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법스님,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여기 두 사람의 친구가 있습니다. 나와 도법스님이라 해도 좋습니다. 그들은 한 때 죽이 맞아 호형호제 말도 트며 거창한 사업을 구상하기도 하더니, 어느 날 무슨 일로 사단이 났는지 내가 종로 한복판에서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향해 이제까지 죽고 못 살던 동업자인 도법스님에게 욕을 퍼부어 댔습니다. 정말 진실을 발로한 것인지도 모르지요. 사기꾼, 거짓말쟁이, 언론플레이의 달인 등등 이라고.
어떤 행인은 내 말에 동조하며 도법스님의 비리를 한 가지라도 더 아는 것이 자랑이라도 되는 듯이 갖은 방법으로 매도했습니다. 그 가운데 어떤 어수룩한 사람이 지나가다 “그 왜들 그래, 싸우지들 말고 찬찬히 꼬인 일을 잘 풀어봐”했다면, 이 사람을 도법스님 동조자라 하는 것이 맞는 말이겠습니까. 이에 대해선 더 이야기 하지 않겠습니다.
처음에 지난 1월 18일자 불교신문에 난 스님의 글을 읽고서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였으나, 한편으로는 어느 고명한 분이 나와서 도법스님의 논리에 반박․시정하는 글을 게재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 후 한겨레, 경향신문에서 계속 대동소이 비슷한 논조의 스님 글을 읽고서는 ‘끝내 모른 척 하는 것은 동조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에, 오지랖 넓은 자가 술값 먼저 낸다더니 제 꼴도 생각지 않은 채 먼지 앉은 종이를 찾아 책상 앞에 앉았습니다.
먼저 불교계 호의적 반응에 대하여 ‘조선왕조 500년의 불교탄압 이후 피해의식에 젖어있고 해방 후 기독교의 급성장에 위기의식을 느낀 한국 불교계가 황우석을 통해 자부심을 누리고 싶어 한 탓’이라하고, 또 ‘그런 꿈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은 미망’이라 하였는데, ‘미망’이라는 표현은 좀 어떨지 모르지만 참 잘 지적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왜 옳지 않다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불교계가 불자를 자랑스러워하는 것이 왜 옳지 않다는 것입니까. 그것도 누가 뭐래도 부인할 수 없는 ‘세계적인 과학자’가 스스로 불자임을 공언한데 대해 미덥고 든든하고 자랑스러운 것이 왜 옳지 않다는 것입니까. 왜 미망이라는 것입니까. 이놈한테 걷어채고 저 놈한테 쥐어 박히다가 이제야 겨우 먹고 살만하여 전 세계 축구인 들을 불러 모아 ‘세계인의 축제’를 벌이는 조국이 왜 자랑스럽지 않겠습니까. 100만인가 200만인가 하는 군중이 종로바닥에 모여 하나같이 붉은 옷을 입고 태극기를 흔들면서 ‘대한민국’을 열호한 것이 과연 미망에 빠진 짓이란 말입니까. 제 나라를 열호하는 것처럼 제 종도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이 왜 옳지 않다는 것입니까.
도법스님 논지는 ‘생명을 파괴하는 황우석을 불자라는 이유로 무조건 감싸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었는데, 그것도 참 옳은 말이기는 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불교의 제1계는 불살생(뭇 생명을 죽이지 말라)입니다. 불살생은 생명외경에 그 뜻을 두고 있으니 곧 불교의 대지임이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생명평화는 어떤 가치에 우선하고 어떤 윤리에 우선하다는 것이 불교의 뜻입니다. 그러니 생명파괴자를 불교인이라는 명목 하에 무조건 감싸는 것은 비불교적이자 비윤리적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도법스님은 ‘무려 1만 5000키로나 걷고 또 걸으며’ 생명평화를 전도한다는 미명아래 얼마나 많은 미물들을 밟아 죽였습니까. 뭇 생명을 죽여가면서 생명평화를 말하는 것이 얼마나 가소로운 짓입니까. 그러나 우리들이 모두 도법스님이 하는 일을 훌륭하고 장하게 여기는 것은 ‘잠깐 작은 것을 버려서 보다 큰 것을 얻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개미 한 마리 풀 한 포기가 작은 것이라서 버린다는 뜻이 아니라, 온 세상에 생명 평화를 홍보한다는 보다 큰 것을 얻기 위하여 우선 잠깐 그들을 희생한다는 뜻이 아닙니까. 그래서 늘 겸손하고 미안하고 황송한 마음이 들어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황우석씨인들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우선 잠깐 작은 생명인 난자를 버려, 보다 큰 생명(난치병 치료)을 얻는다면 도법스님이 하고자 하는 일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더욱이 어느 교수의 논문에 ‘줄기세포는 생명을 해치는 것이 아니다’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렇다면 꼭 ‘황우석은 곧 생명파괴자’라는 생각은 한갓 기우에 불과합니다. 미처 못 읽었으면 읽어보기를 권하고, 이미 읽었으면 한 번 더 읽고 깊이 생각해 주기 바랍니다.
