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월 3일 수요일 묵상 (룻 2:1-7)
[‘우연히’ 가지만, ‘마침 그때’ 찾아오시는 그리스도의 사랑!]
1.시작 기도
아버지, 주는 만물 위에 계시며 만물 안의 언약백성을 돌보시나이다.
감기증상에 시달리는 몸으로 인해 말씀 앞에 나오는 것도 더디었나이다.
말씀으로 사는 언약백성의 존재됨을 아는 자 되어 오늘도 아버지의 성실하심으로 말씀 앞에 엎드립니다.
주의 은혜로 사는 이 날, 주의 보혈로 정케 하사 새 영과 새 마음이 되게 하소서.
진리의 영을 부으사 진리를 알게 하소서.
창세전 아버지와 아들의 사귐 안에 있어 함께 하는 영광을 누리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 본문 내용
나오미는 유다 땅의 흉년을 피해 남편과 두 아들과 함께 모압땅으로 갔다.
그런데 거기에서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두 아들은 결혼하였으나 두 아들마저 죽었다.
나오미는 여호와께서 유다 땅에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을 듣고 유다로 돌아오려 할 때 두 며느리를 각기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하였다. 큰 며느리 오르바는 시어머니 나오미의 합리적인 설득에 그녀의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둘째 며느리 룻은 어머니 나오미와 완전히 연합하여 죽음 이외에 어머니를 떠나지 않겠다고 하며 끝내 나오미를 붙좇아 유다 땅으로 왔다.
사람들은 나오미를 반가이 대하며 ‘나오미’라 부르지만 그녀는 자신을 나오미가 아닌 ‘마라’로 부르라 한다.
유다를 떠날 때는 풍족했으나 모압에서 다 잃고 빈털터리가 되었으니 전능자가 자신을 심히 괴롭게 하셨다고 고백한다. 남편과 아들들을 잃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그녀는 지금 둘째 며느리 모압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보리 수확이 시작될 무렵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다.
그런데 베들레헴에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으로 아주 부유하고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보아스였다.(1절)
어느 날 룻이 나오미에게 들에 나가서 이삭이라도 주워오겠다고 하자 나오미는 그녀를 딸이라 부르며 그렇게 하라 하였다.(2절)
그래서 룻은 밭으로 나가 추숫꾼들 뒤를 따라 이삭을 줍기 시작했다. 그런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인 보아스의 밭에 이르렀다.(3절)
마침 그때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수확하는 자들에게 “여호와께서 그대들과 함께 하시기를 비네!”
라고 인사하자 그들도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주시기를 빕니다.”라고 인사하였다.(4절)
보아스가 일꾼들을 감독하는 자에게 저 젊은 여자는 누구인지 물었다.(5절)
그녀는 나오미와 함께 모압에서 온 모압여인인데, 오늘 아침에 자신에게 와서 일꾼들 뒤를 따라다니며 땅에 떨어진 이삭을 줍게 해달라고 요청하여서 허락해주었는데 그녀는 잠시 오두막에서 쉬는 것 말고는 여태껏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그가 대답했다.(6-7절)
만물 안에서의 삶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위해 힘써 일해야 한다.
아무것도 없이 빈털터리가 된 나오미와 함께 있는 룻은 먹을 것을 위해 들에나가 이삭이라도 줍겠다고 한다.
그런데 만물 위의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는 먼저 언약백성을 돌보신다.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이르게 된 룻과, ‘마침 그때’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그 밭에 이른 보아스의 운명적 만남이 이루어졌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신묘막측하다.
언약백성이라도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 일을 해야하는 현실이다. 그리고 이렇게 성실하게 살아가는 룻을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이르게 하시고 ‘마침 그때’ 보아스는 룻을 보게 한다.
만물 위의 하나님이 만물 안의 그 백성을 돌보시며 일하심을 본다.
성실한 일상 가운데 오직 믿음을 따라 행하는 언약백성에게 모든 것을 더해주심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앙한다는 것, 보이는 육신의 삶을 사는 아담적 실존의 인생들에게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것처럼 믿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1-3)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본 믿음의 선진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다.(히 11:27)
그 믿음을 따라 보이지 않는 만물위의 하나님에게서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아버지의 명령인 영생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죄사함과 영생의 구원과 새 언약을 성취하셨다.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딤후 1:10)
사망가운데 걸어가는 아담적 실존의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의 행동하심은 때가 되어 아들을 보내시고 십자가에 내어주셨다. 하나님을 떠난 육신으로 살아가는 모든 인간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은 사망의 세력을 무력화시킴이며 복음을 통해 생명으로 사는 하나님나라를 이 땅에서 누리게 하는 크신 일이다.
