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정류장 독일가문비나무 - 그대, 떠나지 마세요
The difference between Tennyson and Basho is fully explained in this poem by Goethe:
FOUND
I walked in the woods All by myself, To seek nothing, That was on my mind. I saw in the shade A little flower stand, Bright like the stars Like beautiful eyes. I wanted to pluck it, But it said sweetly: Is it to wilt That I must be broken? I took it out With all its roots, Carried it to the garden At the pretty house. And planted it again In a quiet place; Now it ever spreads And blossoms forth.
(괴테의 시 ‘보았노라’이다.
온전히 나만 보며 숲을 걸었다 / 그늘에서 별처럼 눈처럼 빛나는 작은 꽃이 눈에 뜨이고 말았다 / 꽃은 향기로 말했다 / “내가 그대에 의해 시들어 버리면 안 되겠죠?” / 뿌리째 뽑아 조용한 작은 정원에 심었다 / 꽃은 피어나고 향기는 주위에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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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명 : Picea abies(L.) H.Karst. / 소나무과 가문비나무속
♧ 꽃말 : 정직(honesty), 성실(faithfulness)
나는 뚜벅이로 산다. 화석 연료 덜 소비하기 같은 생태감수성이 해양 심층수처럼 깊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이십대에 도전했던 운전면허 시험에서 네 번 낙방하고는 그 뒤로 시도를 하지 않았다. 차를 필요로 하는 직업을 가진 적이 없었고, 자기 차로 삶을 즐기는 생활을 그리워하지도 않았다. 더 중요한 것은 차를 굴릴 만한 여건이 되지 못했던 탓이다.
자차 운전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지구 온도 올리지 않기에 기여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누군가 차를 태워준다고 하면 기꺼운 마음으로 올라타고는 편안한 이동에 쉼을 누린다. 그래서 나는 문명의 이기가 가져다주는 안락함에서 벗어나 자연에 가깝게 살자는 말은 하지 않는다. 이는 반성과 성찰의 소재는 될지 몰라도 과거로의 실제적 회귀는 상상을 불허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생물과 무생물이 어울려 지구를 만들어 가고 있다고 할 때 갈수록 공산품 무생물의 양이 증가하는 것은 인간의 소유 욕구가 불러온 결과일 것이다. 그 무생물은 인간에게는 한없는 자족감을 안겨주지만 지구 전체를 병들게 한다는 게 대략적인 우리의 인식이다. 그렇지만 진화하는 자동차를 비롯한 무생물의 지속적인 출현을 막기는 어려울 듯하다. 본성은 생태인데, 본능은 생존이기 때문이다.
어디를 가든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 내게 나무 공부를 하면서부터 버스정류장에서 다른 모습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도착 시간을 얼른 확인하고는 주변에 있는 나무들을 둘러보는 것이었다. 가로수로는 은행나무, 느티나무, 양버즘나무, 왕벚나무, 회화나무 등이 눈에 많이 띄었지만, 이 나무들에 대해서도 제대로 아는 게 없어 요모조모 살펴보곤 했다. 그렇다고 나무 공부에 빠져 버스를 놓치는 경우는 거의 없었는데, 단 한 번 있었다.
우리 동네 버스정류장 바로 뒤로는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즉 인도 끝 지점에 다다르면 어른 키만큼의 축대에 작살나무 가지 같은 삼지창 모양의 하얀 쇠 울타리가 둘러쳐져 있고, 그 위에 개나리가 고픈 허리처럼 늘어져 있고, 그 뒤 조경 화단에 심어진 침엽수에서 조금 떨어진 곳부터 아파트가 시작된다. 그래서 버스 오는 쪽을 등지고 이곳을 보고 있으면 버스를 놓치기 쉬울 것 같지만, 좀 부지런히 좌우로 고개를 돌리면 불상사는 피할 수 있다.
