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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1월 23일 주일[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성서 주간)]
제1독서 : 2사무 5,1-3
제2독서 : 콜로 1,12-20
복 음 : 루카 23,35ㄴ-43
그때에 지도자들은 예수님께 35 “이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 하며 빈정거렸다.
36 군사들도 예수님을 조롱하였다. 그들은 예수님께 다가가 신 포도주를 들이대며
37 말하였다.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
38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라는 죄명 패가 붙어 있었다.
39 예수님과 함께 매달린 죄수 하나도,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 하며 그분을 모독하였다.
40 그러나 다른 하나는 그를 꾸짖으며 말하였다.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41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42 그러고 나서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하였다.
4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오늘의 묵상
김 동희 모세 신부
오늘 우리는 전례력으로 한 해를 마감하면서
예수님을 ‘온 누리의 임금’, ‘그리스도왕’이라고 고백합니다.
“이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루카 23,35).
오늘 복음에서 종교 지도자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빈정거리며 한 이 말은 예수님의 삶을 잘 요약해 줍니다.
주님께서는 다른 이들은 살리시면서
정작 당신 자신은 다른 이들을 위한 제물로 내주신 참된 사랑의 임금이십니다.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23,37).
군사들이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을 조롱하며 한 말입니다.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23,39).
예수님 곁에 매달린 죄수 하나가 그분을 모독합니다.
빈정거리고 조롱하고 모독하던 자들의 한결같은 주문은 ‘자신을 구원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임금이신 하느님 나라는 자기를 먼저 돌보는 그런 나라가 아닙니다.
반면에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강도 하나는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23,40-41)라고 하면서
자신이 벌 받아 마땅한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극심한 고통을 주는 십자가 위에서조차 저주를 내리시기보다
용서하시는 예수님에게서 참으로 선하신 구원자를 발견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윽고 그는 주님께 자신을 맡깁니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23,42).
그날, 그 시간 그에게 구원이 주어집니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23,43).
조 명연 마태오 신부
동창 신부 중 한 명이 자기 어렸을 때
미사 가지 않고 놀다가 걸려서 홀딱 벗겨져서 쫓겨난 적이 있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실 저의 부모님께서도 그렇게 하셨을 것 같습니다.
자주 그런 협박성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옛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더 엄격했었습니다.
조과만과를 바치지 않으면 부모님께서 밥을 주지 않았었고,
기도 때 졸면 그 자리에서 뺨을 맞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나이 많은 이도 공소회장 앞에서는 쩔쩔맸고 무조건 순종했으며,
찰고 때는 회초리를 맞으면서 교리 문답을 외웠다고 합니다.
파공 참례(의무적으로 참가해야 하는 축일에 노동을 쉬고 미사 참례하는 것)을 지켰고,
대축일에는 몇 십 리 길을 걸어 본당에서 미사 참례를 한 것으로 나옵니다.
너무 맹목적이고 과도한 것이 아니냐고 현대인들은 말할 것 같습니다.
그냥 먼 옛날의 일이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신앙이 아니라
공포에 의한 것이라면서 평가절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점이 있습니다. 그만큼 주님께 진심이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너무 편안하고 쉬운 신앙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자기 원하는 것만을 요구하고, 그 요구에 맞지 않으면
주님을 원망하고 또 부정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세상의 거센 유혹 속에서 주님께 진심으로 나아가는 신앙이 필요한 때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을 조롱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지도자들(35절), 군사들(36절), 죄수 하나(39절)입니다.
그들의 조롱 내용은 광야의 악마 유혹과 비슷합니다.
“네가 ~라면, 너 자신을 구원해 보아라.”라는 것입니다.
왕으로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왕권과는 큰 차이를 보입니다.
세상의 왕은 남을 희생시켜 자신을 살리고, 군림하며 힘을 과시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하여 남을 살리고, 사랑을 완성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십자가 위에서 용서와 구원을 베푸시는 진정한 왕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이 왕을 어떻게 모셔야 할까요?
바로 예수님 옆에 있었던 회개하는 죄수의 모습을 따라야 합니다.
그는 자기 죄를 인정하고, 예수님의 무죄함을 증언합니다.
그 누구도 하지 않는 모습이며, 진정한 신앙 고백입니다. 주님께 진심인 모습이었습니다.
