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오종문의 새 시조집 「봄 끝 길다」는 한결같이 기억의 뿌리를 찾아가는 여정에서 길어 올린 미학적 결실이다. 시인의 기억은 지나온 시간의 세세한 결을 선연하게 재현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치러온 낱낱 경험을 원초적 형식으로 복원해 간다.
오종문 시인은 스스로[自] 그러한[然] 존재자들의 빛과 그림자, 드러남과 사라짐의 양면성을 깊이 있게 관찰하고 표현함으로써 자신만의 사유와 감각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우리는 다양한 시선과 필치로 발화해 가는 그의 사유와 감각을 통해 정형 양식의 단정함 속에서 치열한 현재형을 일구어 가는 그의 시작 과정을 한껏 경험하게 된다.
또한 자연스럽게 그 안에서 직조되는 오종문만의 가열하고도 유니크한 그리움의 목소리를 만나게 된다. 이처럼 오종문 시인은 정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기억의 뿌리를 찾아가는 구심적 언어를 들려주는 동시에, 견고함과 생동감을 결속한 에너지를 통해 가장 섬세한 현재형의 언어까지 우리에게 건네고 있다 할 것이다.
오종문 시인은 이러한 해석과 성찰의 작업에 자연 사물을 적극 끌어들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네들로 하여금 우리와 함께 살아가야 할 생명 원리가 되게끔 배열하고 은유해 간다. 인간 이성이 고양되고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인간이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고 믿었던 미망을 넘어, 그러한 오도된 욕망을 하나씩 허물어 나간다. 그래서 그는 일종의 생태적 사유를 흔치 않은 열정으로 보여주면서, 보다 나은 공존 원리를 모색하는 상상적 기록을 우리에게 건네고 있다. 우리도 그의 시조를 읽으면서 우리를 둘러싼 생명들에 대해 사유하게 되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궁극적 세계 이해에 스스럼없이 가닿게 되는 것이다.
시인의 말
어떤 작품을 시인의 의도대로 해석해서
공감하는 일이 가능할까.
완벽하게 이해하고 해석해서 받아들이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까. 그런데도
시조를 읽는 이들은 그 글자의 세계로
빠져들어 난독難讀의 어려움을 뚫고서라도
시인의 심중을 꿰뚫어 보고자
시인이 지은 미로를 기꺼이 헤맨다.
시인과 독자 사이에 놓인 글자가 만든
시조 행간의 미로에는 탈출구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입구도 출구도 모호한 글자 사이사이에 놓인
심연 속에서 헤매는 것, 바로 거기서
시조 읽기의 즐거움이 탄생할지도 모른다.
2023년 12월
오종문
1986년 사화집 『지금 그리고 여기』를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조집으로 『오월은 섹스를 한다』,
『지상의 한 집에 들다』,
『아버지의 자전거』 등이 있으며,
가사시집 『명옥헌원림 별사』가 있다.
중앙시조대상, 가람시조문학상,
한국시조대상 등을 수상했다.
●ibook99@naver.com
봄빛 시집
보리밭 봄눈들의 주체못한 한가로움
종일 어쩌지 못해 한가지로 수작 건다
우르르 몰려나와서
참던 말을 터트린다
웅크린 낱말들이 문장 속에 깨어나고
시절은 시절대로 무한대로 흘러가서
들바람 콸콸 쏟으며
젖어가는 중이다
흙발 속 불덩이로 타오르는 것이리라
필경 먼 휘파람에 젖어가는 것이리라
한 사람 여생의 봄을
함께 사는 것이리라
해 뜨고 해 지는 일 한가지로 바라볼 때
푸르게 더 푸르게 나부끼는 풀꽃심상
마침내 봄빛 깨치고
은유 하나 새긴다
영웅
역사를 웅숭깊게 들여다본 적 있는가 전설이
되고 싶어 천하를 주유하는
절대적 신이 되려는 영웅은 늘 존재했다
강산은 못 지켜도 제 밥그릇 잘 지키고 깊은
내공도 없이 절대 고수 되려 하는
스스로 만든 자화상 그 허명이 불편하다
명예를 손에 쥔들 무슨 의미 있겠느냐 안락한
의자에서 달콤함에 취한 순간
추락한 기억의 칼은 뼛속 깊이 파고든다
무릇 영화보다는 사는 법에 중심 두고 오
늘에 감사하고 들녘에 고개 숙이는
아버지 굽은 등 위로 별은 반짝 떠오를까
진실로 존경하는 결점 있는 우리 필부 들꽃이
시든 뒤에 잎들이 더 짙어지듯
이 시대 영웅이 되는 그런 날이 오긴 올까
짧은 세 치 혀 놀려 둥근 말로 포장하는 여기
