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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브레이브 하트 ]
영화 <브레이브 하트>는 헐리우드 영화에서 전쟁을 묘사할 때 가감없이 잔인한 실상을 묘사한 데 있어서 선구자격 영화로 회자됩니다. 다루는 시대가 다르긴 하지만 <라이언 일병 구하기>보다도 몇년 앞서서 온갖 유혈이 낭자한 전투씬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영화는 스코틀랜드 독립을 위해 활약한 윌리엄 월레스(1270~1305)의 일대기를 실제 역사인 것처럼 그렸지만, 역사왜곡이 상당하기 때문에 이 영화의 내용을 실제 역사로 받아들이면 곤란합니다. 역사에서 소재만 따온 픽션이라고 생각하며 영화를 감상해야죠. 명배우 멜 깁슨이 감독, 제작, 주연을 맡아 화제가 되었던 영화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선 당시 전국 200만 관객이 넘는 대박을 터뜨렸고, 특히 호주와 스코틀랜드에서 대성공을 거두면서 국외 흥행 수익은 1억 4천만 달러에 달했습니다. 이는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호주에서 성장하고 가계가 스코틀랜드계인 멜 깁슨의 영향 때문이었을 겁니다. 한편 잉글랜드에선 역사 왜곡 때문에 상영 금지 주장까지 나오면서 유달리 악평을 받았습니다.
2005년 잉글랜드 영화 잡지 <엠파이어>는 그 해 3월호에서 역대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 중 최악의 영화로 이 영화를 선정했습니다. 이 영화는 1996년 제6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 촬영, 분장, 효과 및 사운드 편집, 작품 등 5개 부문에서 오스카를 수상하였습니다.
영화에서 주인공 윌리엄 월레스와 대척점에 서 있는 에드워드 1세는 측에서 보면 높은 치적을 쌓아올린 위대한 왕으로 알려져 왔으며 외모 역시 훤칠한 키에 미남이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래서 영화에서도 에드워드라는 이름보다는 '롱섕크'라고 불리우는데 이는 꺽다리라는 뜻으로 그의 큰 키 덕분에 붙은 것입니다.
잉글랜드 입장에서는 이런 에드워드 1세를 천하의 악당으로 만든 데다 중세에는 흔히 있던 지배층들 간의 정치적 싸움인 영토 분쟁, 왕위 계승권 분쟁을 가지고 잔악한 현대식 침략 전쟁, 인종 청소 전쟁으로 그려놓았다 보니 잉글랜드 사람들이 이 영화에 대해 분노할 만도 합니다.
물론 에드워드 1세가 당시 기준으로도 적에게 매우 잔혹했던 건 사실이기 때문에 스코틀랜드인들에게 그렇게 보이는 것 또한 이유가 있는 셈입니다.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평가는 항상 달라지는 법이지만...
윌리엄 월리스는 스코틀랜드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실존 인물로, 그의 사후 556년이 된 1861년 6월 24일 스코틀랜드의 스털링에서는 그를 기리는 90m 높이의 기념비가 만들어졌습니다. 윌리엄 월리스에 대한 기록과 일기 등은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에 살고 있는 윌리엄 기사의 후손들에 의해 지금도 지켜지고 있습니다. 이 후손들은 촬영 기간에도 제작진과 동고동락하며 영화의 역사적인 배경에 대해 조언했으며, 전투 장면에서는 직접 엑스트라로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 멀리 월레스 기념비가 보입니다.
1994년 6월 6일 시작한 영화의 촬영은 스코틀랜드에 있는, 영국에서 가장 높은 벤네비스 산, 유럽에서 최고의 강우량을 기록하는 글렌네비스 계곡, 아일랜드의 중세 유적지인 트림 성 등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트림 성은 목조 건축물로 훼손되었는데 제작진이 약 12주에 걸쳐 공사하여 웅장한 성으로 변신시켰습니다.
[ 간략한 줄거리 ]
하급 귀족 윌리엄 월레스는 잉글랜드와 투쟁하던 아버지와 형이 회담하자고 불러낸 잉글랜드 측의 배신으로 처참히 죽자, 삼촌의 손에 맡겨집니다. 이후 라틴어와 검술 등 각종 교양과 무예를 익혔으나, 아버지와 형의 죽음으로 인한 트라우마 때문인지, 피끓는 독립운동과는 거리가 먼 평범한 인물로 성장합니다.
