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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첫 궁중 연회 - <신축진찬도>
o 전시장소: 상설전시관 서화실(202-2호)
o 전시기간: 2022. 9. 6.(화)-2022. 12. 25.(일) ※ 전시기간은 상황에 따라 변경될 수 있다.
o 전 시 품: <신축진찬도辛丑進饌圖> 1건
o 입장료: 무료
1901년(신축년) 음력 5월, 대한제국 황실의 어른 효정왕후(헌종의 계비, 명헌태후, 1831-1904)의 71세를 경축하는 궁중 연회 진찬進饌이 경운궁에서 열렸다. 여러 날에 걸쳐 열린 연회 중에서, 다섯 행사의 장면을 그린 병풍을 <신축진찬도辛丑進饌圖>라고 한다. 1897년 대한제국 선포 후 처음으로 열린 궁중 연회를 그린 <신축진찬도>는 황제의 나라 위상에 맞는 기물과 복식 등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작품이다.
신축진찬도(辛丑進饌圖), 대한제국 1901년, 박용훈(1841-?) 등 7인, 비단에 색, 210.3×479.0cm, 국립중앙박물관
〈신축진찬도(辛丑進饌圖)〉는 신축년(1901, 광무 5) 고종 황제(재위, 1863-1907)가 효정왕후孝定王后(명헌태후, 1831-1904)01의 71세를 경축하기 위해, 경운궁慶運宮(현 덕수궁)에서 베푼 진찬進饌02의 다섯 장면을 그린 10폭 병풍이다. 이 그림은 대한제국(1897-1910) 선포 후 처음 열린 궁중 연회의 여러 장면을 자세히 묘사했는데, 황제의 나라 대한제국의 위상과 당시의 궁중 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도1.
제1폭과 제2폭은 경운궁 중화전(中和殿) 진하례(陳賀禮), 제3폭과 제4폭은 5월 13일의 내진찬(內進饌), 제5폭과 제6폭은 5월 13일의 야진찬(夜進饌), 제7폭과 제8폭은 16일의 고종황제 회작(會酌), 제9폭은 18일의 재익일회작(再翌日會酌) 광경이다. 제10폭에는 진찬소(進饌所) 관리들의 좌목(座目)을 기록하였다. 화면은 부감(俯瞰) 시점을 적용하여 전각과 인물 위주로 구성하였다.
01 익풍 부원군 홍재룡洪在龍(1794-1863)의 여식으로 1844년(헌종 10) 조선의 제24대 국왕 헌종獻宗(재위, 1834-1849)의 두 번째 왕비로 책봉되었으며 헌종 승하 후 왕대비王大妃가 되었다. 1890년(고종 27) 신정왕후神貞王后(1808-1890)가 승하한 후왕실의 큰 어른이 되었으며, 1897년(광무 1) 대한제국 선포 후 ‘태후太后’의 호칭을 받았다.02 궁중 연회 중에서 진연進宴에 이어 두 번째로 큰 행사이다.
도1. 〈신축진찬도(辛丑進饌圖)〉 대한제국 1901년, 박용훈(1841-?) 등 7인, 비단에 색, 210.3×479.0cm, 10폭 병풍.
신축년 진찬의 개최 배경과 의미
1900년(광무4) 고종 황제는 효정왕후의 칠순을 맞이하여 강수康綏라는 존호03를 올리고 경축하는 연회를 베풀고자 하였다. 그러나 효정왕후가 나라의 사정이 어렵다며 이를 사양하여 연회는 열리지 않았다. 한편, 황태자(훗날의 순종)도 고종 황제가 50세가 되는 해(1901)를 맞이해 존호를 올리고 성대한 연회를 개최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고종 황제는 황태자의 청을 여러 차례 사양하다가, 1901년 음력 3월에 이르러 효정왕후를 위한 연회를 올리라 명하였고 두 달간의 준비를 거쳐 진찬이 개최되었다. 이러한 점을 종합해 보면 신축년 진찬은 고종 황제가 효정왕후를 공경하는 마음을 보이는 동시에, 황실의 위상을 드러냄으로써 대한제국이 건재함을 널리 알리고자 했던 행사였음을 알 수 있다.
03 국왕과 왕실 구성원의 업적이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올리던 칭호.〈신축진찬도〉의 구성과 내용
진찬의 경과를 기록한 『신축진찬의궤辛丑進饌儀軌』에 따르면, 음력 정월 초하루(양력 2월 19일) 경운궁 중화전中和殿04에서 고종 황제의 50세와 효정왕후의 71세를 경축하는 진하례陳賀禮가 열렸고, 5월 13일부터 18일(양력 6월 28일~7월 3일)까지 경운당慶運堂05에서 효정왕후를 위한 진찬이 열렸다. 진찬은 모두 6차례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고종 황제·효정왕후·황태자 내외를 비롯한 황실 구성원과 진찬을 준비한 대신들이 참여했다. 〈신축진찬도〉는 진하례 장면 (제1-2폭)·진찬 중 4차례의 연회 장면(4-9폭)·진찬을 준비한 관원들의 명단(제10폭)으로 이루어져있는데 진찬의 과정과 〈신축진찬도〉를 비교해보면 다음의 〈표〉와 같다.
