음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오랜 시간을 두고 많은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쌓인 깨달음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높게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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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사의 글 ◆
‘若集滅道’라는 큰 타이틀로 구성된 선묘스님의 이번 시집은 “글을 쓰는 작업이 마음의 지도를 꺼내 보는 일인 동시에 너에게로 가는 지도를 그리는 일”인 것이다. 여기에서 마음의 지도를 꺼내 본다는 것은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우리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동시에 너에게로 가는 지도를 그린다”는 것은 현상 너머에 있는 ‘너’라고 할 수 있는 선묘 스님 자신을 만나러 가는 일이다.
그 길은 쉽게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라서 그렸다 지우기를 반복하는 작업인 동시에 길 속에서 헤매는 작업이다. 풀이해 보자면 이번 시집의 화두는 ‘내 안의 또 다른 나’라고 할 수 있는 참‘나’를 찾아가는 수행의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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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선묘 시인∥
∙ 2002년《문예운동》신인상
∙ 2003년《수필춘추》추천으로 문단에 나옴
∙ 1987년 서울문예대전 문인화 동상
∙ 2000년 개인전(예산문예회관)
∙ 2006년 안견미술대전 특별상
∙ 2007년 대한민국고불서예대전 삼체상 특선
∙ 2014년 한일서예교류전
∙ 2014년 아! 대한민국전
∙ 현재 쌍지암 주지
∙ 한국문인협회, 충남시인협회 회원
∙ 시집『목어를 찾아서』『부처 팔아 고기나 사먹을까』『집은멀다』
∙ 수필집『인연』『운명이 그대 어깨를 짚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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