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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를 자른 자화상(Self-portrait with Bandaged Earr)〉, 1889년, 캔버스에 유채, 51×45cm, 개인 소장
빈센트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 1853-1890)는 19세기 후반 네덜란드 쥔데르트에서 출생 하였다. 네덜란드 후기 인상주의 화가로 주요작품은 <자화상(Mirror-image self portrait)>과 <해바라기 연작([Sunflowers)>(1880), <별이 빛나는 밤에(La Nuit Étoilée)>(1889) 등이 있다. 네덜란드 개신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영국과 프랑스를 떠돌면서 책방 점원과 선교사 등을 지냈다. 1880년 그림을 그리는 것이 천직임을 깨닫고 습작에 열중했다. 네덜란드에서 미술 공부를 시작한 후 프랑스에서 인상파 화가들을 만나면서 그의 독특한 붓놀림으로 자연의 형태와 색채를 생생하게 전달하는 개성적인 화풍이 확립되었다. 그는 현대회화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고 독일 표현주의 화가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다.
✺ 빈센트 반 고흐 명언(Quotes)10가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 1853-1890), 〈자화상(1889)〉, 캔버스에 유화, 57.8×44.5cm
좋은 풍경화는 화가가 풍경을 얼마나 멋지게 묘사하느냐에 달려있다. 이 상식을 무시한 화가가 있다. 그는 풍경이란 주(主)가 아니라 화가의 내면세계를 대변하는 종(從)에 불과하다고 생각한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이다. 표현주의 화가인 고흐 때부터 풍경화는 화가의 내면을 대변하는 종속물이 된다. 이리하여 고흐는 자신의 그림처럼 하늘의 별이 되었다. 고흐는 양초를 세운 모자를 쓰고 밤풍경을 그렸다.
하늘에선 혜성이 소용돌이치며 쏟아졌고, 산은 노란 선이 되어 캔버스를 대각으로 가로질렀다. 불 켜진 여러 집들이 있지만, 뾰족한 예배당 창문들만이 까맣게 그려졌다. 탄광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가 경험한 제도화된 교회의 위선이 그렇게 표현된 것이다. 검푸른 밤하늘의 별들이 어두운 산 아래 들판과 마을을 은은히 비치고 있다.
〈별이 빛나는 밤(The Starry Night)〉, 1889, 캔버스에 유채, 73.7×92.1cm, 뉴욕 현대미술관.
제목에서 연상할 수 있듯 캔버스에 전체적으로 어두운 색조의 유화물감으로 거칠게 밤 풍경을 담았다. 화면 상단과 중단에는 하늘이, 하단에는 땅이, 화면 왼쪽에는 거대한 사이프러스 나무가 그려져 있다. 사이프러스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꽃 형태로 하늘을 향해 솟아 있다. 밤하늘을 상단과 중단에 넓게 배치해 그림의 중심이 되게 하고 밤하늘은 밝은 청색, 대지는 어두운 청색으로 채색했다. 하늘 한가운데에는 격렬하게 파도치는 모양의 거대한 구름이 왼쪽에서 나타나 오른쪽으로 향하고 있다. 층층이, 겹겹이 쌓인 구름은 달과 별을 휘감듯 흘러간다. 강한 기류가 화면 위로 흘러가는 것 같은데, 이것이 작품 전체를 생동감 넘치고 격정적인 분위기로 만들었다. 여기에 두껍게 비연속적으로 굽이치는 붓 터치도 동적인 느낌을 강조 하였다.
어두운 밤하늘과 대조되는 강렬한 색상의 소용돌이와 꿈틀거리는 형태들은 화가의 감수성을 보여준다. 고흐는 노랑, 파랑, 초록을 즐겨 사용했다. 이 그림에서 별과 달은 노란색, 밤하늘과 마을은 파란색과 초록색으로 칠했다. 구름 아래에 4개, 구름 위로 7개의 원형 별이 각각 2단으로 흩어져 빛나고 있다. 화면 맨 오른쪽 상단에는 가장 크고 밝은 원형 안에 눈썹 모양의 달이 그려져 있다. 마치 크고 작은 팽이 12개가 하늘 위에서 동시에 뱅뱅 도는 것 같다. 별, 구름, 하늘은 두텁고 짧은 길이의 선들을 끊었다 이었다를 무수히 반복해 채색했다.
대지는 하단, 화면의 3분의 1 정도로 표현돼 있다. 화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올라가는 듯한 산을 배경으로 집, 교회, 들판이 나타나는데, 폭포수가 흘러내리는 듯한 입체적인 선묘로 표현된 산과 교회 첨탑이 화가의 고향인 네덜란드를 연상케 한다. 하늘과 대지 사이에 마법의 성처럼 보이는 검은색의 거대한 사이프러스가 있다. 사이프러스는 한 번 자르면 다시는 뿌리가 나지 않는다고 해서 서양에선 죽음을 상징하는 나무이다.
고흐는 죽기 1년 전 이 그림을 그렸다. 정신병을 앓아 병원에서 요양 중 그린 작품인데, 실제 창밖 풍경이라기보다 기억을 더듬어 고향 풍경을 그렸다는 해석이 우세하다. 네덜란드 준데르트에서 목사 테오도뤼스의 6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나 31세에 요절하기까지 화가로서 고흐의 삶은 불행의 연속이었다. 오늘날 그의 작품 ‘해바라기’는 크리스티 경매에서 2억4000만 프랑(약 576억 원)에, ‘붓꽃’은 소더비 경매에서 3억2000만 프랑(약 768억 원)에 팔려 그림 경매사상 최고가를 기록한 바 있다.