이 모습을 통해서만 참된 왕이신 예수님을 모실 수 있었고,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따르는 왕은 군림하는 왕이 아니라,
가장 낮은 곳에서 고통 받는 이와 함께 있어 주는 참된 왕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왕을 맞이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우측에 있었던 도둑이 보여준 것처럼,
진심으로 회개하고 주님을 세상에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번 주일이 전례력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는 그리스도 왕 대축일입니다.
올 한 해, 어떤 모습으로 살아왔는지를 떠올리며,
새로운 한 해를 잘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이 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오늘은 전례력으로는 마지막 주일입니다.
이제 한 해를 끝맺고, 다음 주간부터는 대림시기가 시작됩니다.
교회는 오늘을 모든 시간의 주인이신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이 대축일은 단순히 한 해의 끝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역사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는 절정을 드러내줍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왕(임금)’은 대체 어떤 왕인가?
이를 오늘 <본기도>에서 이렇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사랑하시는 성자를 온 누리의 임금으로 세우시어 만물을 새롭게 하셨으니,
모든 피조물이 종살이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섬기며 끝없이 하느님을 찬미하게 하소서.”
이 기도는 두 가지 내용을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의 만물을 자신 안에 모아들여
새롭게 하시는 분으로서의 온 누리의 ‘왕’이심을 말해주며,
둘째는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죄의 노예상태에서 해방된 모든 만물이
그리스도의 ‘왕권’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말해줍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그리스도의 왕’과 ‘그분의 왕권’에 대해 이렇게 밝혀줍니다.
제1독서에서 원로들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우기 전에,
주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합니다.
“너는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고 이스라엘의 영도자가 될 것이다.”(2사무 5,2)
이스라엘 백성에게 ‘목자’는 하느님께 적용된 호칭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결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 길로 나를 끌어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시 23,1-3)
그러니 ‘목자’는 명령하고 군림하는 이가 아니라
돌보고 생기 돋우어주고 이끌어주고 살려내는 이입니다.
그러니 백성이 임금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임금이 백성을 섬긴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 당시의 임금들에 비추어 본다면, 가히 혁명적인 선언이었을 것입니다.
복음사가는 이를 이렇게 전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을 위하여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45)
이는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는 착한 목자'(요한 10,11 참조)이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왕’ 모습입니다.
제2독서는 그리스도의 우주적 온 누리의 주권과 다스림을 찬양하는 '그리스도 찬가'입니다.
이는 아버지께서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내시어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주셨고,
아드님 안에서 우리는 죄의 용서를 받게 되었음을 노래합니다.
무엇보다도 이를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콜로 1,20)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에서는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 위에 새겨진
'유다인의 왕'이라는 명패를 전해줍니다.
곧 그분의 ‘왕’의 모습을 생생히 드러내줍니다.
바로 십자가에 같이 매달린 두 강도의 이야기를 통해
진정한 왕의 다스림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밝혀줍니다.
곧 ‘그리스도의 왕직’의 참된 의미를 밝혀줍니다.
대체 그 나라는 대체 어떤 나라이고, 어떤 왕이 다스리는 나라인가?
사실 오늘 복음은 죽음의 현장이지만, 동시에 새 생명의 탄생을 말해줍니다.
곧 십자가의 죽음과 함께 새 생명으로 태어남을 말합니다.
이를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나라를 믿는 이’,
곧 십자가에 달린 죄수에게 선언합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3)
그렇습니다.
'오늘'은 하늘나라의 문을 열어 온 세상에 흘러들어오게 합니다.
이 하늘나라는 우리가 오늘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맞이하여 받게 되는 선물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건네주신 이 용서와 화해를 위한 사랑의 다스림이
바로 ‘그리스도의 왕직’의 진정한 의미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암브로시우스 성인은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의 왕좌는 십자가이며, 그분의 왕관은 가시로 된 것이다.
그러나 그 가시의 왕관이야말로 하늘과 땅을 다스리는 진정한 영광의 상징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우리 역시 십자가를 통하여
용서와 자비의 ‘그리스도의 왕직’을 수행하는 이들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처럼, 용서와 자비가 다스리는 나라를 이루는 일을 수행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의 왕직’에 참여하는 일이 됩니다.
오늘 우리는 이 직무에 충실할 것을 되새겨보며,
마틴 루터 킹이 살해당하기 전에 한 유명한 말을 되새겨봅니다.
“여러분이 우리에 대해서 세상의 온갖 폭력을 다 사용할지라도,
우리는 여러분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아멘.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조 욱현 토마 신부
1. 전례의 완성 : 십자가에서 드러난 왕권
오늘은 전례력의 마지막 주일,
곧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왕 대축일”이다.