그러나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1세(에드워드 롱섕크)는 인종청소의 일환으로 반항심 강한 스코틀랜드인의 종자를 바꾸고자 초야권을 미끼로 영주들을 반란 투성이인 스코틀랜드 땅으로 보냅니다. 이 때문에 월레스는 영국인 영주에게 사랑하는 여자의 순결을 뺏길 위기에 처하자 그녀와 몰래 결혼하게 됩니다.
이 월레스의 부인을 잉글랜드 병사가 겁탈하려 하자 이를 막는 과정에서 부인이 잉글랜드군에 잡히게 됩니다. 잉글랜드인 영주가 월레스를 잡기 위하여 부인을 살해하면서 월레스는 조용히 가정을 꾸리고 싶어 하던 평범한 인물에서 스코틀랜드의 독립과 아내의 복수에 모든 걸 바치는 무서운 복수귀로 변합니다.
아내의 살해범인 영주를 죽인 것을 시작으로 월레스는 스코틀랜드에서 전면적 반란에 돌입하게 됩니다. 이것을 막기 위해 에드워드 1세는 대군을 보내지만 월레스는 장창을 이용해 이를 스털링 전투에서 잉글랜드의 대군을 격파합니다. 한편 스코틀랜드의 유력한 귀족이자 귀족들의 대표인 로버트 더 브루스와 친분을 쌓습니다. 그리고 기세가 올라 아예 잉글랜드에 쳐들어가 스코틀랜드에 대한 침략의 주 거점이던 요크를 함락시키고 왕의 조카마저 죽입니다.
이 과정에서 월레스는 로버트에게 부패하고 나약한 스코틀랜드 귀족들을 단합해 적과 싸울 수 있도록 이끌어달라고 계속 간청하지만, 로버트는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에 마음을 정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믿는 월레스의 마음에 그도 서서히 감화되어 그를 반드시 도와주겠다고 약속을 합니다.한편 노회한 에드워드 1세는 프랑스 왕녀인 세자빈 이사벨을 보내서 평화교섭을 추진하는데, 그런 척 하면서 뒤로는 대규모 군대를 소집해 직접 전면전에 나섭니다.
* 이사벨라로 나오는 소피 마르소
이 과정에서 동성애자이자 나약하고 이상한 성격인 왕자에게 호감을 못 느끼던 이사벨이 터프하면서도 교양을 갖춘 월레스에게 홀랑 반하게 됩니다. 곧이어 스코틀랜드군과 영국군은 폴커크에서 맞붙었는데, 처음에는 영국측에 붙은 아일랜드군을 포섭해 잘 나가는듯 했습니다. 그러나 월레스의 작전과 달리 부패하고 이기적인 스코틀랜드의 귀족들은 에드워드 롱섕크의 뇌물을 먹어 전투를 방기하고, 월레스는 롱섕크 옆에 서 있던 한 기사에게 따라잡혀서 죽을 뻔합니다.
* 에드워드 1세(롱섕크,롱다리라는 뜻)
그런데 월레스가 간신히 그 기사를 쓰러트리며 죽이려고 헬멧을 벗기고 보니, 그 기사는 아버지의 충고 때문에 완전히 변절한 로버트였습니다. 심한 쇼크를 받은 월레스는 모든 걸 포기하듯이 드러누워 버리지만, 양심의 가책을 느낀 로버트는 월레스를 자기 말에 태워 도망시킵니다.이후 월레스는 잠적하고, 배신한 귀족들을 하나하나 처참히 암살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에 맞춰 다시 반란 세력이 커집니다.
지대한 양심의 가책을 느꼈던 로버트는 다시 월레스와 화해하여 같이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이루자고 월레스에게 사절을 보냅니다. 당연히 월레스를 한 번 배신했던 로버트의 약속을 월레스의 친구들은 믿지 않았지만, 월레스는 반대를 무릅쓰고 로버트를 한번 더 믿어보기로 하고 홀연히 떠납니다.
* 모두 엉덩이를 까고...
