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 조정자役 포기… “당파적입장에 너무 기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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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도 국회가 제 궤도를 벗어난 일이 없지 않았다. 야당은 의사일정을 육탄 저지하고, 여당은 날치기로 의안을 처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정치인들 간의 갈등이었고, 행정부는 최소한의 중립적 태도를 지켜 왔다.
여당 의원들이 야당의 잘못을 공격하기 위해 총리를 상대로 유도 질문을 하더라도
“총리가 정치적인 현안에 언급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답변을 피해 왔다.
여태까지의 대한민국 총리는 그랬다.
이해찬(李海瓚) 총리는 최근 유럽순방 중 기자간담회에서 야당과 언론을 공격하는 발언으로 파문을 일으켰다. 야당 의원은 이날 국회에서 그 발언에 대해 해명을 요구했다. 이 총리가 유감 정도를 표명했으면 정국은 일단 진정될 수 있었고, 대부분은 그럴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이 총리는 정반대로 “한나라당은 지하실에서 차떼기하고 고속도로에서 수백억원을 들여 왔다. 그런 당을 좋은 정당이라고 할 수 있나”라며 야당에 대한 공격 수위를 높였다. 단순한 공격 정도가 아니라 국정 파트너로서의 야당을 부정(否定)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국정을 아우르며 이끌고 가야 할 총리가 오히려 스스로 정국에 파탄의 불씨를 던지고, 거기에 휘발유까지 부은 상황이다.
중앙대 정치학과 장훈 교수는 “이 총리가 다른 총리들과 다르게 정치적 총리의 역할에 치중하고 있고, 당파적 입장에 상당히 기울어 있다”고 말했다. 이만섭(李萬燮) 전 국회의장은 “라디오를 듣다가 보통 놀란 게 아니다. 오늘 같은 일은 처음이다. 총리가 국회의원과 맞서서 언쟁 벌이면 남는 것은 여야 격돌과 국회 위신의 추락뿐”이라며 “앞으로 국회 의장단과 각당 원내총무는 국회가 여당이나 야당의 국회가 아니라 국민의 국회라는 걸 명심해야 한다.
국민의 국회이지 여야 싸움하는 데가 아니다”고 말했다.
국회는 다음주부터 내년도 예산안 심의에 들어간다. 다른 어느 때보다 야당의 협력이 필요한 시점에 국정을 총괄하는 책임을 진 현직 총리가 야당을 향해 독설을 퍼부어 정기국회 일정을 파국으로 몰고 가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이런 이 총리를 보고 일부 여당 의원들은 환호했다.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최근 헌법재판소의 수도 이전 위헌(違憲) 결정에 대해 “입법권이 침해됐다”고 반발했었다. 그런데 이들 여당 의원들은 동료인 야당 의원들을 향해 총리가 독설을 퍼붓자 “잘했다”고 격려했다. 이종걸(李鍾杰) 원내수석부대표는 “총리를 존경한다”고까지 했다. 상대 당을 대화의 파트너로 여기기보다는 짓밟아 이겨야 하는 적(敵)으로 간주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더욱이 이날 국회 본회의 사회를 맡은 열린우리당 소속 김덕규(金德圭) 부의장은 이 총리의 발언에 항의하는 야당 의원들의 의사 진행발언 요구마저 거부했다. 이 총리 발언이 있은 뒤 여야는 낯뜨거운 수준의 설전(舌戰)을 벌였다. 한나라당 남경필(南景弼) 원내수석부대표는 “우리가 여당보고 어미의 몸을 째고 나온 ‘살모사 정당’이라고 하면 좋겠느냐”고 했고,
여당은 “총리가 사실을 제대로 지적한 것 아니냐”고 반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