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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8장 1~11절/간음한 여인과 예수님과의 만남(상한 감정의 치유와 회복)
신약 성경에서 가장 불행한 과거를 가졌지만,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해 가장 행복한 삶을 살았던 두 여인이 있습니다. 우선, 남편이 다섯 명이나 있었던 사마리아 수가 성의 여인입니다. 또 한 사람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 상상할 수 없는 행복한 삶을 산 여인들입니다. 특히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이 겪은 수치와 모멸감은, 물을 길으러 우물에 왔던 수가 성의 여인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큰 고통이었습니다. 간음 장소에서 끌려와 뭇사람 앞에서 인민재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3절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이 말씀에서 세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여인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의해 붙잡혀 변명의 여지도 없이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았습니다. 둘째, 끌려온 것입니다. 영화나 뉴스를 통해 가끔 이슬람 국가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차도르를 쓴 여자가 큰 축구장에서 수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앞에서 군인들에 의해 총살을 당하는 유명한 사진이 있습니다. 셋째, 돌로 쳐 죽이려고 많은 사람들이 둘러선 가운데에 여인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마 여인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상처를 받았을 것입니다. 두려움, 절망, 수치, 모멸감, 그리고 죽음을 경험 했을 것입니다.
본문 말씀을 자세히 보면, 간음한 여인이 겪은 수치, 상처, 괴로움 뒤에는 교활한 음모가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몇 가지 증거를 읽어 낼 수 있습니다. 첫째, 간음한 현장에서 붙잡혔다는 것이 수상합니다.(4절) 그것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 의해 체포되었다는 사실이 더욱 수상합니다. 사람들에게 들킬 만한 장소에서 간통하는 남녀는 없습니다. 이것은 분명 어떤 음모가 있다는 증거입니다. 특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현장을 덮쳐 데려왔다는 것은 계획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둘째, 간통한 남자는 없고 여자만 끌려 왔다는 점입니다. 레위기 20장 10절에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22장 22절에도 “남자가 유부녀와 통간함을 보거든 그 통간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이 여인을 희생양으로 삼는 어떤 음모가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자는 빠지고 힘없는 여인만 끌려온 것입니다.
4~6절에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 이러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했으나 매번 실패하여 이 여인을 희생양으로 잡은 것입니다. 3절 말씀에서 세 종류의 죄가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첫째, 간음 현장에서 붙잡힌 여자가 저지른 종류의 죄입니다. 왜 여인은 간음죄를 지어야 했는지 여러 가지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여인이 가난해 생계유지를 위해 몸을 판 경우입니다. 가난하다는 것은 사회적 신분, 배경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만일 여인이 평소에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과 안면이 있었다면 얼마든지 사태를 수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여인은 자유분방한 성적 본능의 소유자일 수 있습니다. 또 7장과 연결해서 생각해 보면, 1주일간 장막절 대축제 기간 중에 이런 실수를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여인이 저지른 실수는, 들키지 않았지만 누구나 쉽게 저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는 들킨 죄와 들키지 않은 죄가 있을 뿐입니다. 들킨 사람은 교도소에 가 있고 들키지 않은 사람들은 여기 앉아 있습니다. 간음죄뿐 아니라 도적질, 거짓말, 살인 같이 겉으론 드러나지 않지만 인간 본성에 있는 죄들을 말합니다. 이 여인은 들켰고 도움을 받을 만한 연줄이 없어서 사람들 앞으로 끌려나온 것입니다. 모든 인간의 내면세계에는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죄의 유혹이 있습니다.