당일 약속장소에 나타난 월레스를 로버트는 환대하지만, 로버트 몰래 뒷구멍으로 로버트의 아버지에게 배후 조종을 받은 로버트의 가신이 월레스를 기습해서 사로잡아 매복하고 있던 잉글랜드군에 넘겨버립니다. 로버트는 아버지에게 짐승처럼 울부짖지만 엎질러진 물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런던으로 끌려간 월레스는 재판관 앞에서 "반역행위에 대해 자백하는가?"라는 질문에 "애초에 평생토록 잉글랜드 왕을 섬긴 적이 없었는데 무슨 반역이냐!!"라고 당당히 대답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상을 인정하지 않고 결국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인 척장분지형(내장이 드러내지고 사지가 찢어지는 형벌)에 처해지게 됩니다.
* 촬영장에서의 멜 깁슨
이사벨이 달려와 월레스에게 "고통없이 자결하라"거나 "고통을 느끼지 않게 마취약을 먹으라"고 권하지만 월레스는 당당히 죽기 위해 거절합니다. 결국 마지못해 마시긴 하지만, 이사벨이 떠난 사이 입에 머금은 마취약을 뱉어버립니다.월레스는 목이 졸리고 사지를 마구 잡아당긴 뒤 배가 따여 산 채로 내장이 뽑혀지는 잔혹한 형벌을 당합니다.
그러나 자비를 구걸하면 빠르게 죽여주겠다는 재판관과 월레스를 동정해 자비를 구하라고 외치는 군중에게 자비(Mercy) 대신 "자유(FREEDOM)!"라고 외치고 옛 부인의 환상을 군중 속에 보며 죽어갑니다.
병상에 누워 있던 왕 에드워드는 세자빈 이사벨에게서 "지금 내 뱃속에 자라고 있는 건 월레스의 아이이며, 당신의 핏줄은 당신 아들과 함께 끊긴다"라는 잔혹한 고백을 받게 되고, 월레스의 고함소리와 함께 숨을 거둡니다.
* 월레스와 로버트
[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1세와 스코틀랜드의 민중 영웅 윌리엄 월레스 ]
* 잉글랜드 에드워드 1세
* 에드워드 1세
에드워드 1세는 중세 잉글랜드인들에겐 위대한 왕으로 칭송을 받았으나 스코틀랜드인들에게는 끔찍한 악몽이었던 왕으로 평가됩니다. 에드워드 1세는 내정을 통해 잉글랜드의 통치력을 단단히 다지는 한편 대외적으로도 잉글랜드의 세력을 넓히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잉글랜드의 역대 국왕들은 명목상 웨일즈의 왕도 겸하였으나, 그 곳에서 발휘할 수 있는 실권은 거의 없었고 잉글랜드의 왕들도 웨일즈에서 큰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 이상은 웨일즈의 통치 세력에 대해서는 그리 간섭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때까지 웨일즈는 사실상 독자적으로 놀고 있었습니다.
* 영화에서...
그러나 에드워드 1세는 웨일즈의 독자적인 세력을 제압하고 그 곳에서도 실질적인 통치력을 발휘하고자 하였습니다. 때문에 친히 원정을 나가서 직접 통치에 반발하는 웨일즈의 토착 영주들과 싸워 이겼고 이들을 복속시켜 잉글랜드 국왕이 웨일즈에서도 실권을 발휘하도록 하였습니다.
* 에드워드 1세
웨일즈를 확실하게 복속시키던 날 왕세자(후에 에드워드 2세)가 태어나자 그를 웨일즈 공으로 봉합니다. 이후 잉글랜드의 왕세자들은 웨일즈 공으로 봉해지는 전통이 수립됩니다. 현재 찰스 왕세자도 웨일즈공입니다.한편 북쪽 스코틀랜드에서는 알렉산더 3세가 1268년 3월 18일 뜻하지 않은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그날 밤 연회를 베풀고 술에 만취한 상태로 부인을 만나러 간다고 말을 타고 갔다가 신하들과 떨어진 상태에서 낙마사했습니다. 즉, 음주운전을 하다가 사망한 셈이었습니다. 알렉산더 3세는 원래 에드워드 1세의 아들인 헨리 3세의 딸 마가렛과의 사이에서 자식들을 뒀으나, 딸 마가렛 하나 외에는 모두 요절하면서 후계자가 없었습니다.
