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대숲 속에서 죽로차를 보고 오신옥씨가 내려오고 있다.
- 고운 선생이 읊은 바 있듯이 ‘깊숙이 숨겨진 호리병 속 별천지’라는 이곳에서 태어나 이곳에서만 50여 년을 살며 ‘녹차와 결혼한 여인’이 있다. 예로부터 화개장터에서 쌍계1교까지 이어진 십리벚꽃길을 연인이 손잡고 걸으면 결혼하게 된다는 ‘혼인길’로도 유명한 곳이지만, 정작 이 여인은 아직 처녀다. 친구들은 손주 볼 나이가 되었으니 어느새 노처녀의 반열에 올랐다. 그녀가 노처녀가 되도록 한 것이라고는 30여 년간 날마다 찻집 문을 열고, 녹차를 마시고, 녹차를 따라주고, 녹차를 만든 것뿐이다. 오직 녹차만을 사랑하며 녹차와 결혼한 유일한 지리산녀다.
쌍계사 주차장과 버스터미널이 있는 쌍계1교 앞에서 31년째 자리 잡은 찻집 ‘녹향다원’(綠香茶園)의 오신옥(51)씨. 그녀가 바로 1980년대 초반 지리산 최초의 녹찻집 ‘석천다원’의 문을 연 주인장이다. 20대 약관의 나이에 ‘지리산의 사랑방’을 만들고 녹차와 더불어 수많은 지리산 마니아들과 교류해 왔다. 그 모든 인연들의 중심고리는 이 찻집과 녹차였다.
- ▲ 지리산 첫 찻지 녹향다원 전경. 30년 전통의 찻집답게 낡은 건물 그대로다.
- 30년 동안 공식 인터뷰 한 번도 안 해
오신옥씨를 표현하는 말들 중에는 ‘백작약꽃 같은 여인’ 등의 멋진 수사도 있지만, 말 그대로 ‘지리산의 차여인’이자 ‘녹차미녀’다. 단 두 글자로 더 줄여 표현한다면 ‘다모’(茶母)라 부를 만하다. 지리산의 여신인 마고할미나 성모할매의 선녀 이미지가 나이 50세를 넘기면서 녹차와 화학적으로 결합된 화개동천의 산증인이기 때문이다. 이 골짜기에서 그녀가 따라주는 차를 마시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며, 그동안 쌍계사와 그 말사인 국사암과 칠불사 등에 연이 닿은 스님들 또한 그럴 것이고, 지리산 마니아뿐만이 아니라 일반 관광객들 또한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한자리에 앉아서 녹차만으로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인연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지리산의 유일무이한 일이지만, 되새겨보면 이 또한 전생의 업보가 분명해 보인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30년을 한결같이 잘 아는 사람과 잘 모르는 사람 가리지 않고 마주 앉아 눈을 맞추며 찻잔을 함께 들 수 있겠는가. 아마도 생각건대 전생에 지독히 외로웠으리란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리하여 이승에서는 이렇게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과 교류하며 얘기를 하고 정성들여 차를 내주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다모의 길을 선택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 ▲ 녹향다원은 한꺼번에 10명 이상이 앉을 수 없을 정도로 좁아서 오히려 더 아늑해 보인다.
- 하지만 또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군중 속의 고독’이란 말이 그녀를 휩싸고 있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정작 많은 사람들을 만나지만 사실은 언제나 외로우며, “녹차와 결혼했다”는 말 속에는 여전히 ‘노처녀’라는 그림자가 따라 붙기 때문이다. 한겨울 눈보라 속의 녹차꽃이나 직근의 뿌리처럼 스스로를 버티는 저력이 없었다면 벌써 몇 번이고 무너졌을 것이다. 그동안 집안이 세 번이나 망하고, 2남4녀의 장녀로서 결혼을 포기한 채 가계를 책임지면서도 그 누구에게 내색 하나 보이지 않고 홀로 오뚝이처럼 일어서는 그녀의 내공이 실로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녹향다원의 오신옥씨는 한사코 인터뷰를 거절했다. “그냥 차나 한 잔 하자”며 “그래도 오랜 인연인데 저녁에 앞집 ‘신사와 빈대떡’ 언니와 술이나 한 잔 하자”고 했다. 실제로 그녀는 지난 30년 동안 공식 인터뷰를 단 한 차례도 한 적이 없다. 그동안 17번의 하동 야생녹차 문화축제가 벌어지고 벚꽃 축제 등 해마다 지리산과 섬진강이 언론의 주목을 받고, 곳곳의 녹차 명가며 식당들이 지면과 방송을 도배하다시피 해도 단호히 거절해 왔다.
