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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남(錦南) 최부(崔溥 1454~1504)는 조선전기의 문신이다. 그는 일찍이 명을 받들어 제주도에 부임했으나 곧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급히 고향 나주로 귀향케 되었다. 제주(濟州) 출발후 풍랑에 휩쓸려 일행 42명이 표류,구동(甌東. 절강성 영가현)에 정박했다가 월남(越南)을 지나 연북(燕北.하북성 이북 일대)을 거쳐, 다섯달만에 그해 (1488년) 청파역(靑坡驛)에 도착하였다. 임금의 명으로 그의 일행이 보고 듣고 느낀일들을 기록했는데 《표해록(漂海錄)》3권에 있는 금남의 「견문잡록(見聞雜錄)」은 다음과 같다.
우두 외양(牛頭外洋)에서 도저소(桃渚所)까지는 160여 리, 도저소에서 영해현(寧海縣)까지는 400여 리인데, 모두 연해 지방의 궁벽한 땅이므로 객관(客館)과 역사(驛舍)는 없었습니다. 월계 순검사(越溪巡檢司)에 도착하니 비로소 포(鋪.郵亭)가 있었고, 영해현에 도착하니 비로소 백교역(白嶠驛)을 볼 수 있었습니다.
백교역에서 서점(西店)ㆍ연산(連山)ㆍ사명(四明)ㆍ거구(車廏)ㆍ요강(姚江)ㆍ조아(曹娥)ㆍ동관(東關)ㆍ봉래(蓬萊)ㆍ전청(錢淸)ㆍ서흥(西興)을 거쳐 항주부(杭州府)의 무림역(武林驛)에 이르렀는데, 도저소에서 이곳까지는 1500여 리였습니다. 또 무림역에서 오산(吳山)ㆍ장안(長安)ㆍ조림(皁林)ㆍ서수(西水)ㆍ평망(平望)ㆍ송릉(松陵)ㆍ고소(姑蘇)ㆍ석산(錫山)ㆍ비릉(毗陵)ㆍ운양(雲陽)을 거쳐 진강부(鎭江府)의 경구역(京口驛)에 이르렀는데, 항주에서 이곳까지는 1000여 리였습니다. 양자강을 지나서 양주부(揚州府)의 광릉역(廣陵驛)에 이르렀는데, 여기서부터는 길이 수로와 육로로 나누어졌습니다. 수로는, 소백(邵伯)ㆍ우성(盂城)ㆍ계수(界首)ㆍ안평(安平)ㆍ회음(淮陰)ㆍ청구(淸口)ㆍ도원(桃源)ㆍ고성(古城)ㆍ종오(鍾吾)ㆍ직하(直河)ㆍ하비(下邳)ㆍ신안(新安)ㆍ방촌(房村)ㆍ팽성(彭城)ㆍ협구(夾溝)ㆍ사정(泗停)ㆍ사하(沙河)ㆍ노교(魯橋)ㆍ남성(南城)ㆍ개하(開河)ㆍ안산(安山)ㆍ형문(荊門)ㆍ숭무(崇武)ㆍ청양(淸陽)ㆍ청원(淸源)ㆍ도구(渡口)ㆍ갑마영(甲馬營)ㆍ양가장(梁家莊)ㆍ안덕(安德)ㆍ양점(良店)ㆍ연와(連窩)ㆍ신교(新橋)ㆍ전하(磚河)ㆍ건녕(乾寧)ㆍ유하(流河)ㆍ봉신(奉新)ㆍ양청(楊靑)ㆍ양촌(楊村)ㆍ하서(河西)ㆍ화합(和合)을 거쳐서 통주(通州) 노하 수마역(潞河水馬驛)에 이르렀는데, 양주에서 이곳까지는 합계 3300여 리였습니다. 육로는, 대류(大柳)ㆍ지하(池河)ㆍ홍심(紅心)ㆍ호량(濠梁)ㆍ왕장(王莊)ㆍ고진(固鎭)ㆍ대점(大店)ㆍ수양(睢陽)ㆍ협기(夾㳰)ㆍ도산(桃山)ㆍ황택(黃澤)ㆍ이국(利國)ㆍ등양(滕陽)ㆍ계하(界河)ㆍ수성(邾城)ㆍ창평(昌平)ㆍ신가(新嘉)ㆍ신교(新橋)ㆍ동원구현(東原舊縣)ㆍ동성(銅城)ㆍ임산(荏山)ㆍ어구(魚丘)ㆍ대평(大平)ㆍ안덕(安德)ㆍ동광(東光)ㆍ부성(阜城)ㆍ낙성(樂城)ㆍ영해(瀛海)ㆍ근성(鄞城)ㆍ귀의(歸義)ㆍ분수(汾水)ㆍ탁록(涿鹿)을 거쳐서 고절역(固節驛)에 이르렀는데, 양주에서 이곳까지는 2500여 리였습니다.