알렉산더 3세의 유일한 혈손으로 딸 마가렛이 노르웨이 왕과 결혼해서 태어난 외손녀인 마가렛이(왜 여자 이름은 죄다 마가렛으로 짓는지) 있었고 그녀를 생전에 후계자로 지명했기에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마가렛이 스코틀랜드 차기 여왕으로 지목되자 에드워드 1세는 마가렛을 자신의 아들 에드워드 2세와 혼인시켜 스코틀랜드까지 집어삼키려 했습니다.
하지만 마가렛이 갑자기 어린 나이에 병사하는 바람에 실패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기회를 노리다가 스코틀랜드 귀족들 사이에 왕위 계승 분쟁이 일어나자 그들 사이에 끼어듭니다. 그리고 자신을 스코틀랜드 왕으로 인정하는 이에게 스코틀랜드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을 제안합니다.이때 존 밸리올이라는 귀족이 이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 윌리엄 월레스 삽화
밸리올은 에드워드 1세의 강력한 군사적 지원에 힘입어 스코틀랜드의 군주가 되었으나 정작 그에게 실권은 전혀 없었고 명목상으로만 존재하는 허수아비 왕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때문에 밸리올은 군대를 일으켜 에드워드 1세와 전쟁을 벌여 스코틀랜드의 종주권을 빼앗고자 하였으나 도리어 패배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에드워드 1세는 아예 스코틀랜드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하고 나서며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왕임을 선포했습니다. 게다가 스코틀랜드 왕권의 상징이었던 '운명의 돌'과 가장 신성하게 여기는 성 마가렛의 검은 십자가상마저 1296년에 빼앗아 런던 웨스터민스터 사원으로 가져가 버렸습니다.
* 운명의 돌, 1996년에 이 돌은 스코틀랜드로 돌아옵니다
이 덕분에 후에 로버트 1세가 스코틀랜드의 왕을 자칭하며 독립을 선언하기 전까지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의 식민지가 되어 왕도 없이 몇 년을 지내야만 했습니다. 물론 스코틀랜드 왕실과 귀족들은 엄청난 굴욕을 당한 터라 에드워드 1세를 증오하게 됩니다.따라서 스코틀랜드인들은 독립을 요구하며 거세게 저항했습니다.
그러자 에드워드 1세는 잉글랜드에게 호의적인 몇몇 스코틀랜드 귀족들을 뇌물과 권력으로 달래어 포섭하는 증 회유책을 쓰면서도 반항하는 도시와 마을들을 가차없이 짓밟고 그 곳의 귀족들과 시민들을 학살하는 등 잔혹한 통치를 펼쳤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되려 역효과를 불러와 스코틀랜드 귀족과 백성들의 원한을 사는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 운명의 의자
* 윌리엄 월레스의 등장
이런 와중에 당시 스코틀랜드 서부지역에 스코틀랜드 기사의 둘째 아들인 윌리엄 월레스가 있었습니다. 그는 배포가 크고 힘이 장사였으며 용맹하고 대담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동족을 모아놓고 연설이라도 할라치면 어찌나 설득력 있게 말을 잘하는지 듣는 사람마다 그의 말에 푹 빠지곤 했습니다.
월레스는 스코틀랜드를 깊이 사랑했으며, 온 힘을 다해 잉글랜드를 증오했습니다. 잉글랜드인들이 웨일즈를 점령하고 한 것처럼 스코틀랜드도 지배자 행세를 하며 횡포를 부리자 자긍심 높은 스코틀랜드인들은 그냥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치를 떤 이가 윌리엄 월레스였습니다.
* 월레스 동상
어느날 잉글랜드 관리 하나가 월레스를 심하게 모욕을 주는 일이 있었습니다. 월레스는 그 자리에서 그 관리를 때려죽이고 험준한 산악지역으로 도피하였습니다. 그리고 에드워드 1세에 저항하며 무장봉기한 동료 윌리엄 더글라스와 합류하였습니다. 드디어 월레스는 독립을 위해 싸우는 스코틀랜드인들 사이에 가장 단호하고 굳건한 투사가 되었습니다.
