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도시 [심사평]유종숙
보다 근본적인 것은 객체에 대한 이해다
권대근
문학도시,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유종숙 씨의 <우리집 염소>를 당선작으로 뽑는다. 그 이유로는 유종숙의 수필에는 가슴을 뜨겁게 하는 생명성의 감동이 물결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야기의 바탕에 순수와 동심이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옛날 시골에서나 체험할 수 있는 이야기, 그것도 잃어버린 순수를 찾아가는 생명에 대한 존귀함을 고양하고 있는 감동적인 체험이라서 물질문명의 현대사회에서 수필의 화소로 매우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일상적인 삶을 그린 그녀의 수필에 나타난 인간적인 면에 매력을 느낀 독자들은 유종숙의 이야기 속에서 재미를 찾을 수 있다. 이야기가 그토록 좋았던 이유는 따뜻한 방바닥에서 할머니 무릎을 베고 옛이야기를 듣는 듯한 ‘친밀감’이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 수필은 마당에 멍석이나 평상을 펴놓고 이웃집 아저씨의 귀신 이야기를 들으면서 공포에 떨면서도 신기해했던 기억을 소환해준다.
이 수필에는 삼대가 작중 주요 인물로 나온다. 은영이는 글쓴 이의 딸이고, 글쓴 이, 그리고 은영의 할머니다. 키우던 염소가 식용으로 죽임을 당하는 장면에서 시작되는 수필의 발단은 우리가 잊고 살고 있는 메마른 세상에서 순수의 정이 무엇인지를, 생명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돌이켜 생각해 보게 한다. 지금의 70대 정도면, 시골에서는 가끔 집에서 염소를 잡아 보신으로 먹곤 했던 시절을 기억한다. 이 수필은 시간을 50년 전으로 되돌려준다. 평자에게도 왜 저런 순간이 없었겠는가. 그때마다 매번 가슴이 떨리곤 했다. 그렇게 키우던 닭이나, 소 또는 염소를 직접 집에서 잡는 광경은 흔했다. “저녁이 되자 온종일 열리지 않던 가마솥 뚜껑이 열렸다. 염소 뼈를 곤 뽀얀 국물이 살짝 보였다. 은영은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까만 가마솥이 눈물을 흘리던 염소 같아서 쳐다볼 수가 없었다.”는 은영의 가슴 속으로 마음의 여행을 다녀오고 나면 오늘의 삶을 다시 바라볼 용기를 얻을 것 같다.
이 수필의 결말부, “먹거리가 부족하였던 유년시절이었다. 어린 염소의 희생을 처음 목도하는 어린 자식의 쓰라린 마음을 달래주려 애쓰며 어머니와 할머니는 그렇게 담담하게 세월을 이기는 법을 가르쳐 주셨던 것이다.”는 독자들에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객체가 되어본 적이 없는 타자들을 객체로, 또 주체의 자리에 올려놓고 싶다는 하먼의 ‘객체 지향 존재론’이 떠올리게 할 것 같다. 인간이 망친 상징계에 살면서 인간을 믿는다는 게 가능할까. ‘지금은 대체 어떤 세계인가’라는 어느 철학자의 물음을 떠올려보면 ‘객체’를 가벼이 볼 수 없을 것이다. 이 염소 이야기와 은영의 심리변화를 따라가다 보면, 독자들은 세상을 더 좋게 바꾸기 위해서는 객체의 주체화를 시도하는 따뜻한 시선과 따뜻한 언어가 필요하다고 생각할 것 같다. 유종숙은 계층이나 지역에 상관없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닌 보편적 감정들을 건드려 공감을 잘 이끌어낸다. 그것은 마법과도 같은 스토리의 힘이다. 다양한 사람들을 하나의 메시지에 집중시키는 것은 대단히 유용하고 값진 기술이다.
지구의 한쪽에서는 전쟁광들과 이상기후로 많은 생명들이 죽어가고, 또 그 반대편 시골의 마당에서는 구멍 난 생명의식으로 많은 생명들이 죽어나간다. 이 행위소들은 얼핏 각기 다른 차원의 문제로 구분되는 듯 보이지만, 자본주의 체계 속에서 인간중심주의가 낳은 벼랑 끝에 다다랐다는 지점에서 서로 겹쳐진다. 일상적이다 못해 상시적으로 일어나는 동물들의 죽음과 그에 대한 애도의 시간이 없이 일상에 엉겨 있는 현실에서, 과연 바이오필리아는 어떻게 모색될 수 있을까. 인간중심주의 현실에서 손쉽게 풀 수 없는 복잡한 맥락들이 존재하지만, 그레이엄 하먼의 객체 지향 존재론에 이르러 아직 나아갈 담론의 양상을 뚜렷이 명명할 수는 없다고 해도, 생명경시풍조 비판과 함께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숨 쉬고 살고 있는 개인 주체들에 천착하는 인간중심주의 서사는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할까.
