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생각인데여~ 나쁘게 듣지말구 들어주세염~~
님의 글은 웬지 어디선가 많이 들어 본 듯한 글인 거 같아여..
저의 생각은 진정으로 소설이나 시를 사랑하는 분이시라면 아무리 유치해도 좋으니 자신의 생각을 올려놓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어요..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관도 없이 남이 적어놓은 글이나 사상가들의 이름들을 자신의 것인냥 자랑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그런데 정말 그런 것들이 자신의 생각을 바꿔 놓을 수 있을까요??
그 속에서 자신의 독창적인 생각이나 사상이 생겨난다면 그럴때 자신이 느낀점들을 조심스레 드러내놓는것이 정말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진정한 태도라 생각합니다.저두 랭보를 사랑하는 입장에서 드리는 말씀이니 나쁘게 듣지 말아주세요..^^ 저두 아직 그런 모든 것들을 배우는 과정이기에 이런 말할 자격이 못 되거든요..^^
혹시 몇 년 전 한석규가 주연을 맡았던 “넘버 3”를 기억하는지! 거기서 타락한 이미연의 시선생을 하던 그 랭보! 이제 한국 사람들은 랭보라는 이름의 유명한 시인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가 누구인지 모르겠으나, 넘버 3에 나온 그 시선생을 기억하고는 웃고 바로 잊는다.
이 책을 온라인 서점에서 맞딱뜨렸을 때, 나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이클립스’라는 영화가 생각이 났다. 앳된 소년, 빠리의 뒷골목과 남루한 여관방에서 몇 명의 시인들과 “빌어먹을!”을 외치던 대책 없던 소년, 한 가정을 파멸로 가져가고, 자신도 타락의 끝에서 돌파구를 잊었던 답답한 소년… 그리고 잊었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았다. 그는 왜 타락해야만 했나..그가 원한 것은 진정 무엇이었을까.
그를 만나보자라는 심산만으로 구입을 서둘렀던 이 책을 받아본 나는 맨 처음 549쪽이라는 방대한 두께, 엄청난 크기(!).. 그 중량감에 질렸다. ‘도대체 그에 대해 이리도 할 말이 많단 말인가. 쩝’ 책을 구입하고도 워낙 밀려있던 책이 많았고, 그 질림이 삭히기 전에 그를 선뜻 불러내기가 어려웠었다. 그러던 차에 이제는 도저히 미룰 수 없어 549페이지의 엄청난 중량감을 펼쳤다. 미리 말해두지만, 마지막 200페이지 정도를 남겨두고 도저히 전철에서 들고 다니며 읽을 수도 없고, 다른 볼 일로 인해 발생하는 이동시 엄청난 가방의 무게로 인해 귀가 시에만 읽었을 정도로 책이 크고 무거웠다.
그리고 내가 쁘띠피스(랭보학회 회장 역임)라는 사람을 통해 듣는 랭보의 이야기도 무거웠다.
그의 인생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대담무쌍 팔방미인! (수학 제외)
총명했던 랭보가 자기의 인생을 던지려 했던 시인의 길, 투시자의 길.
세상에 대한 리얼하고 비꼬는 투는 우리 마음을 헤집어 놓는다. 마치 헤르만 헤세의 그 크눌프처럼.
사람들은 그의 시의 천재성을 두고, 더구나 그 시들은 그가 20세 이전에 이룩한 시선들이였다는 것을 두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하지만 그의 시에는 그가 세상을 바라보았던 현실이 있었고, 그 현실속에서는 고뇌하는 인간 랭보가 있었다. ‘진정한 시인’이 되고자 용기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랬던 그는 아마 인생을 살면서 단 한 번도 자신이 성공했다고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총망 받던 그 무서운 시인은 당시 폴 베를렌느와의 추문에 휩싸여 인간관계의 실타래가 서로를 옭아매던 그 시절. 그는 문학계를 떠날 수 밖에 없었다. 환멸을 느끼며…
절필을 선언하며 방황하던 20대, 큰 돈을 찾아 정처 없이 방랑하고 정착하길 그다지도 원했건만 제대로 잠을 이루지도 못했던 30대.. 그리고 전신암으로 인한 37세의 죽음.. 그는 너무도 애처롭게 인생을 마감할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운명이였겠지만, 난 그 조급함에 그를 탓하고만 싶었다. 조금만 더 신중했더라면, 1차 세계대전이 지나가고, 2차 세계대전이 지나가고.. 그는 20세기에 할 일이 많았을 시인이 되었을 터.(본인이 그렇게도 원했던 진정한 시인) 하지만, 그는 기다리지 못했고, 자신의 총명함을 믿고 세상의 시인들에게 ‘시인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뛰쳐 나갔던 것이다. 오로지 욕심은 ‘진정한 시인의 이상형’이 되고자 했던 것.. 존중과 겸손은 존재하지 않았다. 소리지르고 스스로 방탕한 생활을 택했으며, 거기에 베를렌느에 대한 연정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는 동성애자로 10대를 보내 그 추문이 그의 사후에도 지속되었지만, 쁘띠피스는 그의 동성애는 오히려 파트너였던 베를렌느에 의해 확대해석된 부분이 많다는 점을 지적한다. 실제로 그의 편지 내용글을 보면 베를렌느와 투시자의 모습으로 태어나기 위해 그를 많이 독려했고, 그와의 애정행각에 대한 오해와 질타, 스스로에 대해 타락에 대한 반성을 통해 오로지 시인의 모습이고자 했던 의지가 담겨져 있다. 질풍노도 시기의 랭보는 그 전형이였고, 그 속에서 잉태된 시는 그의 사후 그 위치를 인정 받게 되었다. 어쩌면, 랭보는 결국 자신의 목표을 이룬 것이 아닐까.
만일 내가 랭보의 친구였다면 결국 끝까지 그의 편이 되주지 못하던 들라에처럼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세상에 내던져진 핏투성이들이다.(하이데거) 세상에 내가 핏투성이도 내던져진 존재라는 존재감을 깨닫는 순간만큼 고독하고 외롭진 않을 것이다. 낯선 존재들이 다가오는 낯선 세계속에 자신의 냉철한 의지를 믿고 단계를 초월해 간다는 것은 상상보다 더한 고통을 수반할 것이다. 자신의 껍질을 스스로 배끼는 것만큼 더한 고통은 없으니깐. 랭보는 그걸 했고, 그 고통을 겪었으며, 그리고 결국은 해결하지 못하고 희망을 갈아 먹으며 인생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