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계원 대통령 비서실장은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 행사에 다녀온뒤 사무실에서 유정회 최영희 총무와 한담을 하고 있었다. 며칠 전 군 선 배인 최 총무는 저녁을 하자고 김 실장에게 연락했으나 대통령이 갑자 기 부르는 바람에 성사되지 않아 그 약속을 오늘로 미룬 채 미리 사무 실에와 있었던 것이다. 김 실장은 "각하께서 또 찾으실지 모르니 다섯 시까지 조금 더 기다려봅시다"고 했다. 오후 4시30분쯤 경호실장이 전 화를 걸어왔다.
"오늘 각하를 모시고 저녁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섯 시까지 정보부 장한테 가십시오.".
김 실장은 전화기를 놓고는 최영희 총무에게 웃으면서 "이러니 제 가 약속을 못합니다"라고 했다.
김계원 실장에게는 지난 해 12월 취임한 이후 이번 만찬이 네번째 였다. 경호실장으로부터 오라는 연락이 없으면 갈 수 없는 자리였다. 김 실장이 마지막으로 궁정동에 간 것은 그 두달 전에 이 궁정동 나동 만찬장을 수리한 뒤였다. 김재규가 안내를 하면서 식탁 밑으로 푹패여 다리를 놓게 되어있는 부분을 자랑스럽게 설명했다. 발바닥이 닿는 바 닥에 용수철 장치가 되어 있어 촉감이 좋았다. 박정희는 그 속으로 상 체의 반쯤을 넣어보면서 "여기에 숨어도 되겠군"이라고 했다.
김계원 실장이 궁정동 본관에 도착한 것은 5시20분쯤. 정보부측의 안내 없이는 비서실장조차 나동 만찬장엘 갈 수가 없어 본관으로 먼저 들어가야 했다. 실장 혼자 본관 1층으로 들어오자 회의실로 그를 안내 한 윤병서 비서는 곧장 2층으로 올라가 자고 있던 부장을 깨웠다. 잠 시 후 김재규는 2층에서 내려와 김계원이 기다리고 있는 회의실로 들 어왔다.
김재규가 말문을 열었다.
"오늘 무슨 일입니까?" "모르겠소. 오늘 행사도 다녀오시고 해서 쉬실 줄 알았는데." "저는 오늘 만찬이 없을 줄 알고 정승화 총장과 저녁약속을 해두었 는데….".
김재규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김계원 실장이 꺼낸 다음 말은 김 재규의 분통을 터뜨릴 만한 것이었다.
"헛 수고 많이 했소. 신민당 공작은 공화당이 다 망쳐놓았소. 중정 은 수고만 하고…." "사표를 일괄반환한다는 말이 이틀만 늦게 나왔어도 되는데…. 할 수 없지요. 이제부터는 정대행이 출범하면 하나씩 부쳐주어야지요.".
그해 10월초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의원직 제명에 항의하여 신민당 의원들이 일괄 제출한 의원직 사퇴서에 대해 그 이틀 전 공화당이 이 사퇴서를 한꺼번에 반환하겠다고 발표한 것을 두고 나누는 대화였다. 정보부에서는 신민당 당직자들에게 압력을 넣어 당직에서 사퇴하게 한 다음, 법원의 판결에 의해서 이미 총재직무가 정지된 김영삼으로부터 당권을 빼앗아 정운갑 총재권한대행에게 넘기는 공작을 추진하고 있었 다.
이런 공작의 압력용으로 신민당 의원들이 제출한 사퇴서를 선별하 여 수리하겠다는 설을 퍼뜨리고 있었는데 공화당이 "다 반환하겠다"고 하는 바람에 정보부에 협조할 듯한 의원들도 강경으로 돌아섰던 것이 다.
이 무렵 김재규가 신민당에서 김영삼 세력을 거세하기 위한 공작을 지휘하면서 상당한 고뇌를 하고 있었음을 엿보게 하는 목격담이 많다. 당시 정보부 외사국장 조성구가 10·26사건 뒤에 합수본부에서 진술한 내용.