스코틀랜드에 남아 있던 잉글랜드의 총독인 서리 백작이 월레스에 쫓겨 달아나자 사기가 오른 스코틀랜드인들은 여기저기에서 반란을 일으켜 잉글랜드인들을 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서리 백작은 에드워드 왕의 명령을 받아 국경 지역 병사들을 모조리 끌어 모아 두 갈래로 나누어 스코틀랜드로 진격을 개시했습니다.
** 스털링 다리에서의 승리
* 승리의 스털링, 패배의 폴커크
월레스는 스털링에서 3킬로 정도 떨어진 포스 강변에서 4만 명의 스코틀랜드군의 선두에 서서 잉글랜드군을 기다렸습니다. 강에는 볼품없는 나무다리가 놓여 있었는데, 두 명이 나란히 건널 정도의 폭이었습니다. 다리를 바라보던 월레스는 병력 대부분을 주변 언덕에 매복시킨 다음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스털링 다리, 당시는 목조였습니다
잉글랜드군이 강 건너편에 나타났을 무렵, 적의 전령이 와서 요구조건을 전했지만, 월레스는 스코틀랜드의 자유를 내세우며 모두 거부하고 전령을 돌려보냈습니다. 서리 백작의 부관들도 다리를 살피고 나서 백작에게 서두르지 말고 신중해야 한다고 조언했습니다. 하지만 백작은 몇몇 장교들에게 당장 공격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경솔하기 짝이 없는 에드워드 1세의 재무상인 크레싱엄을 선두에 세웠습니다.
1천 명의 잉글랜드 병사들이 두 줄로 다리를 건넜습니다. 스코틀랜드군은 석상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2천여 명의 잉글랜드 병사들이 다리를 건넜습니다. 이어서 2천명, 3천명, 4천명, 5천명...그때까지 꼼짝 않고 있던 스코틀랜드 병사들의 모자에 달린 깃털이 일제히 움직였습니다.
“돌격! 한 부대는 교각 쪽으로 가서 잉글랜드군이 넘어오지 못하게 하라! 나머지는 나와 함께 다리를 건너온 5천명을 박살내자!”
월레스가 소리쳤고, 그 명령은 그대로 시행되었습니다. 강 건너편에 남은 잉글랜드군은 강을 건너간 5천명의 잉글랜드 병사들이 전멸당하는 모습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크레싱엄은 전사했고, 스코틀랜드인들은 크레싱엄의 가죽을 벗겨 말채찍으로 사용했습니다.
* 스털링 다리 전투 장면
스털링 전투가 벌어지던 당시에는 에드워드 1세는 프랑스에 있었습니다. 그 후 이어진 몇 차례의 전투에서 월레스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이 승승장구하면서 예전 영토를 회복하고 잉글랜드 국경까지 짓밟기에 이르렀습니다. 연이은 패전 소식에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에드워드는 이를 부드득 부드득 갈면서 귀국했습니다.
* 폴커크에서의 패배
추운 겨울이 지나자 에드워드는 스코틀랜드 놈들에게 본 때를 보여주겠다고 대군을 몰아 스코틀랜드로 진격해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밤, 에드워드가 말과 함께 넘어지는 바람에 말발굽에 채이면서 갈비뼈 두 개가 부러지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사방에서 왕이 살해되었다는 외침이 들려오자 에드워드는 극심한 고통을 참고 다시 말안장 위로 뛰어 올라 힘차게 달려갔습니다. 날이 밝자 왕은 다친 부위에서 여전히 극심한 통증을 느꼈지만 병사들에게 진격 명령을 내리고 폴커크 인근까지 진군했습니다. 그곳에는 스코틀랜드군이 늪지대 뒤쪽의 자갈밭에 정렬해 있었습니다.
에드워드 1세의 군대는 폴커크에서 월레스가 지휘하는 부대를 격파하고 스코틀랜드 병사 1만 5천명을 죽였습니다. 월레스는 남은 병력을 모아 스털링으로 후퇴했다가 잉글랜드군이 추격해오자 마을을 이용하지 못하게 불을 놓고 달아났습니다. 나중에 퍼스의 주민들도 같은 이유로 집들에 불을 놓았고, 식량을 구할 수 없었던 에드워드는 어쩔 수 없이 퇴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 스털링 성
이 때 존 베일리얼과 스코틀랜드 왕위를 다투었던 로버트 브루스의 손자인 같은 이름의 로버트 브루스는 에드워드에게 반기를 들었습니다. 베일리얼의 조카 존 코민도 함께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1303년 봄에 에드워드 1세는 시그레이브를 스코틀랜드 총독에 임명하고 병사 2만 명을 주어 이 반란을 진압하게 했습니다. 조심성이 부족했던 시그레이브는 에딘버러 근방 로슬린에서 병력을 셋으로 나누어 진지를 꾸렸습니다. 기회를 포착한 스코틀랜드군은 진지 세 곳을 따로따로 습격해 모두 격파한 뒤 포로들을 모두 처형했습니다.