또한 모든 불교적 이론은 성언량, 즉 부처님 말씀을 기준삼아야 합니다. ‘부처님은 위대한 스승이 아니라 좋은 벗이다’ 하였는데, 어떤 경전에 그런 말씀이 있습니까. 더구나 ‘부처님을 위대한 스승이라 믿는 것은 부처님을 죽이고 자기도 죽는 행위다’하였는데, 진정 부처님을 위대한 스승으로 믿는 것이 그렇게도 가혹한 일이 된단 말입니까. 더욱이 부처님의 열 가지 명호(여래십호)에도 분명히 ‘더없이 거룩한 스승(무상사)’, 혹은 ‘천상과 인간의 스승(천인사)’이란 명호가 있지 않습니까. 열 걸음 양보하여 ‘부처님은 위대한 스승이자 좋은 벗’이라 하면 안 되는 어떤 큰 이유라도 있는 것입니까. 뭔가 있어 보이기는 한데 그림자만 있고 실체는 없는 그야말로 전도몽상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또 ‘부처님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은 채 존재하는 자체만으로도 충만할 수 있다는 가르침을 주신 분’이라 하였는데, 늘 느끼는 일이지만 도법스님은 참 현란한 말솜씨를 타고 난 듯합니다. 얼마나 멋진 표현입니까. (그런데 몇 년 전 출간된 법정스님의 수상집<텅 빈 충만>이란 책 제목을 연상케 합니다.)
그런데 어쩐지 부처님의 교의이기 보다는 부처님 당시 재세했던 자이나교의 주장을 원용한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번뇌는 모두 소유욕으로부터 발생한다. 그러므로 소유욕을 버림으로 해서 번뇌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하는 교리에 따라, 모든 소유를 버리고 완전나체로 지내기도 하고 혹은 얇은 하얀 천으로만 몸을 감싸기도 합니다. 부처님은 보리수 아래에서 성도하신 후 ‘나는 가난함과 부유함의 양변을 여읜 중도를 깨달았다’ 하는 고고일성을 하신 것은 우리가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깨달음의 실체를 천명하신 것이지요. 이른바 ‘중도선언’입니다.
중도란 무엇입니까. 감산스님은 중도를 설명하면서 논어의 ‘부적야(不適也)하며 불막야(不莫也)하야 의지여비(義之與比)’라는 대목을 인용하신 적이 있는데, 즉 꼭 이것이다 저것이다를 떠나 옳은 것으로 기준을 삼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불교는 가난함을 주창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물론 부유함도 마찬가지입니다. 탐진치를 소멸하라 하였지 언제 가난함을 쫒아라 하였으며, 탐진치를 버려라 하였지 언제 부유함을 버려라 하였습니까. 가난하다고 하여 탐진치가 소멸된다는 것입니까.