수로에는 홍강(紅舡.江船)이 있고 육로에는 포마(鋪馬.驛馬)가 있었습니다. 무릇 왕래하는 사명(使命.왕명을 받은 사신)ㆍ공헌(貢獻.공물의 헌납)ㆍ상고(商賈)들은 모두 수로를 경유했으니, 만약 혹시 가뭄으로 인하여 갑하(閘河)의 물이 얕아서 배가 능히 통행할 수 없거나, 혹시 빨리 달려가서 급히 보고할 일이 있으면 육로를 경유했던 것입니다.
대개 양주부는 남경과 3개의 역(驛) 정도만큼 떨어진 거리로 가까웠고, 또 민(閩.福建省)과 절(浙.浙江省) 이남 지방에서도 모두 이 부(府.양주부)를 경유해 황도(皇都.북경)에 도달하게 되니, 그런 까닭으로 역로(驛路)의 구실이 매우 컸던 것입니다.
육로의 역(驛)은 거리가 60리 되기도 하고, 7, 80리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수로의 역은 무림(武林)에서 오산(吳山)까지 30리, 노하(潞河)에서 회동관(會同館)까지 40리였는데, 모두 수로 중의 육로인 까닭에 거리가 가까웠습니다. 그 외에는 혹은 6, 70리, 혹은 8, 90리, 혹은 100리가 넘기도 했으니, 거리가 매우 멀었습니다. 포(鋪.郵亭)의 거리 역시 10리, 혹은 2, 30리가 되기도 했습니다. 양주 이후로는, 물가에는 또 천(淺)을 6, 7리, 혹은 10리에 설치하여, 이수를 기록했습니다.
신의 경로는 우두 외양에서 도저소, 항주로 해서 북경의 회동관(會同館)에 이르렀으니, 대개 합계하면 6000여 리였습니다. 회동관에서 노하(潞河)ㆍ하점(夏店)ㆍ공락(公樂)ㆍ어양(漁陽)ㆍ양번(陽樊)ㆍ영제(永濟)ㆍ의풍(義豐)ㆍ칠가령(七家嶺)ㆍ난하(灤河)ㆍ노봉구(蘆峯口)ㆍ유관(楡關)ㆍ천안(遷安)ㆍ고령(高嶺)ㆍ사하(沙河)ㆍ동관(東關)ㆍ조가장(曹家莊)ㆍ연산도(連山島)ㆍ행아(杏兒)ㆍ소릉하(小凌河)ㆍ십삼산(十三山)ㆍ여양(閭陽)ㆍ광녕(廣寧)ㆍ고평(高平)ㆍ사령(沙嶺)ㆍ우가장(牛家莊)ㆍ해주재성(海州在城)ㆍ안산(鞍山)ㆍ요양(遼陽) 등 역을 거쳐 요동성에 이르렀는데, 요양역은 곧 요동 재성역(在城驛)이었습니다. 역은 거리가 3, 40리 또는 5, 60리였으니, 합계하면 1700여 리였습니다.
산해관에서 안쪽에는 10리마다 연대(煙臺)를 설치하여 봉화(烽火)를 갖췄고, 산해관을 지난 후에도 또 5리 간격으로 작은 돈대(墩臺)를 설치, 푯말을 세워서 이수를 기록했습니다. 요동에서 두관(頭官)ㆍ첨수(甜水)ㆍ통원보(通遠堡)ㆍ사리(斜里)ㆍ개주(開州)ㆍ탕참(湯站) 등 여러 참(站)을 거쳐 압록강까지는 또 300여 리가 되었습니다.