지도에서 도시나 마을을 가리키는 검은 점을 보면
꿈을 꾸게되는 것처럼,
별(star)이 반짝이는 밤(night)하늘은
늘 나를 꿈(dream)꾸게 만든다.
-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 1888년경, 캔버스에 유채, 92x72.5cm, 파리 오르세 미술관
〈연인이 있는 정원, 셍피에르 광장(Garden with courting couples: square saint-pierre)〉, 1887, 캔버스에 유채, 75×112.7cm, 반 고흐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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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나무가 있는 푸른 보리밭(Wheat Field with Cypresses)〉, 1889년, 캔버스에 유채, 72.5x91.5cm, 런던 국립 갤러리
〈쌩마리의 바다풍경(Seascape at Saintes-Maries Arles)〉, 1888, 캔버스에 유채, 44x53cm, Moscow,Pushkin Museum Russia.
〈다리 근처에서 센 강을 건너는 두 척의 배’, 188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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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 뿌리는 사람〉, 캔버스에 유채, 1888, 64×80cm, 네덜란드 오테를로 크뢸러뮐러 미술관
〈오베르 교회〉, 1890, 캔버스에 유채, 94×74.5cm, 파리 오르세 미술관.
가장 인간적인 화가
고흐는 월세 15프랑을 내는 작은 방에 살면서 치열한 예술혼을 불태웠다. 융단도 깔지 않은 벌거숭이 갈색 마룻바닥, 튼튼하기만 하고 볼품없는 침대뿐 아무런 특징 없는 방에서 그려진 그림은 1,000억 원이 넘는 작품이 되어 사람들을 매료시킨다.
그림 속에도 그의 집은 잘 묘사되어 있다. 침대 위에 양복 걸이가 있고, 방바닥에 두 개의 허술한 의자, 그리고 탁자 위에 물병과 세면도구가 있는 아무리 둘러보아도 간소하기만 한 방이다. 그의 방 푸른빛이 도는 벽엔 작은 거울 하나와 풍경화 한 점이 걸려있을 뿐이다. 이 보잘것없이 작은 월세방의 풍경을 통해 자신의 치열한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고흐의 방〉, 1888년, 캔버스에 유채, 72×90cm, 반 고흐 미술관 소장.
〈노란집 (The Yellow House)〉.
〈밤의 카페테라스(Le Cafe,le soir)〉, 1888, 캔버스에 유채, 65.3x81cm, 네덜란드 오테를로, 크뢸러 뮐러 미술관.
돈이 없어 모델을 구하지 못하고 주로 자화상이나 정물화를 그린 고흐에게 고대 궁전이나 박물관 등 고색창연한 그림은 사치였다. 그래서 그의 그림엔 우월적 존재감을 과시하는 대상은 거의 없다.
“폭풍우 없는 자연 드라마 없듯, 고통 없는 인생 드라마는 없다”고 말한 고흐는 인간 존재를 포장한 특별한 그림이 아니라 유한하고 불안한 숙명을 지닌 고만고만한 인간의 일상을 작품의 소재로 삼기 좋아했다.
〈붉은 포도와 흰포도, 사과, 배, 그리고 레몬(Blue and White Grapes, Apples, Pears and Lemons)〉, 1887,-88, 캔버스에 유채, 44×59cm, 시카고 미술관.
〈밀짚모자가 있는 정물(Still Life with Straw Hat)〉, 1881, 캔버스에 유채, 36.8×53.3cm, 크륄뮐러 미술관.
〈포도(Grapes)〉, 1887,-88, 캔버스에 유채, 33×46.3cm, 반 고흐 미술관.
〈배가 있는 정물(Still Life with Pears)〉, 1887, 캔버스에 유채, 16×59.5cm, Galerie Neue Meister.
〈대접, 항아리 그리고 여러 개의 병(Still Life with Pots, Jar and Bottlrs)〉, 1884년, 캔버스에 유채, 60.5×73cm, 반 고흐 미술관.
〈정물, 데이지, 양귀비와 꽃병(Nature morte, vase aux marguerites et coquelicots)〉, 1890.
〈노란 장미가 담긴 잔〉, 1886년‘, 마분지에 유화, 35.0x27.0cm, 반 고흐 미술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붓꽃이 있는 아를 풍경(View of Arles with Irises in the Foreground)’, 1888년, 65x54cm.
〈아이리스 생 레미(Irises Saint-Remy, Frace)〉, 1890, 캔버스에 유채, 73.5x92cm, 암스테르담, 고흐 박물관.
〈아이리스 생 레미(Irises Saint-Remy, Frace)〉, 1889, 캔버스에 유채, 71×93cm, 암스테르담 고흐박물관.