04 경운궁의 정전正殿으로 현재의 즉조당卽阼堂 위치에 있었으나 1904년 경운궁 화재 때 소실되었다. 현재의 중화전은 화재 이후 복원한 건물이다.
05 현재의 준명당浚眀堂 위치에 있었던 전각으로, 1904년 경운궁 화재 때 소실되었다.
진찬 과정과 <신축진찬도>의 비교
순서날짜*시간장소행사의 주빈행사의 명칭<신축진찬도>
1 1.1. - 중화전 고종 황제 진하례陳賀禮 제1-2폭
2 5.13. 손시* 경운당 효정왕후 내진찬內進饌 제3-4폭
3 5.13. 해시* 야진찬夜進贊 제5-6폭
4 5.16. 손시 고종 황제 대전회작大殿會酌 제7-8폭
5 5.16. 해시 대전야연大殿夜讌 -
6 5.18. 손시 황태자 황태자회작皇太子會酌 9폭
7 5.18. 해시 황태자야연皇太子夜讌 -
* 진찬 관련 일정은 음력을 기준으로 하였다.
* 손시巽時: 오전 08:30~09:30 사이의 시간, * 해시亥時: 오후 21:30~22:30 사이의 시간
〈신축진찬도〉 제1-2폭은 황태자와 만조백관이 중화전에서 황실의 경사를 경축하는 장면이다. 전각 중앙의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 병풍과 노란색 어좌는 황제를 의미한다. 중화전 밖 왼쪽 아래에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태극기太極旗가 휘날리고 있으며도2, 마당 양쪽으로 신하들과 악공·신식 복장의 군인·깃발을 든 의장대의 모습이 보인다.
제1 · 2폭
1601년 정월 초하루 중화전
황태자와 만조백관이 황제에게 경축을 드리다(中和殿 陳賀圖)
경운궁 중화전(현재의 즉조당)에서 순종 황태자와 만조백관이 고종 황제 50세와 효정왕후 71세를 경축하는 '진하'의식이 열렸다. 궁중행사도에서 왕실 인사의 모습은 그들을 상징하는 병풍과 의자 등으로 표현한다. 중화전 가운데 놓인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 병풍 앞에 고종의 황색 어좌(御座)가 있고, 그 오른쪽에 황태자의 자리가 있다. 중화전 밖 왼쪽아래에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태극기(太極旗)가 휘날리고 있다. 중화전 마당 양쪽으로 신하들과 궁중음악을 연주하는 악공이, 이들 주변으로 신식 복장의 군인들과 노란 옷을 입고 깃발을 든 의장대가 있다.
도2. 태극기(제2폭)
제3-4폭은 효정왕후가 주빈인 연회 장면이다. 황제·황태자 내외·내외명부 등이 참석했는데, 여성들도 다수 참석한 만큼 연회장을 붉은색 발로 둘러 함부로 들여다볼 수 없도록 했다. 경운당 중앙 십장생도十長生圖 병풍 앞 의자를 비롯하여 효정왕후를 상징하는 기물들이 붉은색으로 채색되어 있다도3.
제3 · 4폭
1901년 5월 13일 아침 경운당
효정왕후를 위한 연회가 열리다(慶運堂 內進饌圖)
경운당(현 준명당浚明堂)에서 효정왕후가 주빈인 연회 내진찬이 열렸다. 고종, 황태자와 황태자비, 종친과 내외명부, 진찬을 준비한 관원 등이 참석했다. 경운당 중앙에 놓인 십장생도(十長生圖)병풍 앞에 효정왕후의 붉은색 의자가 있고, 그 왼쪽은 황태자비의 자리가 있다. 그 아랫줄에 둘째 황자 의친왕의 아내의 자리가 있는데, 이는 이전과 달라진 모습으로 황실 권위 강화와 관련이 있다. 전각 앞에 임시 무대를 설치하고 붉은색 발을 쳐 악공 등 남성이 안을 볼 수 없도록 했다. 이곳 오른쪽에 고종과 황태자가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황제국의 위상에 맞게 행사장을 둘러싼 장막이 흰색에서 황색으로 바뀌었다.
도3. 효정왕후의 의자(제4폭)
제5-6폭은 늦은 밤에 열린 연회 장면이다. 어두운 연회장을 밝히기 위한 여러 도구가 돋보이는데, 붉은 발과 노란 장막에 촛불을 넣은 청사초롱을 걸었고 임시 무대의 처마에는 촛불이 놓인 유리등이 걸려 있다도4.
제5 · 6폭
1901년 5월 13일 밤 경운당
늦은 밤 연회가 열리다(慶運堂 夜進饌圖)
아침 연회가 열린 당일 밤 9시부터 '야진찬'이 열렸다. 주빈 효정왕후와 주최자 고종, 그리고 황태자가 참석했다. 야진찬은 내진찬과 달리 황실과 종친 여인들이 참석하지 않아 자리와 기물들이 치워졌고, 연회장을 밝히는 촛불이 등장했다. 촛대 위와 유리등안에 촛불이 놓이고, 붉은 발과 황색 장막에 청사초롱이 걸려있다.