산해관에서 동쪽에는 또 기다란 원장(垣墻)을 쌓고 보자(堡子.堡壘)를 설치하여 야인(野人.여진족)을 방비하였습니다. 역체(驛遞)에는 모두 성이 있었으니 방어소(防禦所)와 똑같았습니다. 또 부(府)ㆍ주(州)ㆍ현(縣)을 설치하지 않고 위소(衛所)만 설치하고서 비록 역체의 관원 같은 것이라도 모두 군직(軍職)으로 이를 보충했던 것입니다. 신이 또 전해 듣건대, 삼차하(三汊河)에서부터 또 한 길이 있어, 해주위(海州衛)ㆍ서목성(西木城)ㆍ수안성(綉岸城)ㆍ앵나하둔(鶯拿河屯)ㆍ뇌방(牢房)ㆍ임자둔(林子屯)ㆍ독탑리둔(獨塔里屯)ㆍ임강하둔(林江河屯)ㆍ포로호둔(蒲蘆葫屯)을 거쳐서 압록강에 이르는데, 겨우 200여 리로서 역시 중대로(中大路)라 합니다. 길 왼편에 옛 성터가 있었는데, 황폐해 안시리(安市里)가 되었습니다. 시속에서, ‘고구려에서 당 나라 군사를 막았던 곳’이라고 전합니다. 명 나라 홍무(洪武) 연간에 또 기다란 원장을 쌓아서 오랑캐를 방어했는데, 머리 쪽이 진(秦)나라 장성(長城.만리장성)에 잇닿아 동쪽으로 비스듬히 나왔습니다.
삼차하에서 서쪽은 상세히 알 수 없지마는, 거기서 동쪽은 장정(長靜)ㆍ장녕(長寧)ㆍ장안(長安)ㆍ장승(長勝)ㆍ장영(長營)ㆍ정원(靜遠)ㆍ상유림(上楡林)ㆍ시방사(十方寺) 등 보(堡.부루)를 지나고, 또 동쪽으로 평락박보(平洛泊堡)를 거쳐서 낙양성(洛陽城)에 이르고, 또 북쪽으로 포하(蒲河)ㆍ의로현(懿路縣)ㆍ범하(凡河)ㆍ철령위(鐵寧衛)ㆍ요참(腰站) 등 성을 지나서 개원성(開原城)에 이르고, 또 동무순소성(東撫順所城)을 지나서 남쪽으로 동주(東州)ㆍ마은단(馬跟單)ㆍ청하(淸河)ㆍ함장(鹹場)ㆍ애양(靉陽)ㆍ십차구(十叉口) 등 보에 이르고, 또 압록강에 이르렀는데, 대개 수천여 리가 됩니다. 정현(定縣)ㆍ요좌(遼左) 25위(衛)의 순성(巡城)을 빙 둘러서 또 길이 있다고 하는데, 확실히 알 수는 없었습니다.
봉화현(奉化縣)에서 남쪽은 모두 해변인데, 고산(高山) 준령(峻嶺)과 기암(奇岩) 난석(亂石)이 많았고, 계간(溪澗)이 빙 둘러 있으며, 화초(花草)가 명미(明媚)했습니다. 그리고 대강(大江.양자강)에서 남쪽은 땅이 진흙과 웅덩이가 많았지만, 천태산(天台山)ㆍ사명산(四明山)ㆍ회계산(會稽山)ㆍ천목산(天目山)ㆍ천평산(天平山) 등 여러 산들이 그 사이에 서로 엉클어져 가로 뻗었습니다. 회하(淮河)에서 남쪽은 땅이 호수ㆍ진흙ㆍ습지(濕地)가 많았고 거기서 북쪽은 땅이 솟아오른 곳이 많았습니다. 조하(漕河)는 언덕이 평지보다 높았으므로 언덕을 터뜨리고 물이 흘러내려서 강하와 육지가 변천하게 되었습니다.
제령주(濟寧州)의 북쪽에 분수묘(分水廟)가 있었는데, 분수묘에서 남쪽은 물이 모두 남쪽으로 흐르고, 북쪽은 모두 북쪽으로 흘렀습니다. 무성현(武城縣)에서 북쪽은 땅이 진흙이 많았으니, 장로(長蘆) 등처는 개펄로서 염분이 많았으므로, 곧 ‘우공(禹貢)’의 이른바 ‘해빈(海濱)은 넓고 개펄진 땅이다.’라는 것입니다. 천진위(天津衛)에서 북쪽은 물이 또 모두 남쪽으로 흘러서 장가만(張家灣)까지 이르고 펀펀한 모래톱이 끝이 없었으며, 바람에 따라 유전(流轉)하고 있었습니다.