붓꽃(아이리스:Irises)은 빈센트 반 고흐가 1888년부터 몰두했던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심지어는 생 레미(Saint-Rémy)의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에도 붓꽃 그리기에 열중했다고 한다. 그는 붓꽃이 불안한 영혼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해 주는 형태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해석했다. 생 레미 정신병원에 입원한 이후, 정원의 화단에 피어 있는 붓꽃을 흥미롭게 관찰했던 반 고흐는, 화단으로부터 붓꽃이라는 모티프를 관념적으로 추출하여 캔버스 위에 되살렸다. 작품의 구성은 반 고흐가 아를의 ‘노란 집’을 장식하려고 그렸던 작품 <해바라기>와 그 구성 면에서 유사하다. 작품의 전경에 놓인 꽃병은 주의를 환기시키고, 보는 이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꽃병은 배경과 유사한 톤의 노란색으로 칠해져 있는데, 그 경계는 모호하여 단지 어둡고 희미한 윤곽선으로만 구별된다. 그림자가 없이 그려진 꽃병은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반 고흐는 보색들을 거침 없이 사용함으로써, 그 사이에 조화를 더욱 강조하고자 했다. 눈이 부실 정도로 선명한 레몬 빛의 노란색 배경은 순수한 감청색과 양홍색이 섞인 보라색의 붓꽃을 두드러지게 한다. 꽃은 잘 드러나지 않는 수많은 점들로 그려진 것이 아니라, 작고 긴 붓질로 정확하게 묘사되었다. 그리고 고갱의 종합주의적 양식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짙은 윤곽선으로 인해 꽃잎의 물질성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오른쪽에 그려진 부러진 붓꽃의 잔가지는 반 고흐의 의도적 구성으로서, 작품에 전체적으로 균형감을 불어넣고 있다.
〈뒤집힌 게〉, 1889년, 캔버스 유화, 38cm*46.5cm,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소장.
정물화에서도 그는 독특한 행보를 보였다. 보통 정물화는 탁자와 그 위의 가지런한 과일, 또는 꽃이 담긴 꽃병이 있다. 그러나 고흐의 정물화 〈사과, 배, 포도, 레몬이 있는 정물〉에는 탁자나 배경없이 과일의 배열도 자유롭다. 거기엔 제목에도 없는 큼직한 모과도 세 개나 있다.
마치 반추상화 같다. 인생이란 그런 것, 가지런한 정물화 같으나 실제는 반추상화와 같다. 살다 보면 어디 내 뜻대로만 되던가? 더 잘 풀릴 때도 있고 복병을 만날 때도 있다. 그러려니 하고 주어진 대로 노력하며 살뿐이다. 그래서 규칙 없이 놓인 이 정물화에 정이 간다. 이 정물화의 바탕이 은박지보다 더 반짝이고 있다. 이것이 삶의 불안정성에도 불구하고 저변에 흐르는 생의 환희이다.
고흐는 자신을 그릴 때도 거울에 비친 대로 그렸을 뿐 조금도 꾸미지 않았다. 그런 쌩얼의 자화상을 무려 36장씩 그렸다. 그의 자화상은 모두 정면이 아닌 옆모습이나 얼굴 전체를 담고 있다. 그러면서도 눈은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의심이 많거나 숨길 게 있을 때, 별 관심이 없을 때, 그리고 별 뜻 없이 정면을 회피하기도 한다. 그래서 측면을 감출 것이 많다고 오해한다. 하지만 정면 직시는 측면보다 훨씬 더 의도적이어야 가능하다.
삶에는 마치 나병처럼 고독 속에서 서서히 영혼을 잠식하는 상처가 있다. 하지만 그 고통은 누구와도 나눌 수 없다.
사데크 헤다야트(Sādeq Hedāyat)의 《눈먼 부엉이(Die Blinde Eule)》에 나온 이야기다. 누구나 치유 못 할 절대적 고독이라는 상처가 있는데 그중 고흐는 평생 더 고독하게 살며 그 고독을 인간에게 감동을 주는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그의 그림에 인간미가 묻어나 바로 이것이 인생이라고 찬탄하게 된다.
프랑스 미술심리학 교수인 르네 위그(René Huyghe)는 예술을 이렇게 정의했다.
영혼의 언어로 자신의 자취를 남기려 하는 인간의 욕구에서 태어났다.
불후의 명작이 되려 할수록 인생의 날 것을 포장하지 말고 보여 주어야 한다. 그 가치는 인류가 존속하는 한 영원하다. 역사에 남을 예술가의 전형적 캐릭터인 고흐에게 사랑과 행복의 여신도 늘 잠시만 깃들다가 날아갔다.
그림을 대하는 진지한 태도와 치열하게 한 생을 살다간 그의 예술혼은 지금 우리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암스테르담에 있는 고흐미술관이 세계 미술 초대전을 여는 곳 중에 가장 분주한 이유도, 1,000억 원 이상의 가격에 팔리며 많은 미술애호가가 그의 그림에 열광하는 까닭도 어쩌면 그의 예술혼을 지금의 사람들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감자 먹는 사람들(The Potato Eaters)〉, 1885.
고흐, 색채의 힘을 깨닫다
쉼 없이 고뇌할 운명으로 태어난 파란만장한 드라마였다.
네덜란드의 개신교 목사였던 아버지와 서적상의 딸이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고흐는 삶 자체가 한 편의 드라마였다. 그가 태어난 지 4년 후 평생 후원자가 될 남동생 테오(Theo)가 태어난다.
어린 시절부터 고흐는 학교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런 아들을 위해 부모는 가정교사를 통해 적응훈련을 시킨 후 다시 학교로 보내는 일을 반복했다. 나중에 고흐는 이 시기를 ‘포로처럼 차갑고 우울했던 때’라고 회상했다. 1869년부터 그림을 판매하는 유명한 화상이었던 삼촌 밑으로 들어가면서 그림에 관심을 보인다. 헤이그 지점을 시작으로 런던 지점, 파리 지점 등을 옮겨 다니며 그림을 판매하던 중 그림을 보는 관점이 다른 손님과 큰 언쟁을 벌인 것이 빌미가 되어 삼촌 회사에서 해고된다.