이 대축일은 단순히 한 해의 끝이 아니라,
구원의 역사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는 절정을 드러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모든 피조물을 당신 안에서 새롭게 하셨다(에페 1,10).
그분의 왕권은 세속의 권세나 무력의 지배가 아닌,
사랑과 자비, 그리고 십자가의 봉헌에서 나온 왕권이다.
성 암브로시오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의 왕좌는 십자가이며, 그분의 왕관은 가시로 된 것이다.
그러나 그 가시의 왕관이야말로 하늘과 땅을 다스리는 진정한 영광의 상징이다.”(De Fide II,16,133)
2. 십자가 아래에서 드러난 왕의 모습
오늘 복음은 역설적이다.
왕의 모습이 아니라 패배자처럼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
그러나 그 안에서 참된 왕권이 드러난다. 지도자들과 군인들이 외친다.
“이자가 하느님의 메시아라면, 자신이나 구원해 보라.”(루카 23,35-37)
그들의 조롱은 세속적 왕권의 논리에 기반한다.
“왕이라면 힘이 있어야 하고, 자신을 지킬 줄 알아야 한다.”는 세상의 논리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자신을 구원하지 않음으로써 인류를 구원하신 왕”이시다.
그분의 힘은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의 능력, 그분의 통치는 자비로 다스리는 다스림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왕으로서 다스리셨다.
그분의 못 박힘은 그분의 승리이며, 그분의 죽음은 우리의 생명이다.”(Sermo 218,2)
3. 두 강도: 왕을 알아본 믿음의 눈
복음의 중심은 두 강도에 관한 이야기이다.
한 사람은 조롱하지만, 다른 한 사람은 십자가 위의 왕을 알아본다.
그는 회개하며 이렇게 고백한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42절)
이 고백은 단순한 두려움이나 구원의 욕망이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신앙고백이며 기도이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이미 왕국이 시작되고 있음을 본 것이다.
예수님은 즉시 대답하신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43절)
이 ‘오늘’은 단순한 시간의 하루가 아니라, 구원의 결정적인 순간,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모든 인류에게 열린 하느님 구원의 오늘이다.
바로 이 순간에 하늘나라의 문이 열렸다.
회개한 죄인이 낙원에 들어간 최초의 사람이라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왕권이 죄인을 구원하는 자비의 왕권임을 드러낸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를 이렇게 해석한다.
“그 강도는 열쇠도, 공로도, 선행도 없었으나, 믿음으로 하늘나라의 문을 열었다.
주님은 그를 왕국의 첫 시민으로 맞이하셨다.”(Hom. in Lucam 23)
4. 그리스도의 왕국: 사랑과 자비의 질서
바오로 사도는 오늘 제2독서(콜로 1,12-20)에서
그리스도의 왕권을 우주적 차원으로 확장하여 노래한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내시어,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콜로 1,13)
이 “아드님의 나라”는 단순히 미래의 천상 왕국이 아니라,
지금 우리 안에서 이미 시작된 사랑과 은총의 질서이다.
그리스도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콜로 1,15)으로서,
모든 피조물의 시작과 마지막이 되신다.
모든 만물이 그분 안에서, 그분을 통해, 그분을 향해 존재합니다(콜로 1,16).
성 이레네오는 이렇게 노래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은 새롭게 창조되었다.
그분은 새로운 아담이시며, 우리 안에 하느님의 통치를 다시 세우신 분이시다.”(Adv. Haer. III,22,3)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왕권은 우주적 재창조의 질서,
곧 모든 것을 그분 안에서 하나로 통합하시는 사랑의 권능이다.
5. 교회의 사명: 그리스도의 통치를 드러내는 몸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왕권을 교회를 통해 드러내신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분은 그 머리이시다(콜로 1,18).
머리로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생명의 힘을 교회 안에 흘려보내시며,
모든 구성원을 진리와 사랑 안에서 하나로 묶으신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왕권은 교회를 통하여 역사 안에서 실현된다.
이 통치는 강제나 권력이 아닌, 사랑과 섬김, 그리고 화해의 봉사로 실현된다.
교회 헌장은 이를 이렇게 표현한다.