“뭐 대단한 뜻이 있는 것은 아니고요. 제가 처음 석천다원을 열 때부터 그런 다짐을 했거든요. 대나무 숲속에 뿌리 내리고 그 이슬을 받아먹고 자라는 차나무 죽로차처럼 소박하고 담백하게 살기 위해 거절했을 뿐이지요. 동네 사랑방으로서 나를 찾아오는 이들의 벗이 되고, 녹차를 아는 사람들과 교류하는 정도로만 살고 싶었지요. 번거로운 것도 싫고요. 그저 그 초심을 지키다보니 이렇게 됐을 뿐입니다.”
사실 이 글도 공식 인터뷰는 아니다. 지난 15년 동안 동년배로서의 인연과 나이 쉰을 넘기면서 조금은 부드러워진 그녀의 너른 품을 핑계 삼아 요즘 말로 문득 ‘들이댄 것’이다. 사진도 몰래 찍은 도촬에 가깝고, 아주 잠깐 대나무밭 아래 차나무를 보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느닷없이 찍은 것들이다. 물론 어느 정도의 내락은 받았지만 여전히 공식적인 사진촬영은 하지 못했다. 그녀의 ‘절친’ 언니이자 고향 선배인 바로 앞집 ‘신사와 빈대떡’의 이영재씨와 더불어 사흘 정도 술을 마시며 간신히 얻어낸 ‘암묵적 동의’에 불과한 것이다.
- 각종 개인적 풍문에도 이젠 초연해져
내가 처음 지리산에 왔을 때 애초의 석천다원은 녹향다원으로 간판을 바꿔 달고 있었다. 자주 그 앞을 지나다니며 기웃거리기도 했다. 우선 ‘녹향’(綠香)이라는 말이 참으로 이 골짜기와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고, 어쩐지 이 말이 매우 낯이 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 내가 대구에서 대학을 다닐 때 가끔 들르던 곳이 바로 녹향이었다. 그곳은 대구 문화예술계의 사랑방으로서, 1946년에 문을 연 우리나라 최초의 고전음악 감상실이었다. 이 사실을 돌이켜보니 지리산의 첫 찻집인 ‘석천다원의 후신’ 녹향과의 인연도 참으로 절묘했다.
“당시 석천다원의 이름을 바꿀 때 칠불사 스님이 처음엔 ‘반야다원’이라는 글귀를 주셨어요. 그런데 아무래도 너무 절간 같은 분위기가 나서 외람되게도 다시 한 번 청을 드렸더니 그 스님께서 ‘녹향’이라는 이름을 주셨지요.”
- ▲ 법정 스님의 글씨와 그림이 녹향다원 실내에 걸려 있다.
- 지금도 지리산에는 ‘향’자 돌림의 찻집이 있다. 그 원조가 녹향이고, 그 다음이 한때 잠깐 석천다원을 동업했던 고 조성기씨(조태연가의 아들)의 무향, 그리고 칠불사 올라가는 길 옆의 이호영 여사가 문을 연 관향이 있다. 녹향은 ‘푸른 향기’ 혹은 ‘녹차의 향기’라는 뜻이니 좋고, 무향 또한 차의 ‘향기를 어루만진다’는 뜻이고, 관향은 관음의 세계처럼 ‘향기를 본다’는 뜻이니 이들 모두 녹차의 시배지다운 수준들이 아닐 수 없다.물론 그 외의 수많은 찻집들의 이름 또한 화개동천에 잘 어울리는 언어적 풍경들이다.
내가 15년 전 처음 지리산에 들어와 살면서 알게 된 이들이 바로 이 골짜기 사람들이었다. 쌍계사 입구의 사찰국수로 유명한 백운장(단야식당)의 구월순 누님, 조태연가의 딸인 조연옥씨 부부(산녹차), 그녀의 오빠인 고 조성기씨(무향차), 그리고 비교적 어린 나이에 입산해 그림을 그리다 차도구를 만드는 목공예가 김용회씨와 화가 우성민씨, 그 이후에 사진작가 이창수씨 부부와 지금은 여행생활자로 알려진 유성룡씨, 몇 해 전 법복을 벗고 살림을 차린 법경 스님과 피아니스트 최선생 등이었다. 한동안 이 원주민과 외지인들이 어울려 차도 마시고 술도 마시며 뚜렷한 일도 없이 입만 달고 이 집 저 집 기웃거리며 얻어먹는 ‘공포의 지리산 마실단’ 생활을 하기도 했다.
