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희의 유배시절
편액 두 점『의문당』,『은광연세』
석야 신웅순
김정희. 『의문당』현판.제주 추사관 소장.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에 대정 향교가 있다. 조선 1420년 세종 2년에 설립된 향교이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2년 11월 15일자 기사에 제주 경재소에서 지역 백성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향교 훈도를 뽑게 해줄 것을 청했다는 기록이 있다.
대정·정의 두 고을에 비로소 향교를 두게 되어서, 두 고을 생도가 각각 50여인이 되 니, 청컨대, 그 고을 사람으로서 경서에도 밝고 조행을 잘 닦은 자를 뽑아서 교도케 하 여 주소서.
향교에는 명륜당, 대성전, 동재, 서재, 대성문 등이 있으며 1971년 8월 26일 제주도 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었다.
명륜당의 현판은 순조 때에 대정현감을 지낸 변경붕이 주자의 글씨를 집자해서 만들었으며, 동재에 걸려 있는 의문당 현판은 1846년, 헌종 12년 대정 훈장 강사공이 제주에 유배 중이었던 김정희에게 부탁하여 받은 글씨이다. 의문당 진품 편액은 제주 추사 박물관에 보관되어있다.
대정 향교의 뜰에는 아름드리 소나무 몇 그루가 있다.「세한도」의 주인공과 빼닮아 추사가 세한도를 그릴 때 이 소나무를 모델로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의문당 현판 뒷면 현액 해제문이다.
도광 26년(1846, 현종 12) 11월 일에 본관이 진주인 강사공이 참판 김정희공께 간청하 여 현액을 받아 게재하였다. 글은 향원 오재복이 새겼고 공자 탄신 2479년 무진 봄에 다 시 현액을 걸었다.
疑問堂 懸額 解題文 道光二十六年 丙午 十一月 日 晋州後人 姜師孔 請謫所前 參判金公 正喜 題額謹揭 刻字 鄕員吳在福 孔子誕辰二四七九年 戊辰 春 再揭
강사공은 조선 후기 서귀포시 대정읍 출신으로 추사 김정희와 교류한 석학으로 일재 변경붕과 함께 대정의 학문과 미풍양속 진작의 중추적 역할을 한 대정향교의 훈장이자 학자이다. 추사 김정희가 유배생활을 할 때 2킬로 정도 떨어져 있는 이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의문당은 ‘의심나는 것을 묻는 집’이라는 뜻으로 향교에 걸맞는 제액이다. 동재는 학생들의 기숙사이기 때문에 이름을 그렇게 지었으며 글씨는 바른 학문을 바라는 마음에서 추사는 정갈하고 반듯한 해서체로 섰다.
추사는 동생으로부터 책까지 구해 제자들을 적극적이고 열정적으로 가르쳤다고 한다. 제자로 강사공· 박혜백· 허숙 ·이시형 ·김여추 ·이한우 ·김구오 ·강도순· 강기석· 김좌겸· 홍석호 등을 들 수 있다.
또 추사는 제자 개개인에게도 무척 자상했다고 한다. 김항진이라는 제자가 관아에 끌려갔을 때 알아보니 옥살이 하는 죄수들에게 먹을 것을 준 것 밖에는 죄가 없더라며 현감과 목사에게 선처를 부탁한 편지도 전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추사는 곳곳에 제자들을 추천했으며 양아들 상무에게도 제주 유생 이시형을 부탁하기도 했다.(유홍준, 추사 김정희, 312,3쪽)
김정희의 「은광연세」국립제주박물관 소장
추사는 유배중에 만덕의 선행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은광연세」는 김만덕의 손자인 김종주에게 써준 편액이다. 김종주는 김만덕의 큰 오빠의 큰 아들이다. ‘은혜로운 빛이 세세토록 빛나리라’는 뜻이다.
이 글씨는 ‘김종주’의 증손자가 김만덕기념사업회에 기증한 편액이다.
만덕은 제주 출신으로 어려서 부모를 잃고 기생의 수양딸로 갔다가 기생이 되었으며 스무살이 넘어서야 양민으로 되돌아왔다.
기생으로 있었던 열일곱 살 때의 일이다. 새로 부임한 사또가 수청을 들라고 하자 그녀는 소복을 입고 나타났다. 당황해 사또가 그 연유를 물었다.
“오늘 사또를 모시고 자결하겠습니다.”
그렇게해서 사또의 마음을 돌렸다는 일화가 있다.
만덕에게도 아픈 사랑의 사연이 있었다고 한다.
만덕은 제주목 관아의 말직 통인으로 일하는 고선흠이라는 사람을 사랑했다. 그런데 고선흠은 슬하에 먼저 죽은 아내에게서 태어난 어린 딸 둘을 남기고 그만 요절하고 말았다. 만덕은 연인이 남기고 간 두 딸을 키우기로 결심했다.