7년 만에 화랑을 떠난 고흐는 종교에 관심을 갖게 된다. 이후 벨기에의 가난한 광산촌 교회에서 목회자로 일하면서 노동현장의 현실을 보게 된다. 내성적이었지만 세상을 보는 냉철한 시선을 가졌던 그는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을 위해 노동해방을 주장하는 설교를 하다가 6개월 만에 해고되고 만다. 그때부터 제도권 교회를 평생 불신한다.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속의 시엔〉
세상과 불협화음으로 일관하는 고흐를 안타깝게 지켜보던 동생 테오는 그림공부를 권한다. 이때부터 안톤 모베(Anton Mauve)를 스승 삼아 그림공부를 시작하지만, 이마저도 견해차를 보이며 중단하게 된다. 내성적이고 고집 센 고흐를 감당할 사람은 없어 보였다. 그러던 중에 처음으로 마음이 잘 맞는 친구를 만나게 된다. 오랜 절친으로 남게 되는 고갱이다.
고갱과 고흐는 이렇게 ‘피를 보는’ 격렬한 싸움을 벌여야만 했던 것일까? 그것은 두 화가 간의 견해 차이 때문이었다. 고흐는 빛과 자연 풍경을 보며 그림에 대한 영감을 얻는 스타일이었다. 특히 아를에 오면서 햇빛에 대한 그의 관심은 더욱 커졌다. 그가 아를에 머물던 1888년에 그린 그림들만 봐도 그렇다. 〈밤의 카페〉나 〈별이 빛나는 밤〉, 〈씨 뿌리는 사람〉, 〈노란 집〉 등은 모두가 빛의 움직임을 관찰해서 얻은 결과물이다. 그는 원색 중에서도 햇빛의 색깔과 가장 가까운 노란색 물감을 임파스토(impasto, 유화 물감을 두텁게 바르는 기법)로 캔버스 가득 칠하곤 했다(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에는 ‘물감을 살 돈마저 없어’라는 호소가 자주 등장한다. 고흐의 그림을 보면 그가 얼마나 많은 물감을 사용했는지 금방 알 수 있다). 그러나 전설이나 원시 부족, 상상 속의 세계에 매료되어 있었던 고갱은 자연 풍경을 통해 그림의 모티프를 얻는 것은 상상력이 부족하다는 증거라며 고흐를 비난했다.
둘은 화가 마을을 만들어 함께 생활한다. 하지만 고흐의 괴팍한 성격은 절친 고갱마저 등을 돌리게 한다. 친구가 떠나버리자 화가 난 고흐는 분을 삭이지 못하고 자기 귀를 잘라버린다. 그리고 그 처량한 모습마저 화폭에 담는다.
〈자화상(Self-Portrait)〉, 1887.
〈이젤 앞의 자화상〉, 1888년, 캔버스에 유채, 65.5x50.5cm, 암스테르담 시립 미술관 소장.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1889년, 65×54cm, 프랑스 파리 오르세 미술관.
〈귀를 자른 자화상(Self-portrait with Bandaged Earr)〉, 1889, 캔버스에 유채, 60.5×50cm.
〈탕기 영감의 초상 (Portrait of Père Tanguy)〉.
〈레오니 로즈 샤르뷔다비의 초상〉, 1887년, 캔버스에 유화, 60.7x45.7cm, 반 고흐 미술관.
〈이탈리아 여인 (L'Italienne)〉.
〈일본처녀(La Mousme)’〉 1888년.
〈목부(La Berceuse〉, 1889년.
〈죄수들의 보행〉, 1890년, 캔버스에 유채, 80 x 64cm, 푸쉬킨 미술관, 모스크바.
사랑은 어려움을 동반 하지만
거대한 에너지를 가져다 준다
-빈센트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
〈해바라기(Sunflower)〉, 1881, 터키 옥색배경 유화, 73.5×60cm, 개인소장.
〈해바라기(Sunflower)〉, 1888, 로열 블루색 배경 유화, 98×69cm, 일본 개인소장 중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5년 8월 6일 공습으로 소실됨.
〈해바라기〉, 뮌헨 노이에 피나코테크.
고흐의 예술은 진실과 열정의 도가니였다. 자기의 진실에 맞지 않으면 삼촌이든 스승이든 친구든 가리지 않고 시비를 걸었다. 이런 자신의 심리를 색채로 표현했다.
하이데거가 예술작품의 근원이라 극찬한 〈신발〉에도 그런 심리상태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가 그린 구두는 신데렐라의 유리 구두나 왕들의 화려한 신발이 아닌 땀 냄새가 가득한 농부의 신발이었다. 고흐에게 신발은 신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다. 누군가가 신고 산길이든 밤 길이든 걸어야 신발로서 존재가치가 있다고 믿었다. 그러다 보니 광택을 내기는커녕 끈조차 제대로 맬 필요가 없었다. 그가 그린 신발 속에는 남루한 농부의 소박한 삶이 고스란히 묻어나고 있었다.
이는 하이데거의 “인간의 눈에 비친 사물은 독립적 존재로 파지될 수 없고 관계 속의 존재로만 파악된다”라는 말을 고흐의 그림이 반증해주고 있는 것이다.
