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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회 해운대 달맞이길 미포-청사포-구덕포까지 2019. 9. 11.- 지산 박용구 매우 이른 아침 시간, 대구역 그리고 동대구역 그리고 경산역에서 부산으로 가는 무궁화호에 몸을 싣고 청도, 밀양, 삼량진, 구포를 지나 부산역에 도착한 것이 9시경이었고, 다시 1003번 직행 버스를 타고 해운대로 향했다. 4,50분이 걸려 이제는 기차가 다니지 않는 해운대 동해남부선 철도 길을 걷기로 하고 이리저리 골목을 돌아 철길을 찾았으나 철길은 공사 중으로 길을 막아 놓아 들어갈 수 없었다. 초고층 해운대힐스테이트위브를 바라보면서 망연자실하고 있는데 이런 경우에 까지 대비한 주반장의 용의주도(用意周到)한 계획으로 철길 위쪽 산속으로 난 산책길을 걷기로 했다. 미포에서 청사포 그리고 구덕포까지를 이은 삼포해안 길을 걷기로 한 것이다. 숲길이름이 ‘문탠로드(moontan road)‘인데 문은 달이고 텐은 선탠처럼 빛을 의미하여 달빛산책길을 영어식으로 표시해 놓은 것 같다. 좋은 우리말이 있는데 왜 이렇게 영어로 바뀌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일제 36년간 일본인들이 우리의 성과 이름을 바꾸고 우리말 우리글을 없애려고 그렇게 힘으로 억압하고 회유했으나, 그 힘든 기간 동안에도 안간힘을 다해 우리말을 지키려고 노력해왔고 끝내 지켜 왔는데 광복 70년이 넘은 지금 알게 모르게 우리 일상문화 쪽에 영어가 잠식해 오고 있고 생활문화가 서구화 아니 미국화 되어 가고 있는 것은 강제로 억지로 유도해 나가는 것보다 스스로 그렇게 하도록 이끌어온 미국문화의 위력을 보는 것 같아 가슴이 답답해진다.
숲은 우거져서 키 큰 해송이 상층림이 되어 있고 그 아래 작은 관목들이 자라고 있다. 여기저기 ’사스레피나무‘라는 이름표가 붙어있다. 이 나무는 난대수종인 동백나무 잎보다는 작은데 윤기가 반질반질한 잎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작은 줄기는 꽃꽂이 재료로 많이 이용된다. 이름이 왜 ’사스레피나무‘가 되었을까? 박상진교수의 우리나무이름사전에 “어린 사스레피나무의 껍질을 벗겨 씹어보면 약간 떫고 쓴 쌉싸래한 맛이 난다. ‘쌉싸래하다’라는 말이 ‘사스레’가 되고 껍질을 뜻하는 피(皮)가 붙어 사스레피나무가 되었다.”고 나와 있다. 그럴듯한 설명이다. 가는 길 중간 중간에 해운대 앞바다가 보이고 부산의 명물 오륙도가 보이는 전망이 좋은 곳에 ‘바다쉼터’가 만들어져 있다. 이곳에서 해운대 바다와 초고층 빌딩이 빽빽이 들어찬 도시를 보라보니 언제 저렇게 변해버렸는지 감회가 새롭다. 1973년 4월 해운대 국제 호텔로 신혼여행을 왔던 그때를 생각해 보면 천지가 개벽된 것 같다. 아무리 머릿속에 그때 모습을 그리며 상상해 봐도 그림이 잡히지 않는다. 크고 장대하게 발전한 것인지? 한편으로는 옛것을 찾을 수 없는 아쉬움이 남는다.