“그리스도께서 진리와 생명의 임금으로 오셨듯이,
신자들도 죄와 죽음의 세력을 이기고
세상을 봉사로 다스림으로써 그분의 왕직에 참여한다.”(36항)
6. 결론: 낙원의 약속, 오늘의 부르심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씀은 단순한 약속이 아니라,
우리 각자에게 주어지는 초대의 말씀이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43절)
그리스도의 왕국은 먼 미래가 아니라 오늘의 사건이다.
우리가 지금, 이 순간,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선택할 때,
우리는 이미 그분의 낙원 안에 서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 위의 임금을 바라보며,
그분의 자비를 믿고, 그분 사랑의 통치에 기꺼이 자신을 맡기며,
그분의 은총 안에서 세상을 섬기는 백성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왕권은 강제의 왕권이 아니라 초대의 왕권이다.
그분은 우리를 억누르지 않고, 자유롭게 사랑하게 하신다.
우리가 그분의 왕국을 따르는 길은 오직 하나, 십자가의 길, 자비의 길, 사랑의 길이다.
“주님, 온 천하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계명을 기꺼이 따르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스러운 하늘나라에서 끝없이 살게 하소서. 아멘!”
조 재형 가브리엘 신부
휴가 중에 ‘가족 미사’를 하였습니다.
2년 전에는 ‘작은아버지 부부, 외삼촌 부부’가 함께 했는데, 이번에는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고령으로 몸이 불편하여서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대신에 새 가족이 함께하였습니다.
작년에 결혼한 조카의 아내가 가족 미사에 함께 했습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가 이어져 오듯이, 저희 집안의 신앙도 6대째 이어져 가고 있습니다.
역사는 혼자서 달리는 마라톤이 아니라, 역사는 함께 달리는 이어달리기라고 생각합니다.
작은아버지는 베드로 사도와 같았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으셨던 예수님의 질문에
‘선생님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했던 베드로 사도처럼
작은아버지 삶의 중심에는 언제나 ‘신앙’이 있었습니다.
제가 사제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작은아버지의 말이 있습니다. 작은아버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자식들에게 물려 줄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한양 조씨라는 성이고, 다른 하나는 천주교라는 신앙이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는 것도 작은아버지에게 배운 것입니다.
외삼촌은 바오로 사도와 같았습니다.
유교의 가풍을 이어받은 외삼촌은 세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누나인 어머니가 천주교 집안으로 시집와서 신앙인이 된 것은 받아들였습니다.
제가 사제가 되었을 때 외할머니가 마리아로 세례를 받았고,
외할아버지도 요셉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저는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의 장례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그제야 외삼촌은 세례를 받았습니다.
늦게 시작했지만, 외삼촌은 바오로 사도처럼 신앙 안에서 충실하게 살았습니다.
사목회에서 봉사했고, 레지오에서 봉사했습니다.
제가 외삼촌이 있는 성당에서 ‘특강’을 했을 때는 무척이나 좋아하였습니다.
늦게 신앙을 시작했기에 누구보다 열심히 봉사했습니다.
본당 사제의 좋은 점은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였고,
본당 사제의 부족함이 있을 때는 조용히 기도하였습니다.
외삼촌은 조상들을 모신 선산에서 미사하고 싶다고 제게 말했습니다.
저는 기쁜 마음으로 선산에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외삼촌은 조상들의 영혼이 하느님의 품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을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그리스도 왕은 어떤 분이셨는지 생각해 봅니다.
권위는 있으셨지만 권위적이지는 않으셨습니다.
힘은 있으셨지만, 그 힘을 남용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섬김을 받으실 자격이 충분하셨지만, 오히려 섬기려고 하셨습니다.
그분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대신 지셨습니다.
그분은 피땀을 흘리면서까지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그분은 나병환자, 중풍 병자, 소경, 세리와 창녀들과도 함께 하셨고
그들을 치유해 주시고, 위로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권위는 겸손함에서 생겼습니다.
그분의 힘은 사랑함에서 생겼습니다.
그분은 비록 돈과 조직, 엄청난 배경은 없으셨지만,
희생과 봉사 그리고 기도의 힘으로 세상을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분은 승리하셨고, 그분은 우리들의 구세주가 되었고,
오늘 우리는 그분을 그리스도 왕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명의 죄수가 예수님 곁에 있었습니다. 한 명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 명은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율법을 많이 알았던 사람도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나라의 왕도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로마의 총독도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예수님은 지식으로 알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능력으로 알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권력으로 알 수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았을까요?
밤을 새워 양들을 돌보던 목동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알아보았습니다.