〈신발(A Pair Shoes)〉, 1886, 캔버스에 유채, 45×37.5cm, 반 고흐 미술관.
〈잉글루아 다리(The Langlois at Arles)〉.
색채가 지닌 힘을 알아챈 고흐는 자신에게 투영된 대상의 존재를 드러내는 유일한 자원으로 삼았다.
간척지와 운하가 많았던 네덜란드엔 도개교(跳開橋)도 많았다. 그 아래엔 인근의 여인들이 몰려나와 빨래하곤 했는데, 고흐는 이들을 놓치지 않았다. 내려져 도개교 위로 마차가 지나가고, 빨래하는 아낙들 앞에 세 개의 물결이 동심원을 그리며 번져나가는 모습을 〈앙글루아 다리〉라는 그림을 통해 표현했다. 소소한 삶이 고흐의 눈엔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으로 보였다.
뜨겁고 어설픈 방황의 시작
괴팍한 성격의 고흐에게도 사랑이 찾아온다. 삼촌 화랑의 런던 지점에 근무하던 1873년 6월, 하숙집 딸 외제니 로예(Eugenie Loyer)를 만난 것이다. 당시 열아홉 살 처녀였던 외제니는 예의 바르고 쾌활한 성격 탓에 주변 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고흐가 20세 때 머물고 있던 집주인의 딸 '외제니 로예(Eugenie Loyer)'다. 그는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했지만 그녀는 약혼한 남자가 있어 그의 청혼을 거절한다. 고흐는 이 거절로 낙담하게 되고, 이것을 하느님께서 주신 시련이요 아픔이라고 생각한다.
고흐는 “외제니(Eugenie Loyer)의 미소는 저 태양보다 밝다”며 그의 아름다움을 칭송했다. 그리고 쥘 미슐레(Jules Michelet)의 연애 에세이 《사랑(L’Amour)》을 탐독하던 동생 테오에게 “여자는 사랑받는 한 나이를 먹어도 늙지 않는다”며 그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날 이후 고흐는 외제니(Eugenie Loyer) 앓이를 시작하게 된다. 그녀와 하나가 되고 싶은 열망에 몸부림쳤다. 하지만 외제니는 이미 정혼한 남자가 있었다. 외제니를 향한 사랑이 깊어지자 외제니의 부모는 고흐를 하숙집에서 쫓아버린다. 첫사랑의 실패는 고흐의 인생을 바꿔버린다. 종교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부터 신앙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미술품을 멀리하게 된다.
화랑에 근무하던 때여서 미술품 혐오는 손님들과의 마찰로 이어진다. 동료나 고객들과 언쟁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더 이상 화랑에서 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결국 그는 해고당해 낙향한다.
고향으로 돌아온 이듬해인 1877년, 화랑에서 계속 일하길 원하는 어머니의 청을 물리치고 암스테르담 신학교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한다. 그러나 그에게 신학은 간단한 학문이 아니었다. 신학의 이론과 실천 사이의 괴리감이 그를 괴롭혔다. 광산촌에 들어가 목회활동을 하면서 제도권 교회와 크게 부딪친 이후 종교와도 결별하게 된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미술공부가 시작된다. 목사였던 아버지 밑에서 중심에 신을 두고 살았던 고흐는 탄광촌에서 제도권 교회와 크게 다툰 후 신을 밀어낸다. 그리고 그 자리에 태양을 두게 된다.
이후 그는 태양 아래 어둠이 벌거벗듯이 가식 없는 작품을 그리는데 집중한다. 비싸고 좋은 붓이 아니라 거칠고 큰 붓이나 자신의 손가락, 심지어 나이프로 투박하게 색칠하면서 자기만의 스타일을 만들어 낸다. 이 무렵 태양을 닮은 해바라기가 자주 그림에 중심이 된다.
비싸고 좋은 화구(畵具)가 아니라 아무나 구할 수 있는 조악(粗惡)한 도구로 명화를 그려내면서 대상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기존의 작가와 달리 대충 그리면서도 독립적 생명을 창조해냈다.
두 번째 여인 케이 보스와 자포자기로 만난 세 번째 여인
그의 그림 공부는 테오의 도움이 컸다. 미술공부를 하는 동안 경제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먹고사는 문제는 아버지 밑에 사는 것으로 해결하고 있었다.
그가 아버지 밑에서 그림을 공부할 무렵 외삼촌 스트리커 목사 가족이 휴가를 맞아 방문했다. 그때 동행한 스트리커의 딸 케이 보스 스트리커(Kee Vos-Stricker)를 보고 한눈에 반해 청혼하게 된다. 나이가 일곱 살이나 많은 데다 아들까지 둔 미망인이었던 케이 보스는 그의 청혼을 거절한다. 게다가 둘의 결혼은 부도덕한 짓이라며 집안의 반대가 이어진다. 하지만 고흐의 마음을 돌리진 못한다. 케이 보스에게 구애편지를 보내고, 답장이 없자 암스테르담까지 직접 찾아가서 만났지만 거절당한다.
고흐 나이 28세 때 아버지가 교구목사로 근무하던 에텐에서 그는 일곱 살 연상인 외삼촌의 딸 '케이 보스 스트리커(Kee Vos-Stncker)'를 사랑한다. 그는 용기 내어 사랑을 고백하지만, 남편과 사별해 슬픔에 빠져 있던 그녀는 고흐의 사랑을 거절했다. 그 뒤 고흐는 창녀에게까지 청혼한다.