북경에 이르니, 천수산(天壽山) 등 여러 산들이 북쪽에서 빙 둘러 껴안고 있었으며, 그 서쪽 지맥(支脈)은 태항산(太行山)ㆍ왕옥산(王屋山) 등 여러 산에 죽 연하여 하남(河南)의 경계에 도달하고, 그 동쪽 지맥은 동쪽으로 달려서 삼하(三河)ㆍ계주(薊州)를 거쳐 옥전현(玉田縣)의 북쪽에 이르러선 연산(燕山)이 되고, 또 동쪽으로 풍윤현(豐潤縣)을 거쳐 진자진(榛子鎭)에 이르러선 또 나누어져 두 지맥이 되었습니다. 그 남쪽 지맥은 동쪽으로 난주(灤州)의 창려현(昌黎縣)을 지나서 갈석산(碣石山)에 이르러 바로 바다에 도달하고, 그 북쪽 지맥은 연산의 산맥에 죽 연하여 동쪽으로 천안(遷安)ㆍ영평(永平)을 거쳐서 무령(撫寧)의 동쪽에 이르러 바로 산해관에 도달했으며, 산해관 밖에서 또 산맥이 길게 연하여 동쪽으로 광녕위(廣寧衛)의 서북쪽에 이르러 의무려산(醫巫閭山)이 되었습니다.
북경에서 이곳에 이르기까지는 산들이 모두 민둥민둥하여 초목이 나지 않았습니다. 대강(大江. 양자강)에서 북쪽, 태항산에서 동쪽과 연산ㆍ의무려산에서 남쪽 수천 리 사이는 사방 들이 평탄하고 넓었습니다. 동쪽으로 큰 바다에 통하고 광녕(廣寧)의 동쪽과 해주위(海州衛)의 서쪽과 요동의 북쪽에 길게 뻗어 들어가서 큰 들판이 되었으니 곧 이른바 ‘학야(鶴野)’란 것입니다. 해주위의 동쪽에 비로소 안산(鞍山)이 있어, 얽혀서 남쪽으로 와서 천산(千山)이 되었습니다.
이 뒤부터는 중첩된 뭇 산봉우리들이 마치 죽 벌여 선창과 둘러친 병풍처럼 생겨 가지고 동남쪽으로 압록강에 도달하고, 동쪽으로 야인(野人)의 지경에 뻗어 들어갔습니다.
요동의 남쪽에 분수령(分水嶺)이 있으니, 분수령에서 북쪽은 물이 모두 북쪽으로 흐르고, 남쪽은 모두 남쪽으로 흘렀습니다. 석문령(石門嶺)에서 남쪽은 산에 수풀이 우거지고 시냇물이 맑았습니다.
북경에서 압록강까지는 그 사이에 명색이 하(河)라는 것이 모두 작은 내였으므로, 비가 오면 물이 불었다가 가물면 말랐는데, 난하(灤河)와 삼차하(三汊河)가 제일 크고, 그 다음은 백하(白河)ㆍ대릉하(大凌河)ㆍ소릉하(小凌河)ㆍ태자하(太子河)ㆍ팔도하(八渡河) 등 하수였습니다. 양자강에서 남쪽은 땅이 연한 돌이 많았으므로 육로는 모두 돌로 파서 깔았는데, 혹은 진창을 가로질러서 산등성이로 걸쳐 오르기도 했으니, 영해현(寧海縣)ㆍ봉화현(奉化縣) 등처와 같은 것이 많았습니다. 수로는 모두 돌을 다루어 홍문교(虹門橋)를 세우고 제방을 쌓아 막았으니, 오강현(吳江縣) 등처와 같은 것이 많았습니다.
회하(淮河)에서 북쪽은 한 곳에도 돌다리는 없었으며, 배로 부교(浮橋)를 놓기도 하고 나무다리를 대강 설치한 것도 있었습니다. 육지는 모래 섞인 먼지가 공중에 가득했습니다. 연산관(連山關) 이후부터는 조도(鳥道)가 선(線)과 같았으며, 거치른 풀이 사방에 우거지고 모기가 얼굴을 물어뜯으므로, 길가는 사람이 매우 고통스럽게 여겼습니다. 회하에서 남쪽은 수전(水田.논)이 많고 땅이 비옥하니, 벼와 메조[稻梁]가 천하게 됩니다. 서주(徐州)에서 북쪽은 수전이 없었으며, 요동에서 동쪽은 기후가 또 늦게 덥고 일찍 차므로 오곡(五穀)은 자라지 못하고 기장[黍]만 날 뿐입니다.