* 스털링 성에 있는 월레스 조각상
그러자 에드워드 1세는 곧바로 대병력을 소집해 직접 공격해 왔습니다. 그는 스코틀랜드 북부를 가로지르며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폐허로 만든 다음, 동부 지방의 던펌린에 머물며 겨울을 지냈습니다. 이제 스코틀랜드에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코민과 다른 귀족들은 에드워드에게 항복하고 사면을 받았습니다.
결국 월레스 혼자 남았습니다. 에드워드 1세는 그에게 목숨을 살려준다는 보장은 못하지만 항복하라고 권유했습니다. 하지만 월레스는 분노에 찬 에드워드에게 계속 저항하며 하일랜드 계곡의 깎아지른 바위틈에서 지냈습니다. 독수리가 둥지를 틀고, 급류가 매섭게 흐르고, 흰 눈이 두껍게 쌓여 있고, 칼바람이 휘몰아치는 곳이었습니다.
그런 곳에서 월레스는 타탄 무늬 천으로 몸을 감싸고 칠흑처럼 어두운 밤을 수없이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 무엇에도 월레스의 용기는 꺾이지 않았고 용기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 어떤 시련에도 월레스는 조국에 닥친 불행을 잊거나 그냥 넘길 수 없었습니다.
* 월레스의 처참한 최후
끝에 가서 결국 누가 월레스를 배반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일행 중의 한 사람이 배반한 것은 틀림없을 겁니다. 월레스는 존 멘타이스에게 붙잡혀 런던으로 호송되었습니다. 용맹과 불굴의 의지로 명성이 자자했던 그를 보기 위해 구름떼 같은 군중이 모여들었습니다.
* 재판을 받고 있는 월레스, 머리에 월계관이 쒸어져 있습니다
월레스는 웨스트민스터 홀에서 머리에 월계관을 쓴 채 재판을 받았습니다. 월계관을 씌운 이유는 그가 웨스트민스터에서 왕위에 오르려 했다는 사실을 부각시키고 조롱하기 위하기 였습니다. 재판에서 월레스는 강도와 살인,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는 판결을 내린 사람들에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당신들은 내가 왕의 신하들이 약탈해간 물건을 뺏은 것을 보고 강도질이라 하고, 무례한 잉글랜드인을 죽인 것을 살인이라고 하며, 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적이 없는 내가 왕에게 충성하지 않고 충성하는 자들을 비웃었다며 반역이라고 한다.”
월레스는 말 뒤에 질질 끌려서 형장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높은 교수대에 목이 매달린 다음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내려져서 내장이 끄집어내지고 머리가 잘렸으며, 사지가 네 조각으로 나뉘었습니다. 월레스의 머리는 런던교에 효수되었고, 오른팔은 뉴캐슬로, 왼팔은 베릭으로 보내졌으며, 두 다리는 각각 퍼스와 에버딘으로 보내졌습니다.
* 영화에서 마지막 장면
하지만 에드워드가 월레스의 몸을 아무리 잘게 잘라서 전국 방방곡곡에 보낸다 해도 월레스의 명성은 그보다 갑절은 스코틀랜드 곳곳에 퍼져 나갔습니다. 영어로 된 노래와 이야기가 지속되는 한 월레스에 관한 노래와 이야기도 계속될 것이며, 스코틀랜드인들은 조국의 호수와 산이 없어지지 않는 한 월레스를 영원히 사랑할 것입니다.
* 월레스 이후
비록 반란군 지도자 윌리엄 월레스를 잡아 죽이긴 하였으나 스코틀랜드인들의 저항은 날로 심해졌습니다. 게다가 스코틀랜드 귀족과 평민들의 추대로 스코틀랜드 국왕이 된 로버트 1세(로버트 부르스)가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선포하자 에드워드 1세는 분노가 하늘을 찔렀습니다.