“우리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이다. 더 이상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만 잊어 달라”는 케이 보스(Kee Vos-Stncker)의 문전박대는 고흐를 상심하게 한다. 이 일로 가족과도 불화하게 된다.
동생 테오에게 편지를 보내 “케이 보스와 대화하고 싶다. 긴 시간도 아니다. 내 손이 타오르는 이 불꽃 속에서 견딜 수 있는 시간만큼”이라는 심정을 밝히지만, 더 이상 둘의 관계는 이어지지 못한다. 하지만 이 일로 가족은 물론 친척들과의 갈등으로 번지면서 고흐는 고향을 떠나야 했다.
첫사랑은 물론 두 번째 사랑도 이루어지지 못하자 헤이그로 떠나 미술공부에 전념한다. 안톤 모베에게 수채화를 배워 화가로서 첫발을 내디디게 된다.
〈빈센트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 1853-1890년)
〈테오 반 고흐(Theo van Gogh, 1857~)〉, 1888년.
인상파 화가인 빈센트 반 고흐의 동생이자 미술상이다. 형인 빈센트 반 고흐가 죽고 약 1년뒤 마비성 치매를 앓다가 죽었다. 테오도르는 당시 빈센트 반 고흐와 많은 편지를 교환했다. 편지는 모두 688통이다.
반 고흐의 전설적인 작품들은 그가 죽기 2년 전에 만들어진다. 이때 반 고흐는 간질과 정신 질환에 시달린다. 자신의 귓불을 잘라버리는 기행을 저지른 그는 정신 병원에 수차례 수감되었지만 여기에 굴복하지 않고 단 하나의 작품을 탄생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예술에 열중한다. 그러나 언제나 정신적으로 불안한 삶을 살았고, 그런 자신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발작의 고통이 나를 덮칠 때 왈칵 겁이 난다. 일할 수 있는 기회도 한 번 가면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맹렬히 작업하고 있다. 지금보다 더 심한 발작이 일어난다면 그림 그리는 능력이 파괴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고흐는 결국 오베르의 들판에서 작품 <까마귀가 나는 밀밭>을 그린 후 가슴에 총을 쏘며 생을 마감한다. 그의 일생은 가난과 좌절, 고통과 인내, 성공과 영광에 이르기까지 많은 굴곡이 있었다. 그 굴곡 가운데에서 그는 늘 이방인이었고, 외톨이었다. 그런 고흐 곁에는 오직 동생 '테오'만이 있었다.
세상 모두가 고흐에게 등을 돌리고 고흐 자신마저 스스로를 버릴 때도 오직 동생 '테오'만이 끝까지 형'고흐'의 곁을 지켰다. 테오는 매달 150프랑을 형에게 보냈는데 당시 프랑스의 숙련공이 4인 가족을 부양하는데 1년 생활비가 1,226프랑이었다고 한다. 1년에 1,800 프랑을 꼬박꼬박 형에게 보낸 테오의 부담을 알 수 있다. 그림을 거래하는 상인으로 꽤 성공했기 때문에 벌이가 괜찮았지만 어머니와 동생들의 생계까지 책임지고 있었기에 그의 어깨는 항상 무거웠다. 그렇지만, 테오는 끝까지 형 고흐의 예술을 믿고 지원한다.
‘빈센트 반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가 출판되어 서점가에서 만나 볼 수 있다. 빈센트 반 고흐는 동생 테호와 수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 편지의 내용을 통해 그가 가졌던 작품에 대한 열정, 신념, 고뇌, 사랑을 알 수 있다. 어쩌면 고흐야 말로 그 어떤 역격 속에서도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분투했던 진정한 의미의 영웅이 아닐까? 그가 편지로 남긴 위대한 명언과 그의 작품을 통해 현대를 사는 우리는 큰 감동을 느낄 수 있다.
1882년 1월, 테오의 도움으로 헤이그에 화실을 얻어 본격적인 그림을 그리던 그는 알프레드 상시에(Alfred Sensier)가 쓴 《밀레의 전기》를 읽다가 자신이 가야할 길을 발견하게 된다. 책에서 감동하면서 농어촌 등 촌락을 그리겠다고 다짐하게 된 것이다. 그해 8월엔 갑작스러운 폭풍을 피해 몰려든 고깃배와 갯벌에서 일하다가 뭍으로 올라온 사람들을 화폭에 담은 〈스헤베닝겐 해변의 폭풍이 몰아치는 하늘〉을 그린다.
〈스헤베닝겐 해변의 폭풍이 몰아치는 하늘〉, 1882년, 캔버스에 유채, 34.5×51cm, 반 고흐 미술관 소장.
화가로 자리를 잡아가자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가족과 사이가 나빠지면서 한없이 쓸쓸해진 자신이 초라해 보였다. 그때 시엔[sien(본명 Clasina Maria Hoornik)]이 눈에 들어왔다. 겨울비가 내리는 차가운 거리에서 생계를 위해 남자를 찾고 있던 창녀였다. 임신한 몸에 다섯 살짜리 딸까지 두었던 그녀는 비에 젖어 초라한 모습으로 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알코올 중독에 매독까지 걸려 더는 살아갈 방도를 찾지 못해 보이는 그녀에게서 자신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화실로 데려와 그들을 위로하고 시엔을 모델로 누드화 〈슬픔(sorrow)〉을 그렸다.