에 무슨 말을 더할 수가 있겠느냐
이제 막 도착한 가을 뜬구름을 끌고간다
서운암을 거닐다
해 뜨는 동쪽에서 해가 지는 서쪽까지
서운암 내경에 들어 나 홀로 걷는 동안
중력의 첫발자국이 너무 깊다 무겁다
나 아닌 너가 없고 너 아닌 내가 없는
꿈결에 졸다 깨다 눈꺼풀 쓸어내리면
혼절한 곡선의 시간 금낭화가 피어난다
문장을 완성 못 한 하늘이 저물어가고
종일 게을러빠진 업을 쌓고 깨우는 일
영축산 개미 한 마리 숨찬 몸을 끌고 간다
산문 밖 북새질치는 현기증 난 통속의 말
잃어버린 뿔을 찾아 궤도를 이탈하면
달빛에 베인 분별심 사각사각 무너진다
지구별 통신 4
해 뜨고 해가 져도 무변광대 떠다니며
매질에 실어 보낼 헌 책 속 영원한 꿈
임무를 수행하세요
혼절하는
이 푸른 밤
우리가 빛 속도로 달려갈 수는 없어도
마음이 서로 닿지 않는다고 걱정 말고
우주에 쏘아 올려요
청량한
사랑의 말
아카식 레코드*가 기록하고 저장하는
한 마디도 안 놓치는 신들의 기억 창고
별들이 총총 빛나요
그리운 이
보고픈 날
달 보며 내 얼굴을 거울처럼 떠올리면
잠들 때 이미 이름 나직하게 불렀다면
온전히 한 몸이 되요
각본 없는
혁명의 삶
* Akashic Records : 예전부터 인간과 우주의
모든 활동 기록이 보관된 일종의 데이터베이스
지구별 통신 6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고 울부짖는
끔찍한 무위의 길 출구 없이 떠돌면서
한결 더 높아지는 벽
하루하루 넘어요
한 계절 탕진하고 격한 슬픔 생매장할
거대한 무덤들은 다 어디에 있을까요
중독된 낯선 외로움
총량만을 늘려가요
지구에 덮쳐오는 두려움 망설임 없이
햇볕이 잘 드는 집 웃음이 넘쳐나는
누구도 가보지 않은
천국의 문 있을까요
끝없이 엇갈려서 떠도는 일 기약 없고
돌아갈 소행성도 경작할 땅도 없어
늦기 전 유일한 무기
마음갈피 숨겨둬요
녹음에 취한 봄이 흘러가고 흘러가요
한 번 더 용기 내서 다이브* 할까 봐요
태양이 사라진 지구
신호등이 깜박여요
*다이브Dive: 어떠한 이득을 얻거나 상대방이
이익을 가져가는 것을 막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상대 진영으로 뛰어드는 행위.
[ 평론가 서평 ]
오종문 시인은 자연이 품은 풍경과 순간의 아름다움을 기록하는 일에 매진해 간다. 이제 우리는 시인의 중요한 목소리 가운데 하나가 자연에 대한 섬세하고 아름다운 기억과 그것의 심미적 형상화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아름다운 재현 과정 외에도 그는 자연 사물이나 현상을 삶에 대한 해석의 상관물로 활용하고 있는데, 가령 그것은 삶의 국면과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는 것이다. 그 점에서 그의 시조에 나타난 자연 세목은 단순한 관조 대상이 아니라 시인 자신의 구체적 정서가 투영된 상관물로 존재하는 것이다. 오종문 시인은 이러한 원리를 시조가 가지는 형식 미학적 장처(長處)를 최대한 살려 구현해 가고 있다. 자연 사물을 통한 존재론적 해석과 성찰 과정이 여기서 생성되고 확장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한 시대의 범례(範例)가 되는 시조 작품들은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인생론적 경향을 띠면서 고전적 성정과 깨달음을 우리에게 하염없이 전해준 것이다. 오종문 시조 역시 이러한 고전적이고 인생론적인 질감과 무게를 지니면서, 섬세한 사유와 감각을 거느리고 있는 우리 시대 정형 미학의 대표 사례일 것이다.
오종문의 시조는 이처럼 초월과 안착, 생성과 소멸, 삶과 죽음 같은 대립적 지표들을 한결같이 재구성하면서 서정시를 통한 상상적 전회(轉回)를 감행하고 있다. 우리도 이 저녁 천지간에 그리움을 깔아놓는 그의 일을 따라 우리의 사유와 감각을 새롭게 갱신해 가게 된다.
정형 양식인 시조는 언어의 이러한 이중적 욕망을 동시에 표상해온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만큼 의미 지향과 탈(脫)의미 지향의 욕망을 균형감 있게 결속하면서 ‘시적인 것’의 내용과 형식을 이루어온 것이다. 오종문의 이번 시조집은 이러한 균형 아래서 특유의 아름다운 파문을 그려냈다. 그가 그려낸 아름다운 파문이란 짧은 언어를 통한 사랑의 회상, 자연 사물을 통한 해석과 성찰, 초월과 안착의 심상 제시 등이고, 그것을 모두 감싸고 있는 것이 ‘사랑’의 에너지일 것이다.
-유성호 평론가/교수 「해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