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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대림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대림절은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기에 성탄절을 기다리고 동시에 예수님의 재림을 소망 중에 기다립니다.
그런데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런 질문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다시 오실 그날을 진정으로 기다리는 것일까?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다시 오실 그날을 정말로 사모하면서 진심으로 기다리고 있습니까?
제 주변의 사람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예수님이 빨리 재림하면 좋겠느냐고, 어떤 분들은 빨리 오셨으면 좋겠다고 했고, 어떤 분들은 좀 더 있다가 오셨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 대답은 자신의 미래에 대한 예상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주님이 오셨을 때 그 미래가 기대되는 분들은 주님이 빨리 오시기를 바라는 것 같고, 두려움이 크신 분들은 주님이 천천히 오시기를 원하는 것 같습니다. 미래를 어떻게 예상하느냐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습니다.
미래학이라는 학문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엘빈 토플러 같은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1980년에 제3의 물결이라는 책을 통해 21세기는 정보화의 사회가 될 것이다 그렇게 예측했습니다. 인류는 농경사회, 산업화 사회를 지나 인터넷과 더불어 정보화 사회로 진화될 것이다 그렇게 예상했습니다.
돌아보면 세상은 정말 그렇게 변했습니다. 현재 미래 학자 중에 제일 주목받는 분은 레이 커즈와일입니다. 이분은 컴퓨터 과학자이면서 동시에 미래학자인데, 지난 35년간 그가 예측해 온 미래가 대부분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분의 주장에 많은 분들이 주목합니다. 이분은 2005년에 특이점이 온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앞으로의 세상에서는 인공지능이 중요할 것이고, 인공지능 기술이 발전함으로 말미암아 결국 인공지능과 인간의 삶이 결합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뇌의 정보를 모조리 컴퓨터로 옮겨 기계화된 인간으로 영생의 삶을 살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치 영화 매트릭스에서 보았던 가상과 현실을 오가는 그런 모습으로 영생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인간의 미래는 유토피아가 될 것이다. 그는 그렇게 예상했습니다. 이분과 같이 과학기술이 만든 미래를 낙관적으로 보는 분들은 굳이 예수님이 오셔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재림에 대한 기대도 없습니다. 대신에 과학 기술의 발전을 기대합니다. 앞으로도 더 발전하겠지 그렇게 기대합니다. 우리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이런 기대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한 번 질문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정말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대림절을 보내며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 어서 오셨으면 좋겠다. 그렇게 소망하고 있습니까?
오늘은 이 질문과 함께 성경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21장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멸망과 성전의 붕괴 그리고 세상의 마지막 날에 대해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그중에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25절과 26절은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어떤 일들이 있을 것인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해와 달과 별들의 징조가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26절을 보면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라고 합니다. 아마도 주님께서 오시기 전에 우주적인 그런 재앙들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그리고 바다에 파도가 거세게 일어나 사람들이 두려움으로 고통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자연 재앙에 대한 말씀으로 여겨집니다.
이처럼 성경은 주님이 오시기 전에 우주적인 재앙, 자연 재앙 그런 무서운 일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26절 어떤 사람들은 무서워 기절할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기 시대에 예수님의 재림을 원치 않는 이유는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이런 무서운 일들이 자기 삶에 일어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믿는 자들에게 예수님의 재림은 무서운 일이 아닙니다. 27절을 보겠습니다.
그때의 사람들은 인자가 큰 권능과 영광을 띠고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
주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재림하시면 28절 너희의 구원이 가까워지고 있다. 주님께서 주시는 구원이 우리 삶에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일어나서 머리를 들라고 합니다. 여기서 머리를 든다는 말은 주님을 바라보며 소망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가져야 할 그 소망은 어떤 소망입니까?
성경은 천지창조 이야기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창조된 그 세상을 보시면서 기뻐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세상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죄가 들어왔고 땅에서는 가시덤불과 엉겅 피가 솟아났습니다. 이 땅에 고통과 괴로움이 생겨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세상을 고치기 위해 일하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 17절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예수님도 일하십니다. 그래서 그 구원이 완성되었을 때 그때 예수님께서 다시 오십니다.