에드워드 1세는 로버트 1세와 싸우기 위해 직접 스코틀랜드로 원정을 나가 로버트 1세의 스코틀랜드 저항군과 싸워 그들을 격파하는데 성공했습니다. 패배한 로버트 1세는 아일랜드로 도주했습니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이 원정 도중에 병을 얻어 68세로 일생을 마쳤습니다.
끝내 스코틀랜드를 평정하지 못했던 에드워드 1세는 최후에도 이를 원통하게 여겼다고 전해지며 전설에 따르면 죽기 전에 '내가 죽거든 시체를 화장해서 남은 잿가루와 뼈를 부대 자루에 넣고 병사들과 함께 진군하여 스코틀랜드로 진군하라. 그리고 스코틀랜드를 완전히 평정한 후에 나를 묻어달라.'고 유언했다고 합니다.
사후에 그의 아들인 띨띨한 에드워드 2세가 부왕이 쌓아올린 업적을 죄다 갉아 먹었다고 손가락질 받았습니다. 에드워드 2세는 부왕에 비해 확실히 왕으로서의 능력이 뒤쳐졌으며 결국 로버트 1세와의 싸움에서도 패배하여 스코틀랜드의 지배권을 빼앗겨 버렸습니다.
결국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합병이 되는 300년이 지나서야 에드워드 1세의 소원이 이루어집니다.
[ 실제 에드워드 1세의 모습 ]
잉글랜드를 발전시키고 중앙 집권화의 초석을 쌓았으며 대외적으로도 큰 활약을 펼친 위대한 명군으로 손꼽힙니다. 전략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는데 수많은 전투를 치렀음에도, 대부분의 전투에서 패배를 겪어본 바 없었습니다.한편 적을 상대함에 있어서는 무자비했고 무척 잔혹하였습니다.
윌리엄 월레스같은 적들에게는 사지를 찢어버릴 정도의 잔인하고 냉혹한 모습을 보였으며 이 때문에 폭군이라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게다가 위에서 말한 유언(스코틀랜드를 삼킬 때까지 나를 묻지말라)을 남길 정도의 전설이 있을 정도로 성격은 지독했다고도 합니다.
* 영화에서 에드워드 1세
이와 같이 머리도 좋고 군사적 능력도 굉장히 뛰어나서 기술과 자원이 훨씬 발전했던 후대 15세기,16세기 잉글랜드의 왕들도 평정하지 못한 스코틀랜드를 거의 집어 삼킬뻔 했습니다.
그는 정력이 넘쳐흐르는 위풍당당한 체격을 가지고 기사로서의 기골이 장대했으며 사냥과 야전시합을 즐겼습니다. 별명인 꺽다리왕(Longshanks) 역시 그의 롱다리 덕분에 붙은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본다면 그는 훌륭한 편이었고 그의 천성은 고결했으며 경험에 의한 교훈을 선용한다는, 당시 국왕들로서는 드문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월레스 기념탑
성급하고 태만하며 완고하고 때로는 잔인했으나 동시에 노력가이며 성실하고 이성적이며 기사적인 이 국왕은 또한 유능한 정치가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에드워드 1세의 야심은 많은 무리수를 포함했고, 따라서 당대에나 후대에나 그를 잔혹한 폭군으로 단정하는 시각을 양산했습니다.
하지만 브리튼 섬이 민족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여러 갈래로 갈라져 싸움을 되풀이할 것이 아니라 하나의 정부 아래 통합된 단일 왕국이 되어야 한다는 그의 비전은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왕권 강화를 위해 그가 수립한 여러 제도들, 의회 제도나 재산권 관련 법령 등은 근대 영국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 월레스 장검
* 영화에 등장하는 에드워드 1세
멜 깁슨이 주연과 감독, 제작을 겸한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는 스코틀랜드의 저항군 지도자였던 윌리엄 월레스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만큼 대치되는 에드워드는 희대의 악당으로 등장합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명배우 故 패트릭 맥고한이 열연했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에드워드 1세를 연기한 배우 패트릭 맥고한도 에드워드 왕처럼 키가 188cm로 장신이었다는 것입니다.