일은 버스정류장에서 약간 벗어날 때 생겼다. 그곳에서 뒤를 보며 비자나무인지 전나무인지 갸웃갸웃하며 나무 동정을 하던 중 버스 오는 쪽 반대편으로 시선을 던지니 확실히 아는 나무가 눈에 들어와 천천히 걸었다. 독일가문비나무였다.
에리히 프롬이 인용한 괴테의 시 ‘보았노라’를 보자.
[온전히 나만 보며 숲을 걸었다 / 그늘에서 별처럼 눈처럼 빛나는 작은 꽃이 눈에 뜨이고 말았다 / 꽃은 향기로 말했다 / “내가 그대에 의해 시들어 버리면 안 되겠죠?” / 뿌리째 뽑아 조용한 작은 정원에 심었다 / 꽃은 피어나고 향기는 주위에 가득했다]
에리히 프롬이 이 시를 인용한 것은 앞 장에서 본 테니슨의 시와 바쇼의 하이쿠와 다른 면모를 보여주는 시를 통해 소유와 존재를 말하기 위해서다. 괴테는 테니슨처럼 꽃을 뽑아오기는 했지만, 존재 탐구에 그치지 않고 다시 심었다. 그 행위를 통해 존재 훼손 없이 공존을 이어가고 있다.
여기서 자연을 가까이 두고 소유하는 정원의 역사를 말하기는 어렵다. 유럽, 중국, 일본, 한국마다 고유의 특징이 있는 정원 이야기는 창세기나 서유기에서 시작되는 것인 만큼 길고도 복잡하다. 개인 정원이 공동 소유로 변모된 공원 이야기도 경제 구조와 맞물려야 하기에 버겁다. 그냥 압축해서 현대 사회의 조경을 두고 존재와 소유를 사유해본다. 즉 우리는 자연을 소유하는 대상으로 보는가, 존재 자체로 즐거움을 얻으려는가?
버스정류장에 서 있을 때마다 멀리 떠나는 애인을 마중하듯 가까이 다가가고픈 마음이 가득했던 독일가문비를 보기 위해 시간을 내어 다가갔다. 인도에서 10개 정도 계단을 올라 야생화 식물원 입구에 서 있는 듯한 예쁜 목조 문이 보여 풋풋한 마음으로 들어서 왼쪽으로 몸을 틀어 발을 디디려니 풀 사이로 휴전선 초기에 깔린 듯한 둥근 철조망이 나를 넘지 못하게 하였다. 그래서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 반대쪽으로 가보니 오래된 자전거들이 즐비하게 묶여 있는 벽이 보였고, 그 사이로 버스정류장에서 올려만 보던 독일가문비나무들이 수평으로 내게 다가왔다.
네댓 그루의 독일가문비나무들은 시멘트로 만들어진 빗물 수로 옆에 심어져 있었는데, 거기서 아래쪽으로 한두 걸음만 떼어도 바로 낮은 낭떠러지여서 하늘로 꼿꼿이 솟기는 했어도 기우뚱 기우뚱 위태로워 보였다. 다행히 개나리와 철쭉들이 미끄러지는 토사를 꽁꽁 묶어두겠다는 듯 미어터지도록 옹송그리고 있어 가까이 다가가기는 어렵지 않았지만, 커다란 베란다 창문에서 날아오는 듯한 의심의 눈빛과 아래에서 올라오는 재잘거림과 쌩쌩 차도를 달리는 멀리할 수 없는 백색 소음으로 인해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
라면 한 개 끓일 냄비 정도의 지름을 가지고 있는 재첩 빛깔의 수피는 퍼즐 조각처럼 군데군데 갈라져 있었는데 손으로 대보니 까끌까끌하면서도 돌처럼 딱딱했다. 위로 시선을 올려보니 층층나무처럼 한 지점에서 나뭇가지가 허수아비 팔처럼 옆으로 뻗어나가 있었고, 그 아래로 사각 진 솔잎들이 그늘 하나 마련하지 않는 참빗 모양으로 슬픔을 누르지 못하는 듯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위로의 손길을 내미는 순간 축대 아래에 늘어선 삼지창 쇠 울타리 같은 모양의 끝자락 솔잎들이 내게 아픔을 넘기려는 듯 바늘처럼 내 피부를 콕콕 찔러댔다. 지금까지 옆에서 보기만 했지 비를 피하듯 그 아래 쏙 들어가 교감하려는 나를 밀치는 듯한 인상이 휘감겨와 조용히 그곳을 떠났다. 잠시 뒤를 보자 ‘왜 이 먼 곳에 나를 옮겼어요. 고향으로 가고 싶어요’라는 말이 환청인 듯 현실인 듯 귓가에 잡혀왔지만, 부르릉 부르릉 번개처럼 지나가는 오토바이 소리에 묻혀 오래 각인되지 못했다.