[지난 22일 정오 무렵, 외사국 직원의 해외출장계획서에 결재를 받 기 위해서 부장 비서실로 갔습니다. 안에서 김정섭제2차장보가 부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차장보가 들어간지 한 시간이나 되어서 나오는데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습니다. 부장실로 들어 갔더니 부장은 얼굴을 책상에 파묻고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부하직원의 출장지에 프랑스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부장은 화를 내더니 "프랑스에는 김형욱이 실종사건으로 시끄러운데 왜 여기에 출장을 보 내는가. 싱가포르나 대만으로 변경해"라고 했습니다. 결재도 받지 못 한 상태에서 사무실을 나오는데 차장보는 그때까지 정신나간 사람처럼 비서실 의자에 앉아 있었습니다.].
10월23일 오전 11시30분 남산 부장실에서 국내문제로 각 국장이 참 석하여 회의를 하는데 김재규는 "어제 각하로부터 부마사태와 관련하 여 정보부의 정보활동이 미흡하다는 지적이 있었다. 꾸중과 기합을 단 단히 받았다"고 전달했다. 대통령은 "학원내의 정보망 활용을 어떻게 하였기에 사전에 징후를 포착하지 못했나. 정보부는 뭘 했나?"라고 힐 책했다고 전언했다. 김 부장은 "망을 다시 수습하여 정보활동을 강화 하라"고 지시했다.
10월24일 오후 김재규는 신민당 원내총무 황낙주 의원을 궁정동 사 무실로 초대하여 4시간 동안 원내총무직에서 자진사퇴하라고 설득하고 협박했다.
"난국 수습을 위해서는 김영삼 총재는 일선에서 물러나야 하고 황 총무도 사퇴해주어야겠어요. 김 총재는 나와 같은 피가 섞인 일가가 아닙니까. 내가 그분이 망할 일을 하겠습니까. 황 총무도 사퇴하시면 진해여상의 확장사업도 도와드리겠어요. 2-3년 뒤에는 롤백할 수 있도 록 밀어줄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내가 황 총무와 친하다고 해도 웃분 께서 지시하시면 감옥에 안보낼 수가 없습니다. 황 총무에 대한 비위 사실조사는 다 되어 있습니다.".
황낙주는 "김 부장과 나의 생각은 하늘과 지하실 만큼이나 크다. 차라리 서대문형무소로 가겠다"며 거절했다는 것이다.
10월24일 이후락 공화당의원은 같은 울산 출신인 최형우 의원을 만 나서 신민당 당기위원장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권했다. 정보부장의 의 사라는 것도 전했다. 최형우는 거절했다. 다음날 오전10시쯤 이후락은 남산 부장실로 김재규를 찾아가서 어제 일을 설명했다.
10월25일 오전 정보부 제2차장실에서 간부회의를 하는데 국내정치 담당 김정섭 제2차장보가 부장의 전화를 받았다. 통화를 끝낸 뒤에 그 는 다시 전화기를 들더니 공화당 박준규 의장서리를 불러냈다.
"무슨 일을 그렇게 합니까. 인심은 공화당에서 다 써버리고 우리 보고는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부장님이 언짢게 생각하고 있으니 알아 서 하십시오.".
김정섭 2차장보는 불쑥 "요사이는 정보부를 나무 위에 올려놓고 흔 드는 통에 죽겠단 말이야"라고 중얼거렸다. 외사국은 한 나흘 전부터 주한미국대사관의 동향보고와 부마사태에 대한 미국측의 평가에 관련 된 중요보고서들을 부장에게 올리고 있었다. 나중에 알아보면 그 대부 분의 보고서를 부장이 보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성구 외사국장 은 '부장이 무슨 일을 골똘히 생각하고 있구나' 하는 감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