나 또한 어쩌다 녹향다원에 들러 공짜 차를 얻어 마시기도 했는데, 그 값은 해마다 봄이 오면 한번쯤 갚기도 했다. 아직 봄이 오기도 전에 피어난 매화를 처음 본 곳이 바로 녹향다원이었기에, 다음해에 섬진강 첫 매화가 피면 맨 처음 그 꽃가지를 꺾어다 선물로 주기도 했다. 말하자면 섬진강 첫 매화와 녹차의 물물교환이었던 셈이다. 물론 당시의 나는 섬진강 하구의 문암마을이라는 곳에서 꽃가지 하나를 훔치는 꽃도둑이자 공짜 차를 얻어 마시는 무일푼의 한량이자 건달이었다. 되도록 돈을 벌지도 않고 쓰지도 않겠다던 패기가 철철 넘치고, 이 패기가 화개동천에서 잘 통하던 그 시절이 그립고 또 그리운 건 두 말할 여지도 없다.
- ▲ 발효차 한 사발과 댓잎 위의 녹차꽃.
- ▲ 문밖에서 바라본 녹향다원. 자신의 손은 오직 차를 만드는 데만 쓰여, 다른 사람과 악수도 안 한다는 오신옥씨가 직접 차를 만들고 있다.
- 사슴처럼 목이 긴 달걀형의 미인
그 무렵 녹향다원의 오신옥씨는 무척 도도해 보였다. 사슴처럼 목이 길고 달걀형의 미인인 데다 녹차의 기운이 잘 서려서인지 피부 또한 투명할 정도로 맑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목소리 또한 옥구슬이나 이슬방울처럼 투명했다. 그러나 이 도도하다는 표현은 우선 겉보기에 그렇거나 주변 사람들의 시샘어린 말 속에 서려 있었다는 것이 옳을 것이다.
당시의 소문은 “신옥이는 어릴 때부터 검판사가 아니면 시집을 안 가겠다더니 그래서 아직 못 가고 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벌써부터 흰색 그랜저를 모는 것으로 보아 돈을 엄청 많이 모아두었을 것이다”, “전국 곳곳에 유명인이나 잘 나가는 스님들이 모두 애인일 것이다”는 얘기 등이었다.
나 또한 그녀의 농담에 꼼짝 없이 당한 적이 있다. “언제 더불어 술이나 한 잔 하자”고 청하자 그녀는 대뜸 정색하고는 “저는요, 소주 반잔만 마셔도 다음날 온몸의 피를 다 바꿔야 합니다” 하는 것이었다. 속으로는 ‘과장이 좀 심하지만, 그래도 정말 술을 못 마시는구나’ 했다. 그런데 웬걸, 채 2주일도 지나지 않아 녹차축제 때 마주쳤는데 흰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술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화개장터에서 술을 잔뜩 마시고 집에 오는 길에 한 친구의 등이 너무 편하게 보여 반갑게 그의 등 뒤로 뛰어올랐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순간 이 친구가 운동화 끈을 맨다고 허리를 구부리는 바람에 아스팔트에 얼굴부터 처박은 것이다. 그날 밤 그 백옥 같던 얼굴이 무참히 짓이겨지고 참 오랫동안 고생을 했다. 이처럼 지리산의 처녀 다모가 마스크를 낀 채 한동안 녹차를 따르는 우스꽝스러운 날들도 있었던 것이다.
사실 술의 해독제 또는 중화제로는 녹차가 최고다. 이따금 앞집 언니와 둘이서만 술을 마시는데, 여전히 나이가 들어도 얼굴빛이 맑은 것을 보면 ‘녹차미인’임을 단박에 알아챌 수 있다. 여기서 미인이라 표현해서 또 세상의 뭇 남성들이 직접 확인하려고 파리 떼처럼 모여든다면 조금의 오해가 생길 수 있으니, 굳이 수정하자면 피부색이 훨씬 더 그렇다는 뜻이다.
요즘 취재를 핑계로 며칠 동안 그녀의 절친 언니인 ‘신사와 빈대떡’의 이영재씨와 더불어 술을 마시는 호사를 누렸다. ‘미각의 달인’인 이영재씨의 음식 솜씨는 된장국이며 파전이며 섬진강 참게탕 등으로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얼핏 남자 이름 같지만 그녀의 이름처럼 이 동네의 천재소리를 듣는 ‘영재’였다고 한다. 녹향다원의 맞은편 화개천변에 28년째인가 맛집을 운영하고 있으니 그 둘의 인연 또한 깊지 않을 수 없다.