눈이 멀었던 소경은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세관장이었던 자캐오는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막달레나는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백인대장은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가난한 사람, 헐벗은 사람, 병든 사람은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회개한 사람, 겸손한 사람은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갈망이 있는 사람, 꾸준히 기도하는 사람, 영적으로 깨어있는 사람,
가진 것을 나누는 사람은 우주보다 크신 예수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인생은 풀잎 끝에 맺혀있는 이슬방울 같다고 하였습니다.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이면 말라버리는 들꽃과 같다고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고통의 바다에서 외로이 떠 있는 작은 배와 같다고도 하였습니다.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주님과 함께 지내면 풀잎 끝에 맺혀있는 이슬방울도 아름다운 보석으로 변하게 됩니다.
저녁이면 말라버리는 들꽃도 천상의 향기를 갖게 됩니다.
고통의 바다에 떠 있는 작은 배도 목적지를 향해서 힘차게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 나라는 진리와 생명의 나라요
거룩함과 은총의 나라이며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나라이옵니다.”
너무나 은혜롭고 감동적인 우도 직천당 사건!
양 승국 스테파노 신부
축구시합을 할 때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아주 극적인 경우를 봅니다.
막판 뒤집기입니다. 경기가 거의 다 끝나가는 순간입니다.
후반전 남은 시간은 1분, 스코어는 1:0 우리가 지고 있습니다.
우리 팀의 패배가 거의 확실합니다. 그러나 가끔 기적 같은 일이 생기지요.
막판에 젖 먹던 힘을 다합니다. 정규 시간이 끝나는 순간 우리 편이 한 골을 넣고 동점을 만듭니다.
그리고 심판이 준 추가시간이 2분, 한 골 넣은 여세를 몰아 종료 직전 한 골을 더 넣습니다.
극적인 역전승이지요.
그 순간의 기분은 정말 하늘을 나는 기분입니다.
선수고 코치며 감독까지 다들 너무 좋아 얼싸안고 경기장 위에 쓰러집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극적인 ‘막판뒤집기’ ‘인생 역전’이 오늘 복음에서 이뤄지고 있습니다.
그 주인공은 우도였습니다. 그는 정말 행운아였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 이제 정규 게임은 끝나고 추가 시간에 막판뒤집기를 성공시킵니다.
우도는 너무나 죄스러웠고 송구스러워, 차마 그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지만,
용기를 내어 예수님께 아룁니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이런 그는 누구였습니까? 좌도에게 자신의 말을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우도는 형 중에 가장 극형으로 손꼽히는 십자가형을 언도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십자가형은 예수님처럼 무죄한 형벌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잘못과 과오로 인한 형벌이었습니다.
그는 아마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나쁜 짓이란 나쁜 짓은 다 하고 다녔을 것입니다.
나라에서도 몇 번 기회를 줬겠지요. 그러나 번번이 그는 그 좋은 기회를 놓쳤습니다.
그 결과가 십자가형이었습니다.
이런 그였지만,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막판에 용기를 냈기에,
늦었지만 예수님 안에 긷든 하느님의 신성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명확히 신앙을 고백했기에 이런 정말 놀라운 상급을 선물로 받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우도 직천당 사건’을 묵상할 때마다
저는 우리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온몸으로 확인합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구원의 대열에 합류한 우도의 신앙을 묵상할 때마다
저는 크나큰 마음의 위로와 평화를 얻습니다.
끝까지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느님,
마지막 순간까지 문을 열어놓고 계시는 인자하신 아버지,
그분의 사랑 앞에 감격할 뿐입니다. 행복할 뿐입니다.
적대자들에게 체포되신 예수님,
그 이후에 보여주신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은 철저하게도 수동적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끌려가는 어린 양’이셨습니다. 조금의 저항도 없이 순순히 포박당하십니다.
헤로데 앞으로, 빌라도 앞으로 그저 그들이 원하는 대로 끌려가십니다.
이제 더 이상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메시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위엄과 지혜로 가득 찬 영광의 왕으로서의 모습도 더이상 없습니다.
무기력한 메시아, 한갓 말단 군인으로부터도 무시당하는
왕인 예수님의 마지막 모습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듭니다.
더 이상 놀라운 기적도, 가슴 뛰게 하는 치유 활동도, 감동적인 강론도 없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에 실망을 느낀 군중들도 떠나갑니다.
정녕 모든 것이 끝나버린 걸까요?
