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이 선을 넘지 마시오”
우리가 넘어야 하는 건 계급의 벽이 아닌 타자의 벽
기꺼이 타자를 향해 울타리를 넘는 우리를 상상하기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나 2019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소설이, 2022년 국제신문 신춘문예에 동화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한 김담이 작가의 첫 소설집 『경수주의보』가 걷는사람 소설 15번째 작품으로 출간되었다. 현실과 디스토피아를 넘나드는 동화적인 상상력을 바탕으로 우리를 “어두운 숲길을 헤매는 듯한 경험”으로 인도하는 여덟 편의 소설이 한 권에 담겼다.
김담이의 풍부한 환상으로 채워진 소설 세계는 인간의 존엄성과 사회 구조를 날카롭게 꿰뚫는다. 작가는 추락과 하강, 수렁과 진창을 통해 수직의 전경화를 그려내는 동시에, 하층민의 상승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견고한 사회 시스템을 환유한다. 오늘날의 리얼리즘을 서늘하고도 담담하게 묘파하는 현대판 “신자유주의적 잔혹동화”인 셈이다. 김담이가 그려낸 이야기는 여전히 세계에 존재하는 ‘위’와 ‘아래’의 경계를 반영하며, “거리에 죽음이 넘쳐나고 삶에 존엄이”(최선영, 해설) 없는 사회의 구조적 문제와 그에 기인한 차별을 상징적으로 벼려낸다.
작가는 “삶에서 마주하는 크고 작은 일상과 비일상들”(강병융, 추천사)을 자신만의 독특한 상상력과 통찰력을 활용해 꼼꼼하게 녹여낸다. 이를테면 「당신을 위한 낯선 천국」은 타인과 자신을 애도하기 위한 여정을 떠난 피난민들이 직면한 극한의 생존 상황을, 「집으로 가는 길을 알려 주세요」는 갑작스러운 일상의 추락 속에서 화자가 빠져든 함정과 새로이 찾아온 희생양을 환상 세계를 응용해 보여 준다. 「낭만적 진실」과 표제작 「경수주의보」는 자본의 억압 아래 있는 작가를 빌려 ‘작가다움’과 작금의 시대에 ‘작가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추적한다. 「유령들」은 자연과 인간의 충돌을 드러내며 인간의 무력함을 상징화하고, 「태양 속으로 한 발짝」은 디스토피아 SF를 배경으로 파괴와 재생의 시간을 담아낸다. 「툭」에서는 작은 사건 하나가 한 사람의 삶을 어떻게 송두리째 뒤흔드는지를, 「종점만화방」에서는 인물들이 사회적 벽에 갇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종점’에 이르는 모습을 통해 계급 간의 분리와 인간 존엄성의 상실을 적나라하게 그린다. 이렇듯 절망의 섬뜩함을 섬세하게 묘사하는 기이하고 아름다운 포스트 아포칼립스 속에서, 김담이는 우리가 넘어야 하는 것은 계급의 벽이 아니라 타자의 벽이라는 강한 믿음을 건넨다.
삶과 죽음, 불평등과 경계, 생존의 이야기에서 더 나아가, 작가 김담이는 우리를 향해 오늘날 ‘글쓰기’의 의미를 묻는다. “글을 쓰지 않으면 나는 나일 수 없는가?”(「작가의 말」)라고 자문하며 글 쓰는 삶과 존재에 대해 오래도록 골몰해 온 김담이가 계속해서 도산하고 마는 출판사와 비관적인 문학가의 지위를, 글을 읽고 쓰는 일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특이한 재주”(「유령들」)로 여겨지는 세계를, “독자들에게 외면당했거나 서점 진열대에는 단 한 번도 진열되어 본 적 없는 책들”(「집으로 가는 길을 알려 주세요」)만을 전시하는 미지의 서점을 우리에게 보여 주기를 선택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터다. 그의 소설은 “경계와 진창”으로 가득한 세계에서 “수고롭고 폼나지 않는 일”을 하며 살아내는 것 또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의미임을, 모르는 이의 이름과 그가 겪어낸 삶이 내게로 훅 끼쳐 올 때, 끝내 “아무것도 쓰지 못”(「종점만화방」)하는 모습까지도 아름다운 삶의 한 풍경임을 믿는 따뜻함으로 우리를 위로한다.
목차
당신을 위한 낯선 천국
집으로 가는 길을 알려 주세요
낭만적 진실
유령들
태양 속으로 한 발짝
경수주의보
툭
종점만화방
해설
이 선을 넘지 마시오
―최선영(문학평론가)
작가의 말
책 속으로
“그래 이건 잔혹한 마술이야.”
가슴에 안은 쇠몽둥이가 새털처럼 가볍게 느껴진다. 자꾸만 발끝이 허공에 들린다. 설의 몸은 헬륨 가스가 가득 든 풍선 같다. 설은 하늘로 날아가 버리지 않도록 갑판과 연결된 철제 사다리를 잡는다. 16배 느린 화면처럼 사람들의 움직임이 뚝뚝 끊긴다. 모든 소리가 귀에 닿기 전에 휘발되어 버린다. 설은 갑판에서 발이 떨어지지 않도록 발끝에 힘을 준다. 어릴 적 보았던 마술 쇼처럼 자물쇠가 풀리면 다시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오리라고 생각한다. 피를 흘리는 사람도 없을 것이라, 비명을 지르며 뛰어다니는 사람도 없을 것이라, 차라리 죽여 달라고 애원하는 사람도 없으리라 생각한다.