둘째, 여인을 끌고 온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있는 죄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책잡고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여인을 이용했습니다.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법을 들먹여 사람을 죽이고 파괴시키며 회복할 수 없도록 만드는 일을 종종 봅니다. 교활하고 악랄한 짓입니다. 자신은 종교적으로 의롭기 때문에 이 여인을 심판한다는 위치에서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 간음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기 위해 온갖 비난과 욕을 퍼붓고 있던 사람들에게 있는 죄입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정의의 사도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간음한 여자는 없어져야 사회가 깨끗해진다고 부르짖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얼굴에는 분노와 핏발이 서고 그 순간만은 신성한 율법의 수호자이요, 정의의 사도로 돌변한 휴머니스트들입니다. 사회의 공의와 정의 실현을 위해 여인을 죽이려고 돌을 들고 서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 종류의 죄를 지닌 사람들 앞에서, 그리고 초라하게 떨고 있는 여인을 보시고 반응하셨습니다. 6절에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하여 예수를 시험함 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다만 여인이 어떤 상처를 받고 있는지 아셨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교활한 죄도 목격하셨고, 정의의 사도처럼 흥분한 군중들도 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몸을 굽혀 땅에 글을 쓰셨습니다. 사람들에게 대꾸하시지 않고 고개를 숙여 침묵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1~2절의 말씀과 연결됩니다.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다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저희를 가르치시더니”
7장에서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춤추고 술 마시는 축제 때 유명한 생명의 초대를 하십니다. 요한복음 7장 37~38절에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계속 논쟁했습니다. ‘예수는 귀신 들렸다, 예수는 민중을 선동하는 종교 사기꾼이다’라는 등 여러 말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비난에도 불구하고 감람산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 자주 가시던 곳이 감람산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 전에도 감람산으로 가셔서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감람산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어렵고 힘들 때 무릎 꿇을 수 있고 하나님을 만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감람산이 있기를 바랍니다.
2절 말씀에는 아침에 거기서 나와 성전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3절 말씀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간음함 여인을 끌고 온 것입니다. 문맥상으로 보면, 예수님께서 감람산에 가시고 성전에서 말씀을 가르치시는 모습이 바로 머리를 숙여 글을 쓰는 모습과 연관됩니다. 아마 시간이 있었다면, 예수님께서 감람산에 가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급박한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머리를 숙이시고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셨습니다. 분노하고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런 모습이 못마땅했습니다. 그래서 다그쳤습니다. 빨리 대답해 달라는 것입니다.
7~8절에 “그들이 묻기를 마지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합니다. 첫째, 예수님은 이 여인이 죄가 없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지만, 죄를 간과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죄를 용서하는 것과 죄를 인정하는 것은 다릅니다. 둘째, 모세의 율법이 틀렸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여인이 죄를 지은 것과 모세의 율법이 옳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머리를 숙여 땅에 무엇인가 기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분노하여 돌을 집어 들고 서 있던 사람들이 슬금슬금 한 사람씩 사라져 보린 것입니다.
9절에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음모를 꾀해 간음한 여인을 희생물로 삼아 끌어오고, 사주 받은 수많은 군중이 흥분한 가운데 정의의 사도인 것처럼 굴던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한마디 말씀하시자,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떠나버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여인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이 가능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말씀의 위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 있어 좌우의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우리의 영과 혼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것입니다. 빛이 오면 어둠은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인간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의 입을 통해 나가는 순간에 자신을 멋있게 위장했던 교활한 종교인들도 양심에 가책을 느꼈고, 분노하던 군중도 슬금슬금 도망가 버렸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영적 권위입니다. 어느 누구도 감히 침범할 수 없는 예수님의 영적 권위가 느껴졌을 것입니다. 영적 권위가 있는 사람을 쳐다본다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수모와 치욕의 순간들이 예수님의 한 마디 말씀에 사라져버렸습니다. 일순간 정죄, 고발, 분노, 심판의 분위기는 반전되었습니다. 태풍이 지나고 다시 평정을 되찾았습니다. 죽음이 지나고 부활의 아침이 왔습니다. 저주와 어둠과 죽음이 떠나고 한 순간에 안식과 평안의 빛이 온 것입니다. 이러한 복을 허락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여러분들은 엉킨 실을 풀어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실인데 엉켜서 풀려고 하니 힘이 듭니다. 그런 실은 풀려고 하지 말고 쓰레기통에 넣어버리십시오. 새 실을 사는 편이 더 낫습니다. 저는 엉킨 실타래를 풀려고 하다 너무 힘이 들어 ‘이 실을 확 녹여 누에에서 뽑는 것 같이 새 실로 뽑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나의 인생은 풀리지 않습니다. 어디서 풀어야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 있으면 녹아서 새 실이 되어 나옵니다. 이것을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는 것입니다. 거듭난 것입니다.