<참석하신 분은 박용구 교수님 주경숙, 이사장님, 권영호, 강성희, 정화섭, 안현정, 김미경 , 박귀련, 강희숙, 박건애, 조성자, 박명희, 백영란, 배경애, 조문주, 김주영, 주동일 등 18분입니다. (존칭생략)>
풋풋한 가을 냄새를 풍기는 숲길을 다시 걸어갔으나 아래쪽에 보이는 철길로 나가는 산책길은 공사 중이라는 안내판만 붙여 있고 전부 막아 놓았다. 좁아진 윗길 쪽으로 조금 올라가니 큰길이 나오고 옛날 동네 모습이 조금 남아있는 청사포 마을이 나왔다. 이곳에서 구덕포 쪽으로 걸어서 다리위에서 바다를 내려다 볼 수 있도록 중국의 유리잔도처럼 만들어 놓은 ‘청사포다릿돌전망대’에 올라 둘러보았다. 유리판 깔린 바닥과 듬성듬성 구멍이 뚫려있는 철재판 아래로 내려다보는데 까마득한 아래에서 바위에 부딪쳐 부서지는 파도에 아찔한 기분이 든다. 이제 구덕포 쪽으로 가다가 바닷가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기로 되어 있다. 이름이 ‘배가왕칼국수’ 식당이라고 하는 곳인데 바다가 보이는 언덕위에 철재로 지어진 식당 안에는 사람들이 빼곡하다. 콩국수, 칼국수, 모두 7000원 만두 5000원 그리고 김밥도 곁들어 나왔다. 한 식탁에 4명씩 앉아 국수 3그릇에 김밥 하나, 만두 하나를 배불리 나누어 먹었다. 주동일 선생이 막걸리를 가져와 한잔씩 나누어 마시니 더 즐거운 점심식사가 되었다. 밖으로 나와 송도해수욕장 모래사장으로 들어왔다. 햇볕은 따갑지만 바람은 벌써 가을 냄새가 느껴진다. 해수욕장은 문을 닫았지만 밀려오는 잔잔한 파도의 하얀 포말이 모래사장을 적신다. 다들 신발을 벗고 바닷물에 발을 담그면서 즐거워하는 모습이 영락없는 철들지 않은 소녀들 같다. 이럴 때 무슨 근심걱정이 마음속에 남아 있겠는가? 시원한 가을바람에 파란 하늘과 푸른 파도는 마음속에 천국을 짓기에 충분하였다. 오늘 모처럼 우리와 같이한 주동일 선생님과 산길을 걸으면서 불교에 대해 물어보았다. 기독교에 주기도문처럼 불교에서도 주기도문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는가? 아마 반야심경을 말 할 수 있다고 했다. 금강반야바라밀다심경을 줄여서 반야심경이리고 하는데 불교에 중요한 경전인 금강경을 압축하여 놓은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불교가 인도에서 기원하였으나 힌두교에 밀려 동아시아 쪽으로 전파되면서 북쪽으로는 중국, 만주, 우리나라로 들어온 대승불교와 남쪽으로는 스리랑카, 태국, 말레이시아로 들어온 소승불교가 있다는데 대승불교는 ‘나만 깨우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같이 깨우치게 하는 것’이며 소승불교는 ‘나만을 깨우치는데 중점을 둔다’고 했다. 석가모니가 가르쳐준 것 가운데 업과 윤회와 해탈이 있다. 생사고락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해탈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윤회에서 벗어나 열반의 경지로 들어서게 된다고 했다. 좀 더 깊이 있는 이야길 듣기를 기대하면서 돌아가는 신해운대 역 대합실에서 회원들과 함께 불교 특강을 들었다. 다들 심취하여 경청하였다. 불심은 우리들의 문화 속에 그리고 오랜 생활 속에 같이 녹아있어서 불교신자가 아니어도 흥미가 있어 재미있게 들었으며 느낌을 같이 했다. 바닷가에서 미세먼지 없는 깨끗한 공기를 마시면서 파도가 춤추고 모래사장위에 빨간 잠자리가 날고 있는 이곳은 바로 평화 그 자체였다. 다시 언덕위에 있는 찻집으로 가서 아메리카노 한잔을 마시며 창밖 바다를 바라보면서 다들 이야기꽃을 피우거나 묵상에 잠기어 시간을 보냈다. 4시 30분이 다된 시간에 신해운대 역까지 택시를 타고 가기로 하고 길을 나섰다. 택시가 많지 않아 카카오톡으로 신청하여 차를 잡아타고 기차역에 도착하니 서울 가는 새마을 기차가 5시 36분이었는데 기다리는 동안 주동일 선생님의 불교 특강을 청해 듣고 기차를 타고 대구로 돌아왔다. 즐겁고 재미있는 하루가 되었다.