우리가 가지는 소망은 하나님 구원의 완성입니다. 그러면 요한계시록 21장 4절이 말하는 것처럼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실 것이고, 더 이상 죽음과 고통이 없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구원을 소망합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아시면서 무화과 나무 비유를 이야기하셨습니다. 무화과 나무에 잎이 도달하면 여름이 가까운 것처럼 주님께서 말씀하신 징조들이 나타나면 재림과 함께 우리의 구원이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대를 보며 두렵고 무서운 일들이 있어도 주님의 구원을 믿고 흔들리지 말고 신앙하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32절이 아주 어렵게 느껴집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일들이 한 세대가 끝나기 전에 다 일어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핵심 질문은 이 모든 일이 무엇을 가르키느냐 하는 것입니다. 지금 본문은 재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일이 재림 때에 있을 그 재앙을 의미한다면 32절은 거짓말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한 세대가 지나기 전에 온 것이 아니라 2천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32절에 이 모든 일을 예루살렘 멸망과 관련해서 해석하라고 권유합니다.
오늘 본문 앞 5절에서 24절은 예루살렘 성전 붕괴와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해서 말하는데, 이 모든 일을 그 사건과 관련해서 해석해 보면 이 모든 일은 한 세대가 지나기 전에 분명히 이루어졌습니다. AD 70년 성전이 무너지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예루살렘 성이 멸망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이 들어요. 32절 말씀이 예루살렘 멸망과 연관된 것이라면 왜 누가는 이 말씀을 재림 이야기를 하면서 거기서 다루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이야기라면 24절 다음에 이 구절을 써놓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32절에서 이 말씀을 기록한 데에는 뭔가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 이유가 뭘까요?
누가 복음을 기록한 누가 입장에서는 이 복음서를 기록할 때 이미 예루살렘은 붕괴되어 있습니다. 과거의 사건입니다. 그 사건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겁니다. 그처럼 예수님이 말씀하신 재림도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려움이 있어도 주님의 다시 오심을 믿고 주님을 굳건하게 신앙하라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초기 교회 당시 박해가 많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신앙 때문에 죽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신앙을 지킨 이유는 주님의 재림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를 예로 들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복음 때문에 감옥에 갇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마련되어 있으므로 의로운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그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이유는 주님의 다시 오심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분 앞에 서면 의의 면류관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초기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믿기에 끝까지 믿음을 지켰습니다. 재림 신앙은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는 원동력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인사를 할 때도 마라나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그렇게 인사했습니다.
이 말씀을 오늘 우리 시대에 한번 적용해 봅시다. 우리 시대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강하게 이야기하면 남들에게 뭔가 이상한 사람으로 여김을 받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독교 역사에서는 주님의 재림과 관련해서 잘못된 주장을 하다가 이단으로 정죄된 사례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종말론은 기독교 역사에서 항상 문제거리였습니다.
예를 들어 몬타누스라는 사람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몬타누스는 AD 155년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된 후 성령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지금의 키르키의 페포자에 새 하늘과 새 땅이 건설된다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몬타누스가 이렇게 성령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다닐 때 그때 브리스길라와 막시밀리아라는 두 여인도 똑같은 내용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사람들에게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 몬타누스의 주장이 자기의 주관적인 주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러 사람을 통해서 주신 계시의 말씀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몬타누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의 재림이 임박했다. 우리는 이제 천국에 갈 준비를 해야 한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가정 생활, 직장 생활을 내팽개치고 모두들 폐부자로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종말론은 급속도로 퍼져서 당시 로마와 북아프리카까지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2세기 기독교는 몬타스 때문에 아주 큰 혼란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처럼 예수님은 그곳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재림과 관련된 이런 헛된 주장들, 헛된 계시 사건은 기독교 역사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자라는 이단인 여호와의 증인, 안식교, 몰몬 교 이런 이단들도 몬타누스와 비슷한 주장을 하면서 생겨난 종파들입니다. 그리고 이 이단들로 말미암아 생겨난 사회적 혼란도 몬타누스 때와 비슷했습니다. 주께서 오신다. 언제 어디에 주께서 오신다. 가정도 직장도 다 필요 없다. 영원히 구원을 받아야 된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자기들끼리 모여 주님의 오심을 기다렸습니다.