독일가문비나무 학명은 Picea abies(L.) H. Karst.이다. 속명 Picea는 가문비나무속으로 송진을 뜻하는 라틴어 pix에서 유래했다고 하며, 종소명 abies는 전나무속을 가리킨다고 한다. L.은 린네를 말하고, 명명자 H. Karst는 독일 식물학자를 말한다. 종소명에는 나무의 특징을 기술하는 게 일반적인데 그 자리에 속명을 쓴 것에 대해서는 내가 본 자료에는 없다.
유럽에 주로 분포하는 독일가문비나무는 이름만 보면 독일이 원산지라고 여기는데 영명이 Norway Spruce(노르웨이 가문비나무)이다. 즉 노르웨이가문비나무가 되어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독일가문비나무로 부른다. 한자명을 보면 독일당단(獨逸唐檀, 독일 당나라 노송나무)이고, 또 다른 한자로 구주운삼(歐洲云衫, 유럽가문비)이 된다고 한다. 왜 노르웨이가문비나무가 독일가문비나무로 불리는지 정설은 없지만, 독일이 2차 세계대전 패망 후 이 나무를 심어서 재건의 발판을 삼아 이렇게 부른다고 하는데, 헷갈리는 것은 여전할 뿐이다.
독일가문비나무의 꽃말은 정직(honesty)과 성실(faithfulness)인데, 이는 독일가문비나무 꽃말이라기보다 가문비나무 꽃말이다. 그럼 독일가문비나무와 가문비나무는 어떻게 다른지 알아야 하지만 하나만 짚고 넘어가면 될 것 같다. 가문비나무는 동아시아에 주로 분포한다는 것 말이다.
여기서 더 들어가면 이런 질문이 나오게 된다. 우리 토양에 적합한 가문비나무를 조경수로 심지 왜 수입해온 독일가문비나무를 심느냐고 말이다. 거기까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냥 고향을 떠난 나무들, 적응하느라 고생이 심하다는 것만 느낄 수밖에 없다.
나무교 게송으로 마무리하자.
그대, 나를 떠날 때에는 버스 타고 떠나세요.
자동차를 타고 떠나면 너무 빨리 못 보게 되잖아요.
그대, 나를 떠날 때에는 걸어서 떠나세요.
버스 타고 떠나면 흐려진 뒷모습을 볼 수가 없잖아요.
그대, 나를 떠날 때에는 내게 준 모든 것을 버리고 가세요.
흔적의 소유 한 톨이라도 남으면 내 존재가 슬퍼지잖아요.
그대, 나를 떠나 길을 걷다 쉬고 싶으면 독일가문비나무 밑으로 가세요.
소나무인지 가문비나무인지 비자나무인지 전나무인지 구상나무인지 독일인지 노르웨이인지 일본인지 한국인지
빙빙빙 돌아버릴 거예요.
그대, 나를 떠나지 마세요.
그대가 나이고, 나가 그대여요.
낯선 곳 아무 데나 가지 말고
나고 자란 곳에서 한 세상 성실하게 잘 살다 가요
그래야 우리는 오래토록 행복할 수 있어요
그래야 버스도 자동차도 필요하지 않아요
그대, 우리 고향에서 아름다운 숨 쉬며
오래오래 예쁘게 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