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불구불 끊어질 듯 이어진 길을 따라나선다. 사람들의 가쁜 숨으로 다져진 산길. 고만고만한 돌에서 사는 이끼들의 이야기가 푸르디푸르고, 두런두런 좁은 산책로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살아 있음이 느껴진다. 신을 만나면 신이 되고 자연을 만나면 자연이 되는 것처럼 삶의 모양은 어쩌면 오늘 같은 만남에도 있는 것 같다.
자연은 순수와 깨끗함의 상징이다. 깨끗하다는 것은 아무 욕심이 없다는 것이고 욕심이 없다는 것은 깨달았다는 말이며 깨달으면 부처가 아닐까. '석가성불 산천초목 동시성불'이라는 말이 있다. 석가모니께서 부처가 되고 보니 산천초목이 이미 부처더라는 말인데, 우주에 부처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석가는 자신을 미성불未成佛, 우주 만물을 기성불旣成佛이라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우리 선조들은 돌이나 나무에게도 절을 하고 산에 오르면 사뭇 경건해지기까지 한 것 같다. 그 피를 이어받아서일까. 나도 삶이 힘들어질 때면 본능처럼 자연을 찾는다.
내변산 깊은 곳. 사성팔현四聖八賢이 출현하리라는 예언이 깃들어 있는 월명암 굽이굽이에 마음을 내려놓는다. 날숨에 쌓아온 아집을 버리고 들숨에 무심을 들이는 걸음 내디디며 푸른 숲에 더 깊이 몸과 마음을 담근다. 초여름인데도 변산은 이미 짙푸르게 우거지고, 넉넉하게 펼쳐진 능선은 산을 찾는 사람들에게 목가적 시심을 한껏 풀어놓고 있는 듯하다.
잠시, 산 아래를 내려다본다. 차곡차곡 쌓이는 구름 아래 지평선 꿈틀거리고, 개 짖는 소리가 고단한 농부의 허리를 펴게 하는 들녘.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다랑밭 끄트머리 아담한 마을이 손에 잡힐 듯하다. 지척에선 새들이 여름을 물어다 숲을 푸르게 색칠하고, 낯선 걸음에 낮잠에서 깨어나는 산초나무는 기지개를 켜듯 가지가 하늘에 닿을 듯하다. 지척의 생강나무는 관음의 미소를 짓고 너럭바위 옆 작은 야생초는 누구의 발길에 밟혔는지 허리가 부러졌는데도 항변이 없다. 숨을 고르며 그들의 삶을 들여다본다.
잡초는 잡초대로 꽃은 꽃대로 나무는 나무대로 그냥 산다. 서로를 비방하거나 부러워하지도 않으며 산다. 이유 없는 그냥의 삶. 이름을 불러주는 이 없어도 존재 그 자체롤 족하고 주어지는 빛과 물에 적응하며 초록으로 산다.
녹음에 지친 것인지 하늘이 점점 낮아지더니 비가 내린다. 비를 통하여 무슨 설법을 하시려는가. 후줄근히 젖은 발길 멈추고 녹음에 부딪는 빗소리에 귀 기울인다. 토도독 토도독, 도도도道道道 1,300여 년 전. 변산반도 구중의 파도 너머에 월명암을 봉헌했던 부설거사의 숨결이 법어가 되어 내리는 것 같다.
도부채치소道不在缁素요. / 도부재화야道不在華野라.
제불방편諸不方便이, 지재이생志在利生이다.
'도란 승려의 검은 옷과 속인의 흰옷에 있지 아니하며 도는 번화로운 거리나 조용한 초양에 있는 것도 아니다. 부처의 뜻은 모든 중생을 이롭게 제도하는 데 있다'는 말이 빗방울처럼 굵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