도4. 유리등과 청사초롱(제5-6폭)
제7-8폭은 고종 황제가 내외명부와 행사를 준비한 진찬소 관원들에게 베푼 연회 장면이다. 연회장 곳곳에 황제를 상징하는 노란색 기물이 놓여있고, 여령들이 황제의 덕을 칭송하는 춤을 공연하고 있다도5.
제7 · 8폭
1901년 5월 16일 경운당
고종 황제가 연회를 베풀다(慶運堂 翌日 會酌圖)
이틀 뒤 고종 황제가 주최한 연회에 내외명부와 이번 행사를 담당한 진찬소 관원들이 참석했다. 대한제국 위상에 맞게 경운당 중앙 일월오봉도 앞에 황색의 어좌(御座)가 설치되었고 연회장에 황색 장막이 쳐졌다. 내외명부들은 전각 좌측 황색 장막 뒤 방석에, 진찬소 관원들은 짙은 녹색 관복을 입고 장막 밖에 앉아 있다.
도5. 황제의 공덕을 칭송하는 공연(제7폭)
제9면은 황태자가 주최한 연회 장면으로 황제의 연회와 달리 붉은색 기물들이 놓여 있는 것이 특징이며, 제10면은 진찬의 책임을 맡은 당상 3인, 실무를 맡은 낭청 4인 관직과 성명이 품계 순으로 기록되어 있다.
제9폭
1901년 5월 18일 경운당
황태자가 연회를 베풀다(慶運堂 在翌日 會酌圖)
황제의 연회 이틀 뒤, 황태자(순종)가 주최한 연회가 열렸다. 참석자는 황제의 연회와 같은 내외명부와 진찬소 관원이다. 그러나 주최자가 황태자에 연회장 기물들이 바뀌었다. 경운당 중앙에 십장생도 병풍과 붉은 색 의자가 놓였다. 상을 두른 천과 장막도 붉은색으로 바뀌었다. 연회에 참석한 명부들은 전각 아래 좌측에, 진찬소 관원들은 그림 하단에 그려져 있다.
제10폭
진찬을 준비한 관원 명단(進饌所座目)
1901년 음력 5월의 진찬을 준비하고 그림을 제작한 관청 '진천소'에 소속된 관원들의 명단이다. 책임을 맡은 당상(堂上) 3명, 실무를 맡은 낭청(郎廳) 4명의 관직과 성명이 품계순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와 달라진 점은 궁내부 대신을 당상으로 임명했다는 점이다. 궁내부는 대한제국 주요 업무를 담당한 중앙관청으로 막강한 권력을 가지게 되어, 고종 황제 군주권 구현의 기반이 된 관청이다.
명단의 내용
당상
정1품 보국숭록대주 · 궁내부 특진관 육군부장 신 민영휘
종1품 숭정대부 판돈녕원사 신 홍순형
정2품 정헌대부 의정부 찬정 신 윤정구
낭천
5품 통훈대부 사선사 주사 신 이응
5품 통훈대부 태복사 주사 신 이호집
6품 승훈랑 농상공부 주사 신 박희양
6품 승훈랑 탁지부 주사 신유선
광무 5년(1901) 신축년 5월 일
시대의 변화상을 담다
〈신축진찬도〉는 1897년 대한제국 선포 이후의 시대적 상황을 잘 반영한 작품이다. 19세기 제작된 궁중 연회도에서는 임금을 상징하는 기물을 붉은색으로 채색했다. 반면 〈신축진찬도〉는 고종 황제의 기물은 노란색으로 황태자와 효정왕후의 기물은 붉은색으로 채색하였는데, 자주 국권을 지닌 대한제국의 위상을 드러내고 황실이 건재함을 널리 알리고자 했던 고종 황제의 의중이 잘 나타나있다. 또한 1883년(고종 20) 국기國旗로 정해진 태극기가 황실의 공식 연회에서도 사용되었다는 점과 참석자들의 다양한 모습을 통해 20세기 초 전통과 신문물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점도 살펴볼 수 있다도6~8.
도6. 고종 황제의 어좌(제7-8폭)
도7. 신식 군복을 입은 군인들(제2폭)
도8. 금관조복을 입은 신하들(제1폭)
〈신축진찬도〉는 12월 25일(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 서화Ⅱ실(202-2호)에서 열리는 ‘대한제국 첫 궁중 연회’(2022. 9. 6.-12. 25.)에서 만나볼 수 있다.
자료출처 및 참고문헌: 국립중앙박물관 신축진찬도辛丑進饌圖대한제국 첫 궁중 연회(글. 허문행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 학예연구사), 국립고궁박물관 〈신축진찬도 병풍(辛丑進饌圖 屛風)〉, 1901년, 10폭 병풍/ 『덕수궁 궁중유물전시관(한국문화재보호재단, 1992, p. 10)』, 『朝鮮王朝遺物圖錄 : 宮中遺物展示館 所藏(한국문화재보호재단, 1993, pp. 35~36)』, 『조선왕실그림 朝鮮宮中繪畵(궁중유물전시관, 1996, pp. 2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