그러나 오늘 복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명명백백하게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상 위에 높이 높이 매달리신 예수님,
무거운 십자가를 저 밑에서도 부터 골고타 언덕 끝까지 지고 오시느라 체력도 다 고갈되신 예수님,
무수한 채찍과 못 박힘으로 인한 출혈로 모든 에너지가 다 빠져나간 예수님,
죽음을 목전에 둔 예수님이셨지만, 그 절박하고 고통스런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그 순간 당신이 행하셔야 할 마지막 사도직을 또 수행하고 계십니다.
그 사도직은 바로 회개하는 우도에게 구원을 선포하는 사도직이었습니다.
죽음의 길을 걸어 가시면서도 한 인간의 구원,
그것도 가장 몹쓸 인간의 구원을 위해 노력하시는 하느님께
그저 감사와 찬미를 드릴 뿐입니다.
참된 희망은 어디에?
주 수욱 베드로 신부
1, 희망을 찾는 불안한 인간
어느 날 우리는 이 지구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살아가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태아로서 살해되기도 합니다.
갓 태어나서부터 온갖 질병에 시달리면서 어떤 때는 생명이 위태롭기도 합니다.
지구라는 별에서 각종 조건에 적응하면서 살아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아랍 세계에서 태어난 어린이들은 각종 군사적 폭력 때문에 희생되고 있습니다.
북한에 태어나면, 잘못하면 꽃제비가 되고 맙니다.
여러 나라에서 어린아이들이 학교에 가는 것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한국처럼 어려서부터 참다운 인간 교육은 외면하고 경제적 불평등을 전제로 한
엄청난 경쟁에 내몰리는 나라도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회에 첫발을 내디디려고 할 때부터
젊은이들은 일자리를 찾지 못해서 허둥거리면서 살아갑니다.
나이가 들수록 혼자 감당해야 k는 커져가는 책임감,
사회적 안정장치의 미흡함은 사람들을 생사의 기로에 서게 합니다.
인간 내면의 불안함, 자연과 인간의 충돌로 말미암은 비참함,
가정 안에서부터 인간관계의 불확실함과 사회의 여러 차원에서 벌어지는 긴장들은
오늘 현대인을 참담하게 만들어 놓습니다.
문제는 대책 없이 고령화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만수무강한 고령자나 젊은이나 할 것 없이
모든 세대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 것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수께끼 같은 죽음 앞에서 인간은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인간은 희망을 찾게 됩니다.
헛된 희망을 추구하기도 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 살아가기도 합니다.
때로는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문제를 외면하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도대체 인간은 희망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특히 오늘 한국의 비참한 정치적 상황에서
국민은 어디서 근본적인 희망을 발견한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2.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알려주신 진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 스스로는 알 수 없는 인생의 신비를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존재하십니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은 영원을 그리워합니다.
하느님을 찾고 있습니다.
영원한 하느님, 사랑의 하느님, 자비로운 하느님께서 온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조의 능력을 발휘한 하느님 앞에 인간이 서 있습니다.
인간은 동물 모양을 하고 있지만, 결코 동물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특별히 인간을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은 신적인 존재입니다. 그 인간의 특징은 바로 자유입니다.
오늘 인간이 겪는 그 모든 고통과 모순의 원인은 하느님을 닮은 인간이
자유를 행사해서 하느님 없이 하느님처럼 살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창세 3,5 참고)
그렇게 하느님을 떠나서 살아가는 인간은 비참합니다.
인간은 하느님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아이들이 부모님과 함께 살아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셔서 인간을 찾아오셨습니다.
인간이기에 죽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심으로써 이 세상에서 하느님께서 함께 살아계시고
영원한 생명을 일궈내심을 보여 주십니다.
3. 하느님께서는 시작한 일을 완성하십니다.
하느님은 아무리 힘들어도 시박하신 창조사업을 완수하십니다.
특히 인간을 특별하게 만드셨는데, 인간이 마음에 안 드신다고
창조사업을 중간에 팽개치고 포기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느님은 무한한 자비하심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내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폭력의 한 가운데서 하느님의 숭리, 완성을 보여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왕이십니다.
인간의 반역 때문에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포기하시는 분이 결코 아닙니다.
4. 그 완성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오늘도 하느님의 창조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일은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 결정적인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파스카입니다.
오늘 우리는 미사성제를 올리면서 성체성사 안에서 그 파스카를 기억하고,
오늘 죽음에서 참 생명으로 넘어가고, 그 완성을 향해서 나아감을 선언합니다.