그리고 이제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그날에 그와 같을 소망을 품고 환난속에서 즐거워하며 인내하고 연단의 삶을 살아가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 5:1-5)
3. 나의 묵상
나는 만물 안에서의 삶속에 역사하시는 만물 위의 하나님에 대하여 무지하였다.
눈에 보이는 것들로 일희일비하며 땅의 것을 구하며 내 인생을 얻고자 하는 만물 안의 신앙인, 종교인이었다.
예수집 사람이 도어 보란듯한 믿음의 명문가를 꿈꾸며 교회안에서 열심을 다해 봉사하는 자였다.
나의 생각과 결정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되어 정죄하고 판단하는 우를 범하였다.
하나님 보시기에 어떤 자인가를 묻지 않고 내가 보는대로 판단하고 사는 자였다.
그런 나를 하나님이 심판하시고 아무것도 아닌 티끌과 재 가운데 두셨다.
아무것도 아니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자가 된 나를 용납하지 못하고 죄책하고 괴로워할 때 주님이 내게 오셨다.
야곱의 우물에서 물을 길어 마시나 다시 목마르는 아담적 실존의 삶의 한계를 드러내며 복음을 통해 생명으로 나아가는 생명의 복음을 진리로 계시하셨다.
‘우연히’ 찾아간 야곱의 우물에, ‘마침 그때’ 찾아오신 주님의 손길이 나를 붙들었던 것이다.
볼수 없는 하나님을 진리의 말씀 안에서 보며 사귐 가운데 거하는 은혜를 누리기 시작했다.
영적 기아에 허덕이며 하나님을 갈망하던 자에게 생수의 복음이 계시되어 날마다 말씀의 식탁에서 복음을 통해 생명으로 나아가는 믿음의 현주소를 발견한다.
구원자를 기다리는 믿음의 여인, 룻이 우연히 찾은 보아스의 밭에서 마침 그때 밭을 찾은 보아스와 만나게 하신 만물위의 하나님이 이제 나의 하나님이 되신다.
이제 날마다 아버지의 성실하심으로 말씀 앞에 나온다.
말씀 앞에서 나의 실체를 발견하며 옛사람의 잔재들을 처리한다.
무지한 채 만물 안에서 신앙하던 자, 만물위의 하나님을 만물 안에서 신앙하며 먹을것과 입을 것을 구하던 자였음을 회개한다.
이제 복음을 통해 생명으로 나아가는 진리가 계시되었으니 내가 구할 것은 오직 아버지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다. 그럴 때 모든 것을 더해주시는 하나님 아버지로 인하여 만물 안의 삶을 넉넉히 감당한다.
4. 묵상 기도
아버지, 참으로 무지하고 어리석은 자였나이다.
믿음이 무엇인지 모른 채 만물 안에서 신앙하며 사는 종교인에 불과한 자였나이다.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며 사는 한날의 인생이었나이다.
예수 믿고 교회를 다녀도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인생, 오히려 그들과 더 찌질하고 비참하였나이다.
그들과 다른 인생을 꿈꾸었으나 더 비참한 지경에 이르러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갈망하는 목마름을 주셨나이다.
그 목마름의 끝에 우연히 나간 야곱의 우물에 마침 그때 찾아오신 주님을 만났나이다.
믿음없이 사는 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만물 안에서 찾는 어리석은 자를 보게 하셨나이다.
아담적 실존으로 사는 믿음없음의 실체를 목격하며 십자가에 죽기에만 합당한 자인 것을 알게 하셨나이다.
그런 나를 대신하여 이미 십자가에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감당할 수 없는 감격으로 내게 다가왔나이다.
아버지와 아들되는 영적인 관계성은 알지만 그 존재법을 모르는 무지한 자에게 비로소 복음이 진리로 계시되었나이다.
온전한 통합복음을 듣고 아들의 생명 얻어 아들 안에 거하는 ‘쉐마’의 삶을 준행하는 자가 되게 하셨나이다.
이로써 날마다 내가 주안에 있고 주께서 하나님 안에 계신 믿음의 실체를 알게 하시나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은 이제 만물 안에서 ‘우연히’, 그리고 ‘마침 그때’ 찾아오시나이다.
내가 예측하지 못하는 그때에 오시는 주님이 이제 나의 주가 되어 날마다 환난속에서 즐거워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것으로 인내하며 연단하고 소망을 이루어 가게 하소서.
아버지, 파리로 떠나는 복음의 일꾼들을 붙드소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믿음의 걸음을 걷게 하소서.
우리에게 처헌 현실에 성실하게 하소서.
주께서 앞장서 가시며 상황을 다스리심을 믿나이다.
오늘도 생명 가운데 행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