어쩌다 술을 마시고 싶어도 동네방네 소문의 중심에 서있는 노처녀인지라 남들 몰래 앞집 언니와 마시게 된다. 말하자면 이영재씨는 오신옥씨의 술과 밥과 안주의 멘토이자 인생의 멘토인 것이다. 달빛 좋은 날이면 이웃마을에 사는 ‘여성산악계의 대모’ 남난희씨의 외딴집을 찾아가 대취하기도 하고, 작약꽃이 피었다는 핑계로 봄밤을 지새우기도 한다. 며칠 전 차를 마시다 택배로 도착한 물건을 보니 요즘은 부산의 금정산성 막걸리를 즐겨 마신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녹향다원에 들어가 보면 온갖 차도구와 다기 등으로 꽉 차 있다. 찻집의 오랜 연륜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런데 정작 차를 마실 공간은 비좁다. 다모와 마주 앉아 차를 마실 수 있는 자리 세 개와 다섯 명이 옹기종기 마실 수 있는 자리가 전부다. 버스정류장과 오래된 쌍계1교 근처의 목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있으니 주로 관광객들이 몰려와 선물용으로 찻잔 등의 다기와 차도구 등을 사간다. 찻집 건물은 오래된 채 그대로이며 내부마저 계절의 꽃들을 꽃아 놓는 것과 연륜이 빚어내는 분위기 말고는 일절 가꾸지 않는다.
다모의 옷차림 또한 그냥 입기 편한 것만 입고 화장도 거의 하지 않는다. 때로는 러닝 차림이기도 하고, 더울 때는 핫팬츠 차림이다. 개의치 않고 축제 때도 그냥 마실 다니듯 돌아다닌다. 지리산 여자들의 공통점이기도 한데, ‘나는 나다’ 라는 내면의 자존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래서 이따금 잘 모르는 사람들로부터는 ‘까칠하다’, ‘성깔 있다’는 소리도 듣는다. 손님이 마음에 안 들면 차를 팔지도 않고, 물건도 팔지 않는다.
다만, 손님이 오면 “녹차를 처음 마시는지요?” 먼저 물어보고, 그에 맞게 친절히 설명하며 녹차를 우려내고, 단골이면 몸 상태를 물어보고 덖은 녹차를 마실 것인지, 발효차를 마실 것인지 물어본다. 마치 약사가 처방하듯이 차를 내준다(실제로 그녀의 어머니는 찻집 바로 옆에서 몇 년 전까지 약국을 운영했다). 그리고는 반드시 그 맛과 느낌을 묻는다. 진하다고 대답하면 조금 더 연하게 내는 등 반드시 수정해준다. 그러나 그 이상은 없다. 그 정도만 해도 차인이자 다모로서 최상의 예를 갖춘 셈이기 때문이다. 이를 모르고 어설프게 품평하며 공격했다간 곧바로 당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겁먹을 필요는 없다. 마음은 한없이 여리고, 환하게 웃는 모습과 명랑한 목소리는 말 그대로 백만 불짜리다.
찻집 안을 살펴보면 유난히 눈길을 끄는 액자가 하나 있다. 법정 스님이 쓰고 그린 ‘차나 한 잔 드시고 가게’ 라는 작품이다. 글씨며 그림 또한 깐깐하면서도 다정다감했던 ‘무소유의 스님’답게 소박하고 담백하기 그지없다. ‘녹차의 맛 그대로’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바로 그 옆에는 칠불사 통광 큰스님의 힘찬 글씨 ‘반야다향’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가히 그녀의 내면이 드러나는 풍경이다.
- ▲ 지리산의 첫 찻집으로 문을 연 녹향다원의 오신옥씨가 “제발 사진 찍지 말라”며 손사래를 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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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손은 차 만지는 것… 악수도 안 해
녹향의 그녀는 그 누구와도 악수를 하지 않는다. 자신의 손은 녹차와 찻잔만을 만지는 것이라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간혹 오해도 받는다. 동기동창들의 손도 잡지 않는다. 다모다운 결벽증 아닌 결벽증이다. 요즘은 전국적으로 커피가 대세다보니 찻집마다 커피를 팔지 않을 수 없다. 관광객들은 커피만 찾는다. 그런데도 그녀는 요지부동이다. 오직 덖은 녹차와 발효차만 판다. 돈이 되고 안 되고는 이미 오래 전에 내려놓은 일이다.
