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장열전]
<11> 강직한 성품에 도량이 넓은 김방경 장군
평생을 ‘멸사봉공’ 자세로 일관된 길을 걷다
나라 곳간 감독 때 재상 청탁도 거절, 제방쌓고 저수지 만들어 식수 해결
장군의 지혜에 백성들 크게 탄복, 안동김씨 중시조, 후손이 김구 선생
고려 후기의 무장이자 정치가인 김방경 장군의 신도비. 경북 안동시에 소재하고 있다.한국학 중앙연구원 사진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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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방경(金方慶·1212∼1300) 장군은 고려 후기의 무장이요 정치가다. 자는 본연(本然),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인데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후손이며 할아버지는 민성(敏成)이다. 안동부(安東府·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회곡동(檜谷洞)에서 아버지 병부상서(兵部尙書) 한림학사(翰林學士) 김효인(金孝印)과 어머니 금관국대부인(金官國大夫人) 금녕송씨(金寧宋氏) 사이의 3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잉태부터 성장 과정이 아주 남달랐다. 어머니가 그를 잉태했을 때의 일이다. 안개구름 속에 싸이는 꿈을 여러 차례 꾸게 되자 주위 사람들에게 “구름 기운(雲氣)이 항상 내 코와 입에 닿으니, 아이가 반드시 신선 가운데에서 점지해 나오려는 듯하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렇게 상서로움을 갖고 태어난 김방경은 일찍부터 할아버지의 보살핌을 받고 자랐다. 김방경은 어렸을 때 혹 자기 의사에 거슬리는 일이라도 있으면 길거리에 드러누워 울곤 했지만 소와 말이 그를 피해가니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고 한다.
1229년에 음서(蔭敍·공신이나 현직 당상관의 자손을 과거에 의하지 않고 관리로 채용하던 제도)로 산원 겸 식목녹사(散員兼式目錄事)에 임명돼 관직에 나아가기 시작했다. 당시 시중(侍中) 최종준(崔宗峻)은 충성스럽고 직언을 잘하는 방경의 성품을 대단히 아껴 큰일이 생기면 모두 그에게 맡겨 처리하게 했다.
여러 차례 자리를 옮겨 감찰어사에 올랐는데, 우창(右倉·고려 시대 국가행사에 소요되는 재화를 관리하던 관청)을 감독할 때는 재상(宰相)의 청탁이라 할지라도 단호히 거절했다. 하루는 재상이 권신(權臣·권세 있는 신하)에게 “지금 어사는 예전의 어사가 봉공(奉公·공무를 행하는 것)하는 것에 비하면 매우 부족하다”라고 비난했다. 방경이 이 말을 전해 듣고 대답하기를 “예전의 어사와 같도록 하려면 나도 그렇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나라의 창고를 쌓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에 사람들의 비위를 다 맞출 수는 없소이다”라고 자신의 공무집행 자세를 단호하고도 명확하게 밝혔다. 그러자 불평했던 재상도 크게 부끄러워했다.
견룡행수(牽龍行首·고려시대 궁궐을 지키던 숙위군의 우두머리)라는 중책을 맡았을 때의 일이다. 당시 금위군(禁衛軍·국왕의 친위군)이 권문세가(權門勢家)에 다투어 아부하느라고 숙위(宿衛·숙직하면서 지킴. 또는 그 사람)가 몹시 게을러졌다. 김방경이 이에 분노해 비록 병이 있어도 휴가를 청하지 않고 숙위를 더욱 철저히 했다.
1248년 서북면 병마판관에 부임했을 때 몽고가 침략해 오자 백성들과 함께 위도(葦島)로 들어갔다. 안북부(安北府·평안남도 안주)에 있는 위도에는 10여 리(里)나 되는 평탄하고 넓은 곳이 있었으나 바다의 조수 차가 심해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다. 이에 병마판관 김방경이 백성들을 시켜 제방을 쌓고 개간해 종자를 뿌리게 했다. 백성들이 처음에는 괴로워했으나 가을이 돼 크게 풍년이 들자 백성들은 그 힘으로 살아나게 됐다.
또 섬에는 우물이 없어 식수 확보가 큰 고통이었다. 더구나 물 길으러 간 주민들이 때때로 몽고군에게 사로잡혀 가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이에 김방경이 둑을 쌓아 빗물을 저장하는 못을 만들어 여름에는 빗물을 끌어들여 물을 긷고 겨울에는 얼음을 뜨게 하니 그 걱정이 드디어 사라지게 돼 백성들이 그의 지혜에 탄복했다.
김방경은 89세 되던 1300년에 병환으로 본댁(本宅)에서 생을 마감했다. 임종 시까지 아픔 없이 조용히 앉아서 세상을 떠났다. 장군의 유언(遺言)에 따라 안동 조부(祖父) 산소 근처에 장사(葬事)하게 됐다. 영구(靈柩)가 떠날 때는 삼관녹사(三官錄事) 80여 명이 모두 소복(素服·흰옷)을 하고 제사를 드리며 통곡 속에 저세상으로 떠나는 노장군을 하직했다.
그때 김방경을 미워하던 간신배(奸臣輩)들의 못된 방해로 예장(禮葬·예식을 갖추는 장례)을 치르지 못했는데 뒤에 왕(王)이 크게 후회했다. 충선왕(忠宣王)은 그에게 충렬왕과 같은 충렬(忠烈)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고려 제왕신위가 모셔진 신전에 함께 신위를 모셨다. 또 왕명(王命)으로 신도비(神道碑)를 세우도록 했다.
평생을 멸사봉공(滅私奉公)의 당당함으로 벼슬살이를 한 김방경 장군은 안동김씨의 중시조이며 임시정부 주석 백범(白凡) 김구(金九) 선생이 이분의 후손이니 충성의 혈통은 만세에 전하는 것이다. 국가를 위해 항몽(抗蒙)의 선두에서 만인을 통솔했던 장군의 업적이 이 시대에 더욱 새롭게 두드러진다.
<박희 한국문인협회 전통문학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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