작중 묘사되는 모습은 그야말로 권모술수의 달인이며 피도 눈물도 없는 성격에 혈육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계략과 술수에는 당할 자가 없는 노회하면서도 교활한 왕으로 묘사되어 강력한 카리스마를 보여줍니다.
* 영화에서...
다만 어디까지나 스코틀랜드인의 시점으로 묘사된 영화인만큼 과장될 정도로 비열하고 잔혹하며 몰인정한 면만이 부각되었다는 비판을 피하기 힘들 것입니다. 그래서 영화가 개봉될 때에는 잉글랜드에서는 이 영화를 전면 개봉 금지시키라는 요청이 빗발처럼 쏟아졌다고 합니다.
영화 속에서는 역사적 사실과는 달리, 런던으로 끌려온 윌리엄 월레스가 처형당하는 순간에 자신도 노환에 시달리며 죽어가다가 최후에 윌리엄 월레스가 산채로 칼로 난자당하는 고문을 받으면서도 "자유(Freedom!)"를 부르짖으며 죽자 그 소리를 듣고는 그 기에 질려서 숨을 거두게 됩니다.
더욱이 죽기 직전에는 프랑스 왕녀인 며느리 이사벨라가 윌리엄 월레스를 고통없이 죽게 해주도록 자비를 베풀 것을 애걸하자 이를 끝까지 거부합니다. 그러나 며느리로부터 사실 자신의 뱃속의 아이가 윌리엄 월레스의 아이이며, 에드워드 1세의 혈통은 단절되었다는 충격적인 고백을 듣게 되었으니 더욱 비참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 이사벨라로 분한 소피 마르소
물론 이는 실제 역사와는 전혀 다릅니다. 에드워드 1세는 윌리엄 월레스를 죽이고 나서도 2년 정도 더 살았을 뿐더러, 윌리엄 월레스가 사망할 당시에 며느리 이사벨라는 어린아이에 불과하였고, 심지어 윌리엄 월레스가 사망하고 에드워드 2세가 뒤를 이어 즉위한 후에야 혼인하였습니다. 그 뱃속의 아이가 윌리엄 월레스의 자식이라는 것도 영화의 재미를 위한 완전히 허구에 불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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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와우! 역사적 사실 방대한 자료 아주 유익하게 읽엇읍니다
이러다 소생도 서양사학자로 거듭 나곗읍니다
무임승차 죄송하고 기억의 탱크가 마를때까지 열시미 보고보고
익히겟읍니다, 감사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합쳐진 것은 에드워드 1세가 죽은 지 300년이 경과한 1603년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1세가 엘리자베스 여왕의 뒤를 이어 통합 왕이 되면서 였습니다.
얼핏 보면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를 병합한 모양이었지만 실제로는 제임스 1세는 잉글
랜드의 튜더 왕가(헨리 8세)의 후손이기 때문에 잉글랜드가 병합한 모양이 되었습니다.
잉글랜드가 스코틀랜드 왕가의 후손을 도저히 받아 들일 수는 없었겠지요.
아!! 그렇군요
앵글로색슨족 잉글랜드
겔트족 스코틀랜드
라고 알고있는디요
함릿은 덴마코 바이킹 후예
아뭇튼 인종이뒤섞여
항상 헷갈립니다
원래 영국에는 켈트족이 살았지요. 그러다가 로마군이 잠시 들어와 일부 통치를 했는데...
로마인들의 피는 별로 안섞였고...이후 덴마크에서 앵글로 색슨족이 대량 들어오면서 켈
트족은 웨일즈와 스코틀랜드로 쫓겨났지요. 이후 바이킹 족이 일부 들어와 섞였고...그리
고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노르만족이 들어와 잉글랜드를 지배했는데...사실 노르만족도
바이킹족의 일부라 웨일즈나 스코틀랜드만이 켈트족이 이어져 왔고 잉글랜드는 크게보면
모두 독일 북방의 게르만 족라고 보면 됩니다. 그래서 독일과 영국은 좀 비슷한데가 있지
요. 여기에 비하면 프랑스는 켈트족,라틴족,게르만족의 짬뽕입니다.
간략한 정리 완죤 정리됏심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