“돈만 바라고 했으면 정말 소문 그대로 떼돈을 벌었겠지요. 예전에는 전국의 찻집들이 모두 저희 집에서 차와 다기, 차도구 등을 사 갔습니다. 거의 원가 그대로 줬지요. 녹차의 대중화가 목표였지, 돈만 버는 게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커피가 대세라 하더라도 지리산 화개골은 녹차의 원조입니다. 제가 잘 나서 그런 게 아니라 녹차만 팔아도 굶어죽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아니면 말구요. 잠시 녹차가 외면당하는 듯하지만, 또 돌아올 겁니다. 제가 평생 마셔 보고, 지금도 마시면서 날마다 감동하니까요. 처음 찻집 문을 열 때 대한민국에서 몇 명이나 녹차 맛을 알았겠습니까? 굳이 언론에 얼굴을 내밀지 않고도 살았고, 돈 벌려고 애쓰지도 않았고, 집안이 세 번 망해도 살았습니다. 녹차로 맺은 좋은 인연은 그 인연만으로도 내내 이어집니다.”
그녀는 단호할 때는 단호했고, 까칠할 때는 까칠했다. 다만 강함과 유함의 때를 분명히 했을 뿐이다. 나이 쉰을 넘기면서부터는 농담도 많이 늘 정도로 여유로워졌다. 처녀 다모에게 별의별 소문이 다 돌다보니 뭇남성들이 “왜 결혼은 안 하느냐? 눈이 그리 높으냐? 독신주의자냐?”는 등의 질문을 자주 받는다. 하지만 이제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다. “남편요? 외국에 돈 벌러 갔어요” 하거나 “녹차 밭에 일하러 갔지요” 하고 눙치기도 하고, “아이들요? 벌써 넷이에요. 다 학교 다니지요”라고 답하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사실 처녀가 아니라 결혼을 몇 번 했다더라, 아이가 넷이나 된다더라”는 등의 풍문이 다시 일기도 한다.
하지만 다모답게 그녀는 개의치 않는다. 다만 이 골짜기에서 태어나 잠시 부산에서 공부할 때 빼고는 내내 이곳에서 살았으니 마을공동체의 예의상 조금 더 조심할 뿐이다.
“제가 어렸을 때 청파노인이라는 분이 있었지요. 녹차제다의 전설적인 인물인데 그분의 제자가 강보살이었지요. 쌍계사의 스님들도 그 녹차를 주문해 마셨습니다. 조태연가나 화개제다, 쌍계제다 등도 초창기의 차인들로 존경하지요. 하지만 저는 언제나 청파노인과 강보살을 생각하며 해마다 차를 덖고 또 날마다 차를 마십니다. 제가 만드는 차는 이 찻집에서 팔기에도 모자랄 정도지요. 그래서 상표도 차통도 따로 없습니다.”
나는 그녀를 통해서 청파노인과 강보살 얘기를 처음 들었다. 그녀는 1980년 8월1일 발족한 하동 최초의 ‘녹산 다인회(綠山 茶人會)’의 9대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수많은 얘기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지만 좀체 남의 차에 대해 평가하지 않는다. 이따금 그녀가 외출할 일이 생기면 여동생 선옥씨가 이 찻집의 자리를 지키기도 한다.
만약에 15년 전의 나처럼 돈이 없거나 공짜로 차를 마시고 싶다면, 그녀가 좋아하는 매화나 모란꽃이나 백작약꽃, 도라지꽃 등 철마다 피어나는 꽃이나 좋은 책을 선물로 들고 가면 될지도 모른다. 물론 뒷일은 장담할 수 없다. 판단은 지리산의 다모인 그녀가 할 것이므로.
행여 삶이 팍팍할 때 ‘살과 뼈가 시원해지고, 겨드랑이에 서늘한 바람이 이는 것’을 실감하고 싶다면 쌍계사 입구 녹향다원으로 가서 지리산 처녀다모에게 녹차고문, 물고문을 한번 받아보라고 권하고 싶다.
- 각종 개인적 풍문에도 이젠 초연해져
첫댓글 제가 먼저 인터뷰한 그녀, 아직 저는 발표가 되지 않고 그사이 이시인이~ ㅜㅜ
좋은 취재거리 있으면 저 먼저 알려주세요~! ㅋㅋ
지나는길에 들러 차한잔 해야겠습니다...^^
지리산에 가면 가 볼 곳이 또 생겼네요.
녹향, 신사와 빈대떡.
날마다 보는 언니도 사진으로 보니 더 반갑넹~언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