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바로알고 바로하기 ㅡ2●
<잡아함경 제4권 92.교만경>
위의 교만경 상담 사례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예배보다 더 중요한 점은 깨끗한 마음이라는 것을 확인한 것으로 예배의 참뜻을 가르치신 것이다.
또 예배를 조장하거나 강요하지 않은 붓다의 실상을 바로 볼 수 있는 경전의 예를 살펴보자.
붓다의 자비행 가운데 박칼리를 찾아가 문병(問病)상담한일이 있다.
붓다께서 ‘죽림정사’에 계실 때 비구 박칼리가 라자가하에 있는 어떤 도공의 집에서 앓고 있었다. 간호하는 스님에게 부처님을 한번 뵙고 예배드렸으면 싶은데 죽림정사 까지 갈수 없군요. 간호하던 스님의 전언에 따라 붓다께서는 병문안 하러 도공의 집으로 오셨다.
박칼리의 머리맡에 앉아 뼈만 앙상하게 남은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나지 못하게 한 다음 말씀 하셨다. 붓다께서 “박칼리여, 그대로 누워 있어라. 일어날 것 없다. 병은 좀 어떠냐? 음식은 무얼 먹느냐?”고 나직하게 물으셨다. 박칼리는 말씀드렸다. “붓다님, 고통은 심하고 음식은 통 먹을 수가 없습니다.
병은 더하기만하여 소생할 가망이 없습니다.”
붓다께서 “박칼리, 너는 어떤 후회되는 일이나 원통하게 생각되는 일이 없느냐?”고 물으셨다.
박칼리는 “제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부처님을 찾아뵙고 예배드리고 싶었는데 몸을 움직일 수가 없는 것이 후회되고 원통했습니다.”라고 말씀 드렸다.
붓다께서 “박칼리, 이 썩어질 몸뚱이를 보고 예배(禮拜) 해서는 어쩌자는 것이냐! 법(法)을 보는 사람은 나를 보는 사람이며, 나를 보는 사람은 법을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나를 보려거든 법을 보아라.”고 하셨다.
<아함경>
붓다께서는 자기 자신을 결코 ‘신앙의 대상이나 예배(禮拜)의 대상이 아니라’고 힘주어 말씀 하셨다.
3. 예배 형태
위의 교훈에서 우리나라에서 변형되어가고 있는 불교의 예배관행(禮拜慣行)을 점검하고 개선할 점이 있으면 더 굳어지기 전에 고쳐나가야 할 것이다.
부처님 당시 부처님을 중심으로 하여 오른쪽으로 세 바퀴 돌고나서 부처님의 발아래 예배하고 한쪽으로 물러앉아 있는 것이 예절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인도에서는 수행자나 성자에게 예배하는 것이 상례로 된듯하다. 티베트불교에서는 전신 전면오체투지(全身前面五體投地)로 시행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합장(合掌)이나 오체투지(五體投地) 예경의 형태는 인도의 것이라는 점이다. 합장 예배는 우리나라에도 불교교단에 흡수되어 체질화 되었다. ‘우리나라 불교전래1600여년이 지났지만, 우리민족은 오체투지로 절하기도 하지만 본래 생활화하고 있던 일반적인 예배법을 사용했다. 여인들은 보다 더 장엄한 몸짓으로 예배했었다.’
- 불교예술3권 -
옆 사람이 부딪칠 정도로 양쪽 팔을 크게 벌려 아래에서 위로 휘감아 원형을 그리면서 내려서 합장한 채 끝나고, 다시 시작하는 우리들의 고유한 전통적인 신불에게 드리는 절(拜)이 있었던 것이다.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 불교인들이 외국의 여러 나라에 왕래한 이후에 종전과 다른 새로운 모양이 생기게 되었는데 그중의 하나가 절하는 모습이 이상하게 변형되기 시작 것이다.
그것이 예배하고 나서 양손을 뒤집는 모습이다. 이것을 접촉례라고 하는데 국어사전에도 없는 말이다. 지금은 신도 법요집과 사찰의 신도교육지도지침서에 까지 수록되어 교재로까지 사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스리랑카 미얀마 인도와 티베트 태국 등 어디에도 찾을 수 없는 예배형태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큰 법당에서 예배할 때 손동작을 보면 1960년대 이전에 불자가 되었거나 모태신앙이었던 신도의 손 모습은 일반적인 전통적 절할 때 모습이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불자가 된 분들은 손으로 귀를 감싸거나, 귀 위로 바로 세우거나, 아니면 머리위로 두 손바닥을 치켜세우는 분도 있는 실정이다.
