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경을 넘나든 나무 이야기-9-대구 동산병원 청라언덕 사과나무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적에--” 이 땅에 나서, 이 땅에서 학교를 다닌 사람이라면 <이은상 작시, 박태준 작곡>의 <동무생각(思友)>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 안 불러 본이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노랫말에 나오는 청라언덕이란 곳이 어딜까? 궁금히 생각해 보지 안는 사람도 없을 줄 안다. 청라언덕, 한자로는 푸를 청(靑)에 담쟁이 라(蘿), 즉 담쟁이덩굴이 벽과 나무를 감싸고 올라가고 있는 언덕을 말하는 곳인데, 거기가 바로 지금 대구시 옛 동산병원(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 뒤편)이 있던 자그마한 언덕길을 말한다.
지명(地名)은 그 자리가 앉은 정위(定位)를 내포하고 있는데 여기서 동산(東山)은 옛날 대구 감영이 지금 달성공원 자리에 있을 때 현 위치가 동쪽에 있는 작은 산이기 때문에 이곳에 자리 잡은 작은 병원을 동산병원이라 했지만 나중 대구 감영이 대구 읍성 안 지금의 대구 중구 포정동으로 들어가 성을 쌓았을 때는 새 읍성에서 보면 서쪽에 자리한 산이기도 하다. 그래서 동산은 서산으로 되고 동산병원 바로 앞에 <서문시장>이 오랜 전통을 가지고 지금도 번성하고 있는 중이다.
거듭 말하지만 청라언덕은 동산에 있는 담쟁이덩굴 많은 언덕이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이 야트막한 산은 잡목이 욱어지고 사람과 짐승들의 시신을 처리하는 쓸모없는 산이라서 늘 구리구리한 냄새가 났기 때문에 구린내를 한문글자 구리 동(銅)자로 차용해서 구린내 나는 산 즉 동산(銅山)이라 한데에서 온 이름이라고 도 한다. 이 쓸모없는 산을 1899미국에서 건너온 선교사 <아담스>와 <존슨>이 산주인 달성 서 씨로부터 사들려 대구 최초의 서구식 병원 <제중원(濟衆院)>을 열고 이것이 뒤에 <동산병원>, <계명대 동산의료원>으로 오늘에 이르고. 한편 이때 교회와 신학대학과 선교사 사택들을 연달아 이 언덕에 짓게 된다.
그 후 이 언덕길을 넘나들던 인근 계성중하교 학생 <박태준>이 이웃 명신여학교의 백합 같은 한 여학생을 속으로만 사랑하게 되어 애태우던 이야기를 친구 시인 <이은상>에게 하게 되고 이에 노산 <이은상>은 “동무생각”이란 시로 짓고 <박태준>은 곡을 붙여 오늘에 명곡을 탄생시킨 곳이다, 지금 이 언덕에는 담쟁이덩굴은 잘 볼 수 없지만 작곡가 <박태준의 노래비>가 서 있다.
선교사들이 사들인 불모지인 동산에 교회, 병원, 학교 그리고 선교사들 살림집을 지을 때 마침 대구 읍성을 허물 때 나오는 성벽 돌을 가지고 와서 건물의 기초를 놓고 그 위에 붉은 벽돌로 한줄쌓기를 하고 지붕은 조선 기와를 언져서 동서양 절충식 새로운 건물을 만들어 낸 것이 오늘에 남아 대구 근대 문화유적으로 보존되고 있다. 세월이 흘러 <재중원>이 지금의 의료원으로 확장되어서 동산아래 서문시장 쪽으로 확장되어가자 옛 병원과 선교사들 사택(살림집)은 선교, 의료, 교육박물관으로 재개관되어 오늘에 이른다. 이어서 1996년 최초로 도시 담장허물기 운동이 대구에서 시작되자 이에 부응하고자 청라언덕의 담쟁이 무성하던 담장도 허물어 재정비가 된다.
한편 1899경 대구에 온 선교사들은 중국 산동 반도 쪽으로 먼저 들어간 선교사들이 현지인에게 보급한 사과나무가 잘 자라 선교와 산업으로도 큰 효과를 거두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듣는다. 사실 당시까지만 해도 대구지방에는 밤, 앵두, 대추와 약간의 토종사과가 있기는 했지만 경제수종으로 꼽을만한 나무들은 없었다.
최초의 의료기관 동산병원을 연 존슨 박사는 미국 미주리 주에서 “미주리”. “스미스사이다”. “레드베아밍” 이란 세 가지 사과품종 72 그루를 도입해 와서 병원 사택주위에 심었으나 모두 말라죽고 다만 “미주리” 이란 품종만 살아남아 그 씨앗이 떨어져 후손을 남겨 오늘에 이른다.