그래서 지금 닥치는 고난과 모순을 받아들이며 희망 속에서 용기를 갖고 나아갑니다.
남이 마셔야하는 독주를 대신 나누어 마셔주자.
박 영식 요한 신부
어느 노인이 빵을 훔쳐 먹다가 재판을 받게 되었다.
판사가 법정에서 노인에게 “나이를 그렇게 많이 먹고도
염치없이 남의 제과점에 들어가 빵을 훔쳐 먹었습니까?”하고 비난했다.
노인이 이 말을 듣고 눈물을 글썽이며,
“사흘을 굶었더니 눈에 아무것도 안 보였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판사가 한참 궁리하더니
“당신이 빵을 훔친 절도행위는 10불 벌금형에 해당합니다.”라고 판결을 내렸다.
방청석에서는 술렁대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사정이 얼마나 어려워 빵까지 훔쳐 먹었겠는가?
이것은 판사가 사면해 줄 수도 있는 경범이 아닌가? 너무하다.“
그때 판사가 자기 지갑에서 10불을 꺼내며,
“그 벌금은 내가 내겠습니다.
그 이유는 내가 그동안 맛좋은 음식을 실컷 먹은 죄에 대한 벌금입니다.
오늘 이 어르신 앞에서 참회하고 그 벌금을 대신 내어드리겠습니다.“
이어서 판사는
“이분은 법정에서 나가면 또 빵을 훔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이 자리에 계시는 방청객 여러분도 맛있는 음식을 많이 잡수신 대가로
성의껏 기부금을 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방청객들도 호응해 십시일반 호주머니를 털어 돈을 모았는데,
그 액수가 무려 47불이나 되었다.
그 판사는 이 재판으로 갑자기 유명해져 뉴욕시 시장이 되었다.
이분이 바로 ‘표렐로 라과디아Fiorello la Guardia 판사이다.
1934년부터 1945년까지 세 번이나 뉴욕시장으로 일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뉴욕시장으로 재직 중에 비행기 사고로 순직했다.
뉴욕시청은 시내에서 가까운 허드슨 강 옆에 공항을 만들어
그 판사의 이름을 따라 ‘라과디아’라고 부르고 있다.
오늘도 많은 여행자들이 이 공항을 이용하며 그 판사의 선행을 기억한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처형된 죄수 하나는
그분의 죽음에서 나오는 구원의 힘에 이끌려 회개하고 그분을 참된 임금님으로 알아 뵈었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루카 23,42-43)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죗값을 대신 치르시어
우리가 영원히 행복의 극치 속에서 살게 해 주시는 임금님이다.
예수님의 왕적인 권능과 권위는 당신을 한없이 낮추시는 데서 비롯된다.
그분은 하느님과 동등하신 분이지만
그분께 순종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까지 당신을 낮추셨다.
하느님의 품성은 당신을 비우시는 데서 드러난다.
비하와 순종은 사랑의 특성이요, 하느님의 품성이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은 서로 자기를 낮추고 순종한다.
하느님이 완전무격하고 전지전능하신 분이라고 하여 부자 방망이 같은 분으로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이러한 하느님의 완전한 품성은 비하와 순종으로써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신다는 뜻이다.
“가장 완성된 사람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 사람들이 좋건 나쁘건 가리는 일 없이 모든 사람에게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이다.“
순종은 사람의 기본 품성이다.
그리스도께서 목숨을 바쳐 하느님 아버지께 순종하여 당신이 참 사람이심을 드러내셨다.
예수님은 사람으로서 하느님 아버지께 순종하시는 아들이다.
이처럼 예수님은 순종하심으로써 모든 피조물의 임금이 되셨다. 순종만이 명령권을 준다.
예수님은 종교적인 뜻에서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시는 임금일 뿐만 아니라
개개인 사이나 민족과 민족 사이의 알력과 분쟁과 불의와 증오심과
온갖 사회악을 없애주는 정치지도자로서 온 세상의 임금이시기도 하다.
예수님은 당신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을 통해 이 세상을 다스리신다.
그래서 우리는 가정, 교회, 사회 경제, 정치, 문화
모든 영역을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변화시킴으로써
그분이 온 세상의 임금이심을 증언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임금으로 모시든지 자기가 임금이 되든지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
예수님이 자기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정하시는 임금으로 모시는 이들은
제2 그리스도가 되어 하느님과 같은 존재가 되고
이기심과 이 세상의 죄를 이기는 임금으로 군림할 수 있다.
