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7월 26일 온고을교회 수요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은 삼십 개》
슥 11:9~14
<흥부의 매품팔이>
흥부전에 나오는 이야깁니다.
어느날 흥부에게 매품팔이 기회가 왔습니다.
이웃마을 ‘김부자’가 모함을 당하여 관가에 가서 곤장 30대를 맞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김부자가 병환중이어서 매품팔이를 구했습니다.
누가 대신 가서 30대를 맞고 오면, 30냥을 주겠다 했습니다.
흥부가 그 돈을 받고 곤장을 맞으러 갔는데, 재수 없는 사람은 뒤로자빠져도 코가 깨진다고,
하필 그때 나라에서 죄수들을 방면하라는 영이 떨어졌습니다.
흥부는 매도 못 맞고 터덜터덜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매품 30냥” 매우 흥미롭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은 삼십 개”입니다. 뭔가 연결의 끈이 보이지요?
조선시대 30냥이면 어떤 돈인지, 흥부의 넋두리 속에 나타납니다.
“열냥으로 고기를 사고, 열냥으로 쌀을 사 포식하고, 열냥으로 암송아지를 사겠다”
역산해 보면, 서른냥이면 암송아지 세 마리값입니다. 그렇지요?
요즘 송아지 시세를 알아봤습니다. 암송아지는 3백만 원, 숫송아지는 4백만 원 가량입니다.
조선시대 열냥이면 요즘 시세로 3백만 원입니다. 서른 냥이면 9백만 원입니다.
우와~ 대단히 큰 돈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 “은 삼십 개”는 “은 삼십 세겔”이라는 뜻입니다.
은 한 세겔은 4 데나리온입니다. 그러면, 은 삼십 세겔은 120 데나리온입니다.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요즘 보통인부 노임을 10만 원으로 쳐봅시다.
120데나리온은 1,200만 원입니다. 오늘 설교의 “은 삼십 개”는 대략 1,200만원입니다.
공교롭게도 흥부전에 나오는 ‘삼십 냥’과 비슷한 금액입니다.
오늘 설교가 잘 풀릴 조짐이 보입니다.☻
조선시대 서른 냥, 오늘 본문의 “은 삼십 개” 결코 작은 돈은 아닙니다.
그렇지요?
<성경에 흐르는 은 삼십 세겔이라는 주제>
성경을 유심히 읽다 보면, “은 삼십 개”라는 주제가 이어지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은 삼십 개”를 찾아서 같이 여행을 떠나보겠습니다.
☞ 첫 번째 갈 곳은 출애굽기입니다.
출 21:32 “소가 만일 남종이나 여종을 받으면 소 임자가 은 삼십 세겔을 그의 상전에게
줄 것이요 소는 돌로 쳐서 죽일지니”
소에 받혀서 남종, 여종, 종이 죽었습니다.
소 임자는 “은 삼십 세겔”로 보상하는데, 그 돈을 누구에게 줍니까?
그의 상전에게 줄 것이요
노예의 삶 참 서럽습니다. 노예의 가족이 있어도 ‘상전’이 보상금을 받습니다.
☞ 두 번째는 호세아서로 갑니다.
호 3:2 “내가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그를 사고”
호세아 선지자는 참 처량한 선지자입니다.
아내 고멜이 바람나서 집을 나갔는데, 하나님이 돈을 싸들고 가서 찾아오라 하십니다.
여러분 같으면 가겠습니까? 그러나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합니다.
얼마만큼의 돈을 준비합니까? ~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 입니다.
은 열다섯은 금방 알겠습니다. 보리 한 호멜 반이 얼마인지 따져보겠습니다.
호세아 선지자 당시 보리 한 호멜은 10세겔이었습니다. 한 호멜 반이면 15세겔입니다.
여기서도 호세아 선지자가 치른 아내 고멜의 몸값은 “은 삼십 개”입니다.
☞ 세 번째가 오늘 본문 스가랴서입니다. 11장 12절입니다.
(12절)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품삯을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그만두라 그들이 곧 은 삼십 개를 달아서 내 품삯을 삼은지라”
3번째 은 삼십 개의 주제가 오늘 본문 스가랴 서에 나왔습니다.
☞ “은 삼십 개”가 어떤 의미인지 스가랴 서에 집중해 보겠습니다.
<스가랴 선지자의 품삯>
지난 주 수요일 설교 제목이 “잡혀 죽을 양떼를 먹이라” 기억하십니까?