옛날에는 강소(江蘇)ㆍ절강(浙江)ㆍ복건(福建)에서 남쪽은 배로 화물을 운반, 모두 양자강으로 모여 가지고 바다에 떠서 노하(老河)에 도달, 북경에 이르게 되었는데, 호원(胡元.원나라)의 순제(順帝) 때에 와서 비로소 운하(運河)를 파서 제방을 쌓고 수문을 설치하여 조운(漕運)을 통하게 했습니다. 우리 영락(永樂) 연간에 이르러, 황하(黃河)를 터서 회하(淮河)로 끌어대고, 위하(衛河)를 인도하여 백하(白河)로 통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크게 수축(修築)을 가해서, 물이 쏟아지면 제방을 설치하여 이를 막고, 물이 막히면 제방을 쌓아 이를 가두고, 물이 얕으면 수문을 설치하여 이를 저장하고, 물이 급히 내려가면 홍(洪)을 설치하여 이를 늦추고, 물이 모이면 귀때[嘴]를 설치하여 이를 나누었습니다.
제방의 제도는 두 물을 한계로 해서 안팎의 양옆에 돌로 쌓아 제방을 만들고, 제방 위에는 2개의 돌기둥을 세우며, 돌기둥 위에는 마치 문에 가로지른 나무처럼 나무로 가로질러서, 1개의 큰 구멍을 뚫고, 또 나무기둥을 세워 가로지른 나무의 구멍에 맞춰서 수레바퀴처럼 돌도록 하고, 기둥 사이에 여기저기 구멍을 뚫고, 또 대나무를 쪼개 새끼를 만들어서, 배를 얽어 돌기둥에 매고는 짤막한 나무를 여기저기 있는 구멍에 세워서 이를 정지시키고 배를 당겨 올립니다. 제방에 올라가는 것은 거스르기 때문에 어렵고 제방에 내려가는 것은 따라가기 때문에 쉬웠습니다.
수문의 제도는 양 언덕에 돌 제방을 쌓고 가운데는 배 한 척을 지나갈 만하게 하고 또 넓은 판자로 그 흐름을 막아서 물을 모아 두는데, 판자의 많고 적음은 물의 깊고 얕음에 따라서 했습니다. 또 나무다리를 제방 위에 설치하여 사람들의 왕래를 통하게 하고, 또 2개의 기둥을 나무다리의 양옆에 세우기를 제방의 제도와 같이하여, 배가 이르면 그 다리를 거두어 치우고는 새끼로써 기둥에 매고, 넓은 판자를 당겨 올려서 그 흐름을 통하게 한 후에, 배를 당겨서 지나가게 하고 배가 지나가면 다시 이를 막았습니다.
홍(洪)의 제도도 양 언덕에 돌 제방을 쌓고는, 제방 위에 좁은 길을 닦고, 또 대나무로 만든 닻줄을 사용하여 이를 거슬러 당기니, 한 척의 배를 당기는 데는 인부는 100여 명이 들고 소는 10두(頭)가 들었는데, 제방이든 수문이든 홍(洪)이든 모두 관원이 있어, 인부와 소를 모아 놓고 배가 이르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방과 귀때도 모두 돌로 쌓았고, 또는 더러 목책(木柵)인 것도 있었습니다. 절강 진수(浙江鎭守)가 양왕(楊旺)을 시켜서 신 등을 황도(皇都)로 호송케 했습니다. 기한이 4월 1일까지인 고로 양왕은 신 등을 거느리고 밤낮으로 독촉하여 가는데, 바람이 뒤에서 불면 돛을 달고, 바람이 앞에서 불면 배를 당겼으며, 물이 얕으면 배를 버팀목으로 저었고, 물이 깊으면 노로 저었습니다.
역(驛)에서는 식량을 지급하고, 체운소(遞運所)에서는 배를 바꾸어 주었으니, 무릇 사명(使命)과 공헌(貢獻)이 왕래할 적에는 모두 그렇게 했습니다.