자신이 기생이 된 것도 돈 때문이고, 사랑하는 사람이 빨리 죽은 것도 돈 때문이며, 그가 남긴 두 아이의 장래도 돈이 결정한다고 생각한 만덕은 돈을 벌기로 작정하고 객주집을 차렸다.(http://cafe.daum.net/jejubuddhismletters)
이후 그녀는 거상이 되었다. 1793년 제주도에서 대기근이 들자 만덕은 전재산을 풀어 제주 백성들을 구제했다.
정조는 1796년 제주 목사로부터 이런 만덕의 구휼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정조 임금은 제주 목사에게 영을 내렸다.
“김만덕의 소원이 무엇인지를 알아 답신하라”
김만덕은 소원을 말하기를 꺼렸다. 사또는 임금의 명을 집행하지 않으면 내가 문책을 받는다고 재촉했다.
그녀는 임금이 살고 있는 대궐과 금강산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정조는 그 소원을 들어주라고 분부했다.
당시엔 제주 여자는 결코 육지 땅을 밟을 수 없다는 법이 있었다. 만덕이 이를 깨뜨린 것이다.
정조는 만덕에게 ‘행수내의녀(行首內醫女)라는 벼락 감투를 내렸다. 그래야 임금과 알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알현을 받은 정조가 만덕의 손을 잡고 칭송하고 금강산 구경을 잘 하게 해주라고 영의정에게 명을 내렸다.
만덕은 임금님이 손을 잡았다 하여 명주로 그 손을 감고 금강산에도 올랐고 고향 제주로 내려갈 때도 그 명주천을 풀지 않았다고 한다.
만덕은 이듬해 금강산을 구경하면서 6월까지 서울에 머물렀다. 만덕이 금강산을 구경하고 고향 제주로 돌아간다는 소식을 듣고 박제가는 만덕에게 이별의 시 네 수를 써주었다.
영의정 채제공은 서랍에서 서책을 꺼내 손에 안겨주었는데 그것이 채제공이 쓴 「만덕전」이다. 형조판서 이가환도 그런 만덕을 두고 시를 지어 칭송했다. 현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김만덕의 이야기가 실려 전하고 있다.
그로부터 30년 후 추사 김정희가 제주 대정현에 유배되었을 때 그 소식을 듣고 는 만덕의 손자 김종주에게 ‘恩光衍世’ 라는 현판을 써 준 것이다.
김만덕은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 거금을 내놓은, 그녀의 이름, 만덕(萬德)처럼 나눔과 베풂의 정신, 만덕은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CEO이다.
추사가 써준 이「은광연세」는 제주 시절 예서체 형식의 추사 서풍을 그대 보여주고 있다. ‘은(恩)’ 자 윗부분을 아주 무겁게, ‘심(心)’ 자의 두 번째 획은 매우 두텁게 쓴 것이 이채롭다. 글자 모양에도 추사의 깊은 뜻과 이유가 있었을지 모르겠다.
관지는 또박또박 해서체로 씌여있고 장방형 양각인 ‘완당(阮堂)’이란 낙관을 찍었다.
김종주의 대모가 섬에 기근이 들었을 때 베풀었다. 그래서 특별한 은혜를 입어 금강 산을 유람하였다. 벼슬아치들은 모두 노래하고 읊어 전하였다. 고금에 드문 일이다. 이 편액을 써 주어 그 집안을 드러내고자 한다.
金鐘周大母大施島饑 被殊異之恩至入金剛山 搢紳皆紀傳歌詠之 古今罕有也 書贈此扁以 表其家
「은광연세」의관주
출처:http://cafe.daum.net/jejubuddhismletters
추사가 제주 유배 2년 되었을 때 ‘1842년 6월 10일’ 서울 장동 본가에 보낸 편지의 앞부분이다.
추사의 편지, 출처:http://cafe.daum.net/readandchange
지난달 17, 18일 사이에 공마리 김종주 편에 편지를 부쳤다. 말 편은 다른 편에 비교 해서 매우 더딘데 어느 때 받아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去月十七八月間 因貢馬吏金鐘周便付書 而馬便較他甚遲 姑未知何時入達矣
공마리는 공물로 바치는 말을 관리하는 벼슬아치를 말한다. 말을 관리하면서 편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김종주는 김만덕의 큰 오빠의 큰 아들에 큰 아들이다. 그 편액이 집안 대대로 전해오다가 2010년 후손이 국립제주박물관에 기증했다.
‘김종주’는 추사에게 자신의 할머니 김만덕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에 추사는 그 선행에 감동을 받아 자신의 편지를 전달해준 고마운 마음을 담아 김종주에게「은광연세」를 써 준 것이다.
-월간 서예,2019.8.148-150쪽.
첫댓글 여름을 시원 하게 하는 글 입니다
감사 합니다
고맙습니다.다 먼저 연구한 님들의 덕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