또 ‘사회를 병들게 하는 것은 일등주의와 부자주의 탓’이라 하였는데, 순수한 동기와 신념과 열정으로 각자의 직장에서 혹은 도서관에서 연구실에서 작은 공부방에서 혹은 비닐하우스에서 ‘1등’이 되기 위해 밤을 지새우고 어둑새벽이 되었는데도 불을 끄지 못하는 우리의 선량한 ‘1등주의자’를 매도해서는 안 됩니다. 1등이란 바로 노력, 정진, 성실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들의 행위가 진정 그처럼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면 사회를 건강하게 살찌우는 일은 어떤 것입니까. 노력의 반대인 게으름과 정진의 반대인 나태와 성실의 반대인 무관심입니까. 아니면 그들이 모두 각기 제가하던 일을 걷어치우고 도법스님을 뒤따라 생명평화탁발순례에라도 참여하는 것입니까. 이도 역시 그림자만 있고 실체가 없는 전도몽상에 불과합니다.
모든 성인이 그렇듯이 옳지 않은 방법으로 얻은 부와 명예를 꾸짖으시고, 인간의 속성상 빠지기 쉬운 탐욕을 경계하신 것이지 언제 부자 자체를 나무라신 적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단견에 불과하여 ‘인류의 큰 스승’이라하기에는 부족합니다. ‘중도’에서 말한 것과 같습니다.
또 ‘선천, 후천적인 불구는 생명질서를 파괴한 결과’라 하고, 또 ‘생명평화의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맞는 말인 것 같으면서도 석연치 않은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도법스님은 당차고 겁이 없는 사람인 줄은 평소 느껴왔지만 이 대목은 그야말로 간이 배 밖에 나온 사람이 아니면 차마 할 수 없는 말을 하였습니다.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불구의 몸을 가진 분에게는 한껏 조심스러워 말 한마디라도 삼가는 것이 우리의 인정이고 도리이고 정서입니다. 근본가치가 무엇이든 간에 어떤 결과로 얻어진 것이든지 간에, 우선 병부터 고치는 것이 선결문제입니다. 신문 사진에서 보는 도법스님의 환하게 웃는 치아는 분명 새로 해 넣은 것인데 무슨 생명질서를 파괴했으면 치아가 저 지경이 되었으며, 근본가치를 추구하지 않고 반듯하고 하얀 새 이빨로 바꾸는 것은 어찌 어색하지 않습니까. 도법스님 주위에는 본인을 위시하여 생명질서를 파괴한 결과로 얻어진 선․후천적 불구중생은 한명도 없을 것이요, 설사 있다 하더라도 불구인 채, 난치병 인 채로 먼저 ‘생명질서만을 추구’하나 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누가 독화살에 맞았으면 먼저 화살부터 뽑고 볼 일이지, 이것은 어디서 날아왔을까, 이것을 쏜 자는 누구일까, 남자일까, 여자일까 등을 따질 일은 아니다” 하셨는데, 후생이 가외라더니 도법스님은 부처님도 미처 하시지 못한 논설을 한 참으로 훌륭한 제자로군요.
사람은 제가 아는 것만큼 보이고 보이는 것만큼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혹시 도법스님은 자신이 아는 것만큼, 그리고 보이는 것만큼 불교를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것도 말하기가 조심스러워 전전긍긍하고 두려워하고 어눌한 것이 아니라 큰 입을 벌려 “이것은 이렇게 해야 한다, 그것은 옳지 않다, 그것은 무지의 소치이다, 미망을 버려야 한다.”는 둥, 참으로 기고만장(기세가 높기가 만 길이나 됨) 자신에 찬 언사를 하고 있으나, 어진 사람은 십성어(확정적으로 하는 말)를 꺼려하는 법임을 알아야 합니다. 교계에는 도법스님 보다는 세납도 승납도 월등히 많으신 어른들이 많이 계시고 수행력으로 보나 학문의 깊이로 보더라도 도법스님이 본받고 따라야 할 분들이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하고 있는 도법스님의 태도는 교계에는 나 외 아무도 없다는 듯 자못 안하무인입니다.
도반으로서 간절히 바라노니
도법스님, 공허한 말놀음은 이제 그만 두시라. 이제 밖으로 향하는 걸음을 멈추시라. 그리고 침묵하시라. 그리하여 다른 사람에게 침묵을 가르치시라. 천지를 진동하는 우뢰의 웅변보다는 귓가를 간질이는 가는 비의 속삭임을 보고 배우시라.
첫댓글 잘 읽고 갑니다.
이것이 진정 진실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