즉 이곳이 서양사과의 시배지가 된다. 그러나 도입종 사과나무는 조선 땅에서는 잘 자라지 못해서 수입 종 묘목과 신맛 나는 토종사과나무를 접붙인 나무를 교인들에게 나눠줘서 재배를 권했다한다. 그래서 대구 기독교인들은 선교사가 준 사과나무를 빈 땅에 심고, 얼마간의 경험으로 사과나무는 일교차가 심하고 무덥고 습한 대구분지에 적합하다는 사실을 체득하고 꾸준히 개량에 노력한 덕에 존슨의 시도는 성공하게 되었고 사과는 대구의 상징물이 된다.
청라언덕 옛 동산병원 입구에서 동무생각 노래비가 있는 호젓한 길을 걸어 지금의 동산병원 쪽으로 내려가는 끝 지점에 <스윗즈 주택>이란 대구유형문화제 24호로 지정 의료선교 박물관 간판이 붙은 오래된 기와집 마당에 여러 개의 지팡이를 짚고 힘겹게 선 나무 한 포기를 만나게 된다.
이 나무는 존슨 선교사가 이곳 사택 뜰에 심은 사과나무의 2세목이다. 원조 사과나무는 세월이 하도 오래되어 다 없어지고 원목의 DNA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나무이다. 이 나무도 원래자리가 여기가 아니라 원래는 대구 남산동 사택 정원에 있던 나무인데 동산병원 개원 100주년(1999)을 앞둔 1998.2.28일 현재 자리도 옮겨 심은 것이다.
이 나무는 수령 70세, 높이 7m, 수관 5m, 밑동둘레 0.9m의 노쇠한 나무이지만 지금도 해마다 방울토마토만한 사과가 열린다. 이 나무는 얼핏 봐도 곧 쓸어질듯 가슴높이에 내개의 버팀목. 상단에 피라미드형의 삼각 부목의 보호 속에 노년을 살고 있다. 대구시는 2015년 710만원이란 예산을 들어 20 여 일간 살균처리며 외과수술 등 정성을 보이고 있다. 또 언제 순명할지를 몰라 그 대비책으로 대구수목원에서 이 나무의 후계목(3세목) 5그루를 키워 그 주위에 심어 놨다.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20년 전까지만 해도 대구의 상징은 사과 아닌 능금이었다. 대구에서는 사과대신 능금이란 말을 쓴다. 지금도 과일 박스 표면에 <대구능금조합>이란 글씨가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은 온난화 등등 기후변화 때문에 대구와 경산 등지의 사과과수원은 도시로 공장부지로 또는 대추밭이나 연밭으로 변하고 극히 일부지역. 대구 평광동 일대에만 겨우 대구능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평광동 우재장씨는 지금도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홍옥사과 나무”를 기르고 있다고 자랑한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아무리 선교 활동이라도 그 선교사들은 그 젊은 나이에 목숨을 걸고 이국땅에 와서 전교 못지않게 사업과 문화를 전파한 투사이며 영웅이며 개혁가고 용감한 사람들이란 생각에 존경심을 바친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1817-1862, 미국의 사상가. 문학가. 월든 저자)가 “사과나무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와 놀랄 만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한말을 굳이 들지 않더라도 사과는 위대한 과일이고 우리 인류역사에 정말 큰 영향을 준 과일이다.
밀턴의 <실낙원>에서 에덴동산의 금단의 열매인 <아담과 이브의 사과>,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나 그리스 신화중의 <파리스의 사과>, 만류인력의 법칙의 <뉴턴의 사과>며 마지막으로 애국심의 표상인 <윌리엄 텔의 사과> 등등 사과는 이를 증명하는 그런 사과나무다. 하나 더 있다, 현대의 신품(神品)인 컴퓨터의 거물 애플사의 그 로고, 한입 베문 사과도--
그럼 이렇게 인류역사에 영향을 미친 사과나무의 원산지는 어딜까? 책에 따라서는 차이가 있으나 대개 유럽, 아시아, 그리고 북미 등이 원산지로 나오고 약 25종의 사과가 있다고 한다. 사과나무를 통칭하는 ‘말루스 도메스티카(Malus domestica)’의 원래 조상은 카자키스탄 사막지대에 자라는 야생사과나무라는 게 통설이다.
카자키스탄에서 동서로 전파되나가고 그것들이 현지의 토종과 교잡이 일어나고 인간의 선택 받았다고 보는 게 옳다. 인간이 사과을 이용했다기 보다 사과가 인간을 이용했을 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에는 시기을 알수없는 때 중국에서 작은 열매가 달리는 임금(林檎)이란 것이 전해져 온 것으로 추측되며 임금이란, 열매가 달고 새들이 이 나무숲에 모여들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고 내금(來檎)이라고도 했다, 또는 열매가 능금보다 약간 길고 큰 것이 중앙아시아- 인도 등을 거처 중국 진나라 때 건너왔는데 이것을 내(柰) 또는 빈파(頻婆)라 하기도 했고 이에 반해 재래종을 임금 또는 사과(沙果)로 통용 되었다는 설도 있다. 우리나라의 오늘날 사과는 앞서 말한 존슨 선교사가 미국 미주리 주에서 처음 가져올 거의 같은 그 당시 1890에 인천 일본 영사관 뜰에 관상용으로 묘목으로 심었다는 기록도 볼 수 있다.