10절에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예수님께서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어디 있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중요한 단어가 두 개 나옵니다. ‘고발’와 ‘정죄’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고발하고 정죄합니다. “너는 살 가치가 없다. 어떻게 죄를 짓고 뻔뻔스럽게 살고 있니? 차라리 자살해 버려라” 계속해서 우리를 고발하고 정죄합니다. 인간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이 ‘죄책감’입니다. 잠을 못 자고 우울증에 빠지며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이것이 곧 정죄함입니다. 고소하고 고발하며 정죄하는 것이 마귀의 특기입니다. 성도님들은 누구를 고소, 고발하는 일은 절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모략을 통해서 예수를 붙잡기 위해 갖은 술수를 써서 간음한 여인을 고발하고 정죄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누구든지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는 말씀을 듣는 순간 자신의 죄가 생각나고 어느 누구도 돌을 들어 던지지 못하고 떠난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을 볼 수 있다면 함부로 다른 사람을 정죄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로마서 3장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로마서 5장 12절에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람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죄로 인하여 고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사람들을 선동하여 간음한 여자를 현장에서 붙잡아 와서 예수를 붙잡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7절) 말씀하시니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가 들어날까 두려워서 다 떠나간 것입니다. 사람은 함부로 누구를 고발하거나 정죄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11절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엄청난 공포 속에 떨고 있던 여인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눈을 떠 사방을 둘러보니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용서할 수 없고 하나님만 용서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라는 말씀에서 로마서 8장 1~2절의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하신 말씀을 떠올리게 됩니다. 나를 죽이려던 세력은 떠나고 나는 살아난 것입니다. 치욕스런 과거로 억압당하고 눌려있던 육체는 산산 조각이 나고 더 이상 희망이 없지만, 그래도 ‘나에게서 저주, 비극, 죽음은 떠났다. 나는 복의 주인공이다’ 하고 선언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정죄함이 없고 심판이 없다. 내가 너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것이다. 내가 너를 용서하고 회복시키며 치유할 것이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를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자유, 해방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자유를 주십니다. 그리고 사랑의 충고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가서 마음껏 멋지고 신나는 삶을 살아라. 그리고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를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여인이 죄 지을 수밖에 없음을 이해하셨습니다. 죄는 밉지만 인간 본성의 연약함을 아셨습니다. 우리가 실수하는 것, 죄 지을 수밖에 없는 것을 예수님은 아십니다.
둘째, 예수님께서 여인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기막힌 처지에 빠진 이 여인을 정죄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을 용서하고 희망과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충고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이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드러나지 않는 복잡하고 쓰레기 같은 것들을 주님께서 모두 아시고 불쌍히 여겨 용서하십니다. 자유와 희망을 주시고 사랑의 충고를 아끼지 않으십니다.
셋째, 여인은 예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을 받고 충격, 감동, 환희, 기쁨, 자유, 희망, 하나님께 드리고 싶은 진정한 예배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그 후 여인은 헌신, 봉사, 전도, 구제, 거룩한 삶, 남을 위해 희생하는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불행한 과거로 인해 찌들어 살지 마십시오. 과거의 노예가 되지 마십시오. 여인은 말했습니다. “나의 과거는 없습니다. 나를 죽이려던 사람은 다 떠났습니다. 이제 나에게 새로운 삶이 있습니다.” 그것이 여인이 누렸던 복입니다. 성도들에게도 이와 같은 축복이 흘러넘치길 축원합니다.