--- pp.24~25 「당신을 위한 낯선 천국」중에서
나는 마치 거인국에 사는 소인 같았다. 서점을 찾아 들어오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 눈에는 서점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가끔 서점 앞을 기웃거리는 사람은 있었지만 문을 열고 들어오진 않았다. 시간이 멈춰 버린 시계에 갇힌 것 같았다. 순두부찌개를 먹는 시간만이 유일하게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 pp.115~116 「집으로 가는 길을 알려 주세요」중에서
그토록 원하던 추위와 더위를 피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겼고, 굶지 않아도 되자 이상하게도 도무지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생기지 않았다. 희곡은 여전히 옥상 난간에 서서 자살하려는 남자의 장면에 멈춰 있었다. 걱정하지 않고 먹고 잘 곳이 생기자 남자에게서 자살할 이유가 사라져 버렸다.
--- pp.150~151 「낭만적 진실」중에서
루는 씻고 싶었다. 악취를 풍기며 제인에게 책을 주러 가고 싶지 않았다. 예전의 루는 냄새에 민감한 사람이 아니었다. 골목마다 썩은 물이 넘쳤고, 악취가 코를 쏘았다. 악취는 익숙한 냄새였다. 요단의 아이들은 모두 참기 힘든 냄새가 났다. 머리에서, 입에서, 눈에서, 겨드랑이에서, 사타구니에서, 땀구멍에서 상한 음식 냄새가 났다. 루도 그들 중의 한 명이었고 냄새 때문에 신경 쓸 일은 전혀 없었다. 냄새를, 악취를 인식하게 된 것은 온에게서 ‘좋은 냄새’를 맡은 후였다.
--- p.175 「유령들」중에서
폭염이 계속되자 노인들과 몸이 약한 사람들은 더위를 견디지 못하고 죽어 갔다. 온 동네에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가족이 있는 사람은 땅에 묻혔지만 혼자 사는 노인은 집이 곧 무덤이 되었다.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물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밤낮으로 태양이 식을 줄 모르고 타오르자 저수지마저도 바닥을 보였다.
--- p.223 「태양 속으로 한 발짝」중에서
“우리 반에 경수가 셋이나 돼요?”
경수는 어머니 세대의 철수와 영희만큼, 막내 이모 세대의 은희와 경희만큼 흔한 이름이었다. 그렇다고 하여도 경수가 한 반에 세 명이나 되는 줄 몰랐다.
--- pp.245~246 「경수주의보」중에서
화단에 접근 금지 노란색 테이프가 쳐져 있었다. ‘출입 금지’라고 써진 테이프에는 ‘이 선을 넘지 마시오.’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최 씨는 이 선을 넘지 말라는 단호한 어투를 되새김질하며 주머니 속 열쇠를 만지작거렸다. 무연히 눈송이가 화단을 덮었다. 사고 현장은 보이지 않았다.
--- p.281 「툭」중에서
사장은 마지막 회식 자리에서 ‘문학이여! 영원하라’라고 외치며 잔을 높이 들고 눈물을 흘렸다. 그는 연거푸 소주 석 잔을 들이켜더니 문학의 암담한 미래를 한탄했다. 나는 당장 카드 대금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보테가 베네타 클리어런스 숄더백을 구입할 수 없다는 것이 나를 슬프게 했다. 월급과 퇴직금 대신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작가들의 전집 묶음을 받았고, 엄청난 무게의 그것들은 나에게는 처치 곤란한 골칫덩어리였다.
--- p.309 「종점만화방」중에서
출판사 리뷰
작가의 말
그 무렵 생각이 많았다. 『경수주의보』의 소설은 그 무렵에 썼다. 그 무렵 나는 여럿이 있을 때와 혼자 있을 때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여럿과 어울려 있을 때는 즐겁게 웃으며 이야기했지만, 혼자가 되면 바닥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낙하하고 있었다. 분명 내 삶을 열심히 살아내고 있는데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삶을 사는 것 같은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오랫동안 소설을 쓰지 않고 있었다. 소설을 쓰지 않는 나를 생각해 본 적 없었으므로 ‘나’와 ‘소설을 쓰지 않는 나’ 사이의 틈은 거울 밖의 나와 거울 속의 너처럼 낯설었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곧 회복되리라 믿었다. 틈이 벌어지기 전 예전의 나로, 온전한 나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토록 오랜 시간 틈을 응시하고 있을 줄 몰랐다.
그리고 줄곧 나에게 물었다.
글을 쓰지 않으면 나는 나일 수 없는가?
질문은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 ‘나는 정말 글을 쓰고 싶은가?’ ‘다시 글을 쓸 수 있을까?’라는 물음표를 던졌다. 답도 없는 질문은 일상을 갉아먹으며 삶에 대한 고민으로, 존재에 대한 고민으로 덩치가 커졌다.
(중략)
지금 혹시 어두운 터널에 있다면 내 소설이 너에게, 나의 경수에게 아주 작은 위로가 되길 바라며.
2024년 가을의 시작, 그리고 끝
김담이
* 출처 : 예스24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36887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