대저 100리의 사이에서도 오히려 풍속이 다른 법인데, 하물며 천하의 풍속이겠습니까? 풍속은 일률적으로 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략 양자강 한 강으로써 남북을 나누어서, 그 인가의 성쇠(盛衰)를 살핀다면, 양자강에서 남쪽은 여러 부(府)ㆍ성(城)과 현(縣)ㆍ위(衛) 중에 번화하고 웅장 화려하였으니, 말로써는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진(鎭)ㆍ순검사(巡檢司)ㆍ천호소(千戶所)ㆍ채(寨)ㆍ포(鋪 우정(郵亭))ㆍ리(里)ㆍ패(壩) 같은 것의 그 소재지 부근에는, 3, 4리나 7, 8리, 혹은 10여 리, 많은 경우에는 20여 리의 사이에 여염(閭閻 민가(民家))이 땅에 가득하고, 시사(市肆)가 길 좌우에 그들먹했으며, 누대(樓臺)는 잇따라 섰고 배는 죽 잇대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옥(珠玉)ㆍ금은(金銀)ㆍ보패(寶貝)의 산출과 도량(稻粱)ㆍ염철(鹽鐵)ㆍ어해(魚蠏)의 풍부함과 고양(羔羊)ㆍ아압(鵝鴨)ㆍ계돈(鷄豚)ㆍ여우(驢牛)의 축산과 송황(松皇)ㆍ등종(藤棕)ㆍ용안(龍眼)ㆍ여지(荔枝)ㆍ귤유(橘柚)의 물산은 천하에서 제일 갔으니, 옛날 사람이 강남(江南)을 번화한 장소[佳麗地]로 보았던 것은 이 때문입니다.
양자강에서 북쪽은 양주(楊州)ㆍ회안(淮安) 같은 곳과, 회하에서 북쪽은 서주(徐州)ㆍ제령(濟寧)ㆍ임청(臨淸) 같은 곳은 번화하고 풍부하기가 강남과 다름이 없었으며, 임청이 더욱 번화하였습니다. 그 외에 관부(官府)의 소재지 또한 간혹 번성한 곳이 있었습니다. 진(鎭)ㆍ채(寨)ㆍ역(驛)ㆍ포(鋪)ㆍ리(里)ㆍ집(集)ㆍ취(嘴)ㆍ창(廠)ㆍ만(灣)ㆍ오(塢)ㆍ갑(閘.수문)ㆍ패(壩)ㆍ천(遷) 같은 사이에는 인가가 그다지 번성하지 않고 마을도 소조했습니다. 통주(通州)에서 동쪽은 인가가 점점 적어졌습니다.
산해관을 지나서는 100리를 가서야 겨우 한 마을이 있었으나 초가집 두세 채에 지나지 않았으며, 오직 양ㆍ염소ㆍ닭ㆍ돼지ㆍ노새ㆍ낙타ㆍ소ㆍ말 등이 들판에 널려 있고, 버들ㆍ수양버들ㆍ뽕나무ㆍ대추나무가 무성할 뿐이었습니다. 팔도하(八渡河)에서 남쪽은 거칠고 텅 비어서 인가가 없었습니다.
그 제택(第宅)으로 말하면, 강남(江南.양자강 남쪽)은 기와를 덮고 벽돌을 깔았으며, 섬돌은 모두 연석(鍊石.다듬은 돌)을 사용하고, 또는 더러 돌 기둥을 세운 것도 있었는데 모두 굉장 화려했습니다. 강북(江北.양자강 북쪽)은 작은 초가집이 거의 그 절반을 차지했습니다.
그 복식(服飾)으로 말하면, 강남 사람들은 모두 넓고 큰 검은 속옷과 바지를 입었는데, 능라(綾羅)ㆍ견초(絹綃)ㆍ필단(匹緞)으로 옷을 지은 것이 많았습니다. 양모모(羊毛帽)ㆍ흑필단모(黑匹緞帽)ㆍ마미모(馬尾帽)를 쓰기도 하고, 건(巾)과 머리띠[帕]로 머리를 싸매기도 하고, 귀[角]가 없는 흑건(黑巾)을 쓰기도 했습니다. 관인(官人)은 사모(紗帽)를 쓰고, 상인(喪人)은 백포건(白布巾)을 쓰거나 추포건(麁布巾)을 쓰기도 했으며, 가죽신[皮鞋]을 신기도 하고, 가죽신[皮鞋]과 수여자목[䩺革]과 짚신[芒鞵]을 신기도 했으며, 또는 수건으로 다리를 감아서 버선을 대신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부녀의 입는 옷은 모두 오른쪽 섶을 왼쪽 섶의 위로 여미고[左袵] 장식이 있었는데, 영파부(寧波府)에서 남쪽은 옷섶이 둥글면서 길고 그 끝을 크게 하고 중간에는 화려한 장식을 둘렀으며, 북쪽은 옷섶이 둥글면서 뾰족하여 마치 소뿔처럼 생겼습니다. 혹은 관음관(觀音冠)을 쓰기도 했는데 금과 옥으로 장식하여 보는 사람의 눈을 현란케 했고, 비록 백발 노인일지라도 모두 귀고리를 달았습니다.