세상을 어느 정도 살아온 연령대의 사람들은 사과에 대한 추억 한두 가지는 가지고 있을 것이다. 사과가 나오는 노래, 격언을 비롯하여-. 객담이지만 내가 동산병원 청라언덕의 그 사과나무를 친견하려 오가는 차안, 왕복 7시간 반 동안에 옛 생각이 차창을 스쳐갔다. 과수원집 아들인 초등학교 동창 준이는 방귀도 능금 방귀라고 놀리던 일. 농촌봉사활동 서클에서 만난 우리집 마님, 아내, 그녀의 소원은 과수원집 며느리 되는 것 이였다나. 여의치 못해. 과수원집 맏동서가 되었고. 그 덕에 품질 좋은 사과는 일 년 내내 보급 받고 있다. 이따금 가을 철 고향엘 가서 동생네 과수원에 들으면 보기는 좋지만 막상 바구니 들고 사과 따기 봉사는 한나절도 못하고 물러서며 과수원집 며느리 안 되길 참 잘했다고 하던 말 생각난다.
다음 훈풍의 오월 어느 날 나는 다시 동산병원 청라언덕을 찾아 <동무생각--너를 위해 노래 노래>도 목 터지게 싫겉 부르고 사과나무 2세목의 안부도 여쭙고. 그리고 기미년 만세길 90계단 내려가서 계산동 성당 이인성화백이 그린 그 감나무며, 내가 1980연대 극단 <상황>의 멤버로 출연했던 시극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을 열연했던 그 시, 애국시인 <이상화>가 살던 집 마당의 석류꽃도 다시 보고 올 것이다.
철학자 스피노자가 말했지. “비록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해도 나는 오늘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 나는 심는 데신 사연 있는 나무를 줄창 친견하려 다닐 것이다.
왜나면 내겐 나무 심을 땅이 없고, 나무는 스승이고 역사고 문화이니까-
<TIP 1> 조선시대 한양에도 능금 과수원이 있었다?
종로구 부암동 백사실 가는 길 한편에 <능금마을(뒷골)>이란 곳이 있다.
창의문 밖 이곳의 사과를 경임금(京林檎)이라 하여 질 좋고 맛좋은 사과생산지 였다, 이곳의 사과가 궁중 진상품으로 들어가기도 했고 특히 인조반정이 성공한 뒤 이곳 능금을 하사했다는 기록도 있다. 숙종 때에는 이곳에 논이 없고 밭으로만 살기에 능금나무 20만주를 심게 해서 온통 이 골짜기가 사과밭이었으나 세월에 의해 사라지고 지금은 카페 촌, 향수어린 <능금마을>이란 이름으로만 남아있고 해마다 울 너머로 보이는 앵두나무가 오월 한철을 자랑하고 이있는 곳이다.
<TIP 2>지금 우리나라에도 뉴턴의 사과나무가 살고 있다?
영국 캠브리지 트리니티 갈리지의 <뉴턴 사과나무> 4세목이 지금 대전 국립과학표준국(KRISS) 문리동과 행정동 앞에 살고 있다. 이나무의 형제들 또한 국립중앙과학관, 과천국립과학관, 서울대, 대전 과학고등학교 등 11개 기관에 4대손을 기증하여 유턴은 정신을 기리고 있다.
뉴턴이 만류인력을 발견한 원조 나무는 영국 린커셔의 벨톤 판에 있는 브라운 경의 관수원에 1대까지, 1937년 영국 이스트 모링 과실연구소에 보내져 접목되어 2대나무가 되었고, 1943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기술연구소로 옮겨지고 이 나무의 3그루가 한미과학기술협력의 상징으로 1978.10.3 <주한 미 국제개발처>를 통해 우리나라에 도입 되었는데 이것이 뉴튼사과나무의 3세목이다. 한국 대전에서 30여 년간 잘 자라는데 마지막 나무가 2006 죽었다, 이 나무의 후손인, 미리 준비한 4세 나무가 지금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뉴턴의 사과나무이다. 그 외 부산 부경대학교 용담켐퍼스 즉 옛 부산공고에도 일본 동창회에서 기증한 뉴턴 사과나무가 자라고 있고 경북 영주시 <사과연구소>와 <콩세계과학관> 뜰에도 뉴턴 사과나무 후손이 살고 있다. 모두 뉴턴의 과학정신을 본받으라는 말없는 상징 때문일 것이다.
첫댓글 대구사과, 성환참외 등 초등학교때 특산지생각이 납니다.
그래서 대구가 사과의 고장이 되었군요...^^
이렇게 좋은글을 자주 올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