〈슬픔〉, 1882년, 석판화, 38.5×29cm, 반 고흐 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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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가 스물아홉 살 때 사랑에 빠진 창녀 시엔이다. 그녀는 배 속에 아이를 임신한 채 다섯 살 아이와 함께 남편에게 버림을 받았다. 몸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던 그녀는 어느 날 고흐의 삶 속에 들어오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결국 그녀는 1904년 강물에 뛰어들어 비운의 생을 마감한다.
순탄치 않은 매춘부의 비참함이 손에 잡힐 듯한 그림이었다. 축 처진 가슴과 뱃살들, 아름다울 것 하나 없는 여인이 당장 오늘 밤 먹을 것과 잘 곳을 걱정하고 있는 슬픔이 그림에서 묻어났다. 바닥에 앉아 무릎을 감싼 팔에 얼굴을 묻어 표정을 볼 수 없어 더 애잔했다. 이 그림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화가를 꿈꿨던 고흐의 시작은 알리는 작품이기도 했다.
그들과 함께 밤을 보낸 고흐는 시엔을 차마 모른 체할 수 없었다. 화실에서의 동거가 시작되고, 아이들을 위한 요람과 어린이용 의자가 놓이게 되면서 시엔과의 결혼을 결심한다. 그리고 혼자 있을 때 우울했던 화실이 그들로 인해 밝게 변하는 장면을 목격하면서 그들과의 행복한 시간을 꿈꾸게 된다.
“이제 내 평생의 꿈이 이루어지는 것 같다. 더 좋은 작품 만들어 돈을 벌고 시엔과 결혼해야지. 그것만이 시엔이 다시 구렁텅이로 돌아가지 않도록 돕는 길이야.”
하지만 둘의 결혼은 고흐의 가족은 물론 항상 고흐의 편이었던 동생 테오마저 반대하면서 위기를 맞는다.
“형 왜 하필 그 여자야? 결혼하지 말고 형편 되는대로 돕고 말아. 사랑은 동정이 아니야.”
고흐는 “따뜻한 위로와 생리적 이유”라고 짧게 대답하면서 버틴다. 그러나 이번엔 시엔의 오빠가 찾아와 화실에서의 궁색한 삶을 보더니 “이렇게 살 바에 차라리 거리의 창녀가 낫겠다”며 헤어지기를 강요하면서 둘은 결별하게 된다. “사랑하지만 이별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시엔은 그의 곁을 떠났다.
시엔과의 결혼소동은 가족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버린다. 오직 테오만이 여전히 고흐의 든든한 후원자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시엔은 1904년 강에 몸을 던지는 것으로 한 많은 생을 마감한다. 그녀와 그녀의 딸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은 한동안 고흐를 괴롭힌다. 그 일은 고흐가 혹독하게 창작에만 몰두하게 한다. 그리는 일만이 기쁨이고 구원이라는 확신이 그를 강하게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고흐를 사랑했던 여인
헤이그에서의 화실생활은 궁핍을 견디다 결국 문을 닫는다. 1883년 12월, 어쩔 수 없이 부친의 집이 있는 누넨으로 돌아오지만 부자 관계는 원만하지 못했다. 부친은 고흐에게 신앙을 가지라고 종용했으나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내 의지대로 살겠다’며 거부한다.
아버지 밑에서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아갈 무렵, 어머니가 기차에서 내리다 왼쪽 발을 헛디뎌 발목부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때 어머니의 병간호를 적극적으로 도운 이가 옆집에 살던 마르고트 베게만(Margot Begemann, 1841~1907)였다.
병원을 오고 갈 때 함께 어머니를 부축하면서 두 사람은 가까워졌다. 미술을 좋아했던 열두 살 많은 그녀는 고흐가 화가임을 알고 호감을 품기 시작했다. 그래서 들녘으로 그림을 그리러 갈 때 동행하기도 했다. 이후 고흐를 믿어주고 사랑해준 유일한 여자가 된다.
고흐는 그녀를 위해 〈누넨의 물레방아〉를 그려준다. 두 개의 물레방아 바퀴가 맞물려 있는 그림을 통해 하나는 자신을, 다른 하나는 마르고트를 나타낸 것이다. 그렇게 둘의 사랑이 깊어갈 즈음, 마르고트가 병원에 입원하는 일이 생긴다. 이때 그 곁을 고흐가 지킨 것이 알려지면서 양쪽 집안에서 둘의 관계를 알게 된다.
〈누넨의 물레방아〉, 1884, 캔버스에 유채, 57.5×78.0cm, 개인 소장.
〈황혼의 포플러 거리(Avenue of Poplars at sunset)〉, 1884.
〈삼나무가 있는 밀밭(Wheat Field with Cypresses at the Haude Galline near Eygalieres)〉, 1889, oil on canvas, 73x93.4cm,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City.
〈측백나무 (Cypresses)〉, 1889년, 유채.
〈꽃 피는 과수원(자두나무들)Orchard in Blossom(Plum Trees) 아를〉, 1888, 캔버스에 유채, 55×65cm, 스코틀랜드 국립미술관
〈꽃피는 과수원〉, 1890.
〈올리브 나무(Olive Orchard)〉, 1889년, 73×92cm, 캔버스에 유채.