그레이엄 하먼은 사물 또는 객체(object)의 행위성을 강조하는 ‘객체 지향 존재론’을 정교하게 구축했다. 객체에 대한 하먼의 정의와 이에 기반한 객체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모든 것은 객체인데 우리는 객체를 중심으로 사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을 이해하는 데에 실패해 왔다고 주장하는 하먼 철학의 근거가 된다. 즉, 주체-의식 철학은 세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보다 근본적인 것, 즉 객체에 대한 이해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인간중심주의 이분법이 지배하는 이 끔찍한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들이 갖춰야 할 지식이 바로 객체 지향 존재론이다. 은영이의 염소 이야기는 수많은 이들의 가슴을 뜨겁게 흔들어 역사를 바꾸어놓는다. 이 수필에는 긍정적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특별한 힘이 있다. 수필가란 이름을 달고 앞으로 좋은 수필을 많이 써주길 바란다.
최종심사 권대근(문학평론가)
우리집 염소
유종숙
아침부터 은영의 집 마당에 동네 남자 어른들이 모여들었다. 새까만 염소 한 마리도 말뚝에 묶인 채 마당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어르신 수건으로 눈을 가리고 해야 안 되겠습니꺼?”
할아버지를 보며 말하는 남자의 손에는 아침 내내 수돗가에서 할아버지가 갈던 무쇠 칼이 쥐어져 있었다. 은영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몰라도 무서움에 안방 문고리를 잡고 문틈으로 마당을 내다볼 뿐이었다. 할머니는 부엌과 마당의 솥에 물을 끓이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로 엄마가 수돗가로 나가 앉았다.
“은영 엄마요. 소주잔이나 사발을 갖고 오소! 얼른 안 묵으면 어리가지고 못 묵을 낀데.”
칼을 쥔 남자가 은영 엄마를 보며 말했다. 할머니가 수돗가에 주저앉은 은영 엄마를 일으켜 염소 옆으로 데리고 갔다.
“야야 눈 딱 감고 세 번만 삼키라!”
할머니의 말에 엄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께서 남자에게 눈짓하자 동네 남자들인 염소의 목줄을 잡고 염소의 발을 묶었다. 염소는 자신이 어떻게 될지 아는지 큰 눈을 껌뻑거리며 버둥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은영은 안방에서 지켜보다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염소 비명과 동네 사람들의 목소리가 안방까지 들려왔다.
“어허. 참! 삼키라니까 그걸 못 묵어 가지고 아깝꾸로.”
“숨이 끊기면 피가 어린다니까 얼릉 삼키소!”
“야야 참고 삼키야지! 이 아까븐 거를 삼키라 얼릉!”
마당에서는 더는 염소의 울부짖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방에서 나온 은영이 마당으로 내려가자 비릿한 냄새가 났다. 가만히 보니 염소는 마당에 누운 채로 가녀린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때였다. 남자가 할아버지를 보며 말했다.
“어르신 안 되겠네예. 그만해야겠는데예.”
“피도 안 나오고 어리가 안 되겠네. 자네가 수고를 좀 해주게.”
할아버지의 대답이 끝나자 남자는 날이 선 무쇠 칼을 잡고 염소의 목을 찔렀다. 핏물이 마당에 우두둑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누군가 물 한 바가지를 퍼와 남자의 손에 뿌렸다. 그러자 마당이 순식간에 핏물로 물들었다. 마당을 따라 흘러가는 비릿한 피 냄새에 은영은 연신 헛구역질을 해댔다.
남자가 염소의 배를 가르자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이내 내장을 꺼냈다. 은영이 너무 놀라 비명을 질렀다. 할머니는 은영을 방으로 들여가라며 손짓을 하고는 부엌으로 마당으로 바쁘게 움직이셨다. 마당에 있는 솥에서도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구역질과 흐르는 눈물로 은영은 기운이 다 빠져 방으로 들어와 누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강가로 데리고 나가 풀을 먹이던 염소가 마당에서 피를 흘리고 있다니 믿을 수 없었다.
“엄마 염소를 와 잡는데. 살아있는데 와 죽이는데! 불쌍하구로”
은영이 눈물범벅이 되어 목청을 높이며 엄마에게 따지듯 소리쳤다.
“염소 피가 좋다고 엄마보고 묵으라는데 비린내가 어찌나 나는지 못 묵겠더라. 니는 좀 있다가 염소 고기나 묵어라.”
“잡아먹으려고 키웠나? 어제까지도 말도 안 해놓고 불쌍해서 고기를 어떻게 먹노!”
“은영아, 염소 바꿨다 아이가. 저 뒷집이랑 염소 바꿨다. 우리 염소 아이다”
눈물을 흘리며 고함을 지르는 은영을 엄마가 달래듯 말했다.
울다 지져 잠이 깬 은영이 부엌으로 나갔다. 엄마와 할머니가 아침에 잡은 염소 고기를 삶아 살을 발라내고 있었다.