------------------ 문탠로드를 빠져나오며- 박진규
달이 저 많은 사스레피나무 가는 가지마다 마른 솔잎들을 촘촘히 걸어 놓았다 달빛인양 지난 밤 바람에 우수수 쏟아진 그리움들 산책자들은 젖은 내면을 한 장씩 달빛에 태우며 만조처럼 차오른 심연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러면 이곳이 너무 단조가락이어서 탈이라는 듯 동해남부선 기차가 한바탕 지나간다 그때 마다 묵정밭의 무들이 허연 목을 내밀고 실뿌리로 흙을 움켜쥐었다는 것을 해국(海菊)은 왜 가파른 해변 언덕에만 다닥다닥 피었는지 아찔한 각도에서 빚어지는 어떤 황홀을 막 지나온 듯 연보라 꽃잎들은 성한 것이 없다 강풍주의보가 내려진 청사포 절벽을 떨며 기어갈 때 아슬아슬한 정착지를 떠나지 못한 무화과나무 잎을 몽땅 떨어뜨린 채 마지막 열매를 붙잡고 있다 그렇게 지쳐 다시 꽃 피는 것일까 누구나 문탠로드를 미끄덩하고 빠져나와 그믐처럼 시작한다
*문텐로드(Moontan Road) 대한팔경의 하나인 해운대 달맞이 언덕에서 달빛의 기운을 받으며 산책을 즐길수 있도록 조성된 2.2km의 산책로
<참고자료> 일체개고(一切皆苦)라는 말은 존재하는 모든 것은 괴로움이자 고통이라는 뜻입니다. 태어나는 것이 고통이며, 늙어감이 고통이며, 병드는 것이 고통이며, 죽는 것 또한 고통입니다. 슬픔·우울·절망 또한 고통이며, 미워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고통이며,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도 고통이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고통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살아가는 동안 겪는 그 모든 것들이 고통인 것입니다. 고통이 생기는 이유는 욕망 때문입니다. 삶에 대한 욕망, 쾌락에 대한 욕망, 권력에 대한 욕망 등 우리가 가진 모든 욕망은 업(業)을 쌓게 되고 이 업에 의해 사람은 윤회를 계속하게 됩니다. 석가모니는 이런 욕망을 없애 더 이상 업을 짓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간혹 일체개고(一切皆苦) 대신 열반적정(涅槃寂靜)을 이야기하기도 하는데 열반적정이란 번뇌의 불길이 사라진 열반의 고요한 경지를 의미합니다. 석가모니는 자신이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자신의 제자들에게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해가니 게으르지 말고 정진하라"라고 말했을 정도로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는 가르침을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제행무상이란 말뜻은 모든 것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이어지는 일시적이고 변화의 연속으로써 고정불변하는 실체는 없다는 것입니다. 물질적 요소는 지수화풍(地水火風)의 4가지 요소들이 서로 모여서 만들어져서 잠시 머물다 다시 흩어져 사라져버리며, 생각이나 정신 또한 만들어져 잠시 머물다 변하고 사라지는 과정을 연속하므로 항상 고정되어 있는 것은 없습니다. 사람의 몸도 태어나서 늙고 병들고 죽어버리는 과정의 연속입니다. 사람들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삶은 구르다 멈추는 수레의 바퀴가 한 바퀴도 채 돌지 않고 멈추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바퀴가 멈추는 그 순간 우리의 생명은 사라져 버리고 또다시 업에 의해 변화된 삶이 계속 이어지는 윤회의 연속인 것입니다. 그래서 석가모니는 마지막까지 업에 의한 윤회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 게으르지 말고 정진하라고 당부의 말을 한 것입니다. 영원한 자아(自我)나 영혼은 없다는 뜻의 제법무아(諸法無我)는 석가모니가 기존의 우파니샤드 철학을 비판하면서 만들어낸 원칙입니다. 앞에서 본 것처럼 우파니샤드는 사람들의 개별적 자아인 아트만(Atman)과 우주의 보편적 질서인 브라만(Brahman)은 똑같다고 했으며 이 동일성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해탈이라고 했습니다. 우파니샤드의 입장에서 볼 때 한 사람의 자아는 다른 모든 것들보다도 더 귀중한 존재입니다. 이렇게 귀중한 자아는 바로 순수한 의식인 자신의 영혼입니다. 영혼은 태어날 때 육체 속에 있으며 죽을 때에는 육체를 떠나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영혼이 있는 사람들 개개인은 생각과 행동의 결과에 의해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석가모니는 이런 자아나 영혼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가장 헛된 생각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믿음 때문에 자아에 대한 집착을 일으키고, 집착은 또 욕망을 낳고, 이 욕망은 다시 고통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자아에 대한 집착을 없애기 위해 과감하게 자아란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아마도 우파니샤드의 가르침을 거부하여 사람들이 자신의 사상에 귀를 기울여 주기를 기대한 것일지도 모르죠. 사람들이 자아에 집착하는 이유는 사람을 구성하는 요소들 뒤에 뭔가 다른 실체가 있지 않을까 추측하기 때문입니다. 석가모니는 영원한 자아인 영혼을 찾으려고 해봤지만 결국 사람은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이라는 오온(五蘊)이 일시적으로 조합되어 있을 뿐임을 깨달았습니다. 오온은 매순간마다 변하므로 오온으로 이루어진 것도 변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한 순간도 동일한 상태로 남아있지 못하며 생성되었다가 곧 사라져버리는 생명의 연속체에 불과하다고 한 것입니다. |
첫댓글 [시지중닭 님의 댓글입니다.]
부끄럽습니다.
선생님!
그리고 여러분들꼐 송구합니다.
재미난 여정을 깔끔하게 정리해 주시고,
불교의 요점을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주 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