이런 일들이 기독교의 역사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다 보니까 교회는 재림과 관련해서 아주 조심스럽게 가르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재림 신앙을 너무 강조하면 저 목사 이단 아닌가 저 교회 이상한 교회 아닌가 의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우리 기독교인들은 재림 신앙을 점점 멀리하는 그런 풍조가 생겨났습니다. 저는 여기에 우리 시대 기독교에 불행이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재림에 대한 기대가 약합니다. 초기 교회는 예수님의 재림을 믿었기 때문에 그 힘으로 현실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시대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기대를 멀리하기 때문에 세속화의 물결이 우리에게 밀려오더라도 그래서 사람들이 그 주장을 따라가더라도 거기에 대응할 힘이 약해져 버렸습니다.
저는 2003년에 독일에 신학을 공부하러 왔습니다. 독일의 신학을 공부하러 온 이유는 독일 교회가 여러 면에서 세계 교회의 모범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독일 교회와 독일 신학을 배워 한국에 소개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독일에 사는 동안 독일 교회는 많이 변해버렸습니다. 처음에 독일에 올 때 가이드북을 보니까 독일 기독교 인구는 에판겔 시 35%, 카톨릭 시 35% 그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독일 인구의 70%가 기독교인이라고 했습니다. 얼마 전 챗gpt에게 물어보니까 지금 독일 기독교는 에판겔리시 22%, 카톨리시 24%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지난 20년 동안 독일 개신교는 13%나 감소했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유럽 교회 전체 상황이 독일과 비슷합니다.
한국 교회도 이런 흐름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왜 그럴까 그런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사람들은 과학의 발전과 사회의 발전을 통해 더 좋은 세상에서 살 수 있다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과학의 힘으로 파라다이스와 같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과학의 힘, 사람의 힘을 믿으니 굳이 하나님을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내 힘으로 낙원을 만들면 됩니다. 하나님이 낙원을 만들어준 것을 기다릴 이유가 없습니다.
여기에 우리 시대 기독교가 겪고 있는 어려움의 핵심이 있습니다. 복음서가 기록되던 초기 교회는 세상에서 만난 어려움, 로마 사회에서 겪었던 신앙적인 어려움을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한 소망으로 이겨냈습니다.
그런데 우리 시대에는 인간에 대한 믿음이 점점 커지면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현실 사회에 대한 기대가 커지면서 다시 오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약해져 버렸습니다. 문제를 만났을 때 과학의 힘으로 인간의 힘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점점 무기력해지는 그런 상황입니다. 이때에 우리가 해야 될 일은 믿는 자들이 먼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재림의 소망을 회복해야 합니다.
저는 우리 시대가 창세기에 나오는 바벨탑의 시대와 유사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기술로 하늘에까지 닿는 탑을 만들어서 하나님이 계시는 그 하늘나라로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 인간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반격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혼란스럽게 해서 그들을 흩어버렸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를 보십시오. 과학은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고, 세상은 글로 발리시어롱을 통해서 하나가 되었다고 하지만, 그런데 현실을 보면 사람들은 점점 쪼개지고 흩어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그 기술을 가지고 있는 이 인간이 죄성을 가지고 있으면 그 인간이 만드는 세상은 파라다이스가 아닙니다.
지금 세상은 전쟁을 통해 국가와 국가가 싸우고 있고, 남자와 여자가 젠드 갈등을 벌이고 있습니다. 세대와 세대가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갈등하고 있습니다. 찢어지고 있고 흩어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한 인식,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 그 믿음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때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그 죄성 그 죄성이 극복될 수 있습니다. 죄성이 극복되지 않으면 더 발달된 기술로 더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습니다.
전쟁을 보십시오. 무기가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더 처참한 결과가 우리 눈앞에 펼쳐진 것을 봅니다. 기술이 발달해도 죄성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결코 구원이 임할 수 없습니다.
대림제를 지내는 지금 겸손한 마음으로 인간을 구원하러 오시는 주님에 대한 소망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서 초기 교회 성도들이 재림에 대한 믿음으로 자기 시대의 어려움을 이겨냈던 것처럼, 우리 시대의 교회 역시 건강한 재림 시간으로 우리 시대의 신앙적인 문제들을 이겨낼 수 있어야 합니다.
대림절 두 번째 주일 우리 모두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한번 질문해 봅시다.
나는 정말 주님의 오심을 진짜로 기다리고 있는가?
나는 정말 주님의 나라를 사모하고 있는가?
바른 재림 신앙을 회복함으로 우리 시대의 문제를 이겨나가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