부처가 된 석가모니보다 더 행복해 진다.
그들은 살인마도 품어주고 착한 사람도 안아주는 어머니 같은 이들이다.
바오로 사도처럼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되는 사람이다.
천주교 신자들은 보답을 바라지 않고 은혜를 베풀고, 베푼 뒤에는 결코 후회하지 않으며,
예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증언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본받아 공동체나 직장이나 사회나 국가를 지도하는 위치에 서서도
권위를 주장하지 않는다.
신자들은 가족과 이웃과 동료직원과 백성을 위해
온갖 조롱과 모욕을 마다하지 않고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다.
현대세계에 가장 영향력이 큰 지도자들 중 한 분이 프란치스코 교황이라는 조사결과가 나왔다.
이념과 당리당략과 민족주의와 종교적 우월주의와
교황이라는 자존심을 다 집어던지고 의인과 죄인을 다 포용하기 때문이다.
교황은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리고, 병들과, 억압받는 사람들이 당해야 하는
고통을 대신 짊어주기 때문에 전 인류의 지도자로 존경받는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면 영원한 죽음과 파멸밖에 없다.
오늘 대통령처럼 욕심을 부리는 자들은
사람을 불행하게 하고 슬프게 하며 나라를 송두리째 망가뜨린다.
절도범이 내야하는 벌금을 대신 내어준 라과디아 같은 사람들이 아쉽다.
우리가 잘 먹고 잘 입고 잘 노는 동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들이
굶주림과 고통과 병고와 슬픔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
그들이 마셔야 하는 독주를 우리가 나누어 마셔주자.
아무런 보상도 요구하지 않고 따뜻한 마음을 주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사라에 미쳤지만 눈알이 맑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
아무리 바빠도 마음이 아픈 나를 기다리며 나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
내 기쁨을 위해 내보다 더 크게 웃어주는 사람,
나의 건강을 위해 내 술잔을 대신 마셔주는 사람,
내가 이렇게 무작정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나의 삶은 결코 헛되지 않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주님,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이 승화 시몬 신부
신학생 때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부제품을 받기 직전입니다.
평신도로서 삶을 마무리하고
이제 성직자로 살아간다는 사실에
큰 무게감과 책임감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아직 나는 부족하지 않은가?
내가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당장 본당에 가서 행정적인 부분을 어떻게 할 수 있는가?
이런저런 생각에 생각을 거치게 되자
점점 나의 나약함과 부족함이 드러났습니다.
그러다 깨달았습니다.
지금 생각에만 머물러 있기보다
지금까지 내가 걸어왔던 길을 살펴보았습니다.
방학 때마다 보좌 신부님을 따라다니며 체험한 것들
주임신부님이 자주 시키셨던 강론들
학교에서 봤던 책들과 썼던 리포트와 논문
그리고 기도의 흔적들까지.
결국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 안에 이미 시작되었던 길이
서품을 받음으로서 열매를 맺어갈 수 있는 시작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시작은 내가 걸어온 과거를 기반으로 하기에 흔들리지 않고
이 길을 걸어가며 얻게 된 경험과 체험은
앞으로 걸어갈 길에 전해줄 사랑의 향기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용기를 가지고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전례력상 한해의 마지막을 보내는 오늘도
같은 마음입니다.
마지막이라고 하면 새로운 시작을 위한 설렘도 있지만
그동안 내가 무엇을 하고 살았는가 라는 두려움도 있습니다.
마지막이 심판의 때라고 생각된다면
그저 피하고 싶은 시간이 되지만
새로운 시작을 위한 점검의 때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희망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한 가지
하느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 중의 왕이시며
우리를 위한 사랑으로 자신을 내어주셨고
부활을 통해 우리를 당신 나라로 초대하셨다는 믿음
이 믿음을 통해 우리는 모두와 하나 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바라보는 예수님이 아니라
내가 느끼고 체험한 예수님을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십자가의 고통과 수난 죽음을 바라보며
두려움보다 그분의 사랑을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그분과 함께 낙원에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내 생각에만 멈춰있기보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길 바랍니다.
이미 걸어온 여정 안에 담긴 하느님을 바라보며
오늘 새로운 시작을 향한 발걸음을 내딛는
그런 한 주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https://frsimon.tistory.com/1678 [시몬 신부의 신앙이야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