〈하늘과 태양이 노란 올리브나무 밭 미네아폴리스 아트 업 인스티튜더.(Olive trees with yellow sky and sun)〉, 1889, 오스트리아 벨베데레 갤럴리.
〈오베르의 계단〉, (1890)
〈오베르의 평원(Wheat Fields near Auvers)〉, 1890, 오스트리아 벨베데레 갤럴리.
이들의 만남도 반대에 부딪힌다. 고흐의 집안에서 여자가 너무 늙었다는 이유였고, 마르고트 집안에선 고흐의 인물을 핑계 삼았다. 마르고트는 이 일로 크게 상심하여 자살을 결심한다. 다행히 목숨을 건지면서 결혼승낙을 받아낸다.
이때 〈황혼의 포플러 거리(Avenue of Poplars at sunset)〉가 그려진다. 서쪽에 붉은 해가 마지막 정열을 불태울 때 포플러 가로수 사이로 한 사람이 걷고 있다. 형체만 사람일 뿐 누구인지 알 수 없으나 마르고트일 것이다. 가장 힘이 되어야 할 가족들이 두 연인에게 사랑의 이름으로 가장 많은 아픔을 주었다. 이런 역설적 아픔이 황혼의 실루엣으로 표현된 것이다.
하지만 끝내 둘의 결혼은 이루어지지 못한다. “생명을 함부로 버리려 한 여자를 절대 며느리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목사 아버지의 반대가 워낙 거셌기 때문이다. 상심한 고흐는 가족과도 헤어지겠다고 선언하고 1886년 파리로 떠난다.
사랑에 웃고, 울며, 쓰러지다
파리에서 테오와 함께 살면서 다시 그림을 그리게 된다. 이때 새로 문을 연 카페 탕브랭에 자주 드나들었다. 주인인 아고스티나 세가토리(Agostina Segatori)라는 특이한 옷차림과 미모로 주목받는 여인이었다. 그녀가 고흐에게 정물화 한 점을 갖고 싶다고 접근하면서 둘은 친밀해졌다. 이후 그 카페에서 처음으로 고흐의 전시회가 열린다.
그리고 이 무렵 세가토리가 임신을 하게 된다. 자신의 아이를 가진 세가토리에게 청혼을 하지만 “당신 매독에 내가 전염되었다. 당신과 결혼하지 않겠다. 아이도 지우겠다”는 뜻밖의 거절을 당한다. 시엔에 의해 매독이 전염되어 있었다.
또다시 이별하게 된 고흐는 도시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더 많은 빛과 색채를 찾아 남프랑스 아를로 떠난다. 그곳에서 연작으로 〈꽃이 핀 과수원〉을 그린다. 그리고 1888년엔 처음으로 앵데팡당 살롱전에 작품을 전시한다.
고갱을 만나 화가공동체를 구상하는 것도 이즈음이다. 둘은 노랑 아틀리에를 꾸며 함께 거주한다.
비인간화된 산업사회에서 인간 본연의 모습을 각자의 방식으로 그리는 것으로 주목받은 두 사람은 아마추어 화가 출신으로 최고의 미술학교 출신을 제치고 세계 최고 예술가가 되는 등 공통점이 많았다. 차이가 있다면 고갱은 물, 고흐는 불이라 불리는 정도였다. 오랜만에 마음 맞는 친구가 된 두 사람은 밤의 정경을 그리며 별 밤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내성적이며 격정적이지만 의리를 중시했던 고흐와 외향적이며 인습을 비웃는 현실적 냉소주의자였던 고갱은 잘 맞았다. 애정을 쏟은 상대에게 버림받으면 자신을 괴롭히는 마조히즘적 성격을 지닌 고흐는 사디스트적이며 거침없는 고갱이 평생 함께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고갱이 자신을 귀하지도 않은 해바라기나 그리는 화가 취급하자 등을 돌린다. 그때부터 벌어지기 시작한 둘의 관계는 심하게 다툰 어느 날 화가 나 자신의 귀를 잘라버리는 고흐의 모습에 질려버린 고갱이 떠나면서 막을 내린다.
혼자 남은 고흐는 까닭 모를 죄책감과 공허감에 시달렸다. 그래도 계속 그림을 그려 200편 이상의 작품을 남겼다.
1890년 1월 28일, 브뤼셀 유화전에서 생전 처음이자 유일하게 〈아를의 붉은 포도밭〉이 팔린다. 언론들 역시 ‘고독한 화가, 빈센트 반 고흐’라며 그에 대한 호의적 평론을 발표한다.
〈아를의 붉은 포도밭〉, 1888, 캔버스에 유채, 73×91cm, 러시아 푸슈킨 미술관 소장.
〈까마귀가 나는 밀밭〉, 1890년, 캔버스에 유채, 50.5×103cm,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같은 해 7월 27일, 명왕성이 올라가기 시작했지만, 그는 생을 정리하고 있었다. 자신의 초라한 다락방에서 가슴에 총을 쏘아 생을 마감했다. 형의 죽음을 직감하고 달려온 테오의 품에 안긴 고흐는 “모든 것이 끝나서 좋다”라는 말을 남기고 영영 우리 곁을 떠난다.
참고문헌 및 참고자료: 명작에게 사랑을 묻다(이동연, 평단문화사), 주간동아 978호 (p76~76)(황규성 H큐브 대표), 세계의 미술관(송혜선 자유기고가), Daum.Naver 지식백과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