패역한 백성, 이스라엘을 목양하라고 하나님이 스가랴 선지자에게 명령하셨습니다.(4절)
독특한 명령입니다. 보통 선지자에게는 하나님이 말씀을 전하라고, 말씀을 주십니다.
그런데, 스가랴 선지자에게는 “양떼를 먹이라”하십니다. 말씀을 전할 뿐 아니라,
스가랴 선지자에게는 “제사장과 왕의 역할도 해라!” 이 뜻입니다.
왜요? 지금 이스라엘의 왕, 제사장, 선지자들 모두 타락했습니다.
양떼를 제대로 먹일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오죽 답답하셨으면, 선지자에게 양떼를 먹이라 하셨겠습니까?
스가랴 선지자는 말씀에 순종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목양했습니다.
열심히 이스라엘 백성을 돌봤습니다.
하나님이 버린 패역한 백성, 이스라엘을 성실히 먹이고 입히고 재웠습니다.
그리고 나서 스가랴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 말이 12절입니다. 다시 보겠습니다.
(12절)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품삯을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그만두라 그들이 곧 은 삼십 개를 달아서 내 품삯을 삼은지라”
“줄테면 주고, 안 줘도 무방하다” 그랬더니 어떻게 합니까?
그들이 곧 은 삼십 개를 달아서 내 품삯을 삼은지라
은 삼십이 작은 돈은 아니지만, 왜 하필 ‘은 삼십 개’입니까?
안 줘도 된다는데, 굳이 은 삼십개를 준 이스라엘 백성의 ‘저의’가 무엇입니까?
13절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13절)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 바 그 삯을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 개를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
은 삼십 개를 스가랴 선지자에게 지불하는 유다 백성를 보고, 하나님이 화가 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 바
그들이 하나님을 헤아렸습니다. 하나님을 돈으로 환산했다는 뜻입니다. 패역이지요!
어떻게 하나님을 헤아리고, 하나님의 품삯으로 은 삼십개를 내놓습니까?
차라리 안 준 것만 못합니다. 하나님이 토기장이의 밭에 그것을 버리라고 하십니다.
☞ 토기장이가 나왔습니다. 토기장이도 흥미로운 성경의 한 주제입니다.
<토기장이와 토기장이의 밭>
토기장이는 말 그대로 토기를 만드는 사람입니다.
이사야 서와 예레미야 서에서 토기장이는 하나님으로 비유됩니다.
토기를 어떤 모양으로 만드느냐는 토기장이의 뜻에 달려있습니다.
이 세상을 어떻게 만드느냐? 해달별을 어디에 배치하느냐? 사람을 어떻게 만드느냐?
하나님이 결정권을 갖고 계십니다.
토기장이는 흙을 쓰는 장인입니다. 토기장이에게는 토기를 빚어낼 점토가 필요합니다.
토기장이는 토기를 빚어낼 알맞은 흙을 찾아 나섭니다.
알맞은 토양을 발견하면 그 밭을 삽니다. 농사짓기 위함이 아니라 흙을 쓰기 위해섭니다.
토기장의 밭을 한번 연상해 보십시다. 토기장이가 흙을 파다가 써서 토굴이 뚫려 있습니다.
보기에 매우 흉측한 밭입니다. 알맞은 흙만을 골라서 파다보니 토굴이 꾸불꾸불합니다.
한번 들어가면 되돌아나오기도 어려운 토굴입니다. 그것이 토기장이의 밭입니다.
하나님이 스가랴 선지자에게 “그 삯을 토기장이에게 던지라”(13절)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토기장이의 밭에 던지라는 뜻입니다.
☞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 이어지고 있는 중입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유다백성을 목양했습니다.
목동은 2개의 도구를 씁니다. 지팡이와 막대기입니다.
막대기는 늑대나 이리를 쫓을 때 씁니다.
지팡이는 구덩이에 빠진 양을 구할 때 양의 뿔을 걸어 잡아당길 때 습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유다 백성을 목양할 때, 은총이라는 막대기와 연합이라는 지팡이를 씁니다.
그런데 이들이 너무 패역하니, 은총이라는 막대기를 꺾어버렸습니다.
끝내 연합이라는 지팡이도 꺾어 버립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유다 백성이 자기에게 준 은 삼십개는 토기장이의 밭에 던지고,
두 개의 지팡이를 꺾어버립니다.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14절) “내가 또 연합이라 하는 둘째 막대기를 꺾었으니 이는 유다와 이스라엘 형제의 의리를 끊으려 함이었느니라”
☞ 은 삼십과 토기장이의 밭 주제는 어디까지 흘러갑니까? 그렇습니다. 가룟유다입니다.