강북의 복식도 대개는 강남과 같았는데, 다만 강북에서는 짧고 좁은 흰 옷을 입기를 좋아하고, 가난한 사람 중에는 해진 옷을 입은 이가 10명에 3, 4명은 되었습니다. 부녀의 수식(首飾) 또한 둥글면서도 뾰족하여 닭의 부리와 같았습니다. 창주(滄洲)에서 북쪽은 여자의 옷섶이 오른쪽 섶을 왼쪽 섶의 위로 여미기도 하고, 혹은 왼쪽 섶을 오른쪽 섶의 위로 여미기도 했으나, 통주에서부터는 모두 왼쪽 섶을 오른쪽 섶의 위로 여미었습니다. 산해관에서 동쪽은 사람들이 모두 추솔 비루하고 의관은 남루했습니다.
해주ㆍ요동 등처에는 중국 사람, 우리나라 사람, 여진 사람이 고루 섞여 있었습니다. 석문령(石門嶺)에서 남쪽으로 압록강까지는 모두 우리나라에서 이주한 사람들이므로, 관과 의복과 말씨와 여자의 수식이 거의 우리나라 사람과 같았습니다.
인심과 풍속으로 말하면, 강남은 화순(和順)하여, 형제 혹은 당형제(堂兄弟.從兄弟)와 재종형제가 한 집에 같이 사는 사람이 있었으며, 오강현(吳江縣)에서 북쪽은 간혹 부자가 따로 사는 사람이 있으니, 사람들이 모두 이를 그르게 여겼습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가 승상(繩床)과 교의(交椅.의자)에 걸터앉아서 일을 하였습니다. 강북은 인심이 강한(强悍)하여, 산동에서 북쪽은 한집안이 서로 보호하지 못해 싸움 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며, 혹은 겁탈하는 도적이 사람을 죽이는 일도 많이 있었습니다. 산해관에서 동쪽은 사람들의 성품과 행실이 더욱 사나워서 오랑캐의 기풍이 많이 있었습니다.
또 강남 사람들은 글 읽는 것으로 직업을 삼으므로, 비록 마을의 어린아이나 진부(津夫)와 수부(水夫)일지라도 모두 문자를 알고 있었습니다. 신이 그 지방에 이르러 글자를 써서 그들에게 물으니, 무릇 산천의 고적과 토지의 연혁까지도 모두 알아서, 상세히 알려 주었습니다. 강북은 배우지 못한 사람이 많은 까닭으로, 신이 무엇을 물으려고 하면 모두 ‘나는 글자를 알지 못합니다.’고 하였으니, 곧 무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강남 사람들은 지소(池沼)ㆍ하천(河川)의 일로 직업을 삼으므로 거룻배에 종다래끼를 싣고, 그물과 통발로 물고기를 잡는 사람들이 떼를 지었는데, 강북은 제령부(濟寧府)의 남왕호(南旺湖) 등처 이외는 물고기 잡는 기구를 보지 못했습니다.
또 강남의 부녀들은 모두 문정(門庭) 밖에 나오지 않고, 혹은 주루(朱樓.화려한 누각)에 올라서 주렴(珠簾)을 걷고 밖의 것을 바라볼 뿐이며, 길을 다니거나 밖에서 일하는 자가 없었는데, 강북은 밭 매는 일이나 노 젓는 일들을 모두 부녀자들이 하였습니다. 서주(徐州)와 임청(臨淸) 같은 지방의 부녀들은 화려한 단장을 하고 자신을 팔아서 생활을 하는 것으로 풍속을 이루었습니다.