“잠만 자지 말고 부엌일도 도와야지 인자 다 컸는데”
은영에게 마늘통을 안겨주는 할머니를 보며 은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좁은 부엌은 염소 고기 냄새로 가득 차 부연 수증기를 뿜어대고 있었는데, 은영은 염소 생각으로 눈가가 그렁그렁해서 더더욱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은영이 부엌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마늘을 까기 시작했다. 절구통에 마늘을 빻아야 하지만 마늘은 절구통에서 튕겨 나가 도망을 갔다. 은영도 부엌에서 도망을 가고 싶었지만 갈 곳이 없었다. 오늘은 비린내 나는 집도 염소를 잡는 어른들도 싫었다. 처음으로 주위가 어둡고 칙칙한 기운이 가득하다는 걸 느꼈다.
눈물을 닦으려 수돗가로 가 세수를 하다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갑자기 눈이 따갑고 뾰족한 것으로 눈을 찌르는 것 같이 화끈거렸다. 죽은 염소 때문인 것 같아 겁이 난 은영이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우는 소리에 부엌에서 엄마가 뛰어나왔다.
“어이구 이 가시나야! 정신 안 차리나. 마늘 까다가 손도 씻도 안 하고 바로 눈을 비비면 그 눈이 어찌 되겠노 어!”
은영이 온 얼굴을 찡그리며 억지로 눈을 떴다. 눈에서는 뾰족하고 따가운 눈물이 계속 흘렀다. 엄마가 은영의 얼굴을 씻기고 코를 풀었다. 눈동자는 마늘에 빨갛게 익었고 얼굴은 심통 난 놀부처럼 부었다.
저녁이 되자 온종일 열리지 않던 가마솥 뚜껑이 열렸다. 염소 뼈를 곤 뽀얀 국물이 살짝 보였다. 은영은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까만 가마솥이 눈물을 흘리던 염소 같아서 쳐다볼 수가 없었다.
며칠이 지나 친구들과 강가에 놀러 갔던 은영은 눈에 익은 염소 한 마리를 발견했다. 큰 눈과 작은 뿔, 머리의 가마까지 분명 며칠 전까지 키우던 은영이네 염소였다. 새 주인이 달아둔 짧고 무거운 쇠줄 때문에 마음껏 뛰지도 못하고 멀리 나가지도 못한 채 말뚝 주위만 돌며 풀을 뜯고 있었다.
“그래도 니 우리 집에 있었으면 잡아묵었을낀데 딴 집에 가서 살아있는기다”
가만히 다가가 염소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평소 같았으면 ‘음매’ 소리를 내며 머리를 들이받고 줄을 풀고 도망갔을 테지만 염소는 그 자리에서 풀을 씹으며 까만 눈으로 은영을 쳐다볼 뿐이었다. 멀리 강둑에서 염소의 새 주인이 내려오고 있는 게 보였다. 손으로 급하게 풀을 뜯어 염소 앞에 두고 집으로 향했다.
저녁이 되자 은영의 손바닥이 점점 풀물로 시커멓게 변했다. 다음 날 아침 수돗가에 쭈그리고 앉아 시멘트 바닥에 풀물이 든 손가락을 갈아냈다. 마당 구석에 염소 목줄을 묶던 말뚝이 보이자 강가에서 봤던 염소 생각에 애써 눈물을 꾹꾹 눌러 삼켰다. 훌쩍이는 은영을 보며 엄마가 말했다.
“은영아! 니 염소 보러 가지 마래이. 주인이 싫어한다. 훔치가는가 싶어가지고! 어젯밤에 집에 왔더라. 그라고 풀물은 시간 지나믄 없어진다. 손에서 피난다. 고만해라!”
엄마의 말처럼 며칠이 지나자 염소의 눈동자같이 까맣게 슬프던 풀물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장날이 되자 할아버지가 새끼 염소를 한 마리 안고 마당으로 들어섰다. 눈이 크고 이마가 예쁜, 뿔도 나지 않은 작고 귀여운 새끼염소였다. 신이 난 은영이 염소를 보며 말했다.
“할아부지 나가서 꼴 좀 해 올까예?”
꼴을 베고 있는 강가로 바람을 타고 ‘음매’하는 염소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염소 울음소리는 내겐 살아있다는 소리로, 환희요 기쁨이요 사랑이다. 내가 꼴을 해서 먹여 키운 것에 대한 한없는 애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생존을 위한 희생이기도 하다. 그날 처음 느꼈던 암울함 칙칙함은 인간 생존을 위해 죽어서 피는 꽃이나 다름없었다.
먹거리가 부족하였던 유년시절이었다. 어린 염소의 희생을 처음 목도하는 어린 자식의 쓰라린 마음을 달래주려 애쓰며 어머니와 할머니는 그렇게 담담하게 세월을 이기는 법을 가르쳐 주셨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