<예수님도 은 삼십에 거래가 되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합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는 대제사장에게 예수님을 밀고합니다.
그때 유다가 받은 돈이 바로 “은 삼십 세겔”입니다. 오호 통제라!
유다에게 은 삼십 세겔을 건넨 대제사장들, 참으로 발칙합니다. 그렇지요?
여기서 왜 하필 은 삼십 세겔이냐고요?
가룟유다는 대제사장으로부터 은 삼십을 받고 그때야 자기의 잘못을 깨닫습니다.
여기서 만일 대제사장이 은 삼십 세겔이 아니라 10세겔이나 아니면 50세겔을 받았다면?
유다는 자기의 죄를 깨우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딱’ 받고 보니 은 삼십 세겔입니다.
유다가 구약에서 의미하는 은 삼십을 모를 리 없습니다.
스가랴서에 나오는 유다 백성이 스가랴 선지자에게 은 삼십 개를 지불했던 패역함!
유다는 소름이 돋았을 겁니다.
그 돈, 은 삼십 세겔을 제사장 앞에 패대기칩니다. 그리고 극단적인 선택을 합니다.
대제사장들, 이 돈을 어떻게 합니까?
대제사장들, 가룟유다가 던지고 간 그 돈, 은 삼십 세겔, “이 돈을 어떻게 처리할까?”
이 돈은 성전 금고에 둠이 옳지 않다.
마 27:7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참, 기가 막힙니다. 토기장의 밭, 그렇지않아도 공동묘지 같아요, 으스스 합니다.
유대인들은 시체를 석관에 넣어 토굴, 바위굴에 안장하거든요!
스가랴 시대, 하나님이 은 삼십으로 평가받았습니다.
예수님 시대, 예수님이 은 삼십으로 평가받았습니다.
누가 이렇게 평가했습니까?
회개하지 않고, 복음을 거부한 패역한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입니다.
지금은 어때요?
지금도 주님을 거부하는 사람들, 은 삼십 세겔, ‘한국 돈 1천만 원’
하나님을 우습게 알고, 하나님을 망령되게 일컫습니다.
그리고, 한국 사람들 사람을 두들겨 패놓고 합의할 때 내는 돈을 뭐라 합니까?
‘개값’이라 하잖아요! ‘아, 소름 끼칩니다! 이 세상, 이 세상 돌아가는 이치!’
<생명의 값>
아담하와의 선악과로 타락한 이후, 사람들은 이렇게 서로를 ‘개값’ 취급하면서 삽니다.
사람만 은 삼십으로 평가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심지어 하나님까지 그렇게 평가합니다.
참 몹씁 사람들입니다. 그렇지않습니까?
“은 삼십 개”라는 주제의 설교를 했습니다.
이 설교를 통해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 우리의 생명이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둘째, 우리의 생명을 누가 제대로 평가해주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셋째, 우리의 생명을 제대로 평가해 주시는 분을 만나야 합니다.
마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
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주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으로 우리 생명의 가치를 드러냈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온 천하보다 더 값이 나갑니다. 우리가 그런 생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누가 우리의 생명값을 알아주십니까? 이 말씀하신 예수님, 주님이십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이렇게 값진 생명을 지녔으니,
그 생명을 가지고 생명의 값을 옳게 인정하시는 분을 만날 때, 우리 생명이 생명다워집니다.
우리의 생명을 ‘은 삼십 개’로 저평가하는 세상에서는 우리는 ‘은 삼십’일 뿐입니다.
은 삼십으로 살다가, 토기장이의 밭, 그 무덤에 버려집니다.
아무리 풍수지리를 따지고, 무덤을 거창하게 치장해도, 거기는 토기장의 밭일 뿐입니다.
거기는 썩는 냄새가 날 뿐입니다.
거기를 벗어나서 생명을 생명으로 평가받아야 합니다.
어디를 찾아가면 우리가 생명을 생명으로 대접받을 수 있습니까?
한국에서 공부를 제일 많이 했다는 도올 선생을 찾아가면 그 대접 받을수 있습니까?
대통령을 찾아가면 생명을 생명으로 대접해 줍니까?
요즘 “테스 형”이 유행합니다. 소크라테스를 찾아가면 생명을 생명으로 대접 받습니까?
석가모니, 공자를 찾아가볼까요? ~ 잘 받아야 은 삼십 세겔, 일천만원 안팎입니다.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생명으로 여겨주시고, 맞이해 주시는 분!
오직 한 분 뿐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 오직 주님!
오직 주님만이 우리의 생명을 생명으로 받아주시는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