또 강남 사람은 관원이라 칭하는 자도 혹은 몸소 일을 하기도 하고, 졸도(卒徒)가 된 자도 호상(胡床)에 걸터앉기도 하였으며, 관디[冠帶]에는 무늬가 없고 존비(尊卑)에는 위차가 없었으니, 전혀 예절이 없는 듯하였습니다. 그러나 관아(官衙)에 있으면 위의(威儀)가 정숙(整肅)하고, 군중(軍中)에 있으면 호령이 엄절(嚴切)하고, 대오(隊伍)가 바르며 차례를 따르고 감히 시끄럽게 하지 못했습니다. 한번 호령이 내릴 때에, 한번 징 치는 소리를 들으면 원근에서 구름처럼 모였습니다. 그리고 뒤지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강북도 그러했습니다. 다만 산동(山東)에서 북쪽은 무릇 호령을 내릴 적엔 회초리로 때리지 않으면 능히 정돈시킬 수 없었습니다. 또 강남의 무기로는 창ㆍ칼ㆍ세모창[矛]ㆍ미륵창[戟]이 있고, 갑옷ㆍ투구ㆍ방패 등에는 모두 ‘용(勇)’ 자를 크게 썼습니다. 그러나 활과 화살, 전마(戰馬)는 없었습니다. 강북에는 궁전(弓箭)을 가진 사람이 있었고, 통주에서 동쪽과 요동 등지의 사람들은 모두 활 쏘고 말 달리는 일로 직업을 삼았는데, 화살대는 나무로 만들었습니다.
또 강남에서는 얼굴을 예쁘게 단장하기를 좋아하여 남녀가 모두 경렴(鏡奩.경대)ㆍ빗ㆍ빗치개ㆍ칫솔[刷牙] 등 물건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강북도 그러했습니다만, 다만 이런 물건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은 보지 못했습니다.
강남은 시중에서 금은(金銀)을 사용하고 강북은 동전(銅錢)을 사용했으며, 강남은 시아(市兒.장꾼의 비칭)가 주석으로 팔을 묶고, 강북은 시아가 납으로 코를 뚫었습니다. 강남은 농업ㆍ공업ㆍ상업에 힘을 썼는데, 강북은 놀고 먹는 무리가 많았습니다.
강남은 육로로 갈 때는 교자를 사용하고, 강북은 혹은 말을 타기도 하고 혹은 당나귀를 타기도 했습니다. 강남은 좋은 말이 없었는데, 강북은 말의 크기가 용(龍.8척 이상의 말)과 같았습니다. 강남은 사람이 죽으면, 거가 대족(巨家大族)으로서는 더러 사당[廟]과 정문(旌門)을 세우는 자가 있고, 상인(常人.平民)은 대개 관(棺)을 사용하되 매장하지 않고 물가에 버리니, 소흥부성(紹興府城) 가에는 백골이 흙더미를 이루었습니다. 강북은 양주 등지에서는 봉분을 만들었는데, 강가에 만들기도 하고 혹은 밭 가에나 마을 가운데에 만들기도 했습니다.
강남은 상제와 중이 더러 고기를 먹으나 훈채(葷菜. 파마늘 등 냄새나는 채소)는 먹지 않는데, 강북은 모두 고기를 먹고 훈채를 먹으니, 이것이 강남과 강북의 다른 점입니다. 그들의 동일한 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귀신을 숭상하고 도교(道敎)와 불교를 존숭하며, 말할 때는 반드시 손을 흔들고 성낼 때는 반드시 입을 찡그리면서 침을 뱉고, 음식은 거친 음식도 탁자(卓子)에 같이 차리고 그릇에 같이 담아서 번갈아 젓가락질을 해서 먹으며, 이[蟣蝨]는 반드시 입에 넣어서 씹고, 다듬잇돌과 방망이는 모두 돌을 사용하고, 맷돌을 돌릴 적에는 당나귀나 소를 부리며, 시점(市店)에는 주기(酒旗)를 세웁니다. 그리고 길 가는 사람은 짐을 메기는 해도 등에 짊어지거나 머리에 이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상업을 직업으로 삼기 때문에 비록 현달한 벼슬이나 문벌이 높은 사람일지라도 몸소 저울을 소매 속에 넣어서 하찮은 이익을 분석합니다. 그리고 관부(官府)의 평상 형벌은 대 조각으로 매를 때리고 손가락을 모아서 돌을 메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외에 산천의 요해지와 대사(臺榭.누각과 정자)의 고적으로서 유명한 것들은 비록 붓이 다 닳더라도 능히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신이 두루 관람한 것은 천재에 다시 만나기가 어려운 일입니다만, 상중에 있는 몸이기 때문에 감히 노닐면서 뛰어난 경치를 채취하지 못하고, 다만 배리(陪吏) 4인으로 하여금 날마다 표방(標榜)을 보고 지방을 묻도록 했으니, 한 가지를 계서(揭書)하면 만 가지를 누락시켰으므로, 그 대략만을 기록할 뿐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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