한마디로 성스러운 종교의식에 있어서 기초가 되는 예절마저 통일되지 않다는 것은 넓은 의미에서 보면 무질서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손동작을 하고 절하는 것은 일본사람들에게 찾을 수 있다. 단지 일본사람들만 그와 비슷한 형태를 하는 것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친일(親日)이니 왜색(倭色)이니 하면서도 정작 고칠 것은 모르는 채 하고 있는 것이다.
4. 예배 횟수
또, 예배문제중에 세 번 하는 절(三拜)에 대한 것, 많이 절하는 다배(多拜) 관행 및 재(齋)를 올릴 때 절하는 횟수 등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다. 옛날에는 절에 가면 법당에서나 세 번 절하는 것으로 여기고, 재(齋) 지낼 때도 영단(靈壇)에 두 번 배례(拜禮) 하는 것으로 별일 없이 살아 왔는데, 역시 1960년대부터 스님께 세 번 절하고 법당에도 세 번 절하는 특별한 형식이 전개되어오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노장스님들께 여쭈어보면 근래에 그렇게 되어버렸다고 증언 하시고 있는 실정이다.
“1994년 10월 6일 조계종 개혁회의가 통도사에서 개최한 종단개혁불사 보고법회 법어(法語)를 통해 종정(宗正)스님은 ‘승려나 신도가 큰스님에게 3배(拜)를 올려 인사하는 관행은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살아있는 사람에게 3번 절하는 것은 불경(佛經)이나 불교의례(佛敎儀禮) 어디에도 근거가 없는 것이며, 불전(佛前)이 아니면 절(拜)은 한번으로 그쳐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절에서 재(齋)를 올릴 때 영가(靈駕)에 2번 절하면 되고, 집전하는 스님에게 절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밝히면서 이것부터 개혁하라고 권장하셨다.
- 문화일보 기사/월하스님 대담/1994. 10. 8(토) -
다른 노장스님의 기록물을 살펴보자
“영단(靈壇)에 잔을 올리고 뒤돌아서서 절하지 말라. 집중하여 재를 지내는 스님을 산란하게 만드는 일이다. 살아계신 분에게는 1배를, 영단에는 2배를, 자기스승 제삿날에는 3배를 해야 한다.”고 기회 있을 때마다 밝혀 주장하신다는 것이다.
- 우룡스님 불기2547-1월호/불교신행연구원 -
위와 같이 권유하고 주장하신 장로 선사님들의 가르침을 받들어 봉행해야 할 텐데도 어느 불교 종단에도 개선할 조짐이 보이지 않는 안타까움이 있는 것이다.
민족적 자존심을 우리가 찾아 전통예절을 살리면서 새롭게 가꾸어나가야 할 것이다. 다배(多拜)관행은 어떠한가? 불상을 향해 백팔 배, 천팔십 배, 3천 배 등의 관행도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무슨 일인가? 절에 가서 신도 되기가 힘 든다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고행자(苦行者)의 경우 실천의지에 따라 행할 수는 있지만, 붓다께서 가르치지 않은 것을 구태여 왜 대중 불교시대에 절(拜)을 많이 하도록 강조하며 마치 붓다의 정법수행인양 자처하며 장려하고 있는 현실이다.
5. 예배는 보리심의 증진
불교에 있어서 예배(禮拜)는 매우 경건(敬虔)한 보리심(菩提心)을 증진(增進)하는 신행(信行)의 기본이다. 불자의 생활 속에는 삼귀의례(三歸依禮)가 있고 아침저녁 삼계도사(三界導師), 사생자부(四生慈父), 시아본사(是我本師)라고 경배(敬拜)하고 있지 않은가? 길을 가리키는 인도자이고, 생명의 자비로운 아버지이고, 우리의 스승 이라고 하지 않은가.
스승에게는 먼저 배워야 하는 것이 선결조건이다. 따라서 스승님께 인사하는 것은 가장 자연스러운 예절이 아닌가? 예불을 올릴 때 칠정례(七頂禮)를 보더라도 부처님은 물론 제불 제보살과 마하살 및 역대조사님들과 부처님 제자와 아라한들께 지심으로 귀명례(歸命禮)를 하는 것은 영겁(永劫)을 이어 전등(傳燈) 하신 분들께 예배하는 것이다.
제불통청을 할 때 여러 단에 권공(勸供)할 때 또는 각종 재를 지낼 때도 의식의 절차에 따라서 예배하면 된다는 개념 확립과 습관적으로 체질화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무턱대고 절만 하는 식은 어설프기 그지없는 관행이다.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예경(禮敬) 가운데 배례(拜禮)하는 자태가 그렇게 성스러울 수가 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